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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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는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채찍질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화면 가득히 있습니다.
판화이고
그 상처를 섬세하게 표현하지않았지만 선혈이 낭자한 모습일 겁니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표현한 그림은 많지만
채찍으로 고초를 격는 몸을 그린 그림은 드물고
이 또한 구체적 상황에 비하여는 어느 정도 추상적인 그림인 것 같습니다.
루오는 그 광경의 그리스도를 왜 이런 식으로 표현하였을까요?
매맞는 고통을 함께 느끼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의 의미를 품어보라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도 인생의 여러 때들이 있지만
그것에 함의된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사람' 이자 '참 하나님'인 그리스도는
인간의 역사에 들어서게 된 그 순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헤어보는 수많은 때마다 그 의미는 달랐다고 봅니다.
오랜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우리 각자에게도
같은 그리스도의 때를 서로 다르게 느끼게 되거든요.
화면 전체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보면서
성만찬의 그 몸과 피가 떠오르는 것은 외람된 것일까요...?
지금 매 맞는 저 몸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는 장면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것과는 무관한 기억을
그리스도의 육신에 새기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죽음을 지나,
완전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을 때,
그와의 일치를 소망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며,
오래 전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기억하는 방식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에게 때가 되어 교회 공동체에서 성만찬을 나누며
생명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날들이 이어졌다면,
지금은 죄가 되어 살과 피가 나누어 지는 고통으로
죽음으로 가는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 plate 3 : eternally flagellated...
이번에도 유스님의 설명을 읽기 전에 그림을 묵상하며 글을 써 봅니다.
그리스도라는 제 자신의 울타리를 버리고, 사나이라고 표현 하겠습니다.
그림에서 사나이의 몸 전체 그림이 화면 위아래를 가득 채웁니다.
그것은 상황을 끝낼수 밖에 없다는 감정이 튀어 나오네요.
고개를 숙인채 눈을 감는 모습속에 시련자의 체념과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벌거벚은 자신의 나체는 많은 수모와 처절함이 엿보입니다.
체념과 처절함 그리고 왠지모를 숙연함이 간신히 벽에 기대어 가느다란 다리로 버티어 섭니다.
쉽사리 자신의 무릎을 끊고, 움크리는 것이 훨씬 더 편한텐데...
끝까지 서서 버틸까요?
그래서 숙연함과 숭고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의 빈 배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세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벌거벚은채 노출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질시 받고있는
듯한 인상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사나이는 이런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과 원망보다는
숙연함이 이 그림의 핵심이라고 보여 집니다.
이제 다시 유니스님의 글을 따라 읽어보고 그림을 느껴야 겠습니다.
저도 그림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 생각을 읽으시는 분에게 순간적으로만 공감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한 작품에 대한 고착되거나 답과 같은 인상이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거든요.
저도 쓴 후에 그 내용을 잊어버리기를 바라기도 하구요.
하긴 바라지 않아도 기억을 못하지만서두...ㅎ
그래야 다음에 저도 새롭게 감상을 할 수 있어서요...^^
어쩌면 요즘 저의 그림에 대한 글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그림을 슬쩍 내미는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한편, 루오의 선들에서 이런 숙연함이 표현되는 것에 늘 저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의 속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어떻게 단순한 선에서 저런 것이 풍겨나는 연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무수히 주제로 삼고 그릴 수 있는 그 처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만나지도 못한 존재를 저리 다양하게, 무게로 표현하고 공감하게 할 수 있을까?
루오가 진심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무엇일까?
등등...
유니스 님은 신학자가 되셨네요.
신학교를 나와야만 신학을 아는 게 아니고
영적 통찰력이 있으면 신학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니
유니스 님은 이미 그러고도 남을 분처럼 보입니다.
루오의 저 투박해 보이는 판화가 볼수록 영적인 울림이 나는 것은
다 유니스 님 덕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