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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영감에 대한 오해

조회 수 3118 추천 수 34 2005.12.23 14: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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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 영감에 대한 오해]

좋은 비평은 늘 대안을 제시한다. 나는 정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이점이 늘 궁금했다. 그간의 설교비평을 통해 보여준 것 처럼,  때론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와 억측을 마다하지 않는 점은 생략하자. 그럼에도 이러한 비평글을 통해서는 좀 처럼 속내지 드러내지 않는 정교수의 대안은 무엇일까? 이 싸이트를 찾아온 주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설교내용의 부실이라는 정 교수의 지적은 자연히 설교의 근거인 성경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그리고는 정작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풀어 놓는다. 곧 ‘성서 역사비평’ 이다. 그렇다. 역사비평을 통해 성경을 분석하고 걸러서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서 발전 시키자는 것이 정교수의 대안이었다. 한국교회를 향해 정작 하고싶었던 말이었다.

이렇게 정리해 보자.
한국교회의 문제> 설교의 문제> 성경 해석의 문제>축자영감의 문제> 역사비평 (결과로서의 대안)

정교수의 역사비평 강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다름아닌 기존의 정통교회에서 수용되고있는 축자영감에 대한 비판이다. 곧 잘못 됐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간 단편적인 짧은 글로 이곳 저곳에서 맛 보기만 보여 주던 정 교수가 친절하게도 이곳의 ‘신학마당/온라인 강의실/제19장 성서에 대해’란에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자그마치 A4/ 18장의 장문의 글이다. 이런 심도 있는 글에 대해 언급하려면 아마 최소한 그 2배 이상의 분량이 필요 할 것이다. 최소한의 예의차원에서도 그래야 하리라. 그럼에도 서론과 후반부에 실린 바르트 인용문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이번에는 ‘축자영감’에 대한 정 교수의 의견에 초점을 맞춰보자.)

일단 간략한 용어의 개념부터 확인하자. 대체 ‘축자영감’, ‘역사비평’이 무엇인가? 이 두 이론은 성경을 설명하는 상이한 시각이다. 우선 축자영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계시라 할 때, 그 주된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특별계시’라 한다. 그럼 하나님은 성경에 스스로 속박 당하시고 성경 이외에는 말씀 하시지 않는가? 그렇치 않다.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자연을 통해, 역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하나님은 성경과 자연(역사)를 통해 계시 하시지만, 한 가지 원칙을 가지고 계신다. 곧 성경을 주된 도구로 말씀 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특별계시로 자연과 역사를 일반계시로 구분한다. 곧 성경을 계시자체로 보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역사가 성경이라는 독특한 계시형태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됨을 뜻한다. 이 같은 이유로 자연과 역사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해석의 도구가 곧 성경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의의를 제기하는 무리들이 등장한다. 르네상스와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노골적으로 성경에 대해 딴지를 걸고 나온 것이다. 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혹은 일부는 하나님 말씀인데 일부는 아니라는 주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 교수가 성경이 진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애매한 주장의 배경이다.) 위에 언급한 원리(축자영감을 설명하며 언급한)를 역사비평의 계시론에 대입해 보면,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가 아니라 자연도 역사도 동등한 계시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에 타 종교까지 포함시킨다. 이점에서 정 교수가 종교 다원주의적인 성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은 사실이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해, 기독교적 종교 다원주의라 할까? 이러한 불신(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을 전제로한 이들에게 자연(인간/이성/직관)과 역사를 도구로 성경을 검증하자는 주장은 당연한 수순이다.

성경 기록자의 사고, 개인적 특성, 당시의 역사적 황상, 당시에 통용되었던 설화, 기록자의 문학적 특성 등을 이해하고 분석함으로 참된 진리를 찾아 내자는 것이다. 이를 역사비평이라 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기록자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 기록자가 당시에 개인적인 해석을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 했듯이 지금의 우리도 그러한 해석 작업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때문에 정 교수에게 진리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무엇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열림’, ‘역사발전’ 속에 담긴 의미가 아니던가?

그러면 축자영감은 이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계시전달의 방편으로서 성경은 초월성을 가진다. 여기서 초월은 시간을 초월한 다는 의미에서 이다. 곧 역사를 초월 한다는 것이다. 수천년 전의 이스라엘, 혹은 신약 시대의 유대인, 로마인, 이방인 에게만 유효한 계시로서 성경이 아니라 태초 이후에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분별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하기 때문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불변하심에 기초한다.), 둘째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계시의 대상인 인간의 본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불변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면, 구약시대의 소돔과 고모라 성에 만연했던 인간의 타락과 범죄성은 당시대의 인간의 부패성을 증언 할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발견 하지 않는가? 이같이 성경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인류에게 유효하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제 각론에서 접근해 보자. 정 교수에 따르면, 축자영감이 성경의 감추어진 진리를 캐내는 작업을 방해 한다는 것이다. 곧 해석작업 없이 문자적으로만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독교의 깊은 세계를 체감 할 수 없다는 전제와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슬쩍 흘린다.

사실이 그런가? 정통주의에는 성경해석이 없는가? 아마 정 교수는 해석작업을 진보주의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 보다 정 교수는 기계적 영감과 유기적(축자)영감의 차이를 알고 나 있는 것일까? 여기서 굳이 조직신학 개론서를 인용해야 하는가? 한 대목만 인용하자.

“유기적(Organic)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 자신의 내적존재의 법칙과 잘 조화시켜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벌콥, 기독교신학개론, p.42)

성경에 대한 역사해석만 해석이고, 축자영감에 근거한 성경자체에 의한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는 좁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성경으로 성경을 말하게 하라는” 축자영감의 해석론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혹시 적용과 해석을 혼동하는 것은 아닌가?

축자영감론자 들은 성경을 대할 때, 마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나 문화등은 전혀 고려 하지 않는 무지한 부류쯤으로 그것도 기계적 문자로만 바라 보는 무리쯤으로 취급하는 일방적인 시각은 옳지 못하다. 성경을 의심하는 역사비평의 입장이 성경자체를 회손 한다는 나름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정통주의 축자영감론자에게, 왜 역사비평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식이다. 이는 다른 전제를 가진 상대를 대하는 바른 입장이라 할 수 없다.

치밀하고 진지한 정 교수께서 근거없이 이런 무리한 주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정 교수의 축자영감 비평의 근거는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에 대한 정 교수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글 쓴이 본인에게)

그럼에도 주장의 두 가지 근거를 발견 할 수 있다. 우선 정 교수는 축자영감론자를 향해, 그의 글을 읽는 대중의 이해를 염두에 두고 비유로, 시를 신문처럼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 이를 지적한다. 우선 어떻게 이런 주장이 성립 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축자영감론자는 마치 시를 신문처럼 읽는 부류 라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이 신문처럼 단순한 보도가 아니라 시와 같이 의미가 내포된 시적 언어라는 말인지? 우선 이점부터 분명히 하자. 축자영감론자들은 시를 신문처럼 읽으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전제 하에 시는 시처럼, 그러고 신문은 신문처럼 읽으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 하나님은 기록자의 언어와 사고와 배경까지 사용하셨다. 여러 기록자들이 동원되서 완성된 성경이니 만큼 각 권의 고유한 특징들이 있다. 내용을 근거로 문학적으로 분류할 때 성경은 모든 부분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개중에는 시도, 묵시도, 계시도 있다. 심지어 서신형태 까지를 포함한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자 중에 아가서나 계시록을 읽으면서 이를 신문처럼 읽는 그리스도인은 이단 외에는 없다. 물론 역사서 형태로 기록되었다고 해도 이는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 차원 이상이다. 이는 과거라는 시간에 묶인 죽은 역사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서 이해하고 음미하고 적용해야 할 무한한 진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아니 진리 자체라고 보는 것이다. 곧 단순히 신문 읽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교수의 축자영감 이해는 매우 피상적이다.

다음으로, 정 교수는 축자영감이 이론적으로 정리되고 다시 강조되었던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에서는 필요하고 의미 있을지 몰라도 그 주장을 지금도 수용하는 것은 과거를 사는 덜 개화된 사람과 같다고 주장한다. 역사비평학자 다운(?) 주장이다.

그럼 16세기 종교개혁은 당시에 로마교회의 교회권력을 반대하는 과정에 나온 이론으로 지금은 무효한가? 라는 질문을 유발한다. 나는 지금 내 눈을 의심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강조하고 역사 비평을 주장하는 학자의 역사인식 이었단 말인가?

그럼 7,80년대 군부독재에 대항해서 민주주의 토양을 뿌리 내리게 한 민주화 운동은 당시에만 의미 있고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인가? 그렇다면, 20-30년전의 역사적인 상황에서만 의미있던 민주정신이 헌법조문에 수록되고 여전히 음미되고 나아가 학교에서 어린학생들에게 교육되는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다 발전되고 성숙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라는 답을 기대 해야하나? 50년전의 광복절을 지금도 매년마디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그럼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50년씩이나.

종교개혁을 통해 정리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재 음미하고 보다 풍성하게 확대하는 일은 발전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정 교수 께서는,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 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아야 하리라. 마치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 역사에 없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교회사 개론이리도 인용해야 하나?

초대교회, 교부, 중세, 종교 개혁이후에 이어지는 칼빈과 베자, 초기 영국의 청교도, 18세기 대각성 운동,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대응 그리고 20세기의 복음운동 등…. 정통주의가 16세기에 정체되 있다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결국 본질에서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정신이 일치함을 정 교수는 모르는가 보다.

혹시 종교 개혁자들이 정리한 성경관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라면, 아니다,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시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경시대에 머물러 있다. 구약을 대할 때면 어쩌면 구약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 비평가들의 능숙한 현실감각과 현란한 줄타기 그리고 그들의 고무줄 인식론이 전혀 부럽지 않다. 아니 그럴 의도도 없다.


결국 정 교수에게 성경은 그저 오래된 역사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예의상 한마디는 잊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도 하시는 그런 역사책이라고.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성경이라는 낡은 역사책 뿐 아니라, 현대의 문명으로도, 과학 철학 신학이라는 인문학을 통해서 그리고 사유와 이성을 통해서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다. 그럼 성경과 인문학이 충돌할때 과연 정교수의 선택은 무엇일까?

글의 말미에 바르트를 인용하며 언급한 대목을 보자. 정 교수는 진리의 보편성을 언급하며 현대 인문학이 그 한계를 인정한다고 진단한다. 때문에 보편적인 수단을 통해서도 계시를 규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전히 일천하지만 글쓴이 본인은 신학을 공부했고 이후에 인문학 강의를 몇편 들은 경험이 있다. 불과 기초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과학 개론 등 이었지만 이러한 인문학자들의 주제 접근방식이 지극히 반 기독교적 이며 그것도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정 교수가 언급하는 인문학은 대체 어떤 학문을 의미하는지 의아하다. 아니 이러한 개론서 정도는 이미 섭렵했을 법한 정 교수의 진단 치고는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물론 개중에는 기독교 인문학자들이 있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서 해당학문을 주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직 접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반 기독교적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나아가 이를 조장하는 현대 인문학에 애써 눈 감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아가 이를 성경해석의 도구로 활용하자는 것인가? 결국 이렇게 무리한 인문학의 강조는 역사비평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라 귀결되어야 하나?

우리는 여전히 불신과 합리라는 유혹앞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며 강조되는 이론이나 사상이 시대로 부터 외면 당했던 적은 역사 이래로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도 높이고 하나님도 높이는 절충안은 없다는 것이 정통주의의 시각에서 바라 본 역사적인 검증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수용해야 할까?
  
결국 성경을 두고 벌이는 이러한 논의의 궁극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어떻게 그리고 좀더 가깝게 규명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이 역사비평이라는 방식인가 아니면 축자영감이라는 방식인가? 우리가 적어도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제는 우리속에 함께 내주하시는 성령께 이 문제를 들고 나가 기다리며 침묵하면서 주시는 깨우심에 귀기울여 할 차례라 생각된다.  

아무래도 글이 길어 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정교수의 설교이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 보려 한다.

끝으로, 이처럼 때론 설익고 때론 무리한 주장 조차 진지하게 대응해 주시는 정 교수께 깊이 감사 드린다. 목이 곧지 않은 좋은 교수임에는 틀림없다.

주님의 성육하심에
큰 감사 드리며
그 감사와 기쁨을
모든 인류와 나누고 싶다.

주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길 염원하며,

이길용

2005.12.23 14:57:02
*.97.233.175

캐나다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분이신가요?

[레벨:1]균형

2005.12.23 15:32:47
*.199.9.206

그렇습니다. 저는 3년째 이곳에서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길용

2005.12.23 15:37:06
*.97.233.175

예, 제 지인들 몇분도 지금 캐나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피가 캐나다 것이라 여쭈어봤습니다.
동서 한분이 토론토에 있었고, 다른 지인들은 몬트리올, 뱅쿠버 등지에서 살고 있답니다~

먼 곳 이국에서 풍성한 목회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레벨:1]균형

2005.12.23 15:51:24
*.199.9.206

초면에 제가 이길용 님께 좀 무례 했었지요. 저는 토론토가 아니라 광역 토론토에 속하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진솔한 덕담에 감사 드립니다. 같은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레벨:7]우익지

2005.12.23 18:16:03
*.107.92.247

몇주전에 교회 책꽂이에서 버나드램이 지은 "성경해석학"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조금씩 읽어 갑니다. 꽤 오래된 책인 것 같군요.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럭저럭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군요. "신정통주의(Neo-orthodoxy)는 영감에 대한 모든 역사적 전통적 형태가 부정되고 있다. (축자적 영감, 사상적 영감, 완전 영감) 덧붙여 축자영감을 믿는 것은 사람의 기계적 또는 구수적 영감설을 따르는 과오를 범하고 있고, "성서숭배" (Bibliolatry)를 따르고 있다고 비난한다고 써 있네요. 제가 신학자가 아니니까 더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써 있어요.

하나님을 성경속에 가둘 수 있을까요? 저 작은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를 다 하시고 계실까요? 한성영 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온세계(공간과 시간과 그 다른차원까지도 초월한)에 가득차 계신데 어떻게 문자로 하나님을 결박할 수 있나요.

어떤 목사가 자기의 은퇴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음성을 아직 듣지 못해 결정을 유보한다는 말을 얼마전에 들었습니다. 그냥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이야기이잖아요. 글쎄 영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요? 누가 알아요? 그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자기의 생각인지. 역사가 지나야 알게 되는 것 아닌가요. 성경도 이런 과정을 지났고 역사 소게 파 묻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역사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정희

2005.12.23 23:27:56
*.120.203.176

성서안에서만 또는 특별한계시로서 주님을 발견하고 믿는 축자영감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약함을 보완하기위한 방편으로서의 전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레벨:1]정세웅

2005.12.23 23:48:29
*.154.12.147

제가 균형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텐데요... 님이 웃으시겠죠. 뭔 헛소리인가하고!
균형님의 문제제기 또한 같은 포지션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던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번역의 오류를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성경의 번역상의 다중적 의미를 결정할 때 어떤 기준을 세우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성경 원문이 가지는 다의적 의미를 그 중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혹시 우리 모두가 원어 성경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별로 논쟁이 되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당연히 가야할 길인듯 한데, 그 길이 이상하다고 하시니, 제가 정말 이상합니다.
제가 누군가로 부터 받은 KJV번역성경을 보니, 거기에 그런 도표가 있더군요.
복음적으로 번역된 성서와 비복음적에 가까운 성서라는 구분이 있더군요.
님의 글에 그냥 생각이 나네요...

성탄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레벨:1]균형

2005.12.23 23:53:15
*.199.9.206

한성영님,
이러한 님의 견해를 하나님의 편재라고 하나요?
축자영감 지지자들은 하나님의 편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지요.

그런데
축자영감을 따르면
하나님이 성경안으로 가두어 지는가요?

우익지 님,
'눈 높이 교육'이 라는 카피를 들어 보셨는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소통하는 일은 애초에 불 가능 합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소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그 큰 간극이었지요.

하나님의 해법은
자기비하 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낮추어 주신 것이지요. 소통을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대림도 같은 맥락 이겠지요.

그 이유를 다 헤아릴수 없지만
수혜자의 입장에선 신앙인인 저희는 이를 공급해 주시는 은혜이며,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에
하나님 왜 스스로 낮추셨습니까?
높은 보좌에 그냥 계시지
왜 인간의 언어를 통해 나타내 주십니까?
라고 질문 할수 있을까요?

성경이 작은 가요?
글세요...
저는 이제까지 신앙생활 중에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는 인생을 만난적이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그 깊이와 넒이를 체감하게 되더군요.

저에게 성경은 여전히
무한한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네, 성경은 결코 작자 않습니다.

성육하신 주님을 대면하는
귀한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정정희님,
의미있는 지적이군요.
감사 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2.24 00:54:53
*.249.178.15

균형 님,
저의 대답을 바라는 뜻으로 글을 올리신 건 아니죠?
그냥 저의 신학, 특히 성서관에 대한 균형 님의 생각을 진술한 거니까
특별히 내가 뭐라 반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런데 오랜만에 이렇게 진지하게 문제 제기를 하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기분이 괜찮아지네요.
내 글에 대해서 저렇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있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사실 균현 님의 지적처럼 나는 근본주의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신학, 교계에는 이런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별로 없어요.
그게 아쉽죠.
이 사이트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서로 다른 생각을 소통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죠.
균형 님의 콤멘트에 대해서 일일이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습니다.
그만큼 님의 글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겠지요.
나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구요.
그런데 글이 너무 길어서 무엇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렵군요.
내 생각에 직접 만나서 차근차근 말하다 보면 서로 통하는 게 있을 것 같네요.
글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오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진리논쟁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글이, 특히 설교비평 글이 좀 강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에요.
서로 말이 통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만 하더라도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성서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또는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균형 님은 하나님이 손가락이 있어서 성경을 썼다고 믿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입이 있어서 성서 기자들에게 소리를 불러주었다고 믿지 않으시죠?
아마 그럴 겁니다.
축자영감설이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하나요?
기계적 영감설은 무엇인가요?
어쨌든지 균형 님은 유기적 영감설 쪽이니까 하나님의 손가락과 입은 믿지 않을 겁니다.
성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겠군요.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말이죠.
어떤 존재이기에 그는 자기의 생각을 성서기자들에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존재라고 하나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나요?
왜 인간은 존재하고, 인간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나요?
말 장난처럼 들리십니까?
이건 내 전체 실존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좀더 정확하게 믿어야겠다는 나의 신앙고백에 연관된 것입니다.
균형 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비웠다거나,
낮추셨다는 말을 하셨더군요.
케노시스 신학이죠.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낮아질 수 있어요?
하나님이 절대자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낮음도 없고 높음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낮추셨다는 건
그런 방식으로 밖에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진 신학적 고백, 신학적 해석, 신학적 귀결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또 다시 관념적인 논의로 흘러갈 수 있으니까,
또는 나의 일방적인 주장이 될 수 있으니까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구체적인 말씀만 드릴께요.
위에서 정세웅 목사님이 지적한 것과도 연관되겠군요.
사도행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름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문자의 차원에서 사실로 받아들이시나요?
고대인들이 구름과 하늘을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서는 죽은 말씀이 됩니다.
독을 마셔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복음서의 구절도 그대로 받아들이시나요?
지금 내가 갑자기 고등학생 처럼 말하고 있군요.

즐거운 성탄을 맞으시기를....

[레벨:1]균형

2005.12.24 15:04:00
*.199.9.206

정 교수님,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언젠가 고국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질 때
한번 찾아 뵙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기비하에 대한 관념적인 언급을 하셨으니
이에 대한 저의의견 역시 그 관념적인 표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저는 초월과 내재간의 교류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마치 고등수학에서 여전히 사칙연산이 활용되고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초월 이시라면
그 초월속에 내재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초월과 내재의 경계를 넘나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참된 하나님의 초월을 고백하는 방편이 아닐지요?

예수님의 탄생,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은
정통주의에서 제시하는 신앙의 기준(기독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주님의 재림에 관한 주된 관심은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방식이 아닌 다시 오심에 있다고 이해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언급된 재림의 모습에 굳이 의문을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결국 해석의 문제 이겠지요.
성경을 대할 때 문자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과 동시에
의미로서 접근해야 할 부분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통주의의 시각입니다.

독을 마시면
중 환자실에 입원해야 겠지요.

성탄을 맞이하는 어느 목회자 가족이 별로 즐겁지 않다고 푸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의 경우 교회에서 치루는 성탄행사에 우선 가족들이 동원 되기 때문이지요.

온 가족에게 즐거운 성탄이 되셨으면 합니다.

[레벨:1]균형

2005.12.24 15:10:15
*.199.9.206

한상영 님,
언급한 '특별'이라는 표현은 '일반'과 구분하기 위해서 입니다.
더우기 여기서 사용되는 특별과 일반은 기독교 신앙안에서 통용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언급을 타 종교에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레벨:1]균형

2005.12.24 15:23:41
*.199.9.206

정세웅님,
우선 KJS번역에 대해 정통주의 안에 비판적인 시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곧 지나친 독단에 빠진다는 우려 이지요.

혹시 님은 성경번역의 오류를 발견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번역상의 오류가 발견 됨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 오류가 기존의 성경근간을 흔들만한 오류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칭, 시제정도의 문제가 아닌가요?

단어가 가지는 다중적 의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전문가의 몫이겠지요. 그럼에도 이일에 헌신하는 분들이 기본적인 신앙고백위에 원칙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큰 기준이 있다면, 성경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이 아닐지요?
님이 이러한 번역작업에 참여 하신다면 어떤 기준을 제시하시겠습니까?

나눌수록 확대되는 성탄의 은총이
님에게도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레벨:1]정세웅

2005.12.24 17:46:09
*.59.44.99

제가 던졌던 질문은 균형님의 답변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닌데...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성경원문에 대해 번역이 가능하다면, 그 번역이 영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요.. 문법과 합리적인 언어적 규칙, 혹은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서 이루어지겠죠.
저는 님의 입장이 가진 성경에 대한 신념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비평을 그런 신념의 장으로 끌어들여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 오버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정용섭목사님의 어느 글에서도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부정한 곳이 없는데... 난데 없이 역사비평에 대한 반론을 거기에서 찾으시니....
역사비평이란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갖는 번역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문법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듯이, 역사비평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새롭게 인식하고 발견한 '유용한 도구틀'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그저 파란색이라고만 보아왔던 것이, 하늘색, 푸른색으로도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파란색에 대한 모독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파란색이라는 것에 대해 더 깊은 다양한 인식을 열어주는 것은 아닌지요.

정정희

2005.12.24 17:49:55
*.120.203.176

목사님도 성탄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레벨:7]우익지

2005.12.28 06:26:35
*.94.149.1

균형님

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 말씀은 너무나 깊고 높고 넓습니다. 우리에게는 거의 무한대의 진리입니다만 하나님에게는 그것마져도 유한이라는 생각됩니다. 평신도인 저에게는 그야말로 한 없이 넓음입니다.

요즘 연말교회 소그룹발표를 위해 성서의 내용을 촌극으로 만들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노아 이야기이죠. 자료를 찾으려고 하니까 많은 자료가 "노아 사건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였습니다. 뭐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수천년 전의 사건을 과학이라는 정확한 자로 잰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증명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축자영감을 믿는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죠.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마이크로메터로 콩의 크기를 정확하게 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10미터쯤 떨어져 있던 사람이 그 콩의 크기가 0.753 센티미터라고 했다고 해서 한 20미터쯤 있는 사람이 재어보고 한 0.8센티미터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약 50미터에 있는 사람까지 와서 1센티미터라고 적었다고 합시다. 이렇게 적은 것이 100미터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아 나한테 정확한 측정기구가 있으니 재어 봐야겠다. 잘 잴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100미터 있는 사람이 그럽니다. 야 맞아 1 센티미터가 정확해. 그러니까 50미터에서 적은 것은 다 맞아. 너무 우화인가요?

균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축자영감설은 이것은 분명 아니죠? 그런데 저같은 평신도는 축자영감설이라고 하면 바로 이런 이해를 말합니다. 아마 기계적 영감설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니 제가 축자영감설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 출설하는 교회는 성경의 무오함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배우는 것으로 그것이 축자영감설(성경의 무오함)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무오함을 말한다고 배웠거든요. 언제 한번 이 부분에 대해 잘 정리해서 올려 주세요. 그래야 배우죠. 그럼 감사.

좋은 새해 맞으시고요.

[레벨:0]無名齋

2007.02.28 19:38:37
*.6.213.211

논리가 너무 허술하고 비약이 심해서 중간까지 읽다가 이후는 대충 눈으로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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