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조회 수 1804 추천 수 21 2005.08.31 17: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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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의 글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변변히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리는 것이 예의일텐데 딱히 뭐라 소개할 말이 떠오르질 않네요. 그저 아내와 딸과 함께 서울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민중인 것 같기도 하지만 역사의식이 희박한 탓에 민중이라 불리기도 좀 그런 것 같고, 소심한 걸로 보자면 그저 소시민 같기도 하고, 제 딴에는 시류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기에 대중이라 불리고 싶지는 않고 뭐 그냥 그렇습니다. 편하게 웃어보려고 한 말인데 좀 썰렁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뭐든지 시작이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홈페이지에 들어와서도 도둑 괭이 마냥 살짝 훔쳐보기만 하다가 이렇게 용기를 내서 글을 올리는 건 <정혜신칼럼-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과 그 글에 대한 목사님의 코멘트를 읽고 이것저것 떠오른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워낙 두서없는 것이어서 좀 정리도 해보고 가능하다면 목사님과 이 홈의 가족 분들의 의견도 들으면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 이거 별 이야기도 아닌데 너무 거창해진 것 같네요. 역시 시작이 너무 어려워서...

어쨌든 너그럽게 받아주시길 바라며 그냥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민중이 도대체 뭐냐'고 던져주신 질문을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명쾌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해봤습니다. '민중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민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체가 불분명 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민중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기반, 혹은 배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정혜신 칼럼에서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용된 '역사속에서 구현되는 민심'은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라는 큰 흐름의 물줄기를 거쳐 오늘 여기서 '해석된 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현재의 '날 것으로의 민심'이라고 생각됩니다.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가지의 민심은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충분히 동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못했을 때 벌어졌던 역사 속의 끔찍한 사태들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정리되는데 그 다음부터 생각이 제자리를 맴도네요. 민심을 구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면 그 구분된 민심을 가지고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야하는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대체 어떤 것이, 누구의, 어떤 집단의 민심이 진짜 민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또 민심을 따르는 것과 대중추수주의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도 따져볼 문제일 것 같구요.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어쨌든 민심을 무시하거나 민중을 버리고서는 아무것도 안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중 없이는 역사도 없는 것 아닐까요. 제 아무리 위대한 리더라 할지라도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미 리더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원론적인 이야기에 그치고 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기다리고 설득하고 부둥켜 안아야 하는 것이 민심이고 민중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치 설교자가 청중들을 구원하려드는 것이 아니라 심원한 성서의 지평에 청중들의 삶의 지평이 융해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안내하는 것(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조심스럽네요)과 마찬가지로 민중들 역시 그렇게 역사 속으로 이끌어 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더디더라도 끈질기게 말이지요.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더욱 어긋나가는 사람의 심리를 감안해서라도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민중을 너무 과소평가한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민중을 맹신하는 것도 위험하고... 민중의 양면성을 인식해야... (양비론...으윽)

뭔가 야심차게 글을 시작하긴 했는데 뜬구름만 잡고 만것 같네요. 민중이 뭔지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한데,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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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08.31 23:30:07
*.249.178.18

권요한 씨,
반갑습니다.
어디 사세요?
글을 재미있게 쓰셨습니다.
인터넷 글로 괜찮네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민중이 뭔지 여전히 모호하다고 하셨죠?
그 대목에서 '아이고' 하셨네요.
모호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민중만 모호한 게 아니라 하나님도 모호합니다.
이 말은 그 현실이 불확실하다는 는 게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이 딸린다는 뜻이죠.
아니, 그런 근원적인 것들은 모호한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기 때문이죠.
모호한 걸 실증적으로 규범화하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집니다.
민중 개념도 그 중의 하나죠.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민중신학이 무언가 힘을 주면 줄수록 집니다.
저는 민중신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지만
그것을 추중하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계급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통치'를 규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사랑을 민중만 하나요?
아니면 지식인들만 하나요?
아이들만 사랑하나요?
도대체 누가 사랑을 독점할 수 있단 말인가요?
민중은 하나님의 통치를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통로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신학의 중심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신학논쟁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여기 사이트의 글을 꼼꼼히 읽으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1]권현주

2005.09.02 23:05:07
*.244.165.224

자각한 개인이 민중이라 한다면

역사를 가능한한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위치에서 흐름을 전화시켜나가려 노력하는 개인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지도자가 자신의 역사창조적이며 비판적인 민중성을 제대로 담지하면 할수록,
행복한 공동체가 될 가능성은 높을 것 같읍니다.

민중이란 어떤 특정 계급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보다 가까운 어떤 사회적 힘,
그래서 추출된 개념일 것 같읍니다.
그래서 노동자도, 대통령도 민중이 될 수 있을듯 합니다.
아니 대통령이 민중임을 잊어버렸을 때
혼란은 커지고, 오히려 그는 다른 힘에 의해 조종을 받게되는 것 같읍니다.
이럴때 역사는 방향성을 잃고
문제적인 개인이 더욱 많아지는 것 같읍니다.


민중신학에서의 민중이라는 개념은
어떤 특정한 역사과정에서
추출된 개념일듯 한데 이것을
전체신학과 비교하는 것은
동격끼리의 비교여야한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이를테면
민중만이 사랑을 한다든가 그런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보다 가까운 사랑이 현재로서는 민중의 사랑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정도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있어서 발전적인것 같읍니다.


시간부자를 사칭한 베짱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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