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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성령-부활 생명의 본질적인 영과 승천 능력의 제복의 영(겉옷의 영, 외퉁의 영), 성령의 내적 충만과 외적 충일
조회 수 3129 추천 수 0 2022.01.10 11:49:41관련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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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성령-부활 생명의 본질적인 영과 승천 능력의 제복의 영(겉옷의 영, 외퉁의 영), 성령의 내적 충만과 외적 충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로 오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성령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넣어주셨다(요 20:22). 이것은 마치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후에 그 안에 성령을 불어넣어주신 것과 같다(창 2:7). 그 후에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성령을 부어주셨다(행 2:1-4). 이것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의 말씀의 성취였다.
부활하신 후의 부활 생명의 영, 즉 생명의 영(롬 8:2)과 승천 안에서의 승천 능력의 영은 차이가 있다. 부활 생명의 영은 안에(in) 들어오고, 승천 능력의 영은 위에(upon) 임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성령 충만하다고 할 때의 단어이다. 부활 생명의 영의 충만은 충만(full), 즉 헬라어로 ‘pleroo’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것은 바람이 집 안을 가득 채우듯이 내적으로 채우는 것이다. 승천 능력의 영의 충만은 헬라어로 ‘pletho’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것은 외적으로 쏟아 붓는 것이다.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은 제자들의 영적 존재와 생활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어진 호흡과 같다(요 20:22). 오순절날 주님의 승천 안에서 제자들 위에 부어진 승천 능력의 영은 바람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경륜적으로 제자들의 사역과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부활 생명의 본질적인 영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승천 능력의 경륜적인 영은 그들이 그분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내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외적으로 성령으로 충일되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결할 것이다.
생명의 영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분을 호흡해야 하며(요 20:22), 능력의 영과 관련하여 우리는 엘리야의 겉옷으로 예표된 것(왕하 2:9, 13-15)처럼 우리가 그분을 제복으로 입어야 한다. 생명의 영은 생명수처럼 우리가 마셔야 하고(요 7:37-39), 능력의 영은 침례의 물처럼 우리가 그 안에 잠겨야 한다(행 1:5).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한 영의 두 방면이다(고전 12:13). 생명의 영께서 내주하시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의 생명과 생활을 위한 것이다. 능력의 영께서 부어지시는 것은 경륜적인 것이며, 우리의 사역과 일을 위한 것이다.
이것을 조직신학자 김동수와 대천덕 신부는 이렇게 구분하였다.
A. 순간 체험적 성령 충만(플레토); 특징(지속성: 순간적 체험, 목적: 사명 감당)
1. 세례 요한(눅 1:15): 선지자적 역할 감당
2. 엘리사벳(눅 1:41): 예언적 언사
3. 사가랴(눅 1:67): 예언적 언사
4. 120명의 제자들(행 2:1-4): 방언을 말함
5. 베드로(행 4:8): 예수에 대해 담대히 말함
6. 예루살렘 교인들(행 4:31):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7. 바울(행 9:17): 일시적으로 맹인이 되었다가 즉시 치유되어 보게 됨
8. 바울(행 13:9): 악에 대한 심판 선언
B. 지속 성품적 성령 충만(플레레스/플레로우); 특징(지속성: 지속적 성품, 목적: 영성 형성)
1. 제자들(행 13:52): 기쁨과 성령이 충만함
2. 예수(눅 4:1): 성령께 이끌리심
3. 일곱 일꾼 자격(행 6:3): 칭찬받는 사람
4. 일곱 일꾼 자격(행 6:5): 믿음(신실)의 열매를 맺음
5. 스데반(행 7:55): 용서와 신뢰
6. 바나바(행 11:24): 착하고 신실함이 잇는 성품
7. 에베소 교인들(엡 5:18): 성령을 충만한 상태의 사람이 되라는 명령
목사님은 성령론의 이런 구분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제가 이 둘의 차이점에 대하여 아주 오래 전에 자세히 써 놓은 것이 있기도 합니다. 부활과 승천을 구분하여 보시지 않으시니 이런 구분이 의미가 없으시기도 하겠습니다.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1. 경륜
경륜이란 말의 헬라어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입니다. 이 말은 ‘오이코스’(oikos: 집)와 노모스(nomos: 법)의 합성어이므로 하나님 집, 즉 교회를 다스리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에베소서에 세 번 쓰였습니다(엡 1:9, 3:2, 9). 이것은 청지기(눅 16:2-4, 갈 4:2), 직분(고전 9:17), 경륜(골 1:25), 또 심오한 뜻(엡 1:9)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종합해 볼 때, 경륜은 청지기(책임 맡은 자)가 집을 관리하고 다스리듯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역사와 우주의 경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우주 만물의 운행과 질서, 시간을 가장 적절히 조절하며, 분배하고, 배열하며, 계획하고, 지배하며 관리하시는 일체의 과정을 뜻합니다(에베소서 1:20-23).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작정(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모든 것들을 세밀하게 실행하십니다. 역사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모든 섭리와 사건들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래서 승천 능력의 경륜적인 영이라는 말은 승천 능력의 영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영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은사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주신 주님의 영의 은사의 분배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지방 교회에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2. 엘리야의 겉옷으로 예표된 것,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엘리사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자신에게는 갑절이나 있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휴거된 후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게 되었습니다(왕하 1장).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는다(눅 24:49)고 주님이 말한 승천 능력의 영을 겉옷의 영, 외투의 영, 제복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승천 능력의 영의 사역을 power 사역이라고도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단어가 관련이 됩니다.
(1) dunamis: 기능, 힘(might)
1) 하나님의 힘(마 26:64, 막 14:62)
2) 기적적이고 폭발적인 힘(고전 1:24, 롬 1:16).
3) 강력한 일(막 9:39)
4) 기적(행 2:22, 8:13)
5) 기적적 행위(고후 12:12)
(2) exousia: 제복(uniform)이란 뜻이 있습니다.
1) 행위의 자유, 행동의 권리: 그 행동에 대한 제복이라는 뜻이다
2) 하나님께는 절대적이며 무제한의 권리와 자유(눅 12:5)
3) 처분할 권리가 있다(행 1:7)
4) 사람에게 이 권위가 위임됨(마 28:18-20, 행 1:8).
3. 대천덕 신부님의 성령론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받았느냐>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김동수의 성령론의 글은 기독교 사상에 작년 말 까지 게재되어 있습니다.
무식한 자가 간단하게 써 보았습니다. 제가 조금 공부한 내용입니다. 사실 두 가지에 대해 더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만 총총.
아하, 그렇군요.
경륜이 '지방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와 개념이군요.
제가 아는 한 지방교회는 워치만 리 신학에 근거한 교파에요.
당연히 영지주의 분파라고 분류해도 잘못이 아니지요.
오래 전에 이 사이트에 지방교회 스태프 되는 분이 들어와서
분탕질(?)을 하셨어요. ㅎㅎ
여자분이신데, 정말 글도 설득력 있게 잘 썼어요.
브니엘남 님도 초창기 다비안이시니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처음에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면서 글이 거칠어지더라구요.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분이 저와 다비안 한 분을 명예훼손인가 뭔가로
고소해서 저도 영천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받고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국내가 아니라 대만인가, 어딘가에 거주하면서 온라인으로 고소했어요.
경찰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흐지부지 되었어요.
지금도 그분의 글이 여기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릅니다.
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제가 지금 순전히 오래전 기억으로만 말하는 거니까 100% 정확하지는 않아요.
브니엘남 님의 성령에 대한 이해가 지방교회 신학에 뿌리를 둔 건가요?
'경륜'이라는 단어는 정말 중요합니다. '에큐메니칼'도 그 단어에서 옵니다.
위에서 사전적인 의미를 잘 설명하셨어요.
그런데 그걸 왜 부활의 영에는 안 붙이고 승천의 영에만 붙이는지 모르겠네요.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구원 경륜이잖아요.
정통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재와 경륜을 구분할 뿐이지 그걸 부활과 승천으로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영지주의가 다 잘못된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의 신앙을 보편적인 차원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지식의 차원에서, 그게 영지인데, 설명하다보니
2천년 기독교 신학의 역사와 소통하지 못하게 되어서
부분적으로는 옳게 말하는데 전체적으로는 잘못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 주장이 매력적이어서 영지주의 신앙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통교회에도 그런 경향은 적지 않아요.
기도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거나 자기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거기다가 영육이원론, 선악이원론적인 세계관도 강하구요.
엘리야 겉옷을 매개로 하는 '예표론'은 정말 조심해야 할 성서해석 방법입니다.
많은 이단 교주가 그런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다가 스스로 재림주가 되기도 했답니다. ㅎㅎ
대천덕 신부의 글은 제가 모르고,
<기독교 사상>에 4회에 걸쳐서 쓴 '신약의 성령론 설교'는 저도 읽었습니다.
정통 교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령을 별도 주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아는 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의 원천인 영지주의는 정통신학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성령을
아주 적극적으로 접근하는거 같더군요.
사실 제가 지방교회에 관해서 소상하게 아는 건 아니고
기독교 사상사라는 큰 틀에서 스케치할 뿐입니다.
브니엘남 님이 성령에 관해서 젊은 시절부터 많이 생각하고, 글도 쓰신 거 같은데,
이왕이면 정통 신학이 말하는 성령에 관한 책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몰트만의 <생명의 영>과
졸역인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의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를 추천합니다.
아이구 어렵네요.
성령에 관해서 신학적인 논리를 전개하면서
부활 능력의 영과 승천 능력의 영으로 구분하는 건 생전 처음 봅니다. ㅎㅎ
보통은 삼위일체적 성령 경험을 말합니다.
김동수와 대천덕이 그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았다면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어딘가 영지주의적 경향이 보이는군요.
위 글 중에서 두 단락을 보충 설명해주세요.
1)승천 능력의 경륜적인 영
2)엘리야의 겉옷으로 예표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