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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의 참뜻

조회 수 1924 추천 수 2 2024.02.19 15: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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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의 참뜻

어제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난 후 식사 시간에 어느 형제가 이런 질문을 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33:20)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내 아이디를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씁니까? 다시 말하면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여호와의 천사와 만나 씨름을 하여 이겼을 때 그곳을 브니엘이라는 이름이라고 고쳤는데 이는 그가 거기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이 되는데 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33:20)라고 했는가, 라는 물음이다.

그렇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없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노아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랬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딤전 6:16).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본 것은 하나님의 천사였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행여 하나님의 얼굴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빚어낼까 봐, 극도로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이유가 있다. 우상숭배 때문이다.


여기서 손을 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시스 2세의 부탁을 받고 바티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 하나님의 얼굴을 그렸다.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길고 흰 수염을 휘날리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을까? 그 얼굴을 보고서 그림을 그린 걸까? 물론 아니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하나님의 얼굴은 전적으로 미켈란젤로가 생각한 상상 속의 얼굴이다. 미켈란젤로와 똑같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 하면 그런 이미지를 일정 정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다랗고,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의 모습 말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이다. 세 종교의 조상이 모두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 종교 모두 구약성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세 종교가 다른 점이 많이 있다. 가톨릭은 비교적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드는 일에 관대한 편이다. 그래서 가톨릭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일까지 결정했다.

 

그렇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이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2000년 전 로마의 식민지 시절,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는 것도 크나큰 모욕이라고 여겼다. 그 역시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의 모스크(사원)에 가보면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는 모든 그림이나 조각을 철저히 배제한다. 하물며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의 얼굴조차 그리지 않는다. 역사적 기록화에도 무함마드의 얼굴은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이 민 얼굴만 그릴 뿐이다. 행여 무함마드가 우상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치이다. 그 점에서 유대인들은 가톨릭보다 이슬람교가 유대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세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33:23)라고 기록했다.하나님의 등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은유이다. 하나님에게 등이 있고 얼굴이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의 은 우리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 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등만 보고 얼굴은 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아무도 직접, 즉 실체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모세도 이런 정도밖에 하나님을 알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겠습니까(13:1, 88:14, 102: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105:4)라고 말하고,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리라(11:7, 42:2, 45:12)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뿐이 아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팔복(八福)의 여섯 번째 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5:8).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기록돼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에는 대체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알기 전에, 먼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은 헬라어로 카타로스(Katharos)’이다. 잡티가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어원과 같다. 그건 무슨 뜻인가?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감정 정화가 언제 오는가? 그것은 씻어냄 뒤에 온다. ‘카타로스(Katharos)’, 즉 깨끗함도 마찬가지이다.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낸 뒤에 마음의 깨끗함이 온다. 우리는 회개하면서 씻어낸다. 그렇게 씻어내고 나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우리의 마음이 슬픔으로 꽉 찼을 때도 그렇다. 실컷 울고 나면 속이 텅 비워진다. 그렇게 씻어내며 깨끗해진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첫 번째는 마음이 가난한 것을 말하고(5:3) 여섯 번째는 마음이 깨끗한 것을 말한 것이다(5: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영성 생활은 회개함으로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과연 머리와 몸과 팔다리를 가진 사람처럼 생겼을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처럼 말이다. 이것을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이라고 한. 그렇게 말하는 것은 3차원적인 언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나님을 봤다. 환시를 통해 하나님을 봤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걸 좋아한다. 우상을 만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뭔가 소유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재물을 섬긴다(6:24, 16:13). 출애굽한 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의 신상을 만들고 숭배하였다(왕상 16:32).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것보다, 서로 통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성령의 교통이라고 말한다(고후 13:13). 그래서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는 통함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통한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다.”(고전 6:17)라고 했다. 이것은 안테나의 주파수가 서로 맞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안테나의 감도도 좋아진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잡음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수신하게 된다. 그게 통함이다. 그렇게 서로 통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게 된다(15:7).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된다(13:22).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할 때 그것을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대부분 형상을 붙잡는다. 겉모습을 보려고 한다. 눈과 코와 입을 보려고 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겉모습이 닮게 지은 게 아니라, 속 모습, 즉 형상과 모양이 닮게 지었다(1:26). 여기서 형상은 속 모습, 즉 속성이고, 모양은 형상, 즉 속 모습, 곧 속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을 본떠 인간의 속성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건 속성을 본다는 뜻이다. 속성을 본다는 건, 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통하는 걸 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타이르셨다(14:8-9).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의 속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즉 속성, 곧 사랑과 거룩과 의와 빛이시기 때문이셨다(1:15).

우리가 회개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고 깨끗해지면 우리의 마음의 속성과 하나님의 마음이 속성이 서로 통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는 이미 우리의 에고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때문에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귀를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보게 되었다(욥 42:5)고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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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캔디

2024.02.19 21:13:47
*.72.247.9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4.02.19 21:27:25
*.181.143.12

브니엘남 님은 환자는 안 보고 책 읽고 글쓰기만 하시나 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질문한 '형제'는 정 목사입니다.

[레벨:24]브니엘남

2024.02.20 07:49:44
*.182.114.146

둘째 단락에 추가하였습니다. 

[레벨:30]모모

2024.02.20 18:05:55
*.134.194.227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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