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선생님과의 첫 대화......

조회 수 2460 추천 수 18 2005.04.13 17:30:07
관련링크 :  

메일로 주고받은 정용섭 교수님과의 대화내용을 소개합니다.


 


-- 저의 물음 --


안녕하세요. 교수님


신대원 3학년 이미경입니다.


오늘로 해서 2번째 성서 아카데미에 참석을 했지요.....


성서아카데미는 마음에 부담감을 주지 않아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부담은 진리를 향한 부담과는 다른 종류지요.


굳이 이야기한다면 쓸데없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 같네요.


좋은 고민을 함께 나누면 되는 것 같아서.....좋습니다. ㅋㅋ


 


지난 번에 갔을 때는 뭐랄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서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심했더랬습니다.


지난 번의 내용만 보았을 때는 그것이 마치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인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같기도 했지요.


음~ 거기에 대한 답은 오늘 찾은 것 같습니다.


성서의 기자들이 그들의 세계이해를 통해서 경험한 영적 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고민을 했는데,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성서 본문에서 그것을 찾아가느냐가 숙제겠지만요.


 


그러면서 한가지 의문시 되고,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고민되는 것이 있네요.


지난 학기 현대신학에서 바르트를 배웠습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서관을 배격하면서 새로운 성서관을 가졌지요.


즉,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서는 하나님을 찾는 길을 제시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험, 인간의 견해가 아니라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견해, 하나님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인간의 체험에 바탕을 두는 종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다.


라는 것이지요.


 


이것과 어떻게 연관지어 생각해야 할까요?


교수님은 바르트의 성서관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십니까?


아이 참~ 제가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해서요....


 


그리고 한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공부를 하면서 생각했던 것인데요,


오늘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치 역사의 물줄기가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저는 역사의 물줄기의 주도권은 성령 하나님께 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분이 역사를 주도해 가시며, 그것은 방향성이 있을 터인데,


그것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인간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 물론 소수였지만 그들은 거기에 올바르게 응답했던게 아닐까요?


구원의 역사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인간의 결단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수님의 생각도 저와 다르지 않는 것인데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요?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고......


하여튼 고민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되어 좋습니다.


홈페이지에 많은 글들이 있던데, 마음 같아서는 하룻밤에 다 읽고 싶은데 ㅋㅋ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단순히 읽는다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진 않겠지만요.


하나라도 진지하게 고민하여 읽어야 겠지요....


 


아참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여전히 유효한가요?


개인적으로 그분의 설교를 좋아하거든요.


모새골에 들어가서 자주 듣지요.


그분의 설교를 듣노라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미야자키 감독이 그려내는 세계와 비견할 만한?


하여튼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오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이분이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을 읽으셨나?라는 생각도 해보고,


신학적인 설교가시구나라는 생각도 했답니다.


 


우와~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했네요.


교수님의 친절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행복한 봄날되세요.....


 


벗꽃이 만발한 화요일 밤~


 


-- 선생님의 답변 --


이 양,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상당한 정도로 준비가 된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심화하는 작업이 남아있오.


신학 정보, 즉 바르트와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오트, 융엘 같은 사람들이 말한 것에 대해


대충 이해하는 단계에서


본인이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가는 게 바로 심화요.


신학 정보와 신학 사유가 함께 작동해야만 신학적으로 빨리 성숙할 수 있는데,


한국의 신학현장에서는 그런 게 좀 약한 것 같소.


그건 그렇고,


현재 아카데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을


이 양이 정확하게 이해한 것 같소.


겨우 두번 참석했는데도


성서 기자가 경험한 삶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답을 찾았다는 건


평소에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오?


이 양이 제기한 질문은 상당히 많은 해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한번에 주기는 쉽지 않겠오이다.


그래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몇 가지만이라도 주마간산 격으로 설명할 수밖에...


 


바르트의 성서관이라!


성서실증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바르트의 성서관이


앞서 있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서관과 어떻게 다른지는


이 양이 이미 충분하게 알고 있는 것 같더군.


인간의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간 경험에 대한 진술이 성서라는 게


곧 바르트의 성서관이라고 볼 수 있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인간의 주체성이 중요했지만 말이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계시론적 차원에서 성서를 언급한다고 보아야겠지.


그렇지만 바르트고 성서일원론주의자는 아니오.


기록된 계시인 성서만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


선포된 계시로서의 설교가 모두 계시요.


(자꾸 글이 길어질 것 같은 생각이네. 요약해서 말해야지.)


나는 기본적으로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론적 성서이해에 동의하고 있오.


인간이 무엇을 인식했는가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하다는 뜻이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인식과 판단과 결단이 역사에서 중요하다는


평소의 내 주장은 이런 바르트의 성서관과 대치되는 걸까?


이 주제에는 아마 Th.M.  졸업논문으로 적당할 정도의 복잡한 내용이 담겨 있오.


내 주장은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계시론적인 행위와 그런 역사가


이 세상에서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시를 인식하고 순종하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거요.


그렇지만 하나님, 혹은 이 양이 말하는 성령이 우리에게 완전히 종속된다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대로 순종하면


구원의 역사인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게 진행될 것이고,


우리가 오류에 빠지만 그만큼 역사의 진행은 지체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거요.


만약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기지 않았다면


로마 가톨릭의 자기갱신도 느렸을 것이며,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은폐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재단하지는 못하네.


바르트가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토탈리터 알리터)라고 말하면서


접촉점을 부정했다는 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계시의 주도권에 의해서만 우리의 인식론이 작동될 수 있는 거요.


바르트는 인간론적 낙관론에 빠져있던 자유주의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시 주도권을 강하게 말한 것뿐이고,


나는 역사 앞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인식과 결단의 책임을


변증법적으로 강조하는 것 뿐이오.


설명이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역사의 주도권이 성령에게 있는가, 인간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위의 설명에서 어느 정도 방향이 주어진 것 같소.


다만 우리는 성령이 역사를 끌어간다는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오.


내가 어제의 사도행전 공부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아니 실제적으로도 성령의 일이오.


남북통이 문제 앞에서, 생태파괴 앞에서, 자본주의 힘을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외국인 노동자,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들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오.


물론 성령이 이런 우리의 인식과 판단에 종속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오.


왜냐하면 우리 개인의 인식이라는 것은


전체 역사의 판단에 비해서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무력하기 때문이오.


다만 '부분'에 불과한 개인들이지만 '전체'와의 영적인 소통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인식은 진리의 영인 성령과 연결되는 거요.


그런 영적인 소통이 바로 '영성'이오.


이런 영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중심과제요.


이를 위해서 영적인 실체에 관한 논리적 해명의 역사인 신학을 공부하고


이 세계에 대한 보편적 해명이라 할 인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범주를 끊임없이 초월하면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점더 친근하고 가깝게, 혹은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희망할 수 있을 거요.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는 지금까지 내가 접해본 한국설교자의 설교 중에서


가장 윗길이라 할 수 있오.


고유한 영성의 세계를 간직한 몇 안되는 설교자 중의 한 분이라 할 수 있오.


아마 앞으로 언젠가는 기독교 사상에 그의 설교를 소개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지.


나는 아직 모새골에 가보지 않아서 현재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잘 모르네.


 


이 양이 "친절한 답변"을 기대한다는 말에


이렇게 글이 길어진 것 같소.


이 양의 질문도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사이트에 올릴까 생각했지만


본인의 생각도 모르고 그렇게 할 수 없어도 그냥 이렇게 메일도 답했오.


만약 괜찮다면 이 양 자신이 질문과 내 대답을 같이 사이트에 올려보시오.


왜냐하면 이런 신학적 질문과 대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기에 말이오.


신학적 '담론'이 열리는 세계를 향해서 전진하시오.


이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4.14 00:18:26
*.249.178.15

사이트에 메일 내용을 올렸군.
잘 했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선생들도 그렇고, 음대선생들도 그렇고,
자신들의 전공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나누는 일들이 없는 것 같네.
신학생들도 교회 운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철저하게 논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걸세.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면서도 아는 척하거나,
아니면 알아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뭐가 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신학과정을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네.
25년전의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신학은 단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정도로 끝낸 거지.
학생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신학생으로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시인이 되려면 끊임없는 사유와 언어훈련을 거쳐야 되는데,
프로 바둑기사가 되려면 바둑의 길을 열심히 가야하는데,
신학생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네.
그저 기성 목회자들처럼 교회 관리에만 신경을 쓰는 거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신학에 관심이 많으면 여신학자가 되는 길도 있으니까
여러모로 생각해보시오.
아자!!!!!!

[레벨:0]조기성

2005.04.14 05:22:05
*.107.149.57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역사의 시공간속에서
충분한 시간과 사건과 정황속에서--하나님 스스로의 선택--전달되었다는 사실과

그 계시가 전달되는 과정이
계시의 일방적인 전달자체나 계시의 성취만을 목적으로 하지않고
그 계시를 통해 자신을 인격적으로 알리시고
소통하시고 연합하시기를 원하시는
인간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계시를 성취하시는 과정도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의 믿음이라는 순종을 전제로
성취되어지기를 스스로 기뻐하셨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계시자체와
계시를 전달하시는 과정과
계시를 성취해 가시는 과정이
전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
하나니의 견해
하나님의 생각이
계시된 것이라는 바르트의 강조점은
또한 그렇게 바르트가 말해야할 역사적인 정황을 기반하고 염두해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자유주의자들이 서 있던 역사적인 기반도
있을테고........바르트는 그걸 보았을테고....

다시한번
교수님이 늘 강조하시는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사유는 곧 하나님을 성품을 닮아있는 생각하기라 생각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4.14 11:55:19
*.181.160.60

조기성 씨,
오늘 오전과 오후로 강의가 나뉘어 있어서
이렇게 중간에 잠시 강사 휴게실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넷을 통해 사이트에 들어왔습니다.
봄햇살이 평화롭군요.
만약 우리가 명왕성에서 살고 있다면
햇빛을 전혀 다르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태양이 겨우 야구공 정도의 크기로 보일 것이고,
지금 우리와 같은 봄햇살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이 삶의 조건들이
완전히 낯설게 보이는데서부터 우리의 인문학적 사유는 시작됩니다.
그 낯설음은 바로 모든 생명과 사물을 신비의 차원에 바라보게 하는 단초이죠.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와 영성은 서로 물고 물려 있습니다.
이런 인식이 깊어진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성서를 심층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의 심층에서
새롭게 열어갈 수 있지요.
그게 곧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적 사유, 영성, 신학은 서로 다른 관점이나 다른 층에서
진리를 따라잡으려는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사유는 곧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있는 생각하기"라는 표현이 재미있군요.
그래도 좀 설명이 필요한 부분같네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레벨:0]이미경

2005.04.14 13:28:50
*.66.212.41

계시자체와
계시를 전달하시는 과정과
계시를 성취해 가시는 과정.... 이라.....
음~ 생각해 보아야 겠네요.

[레벨:0]조기성

2005.04.14 17:13:56
*.229.70.195

사실 저는 본격적인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단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감히...--그 가운데
씨름하며 나름대로 정리해가고 있는 가운데 있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인입니다.

그래서 용어의 사용이 적실한지는 모르겠고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해서 쓰는 용어들이 많기에
오해의 소지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사역과 하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비추어보고 미루어 보는 바에 의하면
그리고 그 계시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속에서 보게되고 듣게되고
깨닫게 되는 걸 얘기하는 것이지요.

고전적인 구분 속에서
하나님의 상대적 혹은 공유적 속성에 해당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거룩, 사랑, 자비, 정의, 인내, 지혜 등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특정한 사람과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행하신 일과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행위를 경험하고 증언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적 양식으로 기록을 남기신 재치와
그 기록을 오랜 역사의 시공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해오신 인내와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신 용기가
하나님 편에서도 깊은 인문학적 사유없이 가능했을까라는
발칙한 상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도
하나님께서 인문학적 사유의 과정이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 위대한 드라마가...!!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들도 인문학적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 했으리라는 생각도.....

너무 억지스럽고 웃기지요?
제 생각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4.14 23:14:05
*.249.178.15

조기성 씨,
일반적으로 선교단체 간사들은 성서 문자주의에 기울어져 있는 편인데,
조기성 씨는 좀 예외 같이 되는군요.
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어도
생각과 글쓰기는 전공자 못지 않네요.
아이브이에프(?)의 신앙적 오리엔테이션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군요.

[레벨:0]조기성

2005.04.15 07:37:13
*.194.238.99

넓은 의미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라고 합니다.
IVF는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계기로 불붙은
19세기의 대학생 선교운동의 흐름속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실제로 조직적인 모습은 1928년 영국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속에서
각 대학의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기독학생운동체들이 연합회를 구성했고
그 명칭을 Inter-Varsiy-christian Fellowship라 했습니다.
한국에는 영국의 유학생인 이상윤의 소개로 1956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초교파적이고 간사님들의 출신교단도 다양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나 논의도 어찌나 그 스펙트럼이 넓은지
저도 공부하고 더 오리무중이 된 격이라....

저희 시니어 간사님들의
신학적인 배경으로 얘기하자면
국내에서 신학을 하시는 경우
장신 / 총신 / 침신 등에서 다양하게(?) 신학을 하시는 편이고
국외에서 신학을 하시는 경우
미국에서는 주로 풀러 / 트리니티 / 서든 벱티스트 / 고든 콘웰 / 탈봇 정도에서 신학하시고
캐나다에는 리젠트, 영국에는 LST에 많이 가시더군요.

주로 M.Div과정이나 Th.M정도의 과정이기에
신학적인 심화가 얼마나 일어났는지를 잘 모르겠구요.
단체에서 주어지는 3년이라는 기간이라 정신없이(?)들 다녀오시는 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첫 신앙을 중2때
순복음 대구교회(여의도 순복음 교회 대구 지부???)에서 시작했습니다.
오순절태생(?)이구요.(아내는 고신)
학부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와서 IVF를 통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신앙형성과 신학(?)형성은 자연스럽게 책 읽기를 통해 이루어진거 같은데
제일 먼저 받은 영향은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입니다.
한분은 회중교회 목사이고 한분은 성공회 목사이지요.
그리고 국내에서는 박영선 목사와 김남준 목사의 책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조직신학에 대한 강조가 박영선 목사를 만나게 한거 같고
그가 가지고 있는 청교도에 대한 애착--집착에 가까운--이
청교도들의 저작(지평서원등에서 많이 나오는 책들)과
김남준 목사의 책에 흥미를 느끼게 한거 같습니다.
김교신 전집도 잘 읽었구요...
그리고 거의 닥치는대로(?) 책을 읽는 편이고
서재에 꽃혀 있는 책들을 보면 주제별로
읽는 편이라는 걸 알수 있습니다.

사실 조직신학적인 강조의 대부분은
로이드 존스를 통해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제가 읽은 조직신학 책은
흔히 서점에서 구하기 쉬운
다니엘 밀리오리 / 웨인 그루뎀 / 밀라드 j 에릭슨 / 안토니 후크마 / 스탠리 그란츠
그리고 IVP에서 나온 조직신학 시리즈 정도입니다.
사실 본격적인 신학자들(?)의
저작을 거의 접한 적이 없습니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성경해석과 관해서는
IVP에서 나오는 책--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리즈--들을 통해 눈뜨게 되었고
저희가 강조하는 Personal Bible Study(귀납적 성경연구)는
한계도 많이 있지만 성경을 문예적 맥락 / 역사적 맥락 / 신학적 맥락에서
해석하도록 많이 강조하는 편입니다.
간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행위'(?)를 하기에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4.15 23:38:54
*.249.178.15

조기성 씨,
좀 수상쩍다 했더니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군요.
성서와 신학에 관한 책읽기도 상당한 역량이 있어보입니다.
스텐리 그랜츠의 조직신학에 관한 책을 읽었나요?
그 사람은 판넨베르크의 제자입니다.
몇 주 전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군요.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읽었다고 했지요?
특히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 입문>을 읽었다니 졸 놀라운 일이군요.
만약 바르트의 그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했다면
신학석사 학위자로서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단지 문장의 뜻만이 아니라 그것의 신학적 깊이를 이해했다는 걸 전제할 때 말입니다.
내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CCC 회원들과 신앙적 접촉이 있었는데,
별로 인상이 좋지 않았어요.
너무 도식적, 혹은 율법적인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조기성 씨는 철학적 바탕이 있으니까 신앙의 존재론적 토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돈독하게 만드는데만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런 주관주의적 믿음이라는 것은 이단들이나 소종파 운동에서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미 바울도 고전 13장에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상대화했습니다.
간사 직이 하나의 직업인가요?
아니면 봉사활동인가요?
둘다 합한 역활인가요?
어쨌든지 젊은이들을 향한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기 바랍니다.

[레벨:0]조기성

2005.04.16 08:03:35
*.194.239.95

교수님...
계속해서 던지시는 질문에
제가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ㅋㅋ
사실 제가 곤란한(?)--이 곳에서 읽은 글들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있답니다--질문들을 해서
무언가 얻고 씨름해야 되는데...자꾸 커밍아웃하도록 만드시네요...

학부에서 한 철학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필요한게 있으면 찾아볼 정도는 되니까요.
그치만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처럼
인문학적 사유에 근접한 철학하기가 학부에서는 불가능 했습니다.
학부분위기도 그렇고, 그때 저의 역량도 그랬고
그래서 가끔 '아~~철학하셨군요'라는 말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스텐리 그랜츠의 조직신학 책은 읽었습니다.
사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스킵하며 읽었고
제가 봐도 저의 해독능력이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나온 책을 읽느라 혼쭐이 났습니다.
나중에 CUP에서 나온 <하나니의 비전>이라는 요약판이자 실용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요...ㅋㅋ

스텐리 그랜츠에 대한 소개는
그 분에게서 신학을 하신 선배간사님을 통해서 였고
몇 주전에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것에 대해 통탄하시더군요.
사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알리스터 맥그라스보다
훨씬 더 내공이 좋으신다고 하시던데......
한창 책쓰고 일하실 55세에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은 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충분히 이해'라는 말이 주관적인 표현이라 말씀드리기 어려워야 하지만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자시있게(?) 말씀드립니다.
어렵더라구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통에....정리가 안되서..T T
두고두고 읽을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교단체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으셨다니 유감입니다.
(대표로 사과를 드릴께요....용서해주세요!! ㅎㅎㅎ)
더욱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주세요.
캠퍼스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여러 요인에 의해서....!!

간사라는 직은 하나의 직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전임(full time)사역자라고 하지요.
간사외에의 다른 직업(?)은 가지고 있지않습니다.

저희 단체(IVF)의 경우에는
보통 3년을 사역하고 1차 평가를 공동체로 부터 받게되고
Pass가 되면 3년을 더 사역하구요.
6년차 정도가 되면 장기적인 사역을을 위해
이 사람이 적합한지를 평가위원회를 통해
여러가지 은사와 사역에 대한 평가, 그리고 다른 간사들과의 동역 등등을 보며
공동체와 간사가 함께 평가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6년을 기점으로 사임하는 경우가 많구요.
섬겨왔던 캠퍼스와 공동체를 뒤로 하고 다음 소명의 장으로 가지요.

반면에 장기사역자로 평가가 되면 3년정도의 신학연수와 함께
신학연수 후 6년을 더 사역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대부분 제 갈길을 찾아갑니다.
총무가 되는 일 외에는 공동체에 남을 길이 없지요.

젊은이들을 향한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도록 기도해주세요!!

[레벨:0]이미경

2005.04.18 00:57:34
*.66.212.41

오! 대단해요. 신학생 아닌 신학생이시군요....
김교신 전집까지? 저는 그분을 참 존경하는데도 한권짜리 밖에는 못 읽었는데....ㅋㅋ
칼바르트의 복음주의신학입문도 지난 방학때 스터디를 하면서 읽었지요.
그렇지 않아도 직업란에 간사라고 되어 있어서 어디 간사님인지 궁금했는데.....
IVF 라~ 저랑 아주 친한 학교 언니도 IVF간사죠... 주부사역을 하는....
하여튼 반갑습니다.
저는 왠 꼬리말이 이렇게 많은지 궁금해서 들어와 보았답니다.

[레벨:0]조기성

2005.04.18 07:55:01
*.107.125.19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 아닌가요? ㅎㅎ

혹시 김인숙 간사님인가요?
대구지역 학사회 주부모임 담당간사님인데...

앞으로도 많은 질문들 통해
고민을 더욱 날까롭고 다듬는데
좋은 통찰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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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13]콰미
  • 2005-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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