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멍청한 생각잇기

조회 수 2195 추천 수 19 2005.03.24 19: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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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행위와 체계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애둘러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라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중심의 어떠한 행위로도 결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할 수 없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닐까요?
이는, 인간 사유의 총체인 정치 사회 문화 역사등의 체계를 통해서는
단연코 하나님 나라를 표현할 수도, 이룰 수도 없음을 선포하신 것은 아닐까요?
율법적 윤리(도덕)의 한계와 그 죄성을 수많은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절대한계'-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를 아셨고,
나아가 인간 중심적인 세상 가치판단을 역설적으로 부정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과 세상과의 이 관계를 통해서,
개인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동시에 이룰 것을 명령하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 인간에게 주신(남겨진) 마지막 소망(희망)이,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을 향한 '온전한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아닐까요?
'온전한 사랑의 행위'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삶이 그것일까요?
오직 시대적 상황에 종속된 해석에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취사선택할 문제인가요?
또한 방법적 문제 접근에서도,
우리는 모든 긍정적 방법을 '그렇다'하고, 모든 부정적 방법 또한 '그렇다'하면서,
모든 긍정적 방법을 '아니다'하고, 모든 부정적 방법을 또한 '아니다'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시, 우리가 드러내 보이는 '온전한 사랑의 행위'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고,
시간과 공간에 묶인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하는가요?
이런!
우리는 다시 인간의 '절대한계'로 돌아오고 만 것인가요? 그런가요?
뫼비우스의 띠 위에 놓인 한 점 존재처럼...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3.25 00:09:00
*.249.178.15

허정수 씨,
위의 글들은 '멍청한 생각잇기'가 아니라
인문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의 다층다기성과 심층을 잘 드러내주고 있군요.
'온전한 사랑의 행위'가 그 생각잇기에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답을 주셨네요.
'오로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직 실증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듯이
사랑도 알지 못합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 조차 사랑과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행동들이 폭력적인지는 알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불의한지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건 국가와 국가, 한 국가 안에 이익 집단 사이,
그뿐만 아니라 한 가족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참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요.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그렇구요.
사랑은 성령과 같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지를 우리가 인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려는 그 의도 자체를 일단 포기하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요?
그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그 공간을 마련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게 힘든 일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영이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정하고 축소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혁명입니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니까요.
철저한 순종이니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을 뒤따라 갈 뿐입니다.
자신의 능력만큼만 가면 충분하겠지요.
고난주간이 허정수 씨 가족에게 의미있기를 바라고,
동시에, 전혀 새로운 생명 현상인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레임과 희망도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레벨:7]허정수

2005.03.26 00:30:52
*.167.200.244

목사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자기부정',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령 우리가 '자기(자아)'를
역사적 관계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물리적 시공간에 갇혀있는 자기,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로 규정한다면
'자기부정'이 어떠한 사유의 천착이나 방법적 실천으로 가능할까요?
나아가 자기부정이 가능하다고 해도,
자기부정한 자기는 자기가 아니지 않은가요?
어리석은 질문이 되고 말겠지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3.26 23:34:44
*.249.178.15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일은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공즉 색,색즉 공이라는 말처럼 없는 게 있고, 있는 게 없다면
결국 자기가 없음으로써 자기를 찾는 것이 되겠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는 불교적인 생각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의 자기부정이라는 것은 허정수씨가 정의한 그런 자아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영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죠.
자아는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떤 면에서는 수백만년 동안 생존의 길을 걸어왔던 인간이라는 종 안에
숙명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부정될 수가 없을 겁니다.
다만 기독교에서 성령이라고 부르는 그런 영에 철저하게 의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면 한참 걸립니다.
물론 나도 그 근원에 대해서는 말할 자신이 별로 없기도 하구요.

자기를 부정한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구요?
맞습니다. 맞구요!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주체라고 말할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다만 주관적 욕망만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주체는 하나님뿐이라고 말하면, 너무 진부한 말인가요?
우리가 물방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물입니다.
물방울은 주체가 아니라
물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낭 물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게 곧 물방울의 주체가 살아나는 길일 겁니다.
별 논리도 없는 이야기가 된 것 같군요.

부활의 생명이 함께 하시기를....

[레벨:7]허정수

2005.03.27 23:46:28
*.167.213.253

우리 삶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길 간구하면서,
부활하신 그 분의 생명의 진리속에
목사님 가정의 평강과 기쁨이...

목사님 저는 '자기부정'을 '영'에 맞추지 않고, '자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여전히 저는 존재에 묶여 있습니다.
인간의 '절대한계'를 철저히 깨달을 때 진리와 조우할 지,
단순히 소박하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낼 지 어렵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기독교적 자기부정이 '영에 철저히 의존하는 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저의 방식으로 풀어서,
자기부정이란 인간중심의 사유와 행위를 변증적으로 비우는 것이며,
성령충만함을 채워
하나님 중심의 진리의 행위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는지요?
또한 인간의 '주체'를 물방울에 비유하신 것을,
물방울도 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해도 되는지요? 물론 하나님을 양의 무한함(계량적)으로 호도할 수 있는 우려가 듭니다만...
그렇다면 인간존재가 주관적욕망'만' 있다고 보기보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저의 어리석은 비약이겠지요?

미흡함을 관용으로 받아주시리라 믿으며, 또 여쭙게 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3.28 00:26:33
*.249.178.15

이거 참,
허정수 씨와 말하다보면 자꾸 내가 끌려들어가는 것 같네요.
상대방의 말에서 사유의 끄나풀을 잡아낼 수 있다는 건
언어의 존재론적 경험이 없으면 잘 안되는 작업인데....
더구나 지금 이런 대화는 관념적인 거라 더욱 그렇구요.
존재의 경계에 닿아보려는 사람과 일상에 충실한 사람의 차이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요.
서로 소통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진리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가는 영원한 화두니까 누가 독단적으로 재단하거나
객관적으로 계량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보편적 인식론에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그 진리의 계시를 의식할 뿐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다릴 뿐이지요.
영에 의존하는 것과 자기를 비우는 것은 상호적인 겁니다.
다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주관적 의지로 그것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영적 실체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는 특징이 있을 뿐입니다.
물방울과 물의 관계는 단지 비유일 뿐입니다.
주관적 욕망이라는 나의 표현은
인간이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숙명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까지 대상이 되는 거죠.
자기가 <세계내존재>이면서도 세상을 대상화하는 거죠.
꿈같은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흡사 하나의 '세포'이며,
우리는 그 안에 기생하고 있는 소립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생각하는 세포는 훨씬 근원적 어떤 생명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그 근원적인 생명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바로 그 근원적인 생명의 리얼리티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형식의 삶에서는 도저히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세포 안의 세계에서 그 너머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세포와 근원의 생명체와 단절된 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지시하고 해명할 수 있는 어떤 단서들은,
비록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있습니다.
신학은 곧 그걸 찾는 작업니다.
아무리 찾아도 실증적인 것은 못찾을 겁니다.
결국에는 인격적인 결단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다만 그 이전 단계까지 최선으로 보편적인 인식론적 토대를 세워야 하겠지요.

부활절이 끝나는 밤이지만
기독교인에게는 매일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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