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J 목사님에게!

조회 수 1760 추천 수 18 2005.11.20 00: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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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목사님에게.
일전에 이메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주셨습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이름은 숨기고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공개하도록 허락해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
정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목사님보다 조금 아래 연배의 ‘아무개’ 목사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신앙적 안목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많은 고민을 끌어안고 씨름하는 소위 생각이 복잡한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요,
진리에 대한 이해의 눈이 열리는 체험을 통해
큰 확신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복음의 현실을 알아가면서
자꾸만 복음과는 멀어져만 가는 현실교회와 목사들을 보면서
점차 깊은 의문에 싸이게 되어졌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최근에 보내주신 법과 자유를 읽고
(8장까지는 깊이 읽고 그 뒤는 대충 훑어보았음)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의 보편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이 참 좋았습니다.
저 또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은 계시하시고 임재하시고 섭리의 손길을 펴고
계심을 의심치 않습니다.
목사님은 계시의 보편성은 인정하시면서도
구원의 보편성 - 목사님은 모든 민족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차원에서
구원의 보편성을 말씀하고 계시긴 합니다 - 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문을 닫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서만
율법적 차원의 죄성을 극복하는 참 생명을 살 수 있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일관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가
예수의 중보자 되심에 대한 절대적 주장입니다.
진실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고 믿는 것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계시의 보편성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나 효능이 없는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하고
인간의 이성이 죄로 어두워짐으로 말미암아
자연계시는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고
그동안의 신학은 손쉬운 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 인디언들의 삶, 간디를 읽으면서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어느 기독교 목사의 인식보다 정확하고
훨씬 깊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도나 하늘, 진리가
나에게 다가온 하나님,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오히려 대부분의 기독교의 신 인식이야말로
천박함의 극치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는
적어도 인디언들이 자연을 대하는 정도의 눈은 떠야 한다고 보는데
입으로만 창조주를 말하지 실제로는 창조의 현실 속에서
창조주의 손길과 음성을 듣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구원이 계시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계시의 보편성은 구원의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묻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구원의 중보자로가 아니라
구원의 앞선 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이 어떤 건지를 앞서 감으로 보여주셨다는,  
역사상 누구도 그처럼 온전하게 구원의 삶을 걸어가지 못했다는
면에서 예수의 차별성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꼭 중보자여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드립니다.
믿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는 것은
그만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간 삶과 죽음 -
목사님이 잘 지적하신대로 율법적인 자기 업적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누리는 생명의 나라 -
의 길을 통해서만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면 안 될는지요??
참 믿음은 참여라고 할 때 단지 객관적 정보로서의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에 참여하는 믿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에 대해서 아직 확신이 부족합니다.
성경적 타당성을 끌어오지 못한 채로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지요.

둘째로, 부활의 실체에 대한 의문과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증거는 하나같이 예수의 부활에 집중되어 있는데
솔직히 부활에 대해서는 정말 오리무중입니다.
자세한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지 하나만 여쭙는다면
부활의 실체에 대해서인데요,
꼭 개개인의 부활이어야 하는 건가 하는 겁니다.
꼭 나 ‘아무개’라는 개인이 부활의 몸을 입어야만 하는 건가 하는 의문입니다.
몸이 없는 부활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로 볼 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요,
개개인이 부활한다고 하는 주장이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라는 이기적인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종교적 미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교가 발붙일 수 없을 테니까요.
혹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하셨다고 믿는다면
앞으로의 역사도 섭리하시는 가운데
섭리의 최종 방향이 하나님나라가 아닐까
그래서 꼭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게 될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물론 그때 나는 없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죽음으로 내 존재가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듯 나라는 존재가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극복해야 할 문제 아니냐 하는 고민입니다.
처음 보따리를 풀면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목사님의 글은 참 함축적이라서 생각하며 읽기가 좋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소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
목사님의 설교와 글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말과 글의 겸손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목사님, 매우 바쁘신 것 같은데
여러 사람에게 답변한 것을 되풀이하게 한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혹여라도 그러시다면
이미 대답하신 것을 대신 읽으라고  
안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J 목사님,
마음을 담은 글을 주셨네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신학이나 철학 모두 질문이 중요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서와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질문하는 걸 불신앙처럼 생각한다는 것이겠지요.
내 생각에 신앙은 근본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진리론적 태도입니다.
진리를 독점하는 게 아니라 그쪽을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내 생각은 목사님보다 별로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아마 제가 신학을 조금 더 시간을 내서 공부했으니까
그것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많이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신학이 어디 정보든가요?
특히 신앙적 삶이라는 게 어디 소유의 대상이든가요?
누구든지 그것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있으면
신학의 대가이든지 평신도이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성령론적인 차원으로 좁혀 대답한다면
진리의 영인 성령이 그 어떤 인식론적 한계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상학을 전공해야만 바람을 잘 아는 게 아니라
산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을 경험한 사람도 역시 바람을 아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내가 보기에 목사님은 지금 기독교의 도그마,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도그마가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그건 지난 2천년 동안 자신들이 담아낼 수 없는 성령의 활동을
그들 나름의 해석학적 구도에서 해명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도그마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단 우리로서는 최선입니다.
아무리 최선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건 인간의 인식론에 불과하지요.
인간의 인식론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론이 상위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어떤 글에서도 썼지만
우리는 지금 서양창법을 통해서 독일의 리트도 부르고,
이탈리아의 아리아도 부르고 있습니다.
리트와 아리아를 잘 부르려면 그런 방식으로 발성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판소리처럼 발성했다가는 죽도 밥도 아니지요.
그러나 리트와 아리아도 소리의 존재 자체는 아니겠지요.
소리는 파도 소리도 있고, 개구리 소리도 있습니다.
신생아의 숨소리는 또 어떻구요.
우리는 리트나 아리아를 통해서 존재론적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도그마는 발성법이 아닐까요?
이미 목사님도 그런 소리가 말을 걸어오는 걸 느끼신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특별히 어떤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길을 자기가 가는 것뿐이지요.
그 길을 잘 가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겁니다.
이런 점에서 내가 목사님에게 특별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그마로부터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 길목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걸 약간이라도 눈치 채는 분들을 위해서 그 질문에 대답해볼까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기대는 마세요.

1. 계시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 문제
<법과 자유>에서 계시의 보편성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 같은데
구원의 보편성은 매우 제약적인 것 같다고 쓰셨지요?
그렇게 표현되었다면 내 글쓰기의 한계입니다.
보편과 특수, 전체와 부분의 문제는 칼로 무를 베듯이 구별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분의 정의로우심에 근거한다면 당연히 보편적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그것은 특수 계시의 성격도 지닙니다.
만약에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에게서 어떻게 구원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보편 계시와 특수 계시의 미묘한, 혹은 신비한 상관관계를 설명해줍니다.
목사님이 읽으셨다고 하는 장자와 노자의 작품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자연관에는
분명히 놀라운 세계 이해가 들어있습니다.
그 세계는 곧 하나님의 창조라는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계시와 연결됩니다.
그런 비슷한 생각들이 구약성서에도 많이 들어있을 겁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그런 생각에 머물지 않고 인격적인 어떤 대상을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곧 야훼 하나님이시겠지요.
그런 생각은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전승되면서
점점 변증법적으로 새로운 이해 안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요?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인식과 해석 사이에 벌어지는 신비로운 작용을
실증적으로 말하기는 힘듭니다.
굳이 말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겠군요.
목사님은 계시의 보편성 보다는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서 더 중요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보편적 구원이 맞는지, 선택적 구원이 맞는지, 말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우선 ‘구원’ 자체에 대해서 정리해야 할 겁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내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만 두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물건이나 그림처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어쩌며 이 문제는 목사님이 두 번째로 질문한 부활과 연결되는군요.

2. 부활의 실체에 대해서
목사님은 특히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해서 질문하셨네요.
부활이라는 사건이 개인들의 정체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사건이냐, 하는 거죠.
부활이 무엇일까요?
아직 이 세상에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회적으로 부활한 예수도 지금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는 하늘로 가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합니다.
이런 묵시록적 표상들은 그것자체로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 표상들의 의미를 아는 게 중요하겠지요.
부활, 하늘, 하나님 우편은 모두 생명의 세계와 연관됩니다.
그 생명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혹은 숨어 있기 때문에 현실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묵시록적 언어를 사용하는 거죠.
결국 부활은 종말론적 지평에서만 우리에게 알려지는 궁극적인 생명인 셈입니다.
단지 다시 살아나는 게 부활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생물학적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건 무의미합니다.
무한한 생명의 반복, 영원회귀는 결코 기독교적인 생명이해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영원히 젊고, 영원히 건강하고, 영원히 배부르게 산다면,
그게 하나님 나라일까요?
지금의 생명형식에만 갇혀 있다면, 그런 꿈을 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부활은 그런 상대적인 생명과는 전혀 다른,
오직 하나님에게 은폐되어 있는 생명입니다.
그런 부활의 세계에 우리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참여하는지
우리는 지금 전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그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될 거니까 말입니다.
저도 개인의 정체성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나의 ‘정체성’인가, 하는 질문이 또 다시 우리 앞을 막고 있습니다.
뭐가 나인가요?
목사라는 직책인가요?
남자, 남편, 아버지가 나의 참된 아이덴티티인가요?
아니면 한국사람, 황인종이?
또는 호모 에렉투스 이후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온 그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인가요?
나는 육체인가요, 영인가요?
우리는 육체와 영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요.
뭐가 나의 정체성일까요?
내가 영원하게 지속되기를 원하는 ‘나’는 무엇인가요?
이런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부활과 정체성의 관계도 그렇게 명확한 건 없지요.
내가 궁극적인 세계를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신앙이 허무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질문할 게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답은 알지만 그 답에 이르기까지의 질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답은 곧 예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그에 의해서 인류와 세계전체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 순간에 내가 너무 설교조로 말하는 것 같군요.)
이 답이 왜 진리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 질문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질문이 곧 신학이며, 그 방법론이 곧 인문학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신앙이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정통주의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나는 기독교의 정통을 말하는 중인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들리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부활과 개인의 정체성 문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이건 완전한 대답이 아니라 나의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방식으로 부활에 참여하도록 길을 내셨다.”
끝으로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말을 좀 설명해야겠네요.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막연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모릅니다.
그게 곧 그분의 자유입니다.
그분의 자유 앞에서 우리는 늘 앎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히 신앙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물리의 세계에 까지 적용되는 말입니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숨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기기묘묘하고,
존재는 아득하고
구원은 신비롭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내일 교회력 마지막 주일을 은혜롭게 보내십시오.

[레벨:0]먼지

2005.11.20 11:48:24
*.255.47.110

멋진 질문에 멋진 대답입니다.(무슨 내용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튼이 말년에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광활한 진리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한 알 두 알 줍고 있는 소년에 불과하다"

두 분의 대담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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