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흥미로운 대화

조회 수 1851 추천 수 43 2006.02.11 07: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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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는 개인 사정으로 한 번 수업을 빠졌는데, 그 때 '부활'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부활에 대한 부분이 궁금합니다. 블로그에 부활에 관련한 글을 남기셨고, 지난 수업에서도 살짝 언급하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인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이 세포의 재생에 불과하고, 세포가 재생했더라도 결국 늙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이내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 제자들이 보았거나, 믿었던 '부활'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그것 역시 결국 나중에(교회에 의해)만들어진 것인가요? 사실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특히 예수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는, 이 원래 마가복음에는 없던 구절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하다면, 원래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나, 하고 말이죠.

A :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는 순간 모조리 도망칩니다. 심지어 수석 제자라는 베드로(초대 교황이기도 한)는 밤사이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이 연약하고 비굴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 변화에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육체가 죽고 싶지 않아하는)을 투영해선 안 됩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육체가 살아난 것을 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도 못 알아보지요. 그리고 예수에게 자기들 스승 예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이 나중에 예수인줄 알았을 때 예수는 홀연히 사라집니다.(누가 24:13~) 우리는 한 사람의 실체를 생각할 때 육체라는 껍데기, 이른바 색(色)의 차원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껍데기가 아니라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죽는다고 하는 건 육체, 실체를 잠시 담고 있던 껍데기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담는 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그 자체론 매우 특별한 신비현상, 대단한 마술일 뿐입니다. 누구도 마술을 보고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진 않습니다. 감탄할 뿐이지요. 우리가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경로는 깨달음을 통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건 스승의 육체가 재생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예수의 육체가 재생해도 그게 제자들에게 단지 놀라움만 주었다면, 그들의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건 부활사건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목숨이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는 스승의 말을 어느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육체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천국'이 궁금합니다. 예수전을 들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보다 많은 전문적 지식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선생님의 신앙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짐작하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천국'은 모두가 평등해지고, 하나님의 이미지 본연인 인간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때인 것 같은데 이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흔히 말해지는 영혼의 의미와 성령의 의미, 내세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도 궁금해집니다.

A : 영혼, 성령은 흔히 어떤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이른바 근대 이후 서구식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매우 억지스런 사고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나 영의 세계를 현실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귀신과 영은 다른 방식으로 늘 우리와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귀신과 영에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그들을 통해 삶을 성찰했습니다. 뭔가 신비스런 체험을 하고 희한한 행동을 하는 게 영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런 차원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신비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현실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대단한 신비적인 체험(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신의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는)을 하는 게 어려울까요, 자본주의적 욕망을 씻어내고 새롭게 사는 게 어려울까요? 저는 단연 후자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가치관을 전복하고 회개했다면 그는 영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소통한다면 그걸 우리는 영혼이 영원히 산다, 천국에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죄지은 형제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이 즐거움과 안락함만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도 없고 불편함이 없다면 안락함도 없습니다. 그 오감의 최대 만족치를 천국으로 가정하는 건 단지 육체적 목숨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세는 육체의 목숨이 진 다음의 목숨,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목숨에서 육체를 포함하는 아주 짧은 기간 다음의 목숨입니다.


Q.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다원주의는 합리적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은건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는 그러한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 부분도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A : 개신교에선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유일한 신이라는 말인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가 하느님을 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읽힙니다. 예수 당시 성전 체제가 신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고(신이 성전 지성소에 산다는 전제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걸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문제와 싸우다 죽임을 당했지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바로 예수 당시의 성전체제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엔 하느님을 섬기려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배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라면 교회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교회체제가 없는 곳은 하느님이 없는 곳이 되는데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실제로 그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백인과 같이 하느님이 만든 인간으로 보는가 아니면 짐승으로 보는가, 였지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과 소통해왔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성직자들은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그 논쟁은 실은 ‘국익’ 논쟁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나왔습니다. 예수는 종교체제의 굴레에 갇힌 하느님을 구출하여 인민과 직접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 역시 하느님의 딸 아들들입니다. 예수가 전태일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지요. “너는 나를 창시자로 하는 기독교의 구원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또 자살이라는 죄를 지었기에, 나와 같은 맥락의 실천을 했지만 지옥에 가야 한다” 예수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예수를 믿으면 될 것입니다. 나로선 그런 예수는 개자식입니다.


Q.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관점도 이번 강의를 계기로 고민하게 된 부분인데, 그렇다면 전능하신 그 분은 이 세상 어디까지 관여하시는건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학자는 창조 이후 하나님이 전능성을 상실하셨다고도 말했다는데, 그 이유는 전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째서 이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내버려두셨나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성경이라는 것에도 이 세상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결국에는 미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알수는 없지만, 결국 옳다는 논리겠지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감정적으로까지 부정하기엔 아직 무리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부분도 궁금합니다.

A : 강의 중에 표현했듯, 하느님을 흰수염을 휘날리며 구름위에 앉은 巨漢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안됩니다. 하늘은 고대인들에겐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지만, 이젠 우리는 하늘이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이며 우주의 공간에선 일정하게 분할된 공간도 아니라는 걸 압니다. 이제 하느님이 있는 곳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곳, 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있습니다. 성서 첫머리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동학에서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심' 혹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외곽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의, 선, 따뜻함은 바로 우리 안의 하느님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힘의 전부, 모이는 한 점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게 결국은 이 추악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힘,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되풀이 되는 듯하지만 길게 보면 언제나 인간해방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은 자본주의라는 가장 곤란하고 강력한 적과 싸우는 중입니다.


[레벨:0]조기성

2006.02.11 08:01:21
*.224.154.170

김규항이라는 논객(?)이
자신에게 질문한 분에게
답변한 내용입니다.

"사실 마르크시즘은 세속화된 종말론으로서
곧 일종의 변형된 그리스도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시즘이 곧 인간구원을 중요한 담론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이트 샘터교회 항목 중 '기독교란 무엇인가?'>

목사님이 말씀하신 이 지점에서
기독교를 해명(?)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김규항이
지난 학기 <예수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모임을 가졌던 거 같더군요.
흥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던거 같은데
자료를 구할 수가 없네요...

사실 김규항의 글이나 진중권의 글에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면서
종종 성서를 인용하는 일이 있고
그 성서 인용의 귀결--지금 하느님은 자본주의라는 가장 곤란하고
강력한 적과 싸우는 중입니다(전형적이지요??)--이 조금은 언짢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고 헷갈렸습니다.
그런데 위의 문장이 눈에 띠더군요.
위의 한 문장으로 그 궁금증이 조금은 해소되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데
위 문장에 대한 부연설명을 조금 더 언급해 주실수는 없는지요????

이길용

2006.02.11 13:53:56
*.97.233.122

김규항이나 진중권이나 종교나 신학부분에서는 아마츄어일 뿐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담론의 수준도 그렇고, 참고하는 문헌들의 열팍함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글에서 정교한 신학적 사변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어려운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얄팍한 글쓰기도 한국에서는 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이야기하고 말해야할 사람들이 입다물거나, 혹은 그런 이들이 무척 적다는 말이겠지요.

솔직히 한국 인터넷 문화가 정치시사 평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도 한국 전체를 위해서는 이롭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보다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이들의 역사문화적 담론들이 지속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텐데.. 얄팍하고 편향적인 정치적 수사들만이 난무하는 관계로 정말 필요한 정론들이 뒤로 묻혀버립니다.

따라서 제 눈에는 꼴통 수구적 종교인들이나 얄팍한 지식에 근거한 유행적 정치담론을 양산해 내는 진보(?) 인사들이나 매 한통속으로 보입니다.

정말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이들이 더욱 많이 늘어났음 좋겠습니다

[레벨:0]조기성

2006.02.12 09:44:12
*.80.176.249

교수님의 전체적인 총평...에 동감합니다.
인터넷 문화에 대한
그리고 얄팍하고 편향적인 정치적 수사들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런 수사들로 소위 대중을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십분 동의를 합니다.

그럼에도 총평에 덧붙여
좀 더 섬세함이 아쉽습니다.
그런 식의 생각은 반대편에서도 우리를 향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종교나 신학부분에서는 정교한 사변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나
정치나 사회라는 구정물 속에서의 삶이 거세된 온실 속의 종교인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담론의 수준은 삶을 등에 업지 못하고, 참고하는 문헌들은
두껍고 어려울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 일상에서 무용한 것들일꺼라 생각됩니다"

이런식이라면 더 이상 대화는 단절이 되는게 아닌가요??
저는 정말 필요한 말을 원하고 있거든요.

김규항의 예전 모습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행보--진중권과 달리 그 판을 떠난 걸로 보입니다--에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적인 스탠드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성경이 복음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의 삶의 궤적속에
아내의 후배이자 함께 일(?)하는 자매가
소위 운동권 출신으로 뼈가 굵어온 형제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형제는 경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며
옥살이도 몇번이나 했고
신문방송학과를 나왔지만
노동현실에 대한 공부를 위해
80만원을 받으며 성서공단에 노동자로 위장--고졸로 속이고--취업해서
꽤 오랜동안 일하면서 노조운동을 하고
지금은 민주노총 대구지부에서 일하고 있지요.

두 가정은 자주 만나며 얘기하고
서로의 삶을 오픈하고 터 놓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정치적인 성향이나 많은 것들이 비슷함에도
미묘한 긴장과 함께 서로에게 갈급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 친구가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알았으면하고
(이 말도 요즘은 참 헷갈립니다.
'무엇이 복음이냐?'라는 질문이 저의 화두였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복음이 누/구/에/게/ 복음이 될지?'라는 생각에 어지럽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조금더 사회주의적인 시각
마르크스 사상에 눈을 조금 떳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늘 서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고 웃음으로 마무리 하는 부분이지요.

그 친구에겐 치열한 삶이 있습니다.
얄팍하지 않습니다. 처절합니다.
편향적이긴 하지만 존재와 인격을 걸고 있습니다.

그를 좀 더 이해하고 그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를 독해하고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저의 스탠드가 때로는 걸리적 거리고 방해를 하는군요.....

그래서 김규항이 겪고 있는--어머님이 교회를 다니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예수전>강의는 자신이 가고 있는 구도의 과정을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자신의 깨달음의 수준에서 몇 몇 분들과 나누고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작업이었던 걸로 보입니다--최근의 일과 모습과 그의 글과 행보가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좌파이자 사회주의자로 소개하며 살고 있는 이이기에....

그래서
"사실 마르크시즘은 세속화된 종말론으로서
곧 일종의 변형된 그리스도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시즘이 곧 인간구원을 중요한 담론으로 삼기 때문이다" 라는
정목사님의 말이 눈에 크게 띄게 되었던 것이구요....

교수님!!
혹 저의 글에 심기를 불편케 하는 대목이나
건드리는 대목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정말 필요한 말을 부탁드립니다.

이길용

2006.02.12 17:40:43
*.97.233.122

심기가 불편하거나 부딕키는 대목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구요^^ 다만 요즘 제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보니 긴글로 답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김규항과 진중권에 대해서 딴죽을 놓았던 것은.. 쉽게 그들이 전혀 전문적이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도 성급한 일반화를 논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이 사회가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강요하고 있으니까요) '들음의 자세'도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는 너무도 편하고 쉬운 길을 그들은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시각에서는 제 경우에는 별 충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좌파적 시각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조망함에 있어서 계급적 이해가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평등과 공평한 분배를 위해 우리 사회가 진보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입니다. 이에 대한 내적 충돌은 전혀 없습니다. 꼭 무신론자여야만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꼭 민중의 아편으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구요. 오히려 신체험을 한 이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기존의 문화적 환경적 제한을 넘어서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 이후 각각의 입장과 의지에 따라 정치적 포지션을 정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특정한 이념에만 국한되어야만 한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를 운영하는 입장의 차이이기에, 무한대의 소통 가능성을 상호 개방하고 있으면, 꼭 충돌과 싸움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정교하고 제한없는 소통이지, 이념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 않나요? 내가 절대자, 혹은 절대적 진리를 경험하고 사는 것과 정치적 이념을 지키는 것이 충돌적이어야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초창기 맑시즘의 경우 역사를 객관화, 대상화, 과학화해서 무신론적 토대 위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새롭게 구성했지만.. 지금에 와서 과연 맑스의 기대만큼 무신론과 유신론의 폭이 깊고 넓은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겠지요.

에고.. 이제 더 이상 여유가 없네요... 연구실을 이용한 이후에는 확실히 시의성 있는 댓글쓰기가 많이 힘들어지네요. 잠깐 잠깐 접속해서 간단한 댓글다는 것 외에는.. 제 시간적 여유가 많이 부족하네요.

이 문제 저도 좀더 생각해보죠.

[레벨:7]강석훈

2006.02.13 14:02:25
*.239.101.208

‘평등, 민주, 자유 …’라는 질문 앞에,
억압의 구조를 은폐하고 호도하기위해, 손쉬운 도피처로
오용된 것이 한국기독교였다고 생각합니다.
변혁을 위한 의식화의 과정에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인적/물적 토대를
이용하고자했던 경우도 있었구요.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지칭하는 인식표들이
개별 사안에 대한 집중을 저해하고, 결과적으로 소모적인 피로만 누적시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나브로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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