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한성영 씨에게!

조회 수 3935 추천 수 88 2005.09.25 23:43:23
관련링크 :  
한성영 씨,
이 사이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건 좋아보이지만,
아래와 같은 '안티 기독교'의 글을 퍼 나르는 건 좋아보이지 않는군요.
이 사이트가 기본적으로 '안티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한성영 씨가 퍼다 나른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글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었는데,
만약 한성영 씨가 날라온 이런 글들이 주를 이룬다면
그 사이트는 거의 무의미합니다.
단지 감정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이지
그 안에는 신학도 없고, 논리도 없습니다.
그 글에 실려 있는 내용은 거의 맞습니다.
물론 과장된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런 건 글을 쓰다보면 있게 마련이니까
그렇다 하구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신학계에서는 모두 검토가 끝난 문제들을 무슨 큰 발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소봉대한다는 건 전혀 학문적이지 않은 행동이며,
상식적이지도 않는 행동입니다.
지금 내가 한성영 씨를 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안티 기독교라는 사이트에서 가져온 그 글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상식적이지 않느냐구요?
신학적인 문제는 신학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언급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저 남의 스켄들을 터뜨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또한 그 글이 학문적이지 않다는 말은
기독교가 왜 다른 문명의 설화를 차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명을
충분하게 검토하지 않고,
단지 그 사실만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가 바벨론 홍수 설화와 유사하다는 건 신학의 초보입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서로 다른 생각이 가능합니다.
신학논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글은 아무런 담론이 없이
그저 한건 터뜨린다는 생각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기독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안티 기독교 사이트를 운영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는 비기독교인이 그런 사이트를 운영한다면
그는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런 안티 기독교 사이트는
지금은 발행되는지 모르지만
황색 잡지인 '선데이 서울'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한성영 씨,
이런 정도의 글은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 소화될 줄 알고 올렸다고 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군요.
오해는 마세요.
기독교에 대한 비판 자체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도 늘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판의 방식이 '안티 기독교' 사이트와는 격이 좀 달라야 합니다.
일부러 헐뜯으려는 비판이 있고,
살려내려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면,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글은 전자에 속합니다.
반복되는 말 같지만,
설령 헐뜯으려는 속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이 최소한 학문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다면
나도 거기에 참여해서 논쟁을 벌일 의도가 있지만,
그게 아니군요.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노아홍수와 바벨론의 홍수설화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홍수 이야기가 바벨론 설화에서 왔으니까
성서는 모두 허구다, 모순이다, 거짓말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극우 보수적인 사람들의 막힌 태도도 문제이긴 하지만
기독교를 일부러 흠집 내려는 이런 '안티기독교' 사이트도 문제는 많군요.
내용은 둘째차고,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한성영 씨,
가능하면 아래의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따온 글은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제정구 씨의 글은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도 위치가 <사랑채가> 메뉴가 아니라 <베낀글> 메뉴인 것 같군요.
경찰과 검찰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호소문도 안따까운 심정으로 읽긴 했는데,
대구성서 아카데미에 어울리는 글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여기는 비교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맨날 해석만 할꺼냐, 하고 염려하겠지만
그런 해석만도 사실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행동은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치열하게 펼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만.
주의 은총이.





[레벨:0]함종연

2005.09.26 00:56:04
*.75.24.222

목사님 !!!

멋지세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9.27 00:10:51
*.249.178.22

맞습니다.
저자거리가 바로 신학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신학은 먹물들의 사변놀이로 전락하지 말아야하겠지요.
그게 늘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숙제입니다.
신학적 사유가 어떻게 늘 지지고 볶으면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실질적인 능력으로 작동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지성에 근거해서 소통될 수 있는 신학의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그냥 나름대로 정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의 지성은 전문적인 학문의 깊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
다른 동물과 식물, 그리고 더나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를
자기 삶 안에 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태도는 저자의 붕어빵 장사에게도,
여기 내가 살고 있는 하양 거리에 즐비한 과일 행상인들에도 가능합니다.
거꾸로 이런 태도는 종교인이나 지식인들이라고 해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지요.
한성영 씨는 늘 삶의 현장성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
아무나 따라가기 힘든 삶의 자세입니다.
열심히 그 길을 가십시요.
다만 계속해서 그 길을 가려면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할 겁니다.
그 에너지를 유지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거나
아니면 무한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하겠지요.
결국 영성이 아니면 이런 에너지는 가능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영성을 심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만.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9.28 23:41:15
*.249.178.20

한성영 씨,
위의 글을 보니까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나는 안티 사이트에서 회자되는 내용을 문제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접근하는 방법론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까발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왜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어떤 전승사적 흔적이 있는지,
그것의 신학적 실체가 무엇인지,
즉 그것의 역사적 깊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현대인들에게 낯설어보이는 기독교의 신화적 도그마를 깔아뭉게는 행동은
전혀 학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어떤 영적인 실체를 해명하곤 했습니다.
만약 부처가 자기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거나
그가 태어나자 마자 '천상천아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설화를 놓고
불교는 미몽에 빠져있다고 비판할 수 없는 것과 미슷한 이치입니다.
각각의 종교의 나름으로 진리론적인 전승 과정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 전승에서 고대인들의 신화적 요소들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신화적 요소들은
일종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손가락이 못생겨도 그것이 달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이죠.
그런데 안티 사이트는 그 손가락만 갖고 비판하고 있거든요.
물론 그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수구적 기독교인들도 문제는 문제이죠.
약간 다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몇년 전에 도올 김용옥 씨가 기독교를 쎄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욕먹을 일을 한 건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도올은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신학 문제를 건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의 부도덕한 행동을 책망하는 건 교회 밖에서도 가능하지만,
신학에 관한 것은 교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물론 이 말은 정확한 건 아니죠.
진리는 교회 안이나 밖이나 동일하게 작용해야 하니까요.
다만 내 말은 신학문제는 신학적으로 접근해야지,
혹은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야지 신학 이외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티 사이트는 기독교의 본질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고,
단지 교회 현상에 나타난 불미스러운 일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문제거든요.
미국이 북한 인권 운운하는 일이 많지요?
북한에 인권문제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걸 미국의 잣대로 재단한다는 건
바로 미국이 교만하다는 뜻이고,
그런 행태를 가리켜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남한에도 인권 문제는 최근까지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미국은 남한의 군사독재자들에게는 끽 소리 하지 않았다는 거죠.
자신들의 구미에 맞기만 하면
반인권, 반민주 통치자도 귀엽게 보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이라크를 치듯이 그렇게 깔아뭉개는 방식이 그들에게 좀 있습니다.
이게 거의 기독교 국가라 할 미국이라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죠.
비약이 심한지 모르지만 안티 기독교 사이트는,
(자세하게는 모르겠고, 한성영 씨가 올린 글만 한정해서 볼 때)
부분적으로 미런 미국의 시각과 비슷합니다.
방법론적인 점에서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된게 글을 쓰다가보니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았군요.
혹시 한성영 씨가 안티 사이트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 들어와서 한번 자기 생각을 펼쳐보라고 하세요.
그저 기독교를 훼손시키려고 그냥 한건 터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종교, 인문학, 신학 등등의 일정한 소양을 갖추고
기독교를 비판한다면 얼마든지 논쟁에 참여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런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고 한다면
그런 사이트를 운영할 까닭이 없다고 보이네요.
한성영 씨의 치열한 삶의 태도를 제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어서 하는 말인데,
비록 정통 기독교에 실망할 게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바르게 찾아야 합니다.
안티 사이트는 결코 한성영 씨의 영성과 지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9.30 13:55:35
*.249.178.6

옳은 지적을 했습니다.
주류, 혹은 정통 기독교가 이런 문제를 불거지게 한 장본인입니다.
안티들은, 시아파과 같다고 했지요, 폭력적인 방법으로라도
뭔가 문제를 만들어가려고 하겠지요.
그건 그들의 문제입니다.
테러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지요.
그런 위치에 있지두 않구요.
사람들의 행동은 제 삼자가 개입할 수 없는 어떤 깊은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 대구성서아카데미는
안티 사이트의 테러리즘과는 길을 달리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할 수 있지요.
아카데미가 모든 영역에 끼어들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모든 투쟁 방식에 동의할 수도 없구요.
사실 안티 사이트 방식의 투쟁은 쉽습니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게 바로 테러리스트의 속성입니다.
반전을 위해서 테러를 저질렀던 ,780년대 유럽이나 일본의
적군파의 논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는 불의를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죠.
예수의 정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도 없이,
그런 방식은 대결만 부추길 뿐이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 비판은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만약 내가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 밖으로 나갔다면,
그때부터 나는 기독교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 교회를 비난하는 건 가장 무책임한 일입니다.
무책임하다기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소진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도 종교가 종교 노릇 못하는 건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방속국이나 신문사, 잡지사에도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종교가 기본적으로 사회 자체를 파괴하는,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지 못할 때 그런 비판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안티기독교 사이트는 그런 특정한 사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 같네요.
일종한 종교를 목표하는 비난은,
물론 기독교도 어떤 종교집단을 향해 이단들이라는 굴래를 씌우고,
그들을 파괴하려는 행태를 보일 때가 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여기 대구성서아카데미는 여전히 기독교 공동체 내부 안에
그 자리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바로 세우는 일에
매진하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지,
기독교의 뿌리를 뒤흔들려는 의도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니체나 프로이트, 맑스의 기독교 비판이 상당히 옳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세우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매우 심층적으로 기독교 현상을 했습니다.
니체와 오늘 한국의 안티 사이트가 별 차이가 없다고 보시나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군요.
안티의 테러리즘은 기독교를 바로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앞 글에서 대충 언급이 되었으니까 그만 두구요.
대구성서아카데미는 정당한 방식으로 그 일을 끌어가보려고 합니다.
미적지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진리는 그렇게 있는 둥 없는 둥,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02 00:02:51
*.249.178.8

우 하하하!!!
(인터넷 방식의 글쓰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웬 웃음이냐구요?
통쾌한 웃음이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는 좀 점잖은 척 해야하니까,
대신 한성영씨가 하셨네요.
다 읽고,
정말 크게 웃었습니다.
아니면 낄낄 댔는지도 모르죠.
글을 보니까 나보다 고수네요.
빈정대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괜히 멋모르고 한수 겨루다가 큰 코 다치기 전에,
손자병법에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삼십육계가 가장 효율적인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내가 주인 비슷한 입장이니
어디 도망갈 데도 안 보이네요.
아무래도 내가 수비전략으로 바꾸어야겠어요.
지금까지 한번도 급소다운 급소를 치지 못했으면
전략을 바꾸고 말고도 없지요.
그건 그렇고,
한성영 씨,
알 카에다 방식으로 이 세상에 평화가 가능할까요?
미국의 폭력을 또 하나의 반폭력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라도 해야지 앉아서 맞아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또는 그렇게 하는 당사자의 심정을 이해해봐라,
또는 그 폭력의 뿌리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는 말이 가능하지만,
그리고 그건 사회과학적으로 나름으로 할말은 있지만
여기는 종교 영역이거든요.
칼을 쓰는 자는 자기가 그 칼로 망하게 되어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역사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바르트 식의 표현해서 하나님의 역사참여를 기다리는 것이죠.
로마의 멸망이 내부적 원인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 맞죠?
미국의 패권이 부시 이후로 더욱 드세지고 있는데,
그들이 방향을 선회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분명히 해체될 겁니다.
그때까지 주변의 고통을 어떻게 하냐구요?
최선의 방식으로 투쟁해야겠지요.
그러나 알 카에다 방식은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묘사되고 있는 정교회처럼
오늘 한국의 주류 교회가 얼마나 권력지향적이고 자기 목적적인지는
위에서 한성영 씨가 통쾌하게 설명하고 있으니까 내가 덧불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안티 사이트로 해결될 것 같습니까?
그 방식은 그들의 내부 결속력만 강화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냐구요?
나도 없습니다.
그냥 내 길을 가는 거죠.
자기에게 보인 것 만큼,
자기에게 열려 있는 길을 따라 가면 됩니다.
금방 끝납니다.
우리 개인의 운명도 금방 끝나고,
5만명 교인의 교회도 끝이 그렇게 멀지 않아요.
갑자기 내가 묵시운동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게 참으로 힘듭니다.
묵시, 종말, 역사, 앙가주망, 그 한계 등등,
여기서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성육신하신 예수 처럼
어떻게 이 역사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참여하며,
더 나아가서 그 역사의 끝을 이미 현재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말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이 어떻게 한 인격체의 사유와 행동 속에서
일치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현실과 신비를 우리가 동시에 포착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중심에서 흔들려 극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한편의 극단은 행동주의이며, 다른 극단은 숙명주의입니다.
이 두 극단을 말해놓고 보니까 이게 그렇게 정확한 표현은 아니군요.
대충 그런 그림이라는 것만 전달되었으면 됩니다.
역사는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우연을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믿죠.
미국의 힘에 논리가 아니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어떤 힘 말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 기독교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태도가 정숙주의를, 또는 정적주의를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행동하되 그것의 잠정성을 인식하고,
어떤 카이로스를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회력은 '대강절'로 시작합니다.
대강절의 신앙은 역사를 도피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훨씬 큰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신앙적 인식입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05 08:28:19
*.249.178.23

한성영 씨의 생각과 나의 생각에는 공통의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한성영 씨는 주로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고
나는 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에 대한 전망은 비슷합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대한 것도 그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런 차이가 보기에 따라서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안티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말씀하던데,
여기서 폭력적이라 말은 언어폭력까지 포함한다고 할 때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러도 크게 잘못은 없을 겁니다.
언어사용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위에서 여러번 지적했듯이
그들이 기독교의 문제를 까발리는 방식이 좀 선정적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신학의 근본이라 할 담론에서 좀 벗어난 게 아닐는지.
루터가 95개조항의 신학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대자보 형식으로 내다 걸었는데,
그게 바로 종교개혁의 단초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별개 아닙니다.
루터가 그 이전, 이후에 벌여온 치열한 신학적 투쟁이 중요한 거죠.
로마 가톨리교회의 면죄부가 왜 문제인지를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게 중요하지,
그래 돈으로 조상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민중을 기만하는 거 보니까
너희들 성당 신부와 교황은 모조리 사기꾼이다, 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혁명보다 개혁이 힘들다는 말
테러는 어쩌면 쉬운 길입니다.
너 죽고, 너 죽자, 하는 식이니까요.
그러나 신학적 담론을 통해서 교회의 개혁을 밀고 나가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여기 사기꾼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저지른 몇 가지 사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를 목사직에 끌어내는 게
교회를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그 사건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이 깨달아가도록
담론의 장을 확대하는 게 교회를 살리는 일인지 심사숙고해야지요.
이런 점에서 일단 교회와 그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의 투쟁은
그 어느 모로 보나 바른 길이 아닌게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다시 루터로 돌아갈까요?
우리는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뮌처까지 나가면 좋겠군요.
뮌처는 농민혁명을 지지했고, 루터는 반대했다네요.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힘든 부분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루터가 프레드릭 선제후의 정치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이런 상황에서 참조해야겠지요.
두 개혁가의 주장이 나름으로 타당성이 있긴 하지만
역사는 루터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나도 육체노동자의 아들로 성장했기 때문에
소위 민중의 고난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기본적으로는 혁명지향적이지만
폭력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면
당연히 야구방망이를 들고 싸워야하겠지요.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북한 편을 들고 싸우겠지요.
(지금 내가 쓸데 없는 말을 하고 있군.
더 많은 부연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거두절미 말하다가는
욕 먹기 십상인데.)
과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한 윤리적 성찰을 필요로 하니까
여기서 더 논의할 수는 없겠네요.
분명한 것은 테러의 일상화를 인정하면 곤란한다는 겁니다.
안티 사이트는 바로 테러의 일상화 아닐까요?
안티는 볼썽 사나운 교회 현상을 공격하는 것이지
기독교 자체는 아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더 복잡한 건 기독교의 본질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우리가 간단히 분간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건 종말까지 열려진 문제이기도합니다.
테러의 일상화라는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종교를 목표로 한 사이트라면 이런 표현이 크게 틀리지는 않죠.
기독교에 어떤 사안이 불거졌을 때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 거 하고
기독교를 정조준하는 거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한성영 씨가 생각하는 대로
성령은 교회 활동을 뛰어넘는 생명의 힘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전승하고 있는 교회 안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활동하십니다.
동의하기 힘드신지 모르겠네요.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전승된 고유한 생명활동과
교회 밖의 보편적인 생명활동 사이의 틈을 지혜롭게 메꾸어야 하는 긴장입니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사이에서 변증법적 자리를 확보해야겠지요.
한성영 씨는 그런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군요.
이미 자리가 잡혔는지도 모르구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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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10.07 14:06:59
*.249.178.8

역시 논쟁은 어디서나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그 과정을 통해서 본인의 생각을 명료화되고,
서로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하고, 또한 좁혀지기도 하면서
진리(알레테이아)의 속성인 '드려내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데서는 비슷한데 안티 문제에서 확 다르다는 걸 느끼셨군요.
그게 목사라는 신분의 제약때문일 수도 있고,
녹청은 동색이라는 집단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겠네요.
아마 두루두루 작용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정황들이 내 의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못합니다.
우선 윗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가 생각한 문제를 하나 짚어야겠네요.
왜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승한다고 주장하는가?
그건 오만이 아닌가?
이런 책임 추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생명의 영인 성령이 교회 범주 안에 제한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교회에 제한받지 않고 그 너머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보존과 완성을
그분의 방식으로 이루어가시는,
절대타자이며, 궁극적 관심이며, 사랑 자체이며,
어쩌면 도, 기, 자연, 존재입니다.
공기가 교회 안에만 있는 것 아닌 것처럼
생명의 영은 도처에서 그렇게 활동하십니다.
이런 방향에서는 우리는 얼마든지 많은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보편적인 진리, 계시, 역사에만 한정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에게서 발생한
어떤 사건을 하나님 사건과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좀 특이합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일까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젊은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기독교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지금 여기서 기독론 강의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초기 기독교는 그 하나님 나라를 예수와 일치시켰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을까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의 인식론을 우리가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초기 공동체가 예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석했다고 믿는 데서 그 근거가 확보됩니다.
물론 지금 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해석'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단지 독단적으로 믿으려는 사람들이 거의 주류로 자처하고 있는 데서
기독교 신앙과 그 현상에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긴 합니다.
그건 지금 우리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러나
기본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해석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만은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부정한다면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없는 거죠.
노파심으로, 여기서 단서를 또 달아야겠군요.
사도신경도 역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 이렇게 바르게 해석된다는 걸 전제하고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적 전승을 예수에 대한 최선의 인식이라고,
그것에 근거해서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출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승하고 있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실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모순투성이, 욕망덩어리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안에 일단 정경이 보존되고 있구요,
성만찬 의식이 전승되고 있구요,
2천년 신학이 살아있다는 것만은 인정해야겠지요.
성서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공동체는 교회가 유일하다는 건
실증이지요?
물론 해석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일단 있는 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주 소극적인 입장에서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가장 잘 보존해 왔다는 것입니다.

한성성영 씨는 그것보다 평화, 사랑, 공존, 관용,
이런 가치들에 힘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두 말할 필요없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건 '일반론'으로 옳습니다.
예컨데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전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학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같은 시대에는 대학이 기업 원리에 따라 작동되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에 실패했으니까 대학은 무의미하다고,
그래서 대학 철폐운동을 벌이는 건 좀 이상한 게 아닐까요?
안티 대학교육 사이트는 없나요?
대학을 비롯해서 모든 교육 개혁은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상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대학제도 자체를 지금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좀 문제가 되지요.
대안 교육이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지
필요중분한, 혹은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말이 중언부언하네요.
안티 조선일보와 비교하셨더군요.
안티 조선을 일종의 시민운동입니다.
그러나 종교마저도 이런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처음부터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듯이
안티 기독교가 말하는 내용을 갖고 내가 시비를 거는 게 아닙니다.
그 내용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의 문제점을 내가 그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접근 방법이 문제입니다.
기독교 주류의 접근방법은 훨씬 더 과격하다는 건 불문가지입니다.
그리고,
안티에 대한 나의 입장, 혹은 위치 같은 것도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요.
쉽게 예를 들죠.
수십명이 모여사는 어떤 대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가부장제에 찌든 가족입니다.
여자는 끽 소리 못하고 아이들도 힘들어합니다.
제일 어른 되는 분의 이런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아무리 해도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세명의 가족이 집을 나가버렸네요.
그리고 이 집을 향해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 집에는 첩의 자식들도 있으니까 가정도 아니다, 하고 공격합니다.
이 집에서 여자들은 대학도 못가니까 인간의 삶이 아니다, 하고 공격합니다.
대개의 공격 내용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이 집의 문제를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 집에서 가족으로 살면서
무언가를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서 공격하고 있는,
예전에는 같은 식구였으나 이제는 이 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아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다는
집을 개혁해나가는 일에도 힘이 부치는 상태에서
밖에 나가서 공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담아내야 할까요?

이만, 주의 은총이.
(시간 나면 한잔 하자고 했지요? 집이 어디신지.
여기 하양까지 오실 수 있는지.)

[레벨:5]권요안

2005.10.07 16:51:35
*.105.130.14

이렇게 불쑥 끼어드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과 그것의 극복인 것 같습니다. 암울하고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은 아마도 모두가 공감할텐데, 이제 어떻게, 혹은 누가 그것을 극복하고 바꿔나갈 것인가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실재하는 모순과 부조리의 문제에 직면해서 판단과 사고의 근거에 하나님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문제의 해결(실제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과는 별개로)은 간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그 근거를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불완전함과 무능력에 대한 인식일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주어진 세계에 철저하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인이 처한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온갖 악독과 불의가 판치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이름과 또 다시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저 바라만 볼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옛날 선지자들 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떨쳐 일어나 고발하고 싸우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도 얼마든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겸손은 섣불리 행동에 나서기 보다는 인내와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 모두가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기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순히 균형이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차원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존재, 존재의 근원적 변화라는 명제가 그것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하고 어렴풋이 짐작은 해봅니다만, 여기까지가 제 한계인 것 같네요.

그런 면에서 정용섭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수동적 적극성' 혹은 '소극적 신앙'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싸움은 싸움이되 전혀 새로운 존재로서의 싸움, 기다림은 기다림이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습니다. 드러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넘어서서...

아, 그리고 혹시 목사님과 한 잔하는 자리가 성사된다면 제게도 귀뜸해주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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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10.11 00:28:21
*.249.178.4

한성영 씨,
이 문제는 이쯤해서 내가 항복합니다. ㅎㅎㅎ
사실 이런 담론들을 재미 있어서 계속하고 싶긴 한데,
요즘 좀 시간이 쪼들리네요.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60세까지만 좀 뛰다가
다 접고 어디론가 들어가버려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은 하는데,
또 모르죠.
포도주는 얼마든지,
우리 하양 시장골목에 돼지국밥, 누른곡, 소주나 아니면 동동주도 있습니다.
이거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해도 되는지.
아직 내가 그것을 마신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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