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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 교수?

조회 수 4750 추천 수 117 2006.10.19 16: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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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적 예수를 말해야 하는가?    2005-02-08 
                                 김준우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1. 적개심과 폭력의 제국주의적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수고하며 핍박받는 많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에 교회가 사회적 비판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이유는 정치나 경제는 민주화와 투명화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권력은 아직도 비민주적 상명하복의 구조와 독재의 온상으로 남아 있으며(최상천), 또한 탈권위주의 시대에 반발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참조: 한겨레 21, 342호, 2001/1/18, 536호, 2004/12/2).

'안티 기독교,' '안티 예수,' '안티 바이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등 여러 반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사람들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이유들은 주로 기독교인들의 위선, 극우적인 목사들의 숭미적 태도, 불상훼손과 같은 오만불손한 행위들, 대형교회들의 세습,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공격적이며 배타주의적인 전도 행태 등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눅 6:31)는 말씀처럼,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그런 적대적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였기 때문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노예제도와 유색인종들에 대한 정복과 학살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난 연말에 수십 만 명이 희생된 쓰나미 재앙에 대해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그 재앙이 타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여 신문과 인터넷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 희생자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그들은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말인데, 큰 슬픔에 잠긴 그 유가족들을 비롯해서 전세계의 비기독교인들이 이런 보도를 전해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조차 이처럼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타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마당에, 비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인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대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을 복음의 핵심으로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렇게 비기독교인 이웃들에 대해 저주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종교로 둔갑하여, 역사상 종족학살을 가장 많이 저질러왔던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종교(김진호)가 된 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2.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의미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며 선포해왔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며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며, 언젠가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할 분으로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당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되는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첫째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식과 삶의 한계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를 주어,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구원하시는 분이다.

둘째로, 우리의 삶의 현실이 비록 냉혹하고 부조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무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도적으로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세계라는 믿음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삶의 의미를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셋째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삶이 거룩함과 사랑의 측면에서 개인적인 완전주의적 윤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전하며 격려하는 분이다.  

3.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적 문제점들

그러나 이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과학적 세계관과 고등교육을 통해 비판정신을 배운 이들에게는 신앙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동정녀 탄생과 부활승천과 같은 고대의 신화적인 언어들과 개념들, 세계관을 통해 고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서 지적인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과학적 세계관과 특히 역사의식의 확산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화적 교리를 지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하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학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전근대적인 신화적 세계관을 문자주의적으로 고수함으로써, 지적인 정직성을 불신앙의 태도라고 간주한다.

전세계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젊은 층과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교회를 가장 많이 이탈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세계관의 차이, 즉 성경이 기록된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과 현대의 과학적-역사적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정신분열증"(로이드 기링)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발달 과정에서 이런 분열증은 특히 비판적 사고방식을 통해 관습적 신앙단계에서 주체적-성찰적 단계로 넘어갈 때 흔히 겪게 된다(제임스 파울러).
둘째로,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잉태와 출생 다음에 곧바로 수난과 부활승천으로 이어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내용(알맹이)이 완전히 빠져 있으며, 그 모두가 수동태로 고백되어 있다는 사실(로버트 펑크)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일생을 선택하고 결단했다기보다는 마치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당한 꼭두각시와 같은 모습이며, 예수의 이런 수동성은 기독교인들 역시 수동적이며 비자주적인 노예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신화가 고대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었던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는 구원자 신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티모시 프리크, 피너 갠디)이 알려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은 물론이며, 독특성과 진정성마저 도전 받게 되었다.
셋째로,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고백되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는 부재(不在)하시는 분이 되어 그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정서적으로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종종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려는 경향은 바로 이런 신학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4.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및 사회적 문제점들

이 교리적이며 신화적인 예수 그리스도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적인 위기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위기를 초래한다.

첫째로 신화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오늘날 현대인들이 지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의 자기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신앙고백에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이며, 이런 비정직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단지 입술로만 고백하도록 만들어 믿음과 생활의 불일치를 초래하며, 비주체적이며 비자주적인 인간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질적으로 다른 그분을 본받을 수도 없으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본받을 필요도 없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신화적이며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고집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영혼을 천당으로 인도하는 분이라고 강조됨으로써, 결국 개인주의적이며 영혼구원중심적이며, 저 세상적인 구원 이해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결국 기독교인들의 이기주의와 기복신앙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믿을만한 사람 찾기 어렵다"는 말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단순한 비아냥이 아니다.

또한 이처럼 개인의 영혼중심적 구원 이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사회적 모순이나 생태계의 파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만들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주의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교회 자체의 비민주적 구조와 종교 패거리주의에 대해서도 침묵하도록 만들어, 결국 교회가 "종교의 탈을 쓴 독재의 소굴"(최상천)이라는 비난을 받게까지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이기주의와 기복신앙이 초래한 비윤리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만을 배타적으로 구원하는 분이라고 강조됨으로써, 기독교 신자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천당(예수)과 지옥(불신)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뛰어넘을 수 없는 종교적 장벽과 사회적 차별을 분명히 설정한다. 이런 배타적 구원론의 장벽과 차별은 결국 교회중심주의를 통해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며,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기독교 제국주의를 낳는다.

이런 배타주의와 기독교 제국주의는 외부인들(멸망받을 악한 자들)에 대해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멸망시켜야 할 사탄의 세력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적인 이웃들에 대해 저주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괴물"로 둔갑시키는 짓이며 "사탄적인 기독교"의 특징이다(월터 윙크).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복음을 적개심과 폭력의 종교로 둔갑시키는 것은 이처럼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5. 실종되었던 역사적 예수를 다시 말해야 하는 신학적 이유

기독교 역사에서 역사적 예수는 실종되어버렸다. 당시의 "우상파괴자"(iconoclast)를 "성상"(icon)으로 만드는 신격화 과정에서, 예수의 인간성과 그가 몸바쳐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실종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들, 즉 원죄(어거스틴), 성육신(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가파도키아 교부들), 속죄론(안셀름) 등의 교리들을 예수가 가르친 적이 있는가? 예수가 스스로를 "주님"이나 "구세주"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예수는 자신이 흘릴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역사적 예수를 다시 말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지적인 정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역사적 예수, 즉 당시 랍비와 예언자로 불렸던 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만의 품성과 구원의 능력과 임재를 경험한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놀라운 경험이 당시 어떻게 신화적인 언어와 개념과 세계관을 통해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그리스도 신화의 핵심적 요소들, 즉 하나님의 아들,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승천 등의 교리들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정직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정직한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적인 열정을 되찾고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이다. "예수에 관한 종교"를 그 역사적 뿌리였던 "예수의 종교" 위에 다시 세우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배반하였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교회의 도덕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나라가 아니라 현재적인 나라이며, 저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적인 나라이며, 개인주의적인 나라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나라이며, 영혼구원만의 나라가 아니라 정치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통전적인 해방의 나라이다.

브로커체제의 위계질서와 연고주의가 판치는 불평등과 착취의 나라가 아니라, 브로커 없는 평등주의적 나라(존 도미닉 크로산), 지배가 없는 하나님의 탈지배적 질서이다(월터 윙크). "예수는 (세례요한의 메시아 기대에 관한) 희망을 사랑으로 바꾸고, 미래의 종말론을 현재의 해방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종교와 묵시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토마스 쉬한).
셋째로,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 즉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내부인들(탕자의 비유의 큰 아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제사장과 레위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 큰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사람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새벽부터 일한 품꾼들)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외부인들(탕자의 비유의 탕자,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사마리아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 큰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이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저녁이 다 되어 일을 시작한 품꾼 등)을 위한 특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로버트 펑크).

예수는 외부인들에게 저주와 적개심이 아니라, 무조건적 용서와 특혜를 베풀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제국에 맞서서 정반대되는 질서로 이루어진 반제국주의 운동이다(리처드 호슬리).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운동이다(월터 윙크). 보복을 가르치는 종교는 예수의 종교(용서)가 아니라 사탄의 종교이다(윌리엄 블레이크). 그 하나님 나라는 약자들에게 노예들의 도덕, 즉 굴종과 체념을 가르치는 강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약자들의 저항을 통해 이룩하는 나라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선교사역을 충실하게 계승하지 않는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를 무시하고 배반해왔던 교회사의 전철을 밟기 쉬우며, 그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으로 몰락해가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목회를 계승하는 작업은 교회를 다시 살리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다.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소장     www.historicalijesus.co.kr

(다음카페 부흥과 개혁에서 퍼옴)

    --------꼬리글----------

장경선
이것이 자유주의인지 아닌지..이런 신학적 연구가 훌륭하고 정직한 것으로 각광받고 임용탈락되었다고 분규가 일어나는 신학교..감신이 언제 진보였고 언제부터 어떤의미로 점점 보수화되어간다는것인지 모르겠지만, 06.10.13 21:09
답글  장경선 교회연합을 말할때,개신교회에 진보교단,보수교단이라고 정의할수 있는 근거가 있었는가(특별히 기장을 제외한다면)..진보신학은 어떤 어떤교단이던 앓게된 병마일것입니다. 교회연합은 진보와 보수의 대화가 아니라 개신교단간의 연합으로 말해져야하고,진보신학은 그야말로 교회가 연합해서라도 풀어가야할 숙제입니다. 06.10.13 21:18
  답글  광주행
이런자들과 연합하면 볼만하겠네.... 06.10.14 10:33

답글  holyjoy
김준우교수가 임용탈락되서 불쌍타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의 '역사적 예수'는 김준우자신이 보는 '역사'속에 갇혀 있는 예수일 뿐이라고 여겨지는군요. 결코 성경의 예수가 아니고 김준우자신의 생각속에 있는 예수라고 여겨지는군요. 기독교가 제국주의화되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김준우교수처럼 저항일변도의 예수도 문제이지 않을까요? 제국주의자 예수와 저항세력으로서의 예수....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또한 부흥과 개혁의 카페의 주인으로 계신 줄 믿습니다. 다른 예수를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받을지어다. 06.10.14 17:52
답글  바람소리
많은 학문이 너를 망하게 하였구나............ 지식만 가졌고 신앙은 버렸구나............
신학교수가 저 정도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06.10.16 13:14

해벗
위의 논문을 쓰신 분은 아마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님 처음부터 자유주의 철학적 신학서적들을 읽어서 책상머리 신학자의 눈으로 "가상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한것 같군요. 06.10.16 11:46
답글  해벗
이분의 글은 일부 타당한 지적도 있지만, 여러 곳에서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군요. 하도 틀린 곳이 많아 일일이 말을 하기조차 힘들군요. 06.10.16 11:48
답글  해벗
카타콤의 순교자들은, 주기철목사,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결코 배타적 제국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주님 위하여 조용히 피흘려 순교하였을 뿐 결코, 결코 김준우 님이 말하는 그런 보복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1 06.10.16 11:55
답글  해벗
17년전 감신대의 한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 어느 신입생이 질문, "교수님, 감신 교수중에서 동정녀 탄생을 불신하는 분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교수 왈, "자넨 장로교 신학생인가? 동정녀 탄생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학생, "교수님, 그렇다면 교수님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교수, "...." 06.10.16 12:01
답글  장경선
자넨 장로교신학생인가?ㅎㅎㅎ 그런데, 장로교도 야단난거 같습니다. KNCC 백도웅 총무 예장통합, 연동교회 이성희목사도 통합.. 06.10.16 12:42
해벗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주체적이지않다니, 그리고 그런 신자들이 삶에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니... 이분은 어디 굴뚝에 있다 나왔나? 우리 주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임재에 감격해 하고 있는데... 06.10.16 12:08

답글  어진내人

ㅎㅎ 김준우라는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이.... 해벗님이 아주 잘 말씀했군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땡중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이니 소위 대화라는 체널을 통해 진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겠지요... 06.10.16 13:01
답글  어진내人
대화 한다고 내가 그리로 가는것도 아니고 타협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진리는 양보할 수 없지요. 어쩌면 저들이 진짜를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06.10.16 13:00

답글  장경선
김준우교수같은 분들을 교회의 평신도들은 '전도대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신학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하거나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면서 대화의 대상이라고 하지요. 이런류에 대해 장성한 분량으로 취급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게되는 이유는 순전히 신학전공이기때문이지요. 이런 자유주의신학이 대화의 상대이고 신학(결국 교회의)한축으로 자리잡아가는것을 보면 이시대의 우리(?)가 믿는것은 결국 학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06.10.16 13:09
답글  장경선 신학도 아니고 대학과 전공이라는 증명,학위자체를 과학만큼이나 공고하게 믿어버리는것이 이시대이기에,학문,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탈선과 심하게는 적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나와도 진보신학이 되고 다원적성경해석을 인정해야한다는 합리적인 태도를 취할수밖에 없게 되는 거겠지요. 06.10.16 13:09
답글  장경선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신학전공,신학자라는 말이 이미 가장 위험할수도 있는 말이 되어버린것 같습니다. 학위도로 증명이 안되고 교세로도 참교회는 분별할수 없는일이고, 그렇다고 신비와 기적을 의지할수도 없고...어쩌면 갈수록 교조적인 분리가 더 필요할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연합도 연합이지만요.. 06.10.16 13:09

조현아

2006.10.19 21:40:15
*.130.193.54

혼잣말입니다==>
"지식으로 믿음을 질식시키는 시대,
예수보다는 인간의 신학을 추종하는 시대.
내일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신학적 학설이나 해석으로
흥겨운 듯, 하나님의 성령을 난도질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목사와 신학자와 가르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ㅡ 그러나 소위 스스로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고단수 말로 미혹하는 시대.(실상은 그 중심의 교만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그 말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알수 있다...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지금 여기 각인에게 내주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 견인하시기에)
그들의 혀는 현학으로 매끄럽고, 그 주장은 모든 경계를 허물기라도 하듯 멋져보인다.
조금 있는 믿음의 씨앗조차 빼앗겨 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많이 알게 되었노라는 자부심까지 부여받으며 흐뭇하게 세뇌되어 간다.
목사와 신학자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기독교계 최정상에 서서.... 도사연하는 시대..
이들을 보며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다.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자기 열심으로 분주한 그대...
성령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그대는... 교수나 목회를 관둬라
그것이 거짓없는 양심으로 행하는 것이며,
그대 자신과 하나님과 영혼들을 위하는 길일테니까...."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19 20:44:52
*.212.2.213

한국기독교연구소장(?) 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알맹이가 없는 주장이네요..
교리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가 해답일것이다? ㅋㅋ
당연히 그렇겠지요 성령을 통한 예수를 만나본적이 없으니..
여기 저기 예수에 대한 옛 기록들에서 즉 역사에서만 예수를 만나려고 할 밖에요..
도대체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찾고 복원한다는 것인지?
결국 인간의 연구와 지적 추론이 예수를 만들어내겠군요..끔찍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히려 '교리적 예수'의 가르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작금의 기독교의 부끄러운 모습이 만연하다는 것을 그는 진정 모르는것일까..
요즘 기독교 신자들이 18세기 사람들보다 과학적 계몽적 가르침을 못받아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건지..ㅎㅎㅎ


[레벨:0]smallway

2006.10.19 22:11:40
*.189.11.216

글쎄 성령-하나님을 만나면 뭐하는 건지 .... (깨달음이 있으면 뭘하누 ...)
예수 가르침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 (꿰어야 보배가 되지....)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19 22:31:19
*.212.2.213

성령-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모르시나봐요?
스몰웨이님 말씀대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이 일어납니다. 놀랍지요.

일전에 제가 글을 올린적 있었는데,
'교리적 예수'에 대한 진실된 전파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 땅에 정의와 사랑이 가뭄에 콩나듯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쫓아가던 서유럽이 어떻게 되었는지 역사가 증명하지요.
그 교리적 예수라는 것을 우습게 보고 곁길로 빠지다가 저모양 저꼴이 된것 아닙니까?

이길용

2006.10.19 22:49:50
*.28.204.5

서유럽이 어떤데요?
그렇게 쉽게 일반화시켜서 말할 수 있을까요?

전 8년 유럽에 있으면서 정말 수도없이 경건하고 겸손한.. 그리고 성령과 동행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의 충실한 일상적 신앙생활은 겉멋에만 몰두하는 몇몇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진실되어 보이더군요.

특정한 일부분을 가지고.. 그리고 몇몇 이들의 불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전체를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길용

2006.10.19 22:52:25
*.28.204.5

아주 편하게 유럽교회는 죽었다고.. 말하시는 분들의 용기가 사실 저에게는 무척 기이하고도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줏어담을 수 없는 하느님의 영적 활동을 그리도 단정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신적 판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모양은 다르고, 행색은 달라도..

다 같은 믿음의 자매, 형제로 인정할 줄 아는 넉넉함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반도의 특정한 몇몇 신앙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레벨:0]smallway

2006.10.20 00:01:03
*.189.11.216

행함에 있어 서구인들의 바른생활의 실천에 대한 이길용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잔칫집가는길님,

제가 아직 덜 살아서, 그리고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
성령-하나님을 만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분들을 그리 많이 보지를 못했읍니다
이기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희)귀한 분들이어서 그런지
보통 성자(聖者)들로 불리우고 있다고 알고 있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20 00:10:15
*.150.14.120

조현아, 잔치 님,
비슷한 색깔의 신앙이군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성령의 체험, 성령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강하시군요.
조현아 님의 글빨은 화려하구요,
잔치 님의 글은 강렬하군요.
그런데 두분 모두에게 논리성의 부족이 엿보입니다.
말하려는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을 체험해봐라, 그러면 알리라.
이건 논리가 아니라 자기 확신이지요.
조현아 님은 어떤 이를 향해서 도사 연 한다고 말하시는데,
혹시 본인이 그렇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오래 전부터 계속되는 문제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본인의 체험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어두워지는데,
조현아 님은 밝아지는군요.
그 생각을 조금만 유보해보면 어떨까요?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성령에 의존하는 건 옳습니다.
그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성령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없이 성령 체험이면 다 안다, 하면 조금 곤란한 것 아닌가요?
그런 주장은 통일교 신자들도 하더라구요.
이런 내 말도 성령을 받지 못한 탓이다 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성서는 성령을 한 가지 현상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생명의 영이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령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생명이 무얼까요?
조현아 님, 아세요?
잔치 님, 아세요?
생명은 생물학적 현상일까요, 실존적인 작용일까요?
그것은 생태학일까요, 우주론적 현상일까요?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일까요?
한 알의 밀알이 우주라고 한다면
밀알이 생명인가, 우주가 생명인가요?
지금 내가 성령론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령 체험하면, 안다 하는 식의 논리는
신학적이지도 않고 성서적이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되느니라, 하고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생명의 영을 설명하는 게 좋습니다.
만약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어떤 생명의 힘을 발견했다면 그걸 말하면 돼요.
아기를 키우다가 생명의 힘을 경험했다면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돼요.
아마 김준우 교수는 교리화한, 혹은 헬라철학화한 기독교보다는
갈릴리 현장이라는 역사 안에서 활동한 그 인간 예수에게 호감을 느끼는 분인 것 같습니다.
<예수 세미나> 유의 학자들을 제가 크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유럽 신학에서 이미 18,19세기에 다 끝난 문제를
이제 다시 꺼내들어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걸까, 하는 호기심은 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학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찬성합니다.
그들은 최소한 정직하고 성실합니다.
그들은 도사 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과학적입니다.
이런건 모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나요?
과학을 불신하나요?
과학은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해명인 과학을 신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나요?
조현아, 잔치 님,
두분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체험을 저는 좋게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도 높히 삽니다.
그러나 자기와 다른 형태의 신앙을 매도하는 건
기독교적 관용에서도,
잔치 님이 강조하는 성령의 열매라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구체적인 걸 말하는 훈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거기서 한쪽은 진보적으로,
다른 한쪽은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일반론으로, 추상적으로,
즉 성령을 받으면 알게 돼, 하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대화는 끝나는 겁니다.
김준우 교수의 무슨 주장이 어떤 이유에서 문제가 되는지,
그 구체적인 걸 분석하고 비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내 말이 훈계 조로 들렸다면
용서하세요.
주의 은총이.

[레벨:0]riveroad

2006.10.20 01:21:10
*.116.148.209

흠.. 김준우 교수님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정직하게 신학하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 세미나의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고 계시지만,
고등비판과 고고학적 연구에 바탕으로 한 접근일변도는 아닌 듯 합니다.
예수 세미나의 연구 자체는 상대적인 가치만 담고 있겠지만,
그런 상대적인 가치도 현재의 한국에서는 필요한 상황이 아닐런지요.
하나의 예만 들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고,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참된 이웃사랑은 그가 기독교인이 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진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진보와 보수,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이런 딱지 붙이는 것은
사실 저같은 평신도에겐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왜냐면,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생각은 늘 상대적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남의 생각"은 늘 상대적인 진리이고 때론 확실히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면,
"나의 생각"도 늘 상대적인 진리이고 때론 확실히 틀렸다고 인정할 수 밖에요.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건 상대적이고,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절대적일까요?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건 상대적이고,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절대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정직하게 신학하고 신앙생활하면 나와 달라도
배울 건 배우고 싫은 부분이 일부 있더라도 같이 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김준우 교수는 무서울 정도로 철저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분께서 가시는 길이 저의 길과 꼭 같지는 않지만, 감신에서 겪은 고통을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텍사스에서


[레벨:1]김성용

2006.10.20 11:10:38
*.59.17.207

정 교수님의 '구체적인 걸 말하는 훈련을 하는게 좋습니다'라는 말이 무엇보다도 와닿습니다.
학부 2학년 때부터 설교를 하느라 적어도 8년 이상 학생들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는데,
(군대에서도 1년 이상을 군종으로 섬기면서 저녁설교를 도맡아 했었죠)
최근에야말로 제 설교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전에는 제가 모든 것을 알고서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정말이지 아는 것은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모른다고 설교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청년들도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싶더니, 이제는 제가 의도하는 뜻을 이해하는듯,
예전보다 더 진지해지고 예전보다 더 분명해지고 예전보다 더 자주 말씀에 대해서 질문하더군요.

앞으로도 구체적인 것을 말하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20 17:03:02
*.77.226.138

조현아님, 편을 가르고 싶은신가요?
김준우교수님에게 님과같은 진정성과 믿음이 없을까봐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것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잊혀진/모자란 부분의 충격이 될 수 있음을 믿으셨으면..
예수님앞에서는 김준우교수님도 조현아님도 함께 기쁨의 식탁을 나누지 않겠습니까?
김준우교수님이 죄인이나 창녀, 세리보다 못한가요?
할말은 많지만..

[레벨:1]박상열

2006.10.20 22:06:08
*.37.196.178

이 글을 읽고 '조현아' 님이아 '잔치'님의
댓글에 좀 뜻밖이었습니다.
비판적이 말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성령을 경험 했다(안했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딱 알 수 있는건지...
참,, 그리고,,김준우 교수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입장에 수긍이 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자유주의(?) 그런건가요?^^;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21 05:05:04
*.212.2.213

/ 정목사님께

목사님의 충고 감사합니다.
항상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만 쉬운건 아니네요.^^;
정말 훈련이 필요한 부분인것 같습니다.

먼저 김준우 교수가 성령을 안받았다라는 말의 뜻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사도신경과 같은 보수적 신조를 신뢰합니다. 줄여서 '신조'라고 하겠습니다.
(교리적 예수의 결정체가 신조라고 생각합니다)

신조를 인정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을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조를 부정하는 사람은 최소한 성령을 받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요약하자면 신조는 성령의 내주 증거에 대한 '필요조건'입니다.

그 신조가 무오한 것이냐? 물론 아닙니다.
다만 신조의 권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신뢰하는 겁니다.
세부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기준으로서의 목적적 기능은 오류가 없다고 믿는것이지요.

이러한 범주 내에서 김준우 교수를 '성령 받지 않은 자'라고 말한겁니다.

기독교라는 자꾸 고장이 생기는 기계가 있는데,
많은 수리 도구중에 '역사적 해석'이라는 드라이버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비아는 그 드라이버로 기계를 고쳐보려고 하고
김준우 교수는 그 드라이버로 수리를 하는게 아니라
해머와 같이 근본적인 파괴의 도구로서 들이대고 있는거죠.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 좋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방법론만이 유일한 답일때도 있지요.
그러나 아시겠지만 과학적 방법론이 꽤 처참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행태주의니 실증주의니 다 그 일종이지요?)

물론 자연과학 계열은 얘기가 다르지요. 자연과학에서는 그 방법론이 맞지요.
그러나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 해석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전방위적으로 차용할 순 없다고 봅니다.

과학을 '불신'하자는게 아니라, '과신'하지 말자는 겁니다.
과학이 자연에 대해 해명해 줄겁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해명하지요?
목사님께서 생명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건 과학도 도대체 해명할 엄두를 못내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과학적 방법론이 우월한것 처럼 말씀하시는지요?
또 그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설득과 해명이 어떤 사람들에겐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즉 설득력이 없는 얘기가 될 때도 많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냥 구체적 삶의 모습이나 신비적인 체험이 '과학'이 될 때도 있는것이죠.

이상의 이유로 저는 과학을 과신하지 않기에,
성경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긋습니다.
그 한계 너머는 신비의 영역이지요. 성령은 그 양자 모두에서 활동하십니다.

김준우 교수는 그 선을 구분을 못하는 겁니다.
어디까지가 과학(역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어디까지가 신비(믿음)의 영역인지.
저도 그 경계의 모든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김준우 교수가 부정한 배타적 예수 구원관이나 죄사함의 원리, 천국개념등은
과학(역사적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 제가 열거한 개념들도 역사적 해석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상한 것은 저의 경우,
어떤 개념들은 설명이나 정보를 통해 깨닫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예수가 누구인가? 그는 구세주인가? 그는 죄를 사하는가? 그는 창조주인가?
이거 누가 알려준적 없고 교회 가서 배운적 없습니다.
희한한 경우라고 보실지 모르겠지만, 창조,타락,구속등 기독교 핵심 개념을
역사적 해석이 전혀 없는 그냥 성경 텍스트만 놓고 보다가 알게되고 믿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그것도 무슨 10년간의 연구 끝에 알게된 것이 아니라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 가운데.
교회에 가서는 그 개념들을 확인하고 더 세부적인 교리를 배운것 뿐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이 만물박사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것 즉 구원과 직결되는 것들 중 하나인
'미혹케 하는 것'에 대해서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는 겁니다.(물론 다른것도 가르치시죠)
우리가 이단 정죄를 무슨 권한으로 하는걸까요? 학문적인 권위일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단 정죄까지 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것이 학문적으로 뛰어난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탁월한 이단 주장이 나올때는 속수무책이지요.
우리가 시대마다 미혹케하는 조류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그 무의식가운데 성령의 권위를 행사하는 겁니다.
물론 그냥 인간의 오만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자도 있겠지만
가라지는 가라지일 뿐, 그것이 알곡의 존재까지 부정케 하지는 못합니다.

쓰다보니 정목사님께 쓰는 글이 아니라 두서 없이 모두에게 쓰는 글이 됐네요..
모두 평안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21 08:14:09
*.150.14.57

잔치 님,
위의 글은 좋았어요.
구체성이 보인다는 겁니다.
나름으로 논리성도 있구요.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면
서로의 견해에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전체적으로 잔치 님의 생각을 인정합니다.
내 생각하고 크게 틀린 게 별로 없네요.
위의 글은 세 가지 키워드가 나오네요.
삼위일체, 과학적 방법론, 성령.
김준우 교수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더군요.
삼위일체의 특징이 교리적인 예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교리에 이르게 된 과정을 과학적으로 파악해서
원래 예수님이 가르치려고 했던 그 실체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 같습니다.
특히 삼위일체는 신화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하네요.
일단 그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이 신화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하지요.
동정녀, 부활, 하늘, 재림 같은 개념들이 신화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게 어려운 문제에요.
사도신경의 내용에 신화와 역사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는 게 말이죠.
기독교 교리는 분명히 신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긴 하지만
모든 교리가 그런 것이 아니며,
또한 신화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실체는 신화 너머를 담고 있습니다.
김준우 교수의 문제 제기는 특별히 새로운 건 없어요.
본인은 역사적 예수 문제 제기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지만요.
앞서의 내 글에서 언급되었지만
이런 점에서 나는 "예수 세미나" 운동에 대해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 문제를 뛰어넘은 상태인데,
그걸 여전히 새로운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죠.
예수 세미나 운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교회 개혁운동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교회가 지나치게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으니까
원래의 기독교 정신을 되찾자는 거겠지요.
그러다가 자칫하면,
빈대를 잡다가 초가삼칸을 태우거나
목욕물을 버리다가 애기까지 버리게 될 수 있다는 점은
그들이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휴머니스트를 키우는 종교는 아니거든요.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자는 캠패인도 아니거든요.
어쨌든지 김준우 교수가 사도신경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안고 있는 신화적 예수 상을 극복하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과학, 성령 문제는 오늘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전치 님은 혼자서 순식간에 모든 걸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태도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군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사이비 교주들도 그런 이야기를 흔하게 하거든요.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절대화하지요.
자기 혼자서 성령의 도움으로 모든 걸 깨닫는 방식보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배우는 방식이
훨씬 기독교적인 겁니다.
기독교를 역사적 종교라고 하고,
하나님을 역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게 이런 연유지요.
진리 인식의 문제에서
역사와 전승을 폐기하고 개인의 실존을 부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차르트 같은 천재는 누구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5살때부터 작곡을 했다고 하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공부가 아주 중요합니다.
진리(알레테이아)는 탈은폐의 힘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우리를 조금씩, 때로는 비약적으로
어떤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다주실 겁니다.
이런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활동하시려면
일단 자신의 깨달음이 아주 적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요.
인터넷을 통한 대화도 역시 공부 중의 하나가 될 겁니다.
진리의 영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레벨:7]늘오늘

2006.10.21 08:16:13
*.239.101.220

세상의 선한 아름다움을 누구에게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악한 비극을 깨닫는 데에도 노력과 의지는 부수적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저에겐 걸림돌이었습니다.
선과 악은 설명이전에 자명한 것이었고, 노력여하에 따라,
과학적으로 분석, 설명, 대안제시가 가능하고, 재능에 따라,
예술적으로 감응, 표현, 창작되어질 수 있고, 때와 인연을 따라,
종교적으로 승화, 형성, 추동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예견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었고,
200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자명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 난감한 화두 ‘예수’를 붙들고, 세상을 역사를 인생을
바라보고 헤쳐 나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저도 역시 이 난감한 ‘지식’을 은혜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을 타인을 재단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신조’라는 것이 우리를 재판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피조물임을 확인하고,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기다림의 자세일 뿐입니다.

조현아님이 올려주신 글을 통해 처음 접해본 김준우 교수님의 주장에서,
기독교인이 감당할 고민과 노력, 구도적인 자세가 느껴집니다.
신조를 해머로 박살냈다는 등의 트집은, 어이없는 잠꼬대입니다.

[레벨:0]smallway

2006.10.21 11:29:32
*.189.11.216

'성령(聖靈)'이라 거룩 거룩히 불리우고있는 소위 '성령-하나님' ....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라 저는 깨닫고 있읍니다.

그것은 점지(택함)받은 어느 특정한 이들만의 소유물이 아닌
말하자면, 바울이나, 사도신경을 만든이들만의 소유가 아닌
김준우교수, 조현아님 .... 정용섭선생님, 잔치집가는길님 들만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도 깨닫고 있읍니다.
(들에핀 백합화에서도 ....특히 사람들에게서는 ... 인지하기가 수월하지요 ..)
profile

[레벨:2]박 진

2006.10.21 17:21:17
*.76.3.20

다른 분들께서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야기하셨지만 전 잔칫집가는길님의 댓글에 좀 화가 나는군요.

예수의 믿음이 어떻게 예수에 관한 믿음으로 바뀌어 가는지, 그래서 그 과정에서
희석되어지고 사라져버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탐구하는 역사적 예수연구에
필요성과 공감을 하는 여부는 본인의 이해에 달린 문제라고 하더라도

오랜시간 성실하게 추구해온 한 학자의 학문적 노력들이
님에게 있어서는 그저 성령 받지 못한 자의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에 불과하군요.

이미 정세웅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타인의 신앙의 진정성마저
자신의 좁은 신앙의 이해로 쉽사리 제단하려드는 일종의 종교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을 일종의 분별의 영역으로 치부하려는 모습은 다소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님께서 애지중지 하시는 그 신조에 저 또한 매 주일 고백하고
여러 고백적 신조들의 가이드라인을 존중하지만
님의 그런 경솔한 태도에는 솔직히 동의 할 수가 없겠네요.



*아래는 한국기독교연구소 게시판에서 퍼온 글 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님의 말대로 역사적 실증도 없이 주장하는 것인지,
진보적인 성서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님의 말처럼 "뻔한 것,
" 즉 "사도신경에서 고백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몸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시도",
"그래서 인간 예수를 신앙의 대상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부터 철저히 분리시키려는 시도"인지,
아니면 그 신앙의 대상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고백을 그 신앙고백의 역사적 근거,
즉 인간 예수의 삶과 가르침 위에 더욱 철저하고 확고하게 올려세움으로써,
기독교 신앙고백이 요즘 젊은이들말로 "헛소리"(nonsense)가 되지 않도록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는 시도인지를, 최소한 <예수의 의미>를 읽어보고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2000년 동안 고백해왔던 신앙고백이 만일 잘못된 것이라면, 교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교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전통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서 언제나 성숙하기도 하며 쇠진하기도 하지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억압하는 굴레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전통은 심지어 완전히 죽어서 사라져버리기도 하지요.
기독교 신학자의 과제란 성서적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복음의 활력을 잃지 않도록 지키고,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며,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켜 복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며,
또한 오늘날의 교회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증오하고 결국엔 죽여버린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처럼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감시하고, 경고하며, 개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서로에게서 배우거나 서로를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닌 경우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레벨:1]정세웅

2006.10.21 19:21:09
*.77.226.138

잔치집가는길님의 댓글에 대해 짧은 생각을 드립니다.
김준우교수님께서 님의 신앙과 고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조라는 것은 역사적 산물일 뿐이고요,
그래서 그 신조가 담아내고자 했던 것에 대해 충분한 탐구가 필요하겠지요.
신화적 세계관이라는 표현이 거북한가 보신데요.
신화적 세계관이란 그 당시의 셋팅이라는 겁니다.
오늘의 세계관도 수백년 후에는 '신화적 세계관'일 뿐이죠.
수백년후의 사람들이 오늘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해석'이 필요하고,
해석에는 오늘의 세계관의 특성은 제거하고 그 내용을 찾아야 하겠죠.
우리가 조선시대를 단순히 이해할 수 있나요?
조선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세계관/신화를 이해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오늘과 다른 언어/관습/문화속에 담고자 했던 '본질'을 얻고 배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언어/관습/문화로 담아내야 하고요..

만일 이런 전제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그냥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시면 됩니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없습니다.
지금도 과거의 신화적 세계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거 트집잡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신화적 세계관의 언어가 해석없이 사용됨으로써 비롯되는
왜곡된 기독교현실이 있다고 보는 것이고, 그 왜곡된 정치성을 벗겨내고자 하는 것이죠.

김준우교수님의 경우는 예수세미나를 추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연구목적과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것이고요,
그 결과물이 지금의 한국교회가 미래를 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세미나가 했던 작업이 의미있는 것은
'예수'자체에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는 것이죠.
정용섭교수님 말씀대로, 예수세미나의 작업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예수세미나가 '역사적 예수'라는 화두를 통해 과거보다더 세밀한 예수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게 별로 필요없는 분도 계실텐데요, 그럼 그냥 열심히 자기 믿음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혼자 떠들게 아니라면, 납득되고, 근거있고, 소통할 수 있는 기반위에 서야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항상 이런 부분이 언급되면 투쟁적으로 변하니 문제죠.
각자가 어떤 신앙의 화두를 갖는 다는 것은
그 속에 절실한 문제의식과 절박함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냥 심심해서,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학자적 키치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자신의 신앙속에서 참된 열매를 맺으면 그것으로 승부가 나는 것 아닙니까?

서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그 진정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게 중요하겠죠.
물론 잔칫집가는길님의 진정성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조현아님도요..
하지만, 남에게도 님들 못지않은 신앙의 경험과 절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으면 하네요.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22 00:21:39
*.212.2.213

많은 분들의 댓글 귀하게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교수에 대한 것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지요.

세웅님은 김교수가 저의 신앙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시는데
윗 글로 봐서는 완전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것과
그 예수를 믿는자들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김교수가 보기엔 콩이 나온적이 없답니다.
예수를 심었는데 '마귀 같은 자들'이 나왔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드문 드문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예수를 심으면 예수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김교수의 주장이 일반화 되려면 예외가 없어야죠.
(저는 지금도 그 예외라는 것을 분명히 보고 듣고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다비아에 오시는 분들은 다들 어떤 식으로든 교회와 연결이 되어 있는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최대 교단들인 예장 합동,통합,침례,감리,순복음 등등
거기서 교리적 예수를 제대로 가르치기나 하는 줄 아십니까?
(기장이나 성결교 쪽은 제가 정확히 모르겠군요)
도무지 가르치지를 않아요. 성도들이 십계명도 제대로 모릅니다.
십계명 뿐인가요? 제대로 아는 성경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들이 안 가르치거든요.
황당하시겠지만 사도신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목사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실종된지 오래되었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보수교단에 있음에도 기독교를 제대로 풀어주시는 목사님을 만났기에
그나마 이런 인식이라도 갖고 있는것입니다.)

지금은 콩이 이상한가를 따질 시기가 아니라
그 콩이 밭에 제대로 뿌려지고나 있는지를 검토해봐야 하는 시점입니다.

김교수는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교리적 예수가 제대로 적용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실험)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타적 예수->이웃에 대한 증오->기독교의 사탄화"라는 극단적인 도식도 가능한거겠지요.

이 부분에서 저와 김교수는 완전히 다른 인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아직 적용이 제대로 된적도 없다고 보는것이고,
그는 적용이 이미 끝나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보는 것이구요.

또 오해는 풀고 갑시다.
김교수가 의도적으로 기독교 토대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말한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개혁과 창조를 위한 일이라 믿고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파괴행위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의 열정이나 땀 자체를 부정하는 상식 밖의 글로 읽혀졌다면 제가 글을 잘못쓴거겠지요.
(글쓰기를 통한 대화는 참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삶으로 증명해야겠지요.
저는 평신도이지만, 우선적으로 그 교리적 예수를 심는데 주력하고 싶습니다.

저도 당연히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신앙 선배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조금 믿기 힘든 회심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조금 뭔가를 더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냥 세상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다비아에서 이런식으로 자주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걸때는 좀 많이 걸지만요..^^)
다만 김교수 경우에는 판단과 분석이 가능했기에 그렇게 한것 뿐이죠.
제 수준에서 판단이 안되는 분이었다면 제가 실수하고 있는 거구요.

정목사님의 댓글처럼,
저나 김교수나 아니면 다른 기독인들 모두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온전케 하시는 일이 더욱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길용

2006.10.22 01:21:38
*.28.204.5

그렇다면 일방적인 판단을 선언하시기 전에.. 먼저 잔치님의 '교리적 예수론'을 풀어주시는 것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요?

잔치님의 이야기는 그럼 '교리' (혹은 교리적 예수?) 를 모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서유럽 교회가 교리적 예수를 우습게 봤다는 판단의 근거도 전해 들을 수 있을까요?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22 23:25:50
*.212.2.213

/ 이길용 교수님(?)께

엄두가 안나는 부탁을 하시네요.
교리적 예수론은 과거의 신학적 발자취를 따라가면
누구나 만날수 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종교개혁, 청교도 신학, 유명한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선을 그을수는 없지만 감은 잡을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 등등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지요.
어떻게 보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일시적으로 선을 그은 겁니다.
일단 거기까지 그때까지 쌓아놓은 것이나 제대로 적용해 보자는 거지요.
저는 어거스틴을 지금 봐도 잘 모르겠더군요.
전에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아니더라구요.

물론 성경은 항상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알고 있는것, 과거에 쌓아 왔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으로도 죄인인 인간을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하는 출발점에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뭘 하든 그 때부터는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더 깊은 신학의 경지에 이를수도 있고, 성자와 같은 삶을 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거듭난 다음에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불신자의 삶은 그게 안돼요. 절대로.
일단 아이를 '출생시켜놓고' 보자는 겁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보고 미성숙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서유럽에 대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듭남에 대한 확실한 자각과 그 증거로서 나타나는 거룩한 삶의 모습이
교회와 국가 전체적으로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 모습은 대표적으로 개방적인 성문화로 나타나지요.
다비아도 동성애 같은 것을 꽤 옹호하거나 판단을 보류하는 입장이던데,
동성애는 죄에요. 마치 미움이나 질투가 우리에게 마치 병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죄인것처럼.
죄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건데, 동성애가 죄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분이 그걸 싫어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분께서 알려주신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양심을 통해서,경험을 통해서...
물론 이부분에서도 저랑은 기준이 다르실테니까 그만 하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이런 타락한 모습은 서유럽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을겁니다.
거듭나면 그렇게 살수가 없거든요. 죄를 합리화하고 제도로서 옹호하며 살수는 없는 겁니다.
결정적으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서유럽 교회에 보내는 싸늘한 시선이 그 증거입니다.
초대교회를 로마가 핍박했지만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두려워는 했지만 경멸하진 않았습니다.
세상이 악하긴 해도 교회가 제 구실 하는지 못하는지는 구별합니다.

병원에서는 병을 고치고, 학교에서는 전인적 교육을 하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제공하듯이
교회에서는 죄로 병든 자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새 생명을 얻어서, 수가성 여인처럼 기뻐 뛰는 자들이 나타나게 하는 것. 그게 교회의 할 일입니다.
세상에서 소리없이 절망하던 자들이 교회에서 가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변화,변화,변화,변화!! 자신의 왕이 자신이 아니고 예수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저는 더 고상한 그 무엇을 전하고 다닐 맘은 없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길..

더 이상의 문답은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로 인정이 되는 주제로 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주제들은 아닌것 같습니다.

이길용

2006.10.23 06:22:45
*.28.204.5

저 역시 더 이상의 대화가 별로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잔치님 말씀을 보면 '교리적 예수론'을 '신학적 기독론'과 거의 동일시하는 것 같군요.
과연 '신학'과 '교리'가 일치하는 것인지 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네요.

그리고 서유럽에 관한 말씀은 그렇게 쉽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것이 못됩니다.
일반적인 서유럽인들말고 그곳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잔치님의 방식으로 판단하자면.. 한국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일겁니다.

한 사회, 혹은 그룹에 대한 판단은 그런식으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분명 잔치님의 판단기준은 심하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잣대가 서유럽을 향할때는 더 심하게 그러고 있는 중이구요.

이 두 가지 좀 더 고민하신다면.. 이 대화가 그렇게 유익하지않았다고 볼 수도 없을 겁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어긋난 패러다임의 적용'
'정확한 개념 이해의 필요성'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역사를 그리 좁게 판단치 마세요.."






Eugene

2006.10.24 01:47:27
*.160.189.210

아비규환의 한국에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말고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고 역사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기복주의적인....기타 등등)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나요?

그런 소수의 몇분들이 계시기에
과연 한국의 개신교는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건가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참 무서운 말이군요....

그래도 저같이 소심한 사람들이 그동안 눈팅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잔치님 같은 분들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 저같이 소심한 사람들이" 가 아니라 '저는' 으로 바꾸겠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만 여러분들처럼 제 안에 들어 있는 생각들과 느낌들을
잘 정리해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인 곳이 어디인가?' 하고 찾아 봐야되겠습니다.
한번도 직접적으로 논쟁에 휘말려 들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제 신앙의 심화를 위해서는
아직 제가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피차 사랑이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느꼈습니다.
700번째 다비아 가족이 생겼다면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명단에서 저는 빠지려고 합니다.

만일 제가 틀리고 여러분들이 맞는다면
그리고 제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다시만나겠지요.

그동안 정목사님의 여러 글을 통해 아주 많이 생각하고 도전받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 목사님의 '인격'이 제게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7]늘오늘

2006.10.24 04:58:50
*.239.101.220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나, 그 내용에 있어서나
잔치집가는길 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저보다 훨씬 윗길임을 압니다.
그리고 깊은 호감을 갖고 있구요. 그러나 사안에 따라 적대적인 감정이
전면에 튀는 것은, 한편 오해 탓이고, 한편 미숙함 탓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전쟁같은 과정을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각적으로 내 입맛에
맞으면 히히덕거리고, 아니다 싶으면 투덜거립니다만, 이쪽이든 저쪽이든
내용이 충실한 글 앞에서, 저는 저의 감정적인 글들을 후회하는 일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투닥거리더라도, 사람을 미워하거나 깔보거나하지는 않습니다.
성실함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나와 다른 의견과의 맞부딪침 속에서
반대 입장을 인식/감안/인정하게 되고, 스스로도 성숙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Eugene 님, 우리 미워서 싸우는 거 아녀요. 정말이라니깐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24 23:40:44
*.150.14.92

유지 님이 다비아 회원을 스스로 포기하신다는 말이군요.
조금 섭섭하네요.
서로 생각이 달라도,
아니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배울 게 있을 텐데요.
물론 기분이 상할 정도로 글쓰기의 분위기가 격해지면 문제이긴 합니다.
회원을 그만 두시더라도
간혹 구경하러는 오세요.
그리고 생각이 바뀌면 다시 글쓰기 회원으로 들어오세요.
언제나 문이 열여 있습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0]이쁘지

2006.10.28 11:43:02
*.109.54.20

정용섭님... 님의 글을 이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글이 너무 길어
한편 읽고 싶은 생각마져 들지 않았었는데....
논리적이란말 과학적이란말....과 함께 믿음이란 말은 반대의 말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님의 논리가 좀... 저와는 평행선을 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집니다..
논리와 과학은 변한다는것을 아시는지요... 어제의 지식과 사실이 오늘 다른지식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니게 됨을요...... 암튼 반갑습니다... 글을 다 읽고 이야기 하겠습니다...샬롬~
profile

[레벨:8]김민욱

2006.10.28 18:21:11
*.80.127.227

이쁘지님께.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혹은 저와 생각이 비슷한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 제 생각을 오픈합니다.
아직 글쓰기 초보라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내가 성경과 신앙에 대해 잘 모르는데, 배울 마음이 있어서 들렀다 싶으시다면,
사랑채보다는 가능한 다비아 큐티나 주일 메시지, 기본신학 등을 집중적으로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또는 사랑채에서 길게 논의되는 주제 중에서
정용섭 목사님이 답글을 다신 글을 잘 읽어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몇몇 프로 글쓰기 회원분들을 제외하고는
준프로나 아마추어 글쓰기 회원들이 쓰는 글에서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건강하고 본질적인,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배우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느껴진다', '아시는지요', '됨을요' 등의 단어를 보니까
님도 저처럼 글로 댓글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좋은 글을 통해 잘 배운 다음에
모르는 것을 질문하거나, 토론에 살짝 끼어들거나, 잘 아는 것 같은 주제가 나오면
그때 구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문제제기부터 시작하면 정작 공동체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몇 가지 쓴 경험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질문을 제대로 던지는 것도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에 질문도 제대로 못 던지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말씀묵상이나 주일 메시지,
정목사님이 고백하는 신앙에 중점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이하로는 건방진 몇 마디, 겁없이 남깁니다..^^(......읽어보니 위엣 것도 건방집니다...^^)

왜 자기가 잘 모르는 게 있고,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성경을 통해 전해진 한 하나님을 믿고 배우는 공동체인데,
서로 말이 통하는 대화와 토론이 이뤄지는 것은 참, 정말 어려운 것인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이 자주 언급하시고, 쿠엘류의 책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보편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모든 소통의 문이 열릴까요?
그때가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일까요?

[레벨:0]이쁘지

2006.10.30 11:13:41
*.109.54.20

김민욱님께..
님께서 남길 답글을 읽으며.. 잠시 고민했습니다.. 잘못들어 왔나??? 하구요^^::
대략난감합니다. ::
사랑채라는 자유게시판에서도 정적인 불확실한 어투가 적합하지 않고 논리적인 언어만이
용납된다는 의미로 들리는 군요...
글을 읽고 난다음 소감을 쓰는 것이 저는 그렇게 잘못된것이라 생각은 되어지지 않지만.
이곳의 흐름이 그러하다면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엔 또하나의 틀이 있군요....^^ 제가 못알아 봤습니다...
신학적인 학문의 기초가 없으면 그냥 배우라는 것입니까..
배울것은 배우겠습니다...^^
하지만.. 님들이 갖힌 그 감옥에서 먼저 나오시지요^^ 농담입니다..^^
제가 너무 건방졌나요? 한지체로서 서로 사랑합시다...
profile

[레벨:8]김민욱

2006.10.30 21:21:49
*.80.121.232

이곳의 흐름이고, 이곳의 틀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따라서 님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정도입니다.
쓴 글을 보시고 답글 다셨는데, 쓴 글을 지울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제가 섣불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글로 인해 이쁘지님의 생각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쾌한 혼란을 야기했다면 미안합니다.
제 의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수준만 생각하고 공감을 이룰까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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