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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 이해하기

조회 수 2359 추천 수 29 2005.11.18 16: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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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 이해하기

최근에 올려진 정용섭 교수의 “당신 설교는 어떤데?” 라는 장문의 글과 그 외 몇 편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첫번째 글은 얼마 전에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고’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 대한 정교수의 의견이라 보여진다. 무 명인에 불과한 본인의 의견에 자세히 답글을 주신 정 교수께 감사한다. 이 후에 지속될지 모르는 정 교수와의 보다 심층적인 대화를 위해 우선 정 교수의 입장을 이해하자는 나름의 시도가 이 글의 동기이다. 따라서 질문과 때론 주관적인 비평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일시적인 빈정거림이 아닌 나름의 진지한 질문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인간과 생명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제기하는 정교수의 입장이 매우 진지하다. 이 문제를 푸는 두 가지 방식을 추론해 볼수 있다. 첫째는, 문제를 이해하고 문제를 진지하게 풀어나가 답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를 푸는 주체는 당사자이다. 정 교수가 지지하는 이 방식에서 문제를 푸는데 필연적인 도구는 무엇일까? 크게는 인문학이며 좁혀 말하면 인식론이라 이해된다. 물론 정교수는 여기에 조직신학을 더 하지만 그가 언급하는 조직신학이란 인문학의 범주 안에서 정리된 종교에 대한 인식론의 결과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자로 보인다. 어쩌면 인문학자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혼란이 생긴다. 구도자적 자세로 인식론을 주된 도구로서 활용하는 정 교수가 초월하는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고 역사와 생명을 지배하는 하나님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글 말미에 언급한 것 처럼 인식의 한계를 인정한 다는 뜻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정 교수가 제시한 문제의 답은 생명에 대한 신비함이며 막막함이다. 그 큰 주제를 인식의 한계에서 모두 다루기는 역 부족이라는 솔직한 고백이다. 여기서 정교수가 신비함과 막막함을 역설하는 이유는 그가 규정하는 답에 대한 성격 때문이다. 곧 체감된 답(구도의 과정을 통해 체득된 답)이라야 참된 답이라는 나름의 시각을 견지한 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식견을 가진 내가 보더라도 이는 과도한 욕심이다. 아니 모순이다.

1) 우선 이 질문이 떠 오른다. 정 교수는 과연 스스로의 인식의 지평안에 그 방대한 주제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체감 할수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 인식의 틀을 가지고 기독교와 성경 역사의 현장이라는 어두운 동글(역사비평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 가라는 말인지? 초월을 인정한 다는 표면적인 고백에 비해 그 초월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인식론이라는 도구를 여전히 고집하는 정 교수의 태도를 나름대로 감지하면서 제기하는 의문이다.

정 교수의 글을 대할 때 나는 한 수행자를 만난 기분이 든다. 진리를 대하는 진지함이 물신 묻어 나기 때문이다. 본 받을 많한 좋은 자세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정교수의 진리에 대한 진지함의 내용을 볼 때 마치 도를 터득하기 위해 몸 부림 치는 한 수행종교인의 그것과 유사한 행태를 보는 듯하다. 내면(혹은 초월)의 세계를 수행을 통해 다스리고 지배함으로 결국 도(진리)에 이른다는 그러한 수행종교 말이다. 그가 표방하는 기독교는 단지 하나의 다른 종교의 이름이며 그 종교의 교주나 대상 역시 타 종교와 비교해서 이름만 다른 그런 종교… 초월을 접근하는 방식이나 지침만 다를 뿐이지 그 결과는 동일 하다는 그런 종교가 연상된다. 이러한 관념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하던가? 나는 불교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어느 고승이 임종을 앞두고 삶의 의미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건 나도 몰라’ ‘인생은 결국 허무이니라’. 왠지 정교수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 고승이 떠오른다. 답을 구하는 군중에게 답은 없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 알아서 찾으라는 뜻인가?

성경을 향해 역사비평이라는 인식의 칼을 주저 없이 휘두르면서 그 성경의 내용이 지칭하는 하나님과 성령의 초월이 인식된다는 사실이 아니 막연히 감지 된다는 사실이 기이하다. 스행을 통한 인식의 결과인가 아니면 직관 인가? 초월을 담을 수 있는 인식이라면 그 인식론 자체가 또 하나의 종교이리라. 인간의 해석된 언어라는 곧 인간의 말이라는 성경, 진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하다는 그 성경을 왜 아직 붙들고 있는지 의아하다. 세상에는 진리를 담은 책이라 지칭되는 여러 책들도 많던데 왜 하필 성경일까? 금강경도 있고, 사서삼경도 있지 않은가?

2) 다음으로 정 교수의 입장을 듣고 싶은 대목이다. 그는 인식과 초월의 경계는 어디로 규정 하는지 이다. 어디까지가 인식이고 어디까지가 초월이라는 말인가? 혹은 인식과 초월이 충돌 할 때 정 교수가 제시 할 해법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초월과 인식이라는 (대립의 의미에서) 두 개념사이를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신비를 추구하는 막연한 방황이라는 예기인지 아니면 열심히 인식이라는 도구를 통해 수행하다가 초월을 만나면 그 인식의 틀마저 주저없이 내려 놓자는 뜻인지 혼란하다.  나중에 내려 놓을 그럴 인식이라면 무엇 때문에 붙잡으라고 강조하는가? 혹시 인식을 기반한 수행 없이는 초월의 예고편 마저 감지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뜻인가? 나는 이점에서 정 교수가 체감하고자 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인간적인 기독교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약자와 소외자에게 관심을 집중한 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를 접근하는 도구로서의 인간적인 인식론을 지칭한다.


이제 인간과 생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두 번째 해법은 무엇인가?

우선 전제 할 것은 이 방식은 인식의 한계를 초월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을 인생과 생명이라는 신비를 아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여기서 앎이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초월로서의 계시를 통해서 이다. 곧 성경을 통한 인식이다. 이점에서 정통주의 기독교는 진리의 실현을 위해 인식 혹은 이성이라는 도구를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그 인식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 할 뿐이다. 곧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정직히 고백하는 것이 그 출발이다. 이 과정역시 긴 수행을 통해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선언하는 최후의 독백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초월적인 임재를 통해 터득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위에서 언급한 수행종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럼 이제 답을 얻었는데 무엇하러 종교활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이미 구원을 얻었는데 구태여 종교행위가 필요한가라는 의문 말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이미 얻은 답을 가지고 그 과정을 체감해 가는 삶이라고 이해한다. 이점에서 혹자는 역설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이다. 이는 이성과 인식의 차원으로만은 이해될 수 없는 구도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독인들의 태도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며 체감하려는 사람들의 진지한 자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이점이 정 교수의 지적이다. 나아가 정 교수는 그 이유를 분석하면서 원인을 설교라는 진리 전달의 현실적인 한 방편이라고 본 것이다. 곧 기존의 설교 내용이 진리를 체감함으로 보다 성숙하고 진지해 져야 할 신앙인의 모습을 촉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보다는 눈 앞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기존의 설교가 이를 부추기는 도구로서 활용된다는 지적인 것이다.

무척 아픈 지적이다. 무어라 변명할 여지도 없을 많큼 정당한 지적이다. 나아가 한편으론 정 교수께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정통주의라는 같은 신앙 노선을 걸어가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내부의 문제가 우선 내부로부터 제기되고 충분히 자정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며 혹은 체감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 신앙을 추구한 다는 의미에서 정 교수와 정통주의의 가르침은 일치한다. 이를 촉구하는 주장의 과정에 도입된 그의 선입관과 그에 따른 경솔함(?)이 아쉽지만 이를 떠나 한국교회가 좀더 진지해 지고 성숙해 지는 계기로 삼을 것을 바란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마디는 덧 붙이고 싶다.
진리를 가리키는 뒤 틀린 손 가락을 지적 하는 정 교수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뒤 틀린 손가락을 지적한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달 자체마저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무엇보다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언급한 신앙의 도구로서의 인식론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수행에 집착하면서도 초월을 인정한다는 그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솔직한 인정이 외형적 고백으로서 머무를지 아니면 내면으로 스며들어 그의 방법론 까지 주도 할지는 좀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미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는 성경의 그 수많은 증언들에 대한 정 교수의 인신론적 반응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그의 역사 비평적인 해석은 무엇일까?  


“진리( the truth)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 3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레벨:1]균형

2005.11.18 17:23:31
*.199.9.206

한 가지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밑에 "이미정씨 처리유감-관리자님"이라는 글을 자진 삭제 했습니다. 저의 의견이 이곳의 회원님께 부담스럽게 읽혀 질수 있음을 제가 미처 숙고하지 못했습니다. 호칭문제로 시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저의 의견이 관리자께 전달된 이상 진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얻는 글이 될수 있다는 판단에서 입니다. 본의 아니게 잠시 본질에서 어긋난 문제로 소란을 일으겼다는 점에서 사과 드립니다. 관리자 님과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1.18 23:41:30
*.249.178.23

균형 씨,
필명이군요.
본명인가요?
내가 어느 정도로 대글을 달아야 할까, 조금 망설여집니다.
그냥 고맙다는 인사만으로 충분할 것 같기도 하고,
매우 진지하게 나오셨으니까 나도 그래야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글이 질문인지, 아니면 단지 본인의 콤멘트인지 내가 잘 모르겠군요.
아마 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는 거죠.
혹시 질문, 또는 신학적 담론을 위해서 그렇게 글을 쓰셨나요?
재미 있으라고 한 마디 한다면,
내가 여기서 힘들여 글을 썼다가
위에서 "이미정 씨 처리 유감"을 삭제한 것처럼
또 삭제해 버리면 헛수고가 될 것 같기도 하네요.
어쩌지요?
그래도 한 마디는 최소한 대답 비슷한 걸 해야겠군요.
그런데 사실 균형 씨가 정확하게 무엇을 문제 삼는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위의 글에서 자주 언급된 게 아마 '인식'과 '초월'인 것 같네요.
맞나요?
기독교 신앙을 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어떻게 초월을 말할 수 있나, 하는 거죠?
글쎄요.
내 글의 어느 구석에 그런 표현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인식과 초월은 별로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개념입니다.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말이죠.
인식은 존재와 대립개념이고,
초월은 내재와 대립개념입니다.
나는 한 번도 인식을 통해서 초월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표현이 그런 방식으로 된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문맥적으로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내가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존재가 우리에게 소통되는 계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지
인식으로 존재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요?
무얼 우리는 존재라고 하나요?
그 존재의 신비 깊이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인식론이 작동해야 합니다.
초월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초월해 계시나요?
맞지요.
그러나 초월로서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건 유대교의 하나님이죠.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의 하나님이에요.
아들로서의 하나님이죠.
역사에 의존적이었던 예수가 곧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게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게 곧 기독교가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은 하나님을 단지 그렇게 인식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신비하게 존재하는 하나님,
그렇게 계시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구도의 결정이 곧 삼위일체입니다.
초기 교부들이 어떻게 삼위일체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플라톤에게 영향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플라토니즘에 삼위일체론이 있었다고 말하고,
다만 성육신을 몰랐을 뿐이라고 했어요.
다행스럽게도 기독교는 교부 때부터 고집불통이 아니었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폐쇄된 게 아니라 종말을 향해 열려진 거에요.
내가 공연히 말이 많았군요.
인식과 초월을 직결시켜서 내 주장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예 첫 단추가 잘못 끼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도 넓게 봐서 균형 씨가 무얼 말하려는지 알겠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초월적인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죠.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게 아닐까요?
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계시가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마저 생각하지(인식하지) 말아야 하나요?
기독교 교리는 모두 이런 인식론을 통해서 형성되었는데,
지금 와서 그런 걸 완전히 버리라는 건가요?

앞으로 좀 더 진지한 대화를 원하시면
본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거기에 맞게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균형 씨가 신대원 학생이라고 한다면
내가 신학 개론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좀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위 글에서 인문학, 조직신학 운운하면서
"그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자로 보인다. 어쩌면 인문학자 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쓰셨네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진보주의자라!
인간적이라는 말인지,
헤겔의 역사진보사관에 떨어진 사람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유주의자라는 뜻인지 분간할 수 없네요.
그런데 균형 씨,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진보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이 세계와 역사가
고정된 게 아니라 종말을 향해서 움직이고 열린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입니다.
다만 기계적인 진보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진보에요.

이 사이트를 방문한 귀한 손님인데,
혹시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하세요.
그리고 "당신 설교는 어떤데?"는 균형 씨의 언급 때문이 아니라
목원대학교를 은퇴하신 송기득 선생님이
아예 주제까지 선정해서 피할 수 없게 밀고 들어오셔서
쓰게 된 것입니다.
그 글 앞과 끝에 이미 다 밝혔는데요.
이제 대림절이 옵니다.
내일이라도 이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걸 나는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현재 우리 삶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시작된 그런 종말의 생명 사건을
이해하고, 그것과 일치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균형

2005.11.19 14:27:18
*.199.9.206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시한 몇 가지 의문을 통해 더 큰 의문을 가지게 되는군요.
이것이 정 교수께서 언급하신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의 차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좀 생뚱 맞게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주장에 충실한다는 일이 쉽지않다는 생각입니다.
이성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려는 한계이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동등하게 양립 될 수 없는 인식과 초월이라는 개념이 한 구도자의 내면에서 만나고 때론 충돌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 한계마저 인식을 통해 체감하려는 시도가 좀 아쉬운 것이지요.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인식’ 이라는 압축된 한 마디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무수한 의문을 어찌해야 할 지요. 이와 함께 ‘인식을 통해 초월을 포착 할 수 없다는’ 언급은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가요. 그렇게 되면 ‘인식(생각)’ 안에 담기지 않은 신비는 신비가 아닌 무속이 되는지요. 이러한 전제를 통해 언급하신 결론이 ‘초월로서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선언이셨던 가요. 그러시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신비’의 크심을 언급하시니 제가 고민에 빠질 수 밖에요. 인간의 그것도 제한된 인식 안에 감금 당하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의견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 실지요.

초월 이시면서 자기비하 하심으로 내재하신 그리스도 안에 진리의 열쇠가 있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연장선상에서 언급하신 ‘삼위일체’이지만 한 마디 의견 드리면, 이러한 견해를 정통주의에서는 ‘일신론’ 혹은 ‘양태론’이라고 하더군요. (헤겔, 술라이어 막허 심지어 여호와 증인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혹시 제가 정 교수를 향해 진보주의라고 언급한 부분이 불쾌 하셨는지요? 어느 글에서 ‘법증법적 역사발전으로서의 열림(내재?)’ 이라 표현 하셨나요. 그렇군요. 진보주의 안에도 다양한 시각이 있군요.

송기득 선생님을 향해 기록하신 글을 제가 가로챈 격이 되었군요. 제가 기록한 처음 글에 설교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질문 했답니다. 송 선생님을 향한 글에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잠시 제가 즐거운 상상에 빠졌었군요. 송 선생님을 언급하신 부분을 읽었으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결례에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제 실명도 밝혔고, 주장의 일관성을 위해 필명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가입할 당시에 언급했답니다. 그리고 정통주의 신앙노선에 서 있음도 언급했구요..

주장의 옳고 그름 혹은 합리와 비 합리를 떠나
정 교수께서 빌어주시는 은총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흐믓하답니다.

주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염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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