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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조회 수 1292 추천 수 10 2006.02.10 12: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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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동안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잘 이해되지 않거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을 접할 때 마다
“목사님 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가곤 했었습니다.
영적 깊이로나 인문학적 깊이로나 목사님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지요.
그저 혼자서 곰곰이 되새김질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질문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저 혼자 되새김질 해 봤자 답이 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두 편의 글이 서로 상충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도바울의 자유]와 [거룩한 분노]가 그것입니다.
앞글에서 목사님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자유보다도 그 권리를 버리는 자유가 참된 자유이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뒷글에서는 ‘우리에게는 뺨을 때리는 사람과 맞서 싸울 권리가 있고 또한 그것은 정당하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권리의 포기’와 ‘권리의 행사’를 동시에 주장하고 계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동시에 앞글에서는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지 목회자의 사례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도 궁극적으로 이런 구조로 나가야 합니다.]라며 ‘권리의 포기’를 일반화시켜 우리들에게 그것을 권면하고 계시는 반면에,
뒷글에서는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대라는 말씀도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그런 정도의 경지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오른뺨을 맞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왼뺨도 대야한다고 충고할 수 없다는 말이다.]라며 ‘권리의 포기’가 권면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2.10 23:27:35
*.249.178.23

먼지 님,
최근의 내 글에서 모순이 발견된다고 하셨군요.
일단 그런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먼지 님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런 걸 느꼈겠지만
그렇게 확실하지 않거나
질문하는 게 귀찮아서 그만둔 일이 많았을 겁니다.
어떤 분이라도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해오면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려니 했는데,
먼지 님이 하셨군요.
내 글을 가장 정성스럽게 읽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이렇게 문제까지 지적해주니 더 한층 고맙습니다.
질문에 답한다기보다는 그냥 느끼는 것 몇 가지를 정리하겠습니다.

1. 영적인 깊이와 인문학적 깊이
이 부분에서 내가 앞선다고 하신 말씀은 맞지 않는 말이군요.
영적인 깊이는 아무도 측량할 수 있는 세계이구요.
인문학은 나의 전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사이트에서 가장 조심하는 것은
내 글이 인문학적으로 그 토대가 부실한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 회원과 비회원들 중에는 인문, 사회화학, 자연과학 등등에서
전문가들이 제법 되거든요.
나는 그저 신학자에 불과해요.
그것도 조직신학 비슷한 걸 한 사람이죠.
여기 회원들보다 내가 조금 나은 점은 오직 조직신학 부분일 겁니다.
그 조직신학 작업을 인문학적인 토대에서 펼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인 오류가 나에게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먼지 님의 질문도 그런 것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죠.

2. 사도바울의 자유
지난주일 설교였습니다.
거기서 사도권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인의 진정한 자유의 토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 목사의 사례비 문제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죠.
핵심은 그렇게 사도권이 위협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토대가 무엇인가에 놓여 있어요.
그건 곧 복음에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복음에 근거해서
바울은 율법을 따르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했어요.
자기 권리를 버릴 수도 있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틴 루터의 논문 제목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있군요.
여기에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거죠.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서 현실적인 자유를 확보할 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아요.
예수 믿어도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아요.
그러나 성서는 또 자유하다고 말하죠.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자유롭지 않은데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 사이의 긴장 말이에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한다면,
그 긴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바로 자유의 토대라는 거죠.
그를 아는 것만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자유마저도 어떤 실체는 아니에요.
그 무엇으로 계량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죠.
그분에게서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결국 기독교인의 자유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에요.
(신학을 한 사람은 이렇게 말이 많은 법이랍니다. 용서....)
<사도 바울의 자유>라는 설교는
바울이 권리를 포기했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를 자유의 토대로 삼았다는데 있습니다.
이게 전달되지 않았다면 나의 표현력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3. 거룩한 분노
오늘 이 글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았어요.
<말씀과 삶>을 발행하기 위해서 좀 서둘러 글을 쓴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사이트에 올린 글을 먼지 님에 교정해 주었는데도,
다시 읽어보니까 문장 구조에서 결정적인 오류가 보이네요.
시간에 쫓기면서 좀 거칠게 쓴 글입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건 아니에요.
먼지 님은 이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네요.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뺨을 때리는 사람과 맞서 싸울 권리가 있고
또한 그것은 정당하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마지막 패러그래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보군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뺨을 때리는 사람과 싸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런 상황은 내가 뺨을 맞는 게 아니라
남이 그렇게 맞는 거를 말합니다.
내가 맞을 때는 자신의 인내심으로 해결해도 되겠지만
다른 사람이 맞을 때는,
특히 본문에서 나오는 ‘손 마른 사람’ 같은 사람들이 맞은 경우에
여기에 맞서야 할 거룩한 분노가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게
내 글의 요지였어요.

4. 권리 포기와 권리 행사의 모순
정확하게 지적하셨군요.
바울은 사도권을 포기했고,
예수는 분노를 표출했으니까,
아니 제가 그렇게 설명했으니까 모순이군요.
바울의 권리 포기는 일반화하고
뺨을 대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상황론으로 몰고 갔으니까
모순이긴 모순이군요.
그런데 이 두 글을 단순 비교하기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어요.
물론 먼지 님이 인용한 문장이 내 글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진술들은 성서 텍스트, 또는 신학적적인 ‘자리’를 전제하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만약 이런 방식으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도 모순이 발견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저 암시만 한다면 예수님도 성전에서 작은 폭력을 행사하신 적이 있어요.
그렇다고 내 글이 예수님의 경우와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이 두 글을 같은 저울에 울려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뿐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먼지 님의 문제 제기를 이런 방식으로 피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충분한 설득력은 없어도 대답은 하긴 해야겠군요.
그런데 어쩌면 위의 내 설명에서 어느 정도의 대답을 주어졌으리라고 봅니다.
먼지 님은 두 글 사이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어요.
우선 첫 번째 글에 대해서는 이렇습니다.
<동시에 앞글에서는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지 목회자의 사례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도 궁극적으로 이런 구조로 나가야 합니다.]라며 ‘권리의 포기’를 일반화시켜 우리들에게 그것을 권면하고 계시는 반면에,...>
목회자 사례비 문제가 언급된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그저’ 전한다는 내용이에요.
저는 권리의 포기를 일반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죠.
학교 선생님들이 월급을 받지 않고 가르칠 수 있나요?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않을 수 있나요?
복음 전하는 것 자체를 은총으로 안다는 그 사실을 말한 것이고,
이 세상의 삶도 이런 정신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었어요.
<궁극적으로> 이런 구조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건 종말론적인 관점이죠.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구요.
종말, 하나님 나라와 오늘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위에서 한번 지적한대로 긴장이 따라오죠.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가 기독교 윤리의 관건입니다.
두 번째의 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뒷글에서는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대라는 말씀도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그런 정도의 경지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오른뺨을 맞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왼뺨도 대야한다고 충고할 수 없다는 말이다.]라며 ‘권리의 포기’가 권면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른 뺨을 치는 이 현실이 바로 기독교 윤리가 구체화해야 할 장입니다.
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아직 절대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오른 뺨을 치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향해서 나가야겠지요.
그게 가능할래나?
여기서 우리는 구분해야합니다.
내가 뺨을 맞은 경우인지,
아니면 뺨을 맞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경우인지 말이죠.
내 뺨에 대해서는 개인의 영성에 따라서 무한한 비폭력으로 나갈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의 뺨에 대해서 모른 채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여기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할까요?
당신 뺨이 아프지만 참아야 해,
충고해야 할지,
아니면 그 사람의 뺨을 친 자와 싸워야 할지,
그건 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럴만한 용기가 없어서 문제지만,
일단 방향만은 그렇습니다.

공연히 말이 길어진 것 같군요.
두 글이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먼지 님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의 글은 바울 자신이 당한 상황에서 자기 권리를 포기한 것이지만
뒤의 글은 다른 사람이 당한 상황에서 분노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좋은 밤, 되세요.

[레벨:0]먼지

2006.02.11 12:21:17
*.255.46.249

이렇게 긴 글로 답변해 주시니 공연히 제가 송구스러워 지네요.
[사도바울의 자유]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저도 놓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그 자체가 이미 상이고, 권리고, 자유라는 걸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것에 별로 미련을 두지 않겠지요.
마치, 너무나도 그립던 사랑하는 남자가 값비싼 선물을 사들고 방문했을 때, 선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그 남자에게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여인의 심정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친절하신 대답,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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