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다시 여쭙니다

조회 수 1782 추천 수 11 2005.11.20 21: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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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귀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주일은 잘 보내셨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질문하는 존재로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이란 끊임없이 피조물로서 삶을 주신 창조자에게 참된 질문을 묻고
창조자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질문을 억누르거나
질문하지 않는 단순함의 노예로 만들려는 어떤 의도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악한 인간 죽이기이며 참된 신앙의 세계를 닫는
적그리스도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음흉한 인간 지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자행되는 질문 틀어막기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성의 틀 안에서 파악하겠다고 나서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도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오만이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느 한쪽에
휩쓸리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씀(‘법과 자유’에서)은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우리에겐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기에 충분하기는 하나 부분적일 뿐이고,  
그분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알아듣기 역시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한 충분한 대답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목사님께서 확정적인 대답을 애둘러 피하시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의 내용이나 부활의 실체에 대한 의문들은
인간의 경험과 인식론적 한계를 뛰어넘는, 문자적 설명을 뛰어넘는 것들이기에
예수님마저도 비유를 통해 말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한계에 대해선 노자가 선구자지요.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그 도는 항상 있는 본래의 도가 아니라는
노자 첫 장의 선언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와 언어의 한계를
전제하고 도를 말한다는 노자의 정직한 선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추구했던 프란시스 쉐퍼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자세 - 마지막 종말의 때까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
에 대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동시에 목사님의 열린 대답에 대하여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기도 합니다.
결코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시려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구원과 예수의 중보성과의 관련에 대한 문제였거든요.
그런데 제 의문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주는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인문학적 기독교읽기> 팔복에 대한 말씀에서입니다.
“우리가 팔복에서 배우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종교적 조건이 아니라
어떤 삶의 방향성과 연관되어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가 복을 선포한 이들은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어쨌든 예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나 자세와는
전혀 달리 가난하고 울고 슬퍼하고,
또한 의와 평화를 갈구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셨다.” (60쪽)

여기서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이 말은 ‘중보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과 상관없이’
라는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물론 이 말은 목사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고
판넨베르크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목사님도 어느 정도 공감하시기에 인용하신 것 아닙니까?

또 하나님나라와 관련해서도 옳은 말씀을 하셨더군요.
하나님나라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어떤 체제나 질서가 아니라 변화와 운동의 성격이다.
하나님나라의 속성은 한결같이 어떤 힘이나 변화나 새로움,
열린 마음 같은 것들이지 어떤 조건이나 지위나 안정감,
보수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방향성 같은 것들이다.(55-57쪽)

제가 보기에 이런 이해는 기존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매우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라고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진리에 합당한 이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나라를 어떤 소유나 상태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부활의 자기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만일 목사님이 이해하시는 대로 하나님나라를 삶의 방향성,
내 존재와 삶의 뿌리를 하나님에게로까지 연장해서 바라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리스도의 중보성이나 부활의 자기 정체성에 매이지 않는
열린 진리 추구가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목사님의 오해를 풀고 넘어가지요.
제가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은 무조건 누구나 다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지향성을 갖지 않는 삶이 어떻게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말이 안되겠지요.
제가 말하는 구원의 보편성은 예수의 중보성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걸어가신 길만이 참된 구원의 삶인데
(다른 누구도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구원의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그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앞선자로서
구원의 길을 증언하고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를 몰라도
예수를 신앙의 주로 고백하지 않아도
예수가 가신 그 길을 불완전하지만 그 방향성을 갖고 살았다면
(간디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나라에 참여한 사람이고,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는 하나님의 의겠지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할 길이 없어지지요.
그래서 고민하는 겁니다.

기대하기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좀 더 적극적인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설명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말이지요.
이게 욕심이 지나친 걸까요?
호기심이 지나친 걸까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지나치게 합리적인 틀 안으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어떤 틀, 공식 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싫어하는 것은 없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목사님의 적극적인 대답을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조현아

2005.11.20 22:48:30
*.117.161.32

지나가다가... 저 혼자만의 독백조로...^^;;
저의 글은 무시하시고 pass하시길 바랍니다.

그 영안에, 빛 비추임을 받았다면...
예수가 누구신지... 그를 만져보았다면..
아니 그가 내게 찾아왔다면...
그가 내 안에 계심을 보았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까?
나는 간혹 오만한 질문을 던져본다.

누구의 표현대로... 건널 수 없는 절벽이 있어
내 인식의 밧줄로 평생을 던져도 다을 수 없는 건너편 절벽앞에서
인식론의 절벽앞에서..... 지성도 이성도 인식도 아닌 영안으로
건너편에서 내게로 던져진 밧줄을 보았다면.. 그것을 만졌다면
많은 세월을 그토록 허무한 지식의 건초더미속을
헤아리지 않으련만..........
단지...사람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는 듯하다....
때로 미지는 미지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
미지를 나의 인식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이성으로 활발히 작동시킬지는 모르지만 그 영을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알려지지 않는 부분을 알려고 무수한 밧줄로 허공을 가늠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분앞에서 보여주시라고 무릎꿇음이 낫지 않을까....

내 영에 주어진 빛을 내 이성이 해석해 내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찐대... 내 이성이 영을 해석할 수 있을까?
사변의 건초더미에서 양식을 찾을 수 있을까?
주리고 목마른 상태, 더구나 손에 잡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많은 사람이 지혜를 발견하기도 전에 지식으로 기운다.
영을 알기도 전에 이성으로 기울어 버린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알기도 전에 나사렛의 예수만 천착한다.
그리하여 드러남과 피상에 천착하고 만족한다.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욕구보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더 커서 일지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욕구보다
자기에 대한 욕구가 더 커서 일지 모르겠다.
진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앞에서는 숨으시고
무지한? 어린 아이같은자 에게는 나타난다.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의도 앞에서는
철저히 닫혀져 가는 진리... 숨어버리는 빛..
더욱 짙어져만 가는 안개...그 이유가 궁금하다.
"알면 다치기" 라도 하는 걸까?

내 속에 빛이 어둡지 않은지.. ?
더 밝은 빛 가운데로.. 진행하고 싶다.
그러나 행여 ..
분명한 곳에서 시작해서 점점 안개속으로 들어갈까 두렵다.

정정희

2005.11.21 16:32:29
*.120.203.176

그래서 결국 "종교는 체험이다 "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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