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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하여

조회 수 4908 추천 수 0 2009.09.03 2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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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

성경을 바르게 해석 및 적용해야 함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 해도 성경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라면 좋은 해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한 주석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그릇된 해석 중의 하나가 일천번제를 천 번의 제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것이 천 번의 새벽기도 혹은 천 번의 헌금 등등으로 교회 속에 존재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천 번을 작정하고 새벽기도 혹은 헌금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솔로몬의 일천번제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해석 중의 하나가 천 마리의 짐승재물로 드린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천번제의 일천을 천 번(횟수)이 아닌 천 마리(물량)의 재물로 해석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주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타당해 보이는 듯하지만 이도 바른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 마리의 짐승을 재물로 제사 드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번제에 대한 설명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번제는 재물을 통째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본문에 여러 날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시에 일천 마리의 재물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천은 정확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도 타당해 보이는 듯하지만 자의적 해석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일천에는 그와 같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주석은 주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위의 세 가지는 부당하거나 부족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 밖의 주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천’에 대하여~

일천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번제) 엘레프(일천)’로서 ‘일천+번제’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한자(漢字)와 같이 상형문자입니다.

알파벳의 하나하나에 상형의 의미가 있습니다.

알렙(א)은 황소, 베트(ב)는 집(house), 김멜(ג)은 낙타 등등, 22개의 알파벳마다 상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형적 의미에 있어서 알렙이 왜 황소인지, 베트가 왜 집인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고 지내다가 이참에 김강섭(원어성경연구원장) 교수님을 통하여 상형적 의미의 형성과정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것이 히브리 알파벳의 본질적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렇듯 일천번제는 상형의 의미를 가지게 된 알파벳의 본질적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렙의 상형적 의미는 ‘황소’입니다.

알렙의 형태를 자세히 보면 황소의 뿔처럼 생겼습니다.

여기서 소는 주인의 가르침을 본받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가르치는 대로 길들여지는 속성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알렙의 동사형은 ‘알라프’로서 ‘본받다’, ‘길들여지다’는 뜻입니다.

이 속성을 가진 알렙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알렙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길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축을 하는 고대 유대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동물 중에서 단연 소가 그러한 동물이기에 알렙이 차용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받다’, ‘길들여지다’는 의미를 가진 소, 그 소의 상형을 따라 만들어진 알파벳이 알렙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소를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에는 알렙이라는 알파벳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에서도 재물로 언급되는 숫 소의 단어는 ‘소르’인데 이 단어에 알렙이라는 알파벳이 없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파르’라는 단어가 쓰이지만 여기에도 알렙은 없습니다.

정말 이상하지요?

알파벳 알렙의 상형적 의미가 황소인데, 실제 소를 가리키는 단어에는 알렙이라는 알파벳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 히브리어 첫 알파벳인 알렙의 상형적 의미는 황소라고 했습니다.

- 그러나 실제 소를 가리키는 단어에는 알렙이라는 알파벳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 또한 알렙의 본질적 의미는 ‘본 받다’, ‘길들여지다’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조금 복잡해지더라도 위의 세 가지를 기억하시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품사의 출발은 동사입니다.

명사, 형용사 등등은 동사적 의미로 설명할 때 명확해진다는 뜻입니다.

또한 모든 파생어도 동사형을 기본형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동사형 알라프의 어원을 가진 단어로 기록된 성경 몇 군데를 보겠습니다.

잠22:25 ~ 본받아 ~ : 여기서 본 받는다는 것은 대상을 닮는다는 뜻의 알라프가 사용된 단어입니다.

욥15:5 ~ 가르치나니 ~ : 여기서 (부정이든 긍정이든) 가르친다는 것은 곧 길들인다는 의미의 알라프가 사용된 단어입니다.

욥33:33 ~ 가르치리라 : 여기서도 길들인다는 의미의 알라프가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일천번제에서 ‘일천’을 가리키는 단어가 ‘엘레프’입니다.

이 엘레프의 동사형도 알라프입니다.

이제 마지막 고개를 넘겠습니다.

엘레프는 숫자 일천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일천번제의 일천은 결국 숫자가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성경이 해석하기를 일천을 숫자로 규정해놓고 다만, 이것이 횟수일까 물량일까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복잡한 문제이고 동시에 함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내용이기는 하지만,

일천번제의 일천을 횟수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왕에 즉위하여 2년 반 이상을 매일 번제를 드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일천번제의 일천을 물량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 정주영회장이 북한에 가지고 갔던 소가 500 마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난리였는데 3천년 전 고대에 일천마리라면 어떻겠습니까?

운송수단, 먹이감, 땔감 등등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결국 일천은 숫자로서 풀어볼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일천이라는 숫자는 천 번의 제사냐, 혹은 천 마리의 재물이냐를 따지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숫자 일천에 대해 고민하다가 제가 과거에 수학 전공자와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그 때 들었던 ‘숫자는 신비’라는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는 1과 2 사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구분할수록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수들만 확인될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숫자는 그렇게 신비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가장 난해한 해석 중의 하나가 숫자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숫자의 비밀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해서 일천을 가리키는 엘레프의 의미를 찾아 기본 동사인 알라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어를 해석할 때 어원적 의미를 찾는 것은 기본일 것이기에 여기서도 엘레프(일천)를 기본형을 따라 ‘본받다’, ‘길들여지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일천번제에서의 일천은 나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길들여지기를 바란다는 겸손하고 순종적이고 진심어린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비워진 인간의 마음에만 하나님의 지혜가 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번제에 대하여 ~

일천번제에서 ‘일천’과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번제’라는 제사입니다.

예수의 사역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제사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먼저 하겠습니다.

오경 속에서의 제사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하나님이 알아서 세우는 그런 피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을 통하여 인간과 함께 세상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원리적으로는 땅 위에서 실현되는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오경은 궁극적으로 이 땅 위에 형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지고 통치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세상 속에 이루는 제도 또는 도구가 언약이고, 이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이 바로 제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사의 본래의 기능은 파기된 언약을 회복, 유지, 발전시켜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 제사는 종류도 많고, 방식도 까다로운 만큼 의미와 목적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분류하면, 제사에는 죄와 관계있는 제사가 있고(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죄와 관계없는 제사도 있습니다(번제, 화목제, 소제).

여기서 주시할 것은, 번제와 화목제는 죄와 관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인데, 오늘의 주제는 번제이니 번제만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번제는 재물을 통째로 재만 남도록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죄와 관련이 있는 경우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진노로부터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어느 정도의 진노인가 하면 죄인을 재만 남도록 불태울 정도의 진노입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번제를 이것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의 사역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와 관련이 없는 번제의 경우입니다.

이런 번제가 성경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창22장의 이삭을 드리는 제사가 그렇고, 출24장과 시50편의 번제가 그렇습니다.

특히 일천번제를 다루고 있는 왕상3장의 번제 역시 죄와 관련 없는 제사입니다.

여기에 일천번제의 또 다른 핵심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번제가 죄와 관계없는 경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전적 포기를 의미합니다.

어느 정도의 포기인가 하면 동일하게 내 몸을 재만 남도록 불태울 정도의 포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까지도 불태워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삭 번제의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존 앞에서 모든 인간적 요소(전제, 업적, 경험, 확신, 심지어 신학까지도)를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은 능동이 아닌 수동입니다.
그냥 버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역은 이것과도 동일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기는 포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 포기의 다른 표현은 전적 헌신(열정적 삶)입니다.

인간적 요소가 포기되었기에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역이 자리하게 됨으로 불타는 열정적 삶을 살 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사역에는 전적인 포기임과 동시에 전적인 헌신도 담겨 있습니다.

한 때 순교자의 삶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서도 절대포기와 절대헌신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헌신의 분량은 포기의 분량과 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절대포기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절대헌신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헌신이 없는 이유는 절대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헌신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비워진 마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헌신이 현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적 욕망에서 기인된 헌신은 죄악 중의 죄악임을 전제합니다.


사랑으로 유추해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쌍방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동일하게 불타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도 사람은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자신을 불태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동일한 사랑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렇듯 죄와 관계없는 번제란, 인간적 요소가 포기 된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하나님께 불타는 열정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됐습니다.

일천번제란 인간적 요소를 재만 남도록 불태우기까지 포기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본받겠다는 진정의 제사입니다.

그 심층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사건은 완전한 일천번제였습니다.

그러나 일천번제를 열왕기서 전체 속에서 해석해야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니 이것으로 줄이겠습니다.


일천번제의 의미를 빌립보서 2장과 연결하여 결말을 맺고 싶습니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레벨:11]박승수

2009.09.03 22:17:45
*.238.212.49

제가 시건방을 떨어봤습니다.
저에게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지적해주시고,
다른 견해를 말씀하시면 배우겠습니다. 
profile

[레벨:13]하늘바람

2009.09.04 09:13:57
*.77.134.134

박승수님! 오늘 아침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감사!
퍼가도 되겠는지요?...

[레벨:5]권요안

2009.09.04 12:08:13
*.62.46.18

정성이 담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일천'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정용섭 목사님께서 약간 파격적(?)인 설교를 들려주신 덕분에 다시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일천'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글자 그대로 숫자 일천을 뜻하는 것일 뿐이 아닐까 합니다.

왕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끝내고 제사를 드리는 기사가 보도되는데, 거기서 드린 재물의 숫자는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천'과는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그렇게 제물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앞 놋단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성서 기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꼼꼼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엄청난 양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가능한 장소까지 빠뜨리지 않고 세세하게 기록해 놓은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왕상 3장 4절을 보면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간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바로 산당의 크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일천'이 숫자가 아니라 다른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면 굳이 그 앞에 산당의 크기를 적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천'이 제사의 횟수를 의미한다면 역시 산당의 크기는 별 관계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솔로몬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많이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런 저런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솔로몬 스스로 자신을 평가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전도서 1장을 보면서 말입니다. ㅎㅎ

[레벨:11]박승수

2009.09.05 06:15:13
*.238.212.49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해는 떳다가 지고 그 떳던 곳으로 빨리 돌아 가도다 ~'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가수 조하문이라는 분이 부른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 이것도 헛되고 저것도 헛되도다'
모든 사람이 인생 말년에 하게 될 고백같습니다.
이것을 현재에 적용하기 위하여
저는 늘 시131편을 읇조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

[레벨:12]라크리매

2009.09.04 12:44:14
*.41.16.153

박승수님께서 오랜시간 성경을 붙잡고 고민한 흔적이 보이네요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과 그 도구는 정말 무궁무진 한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성경의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것이 참 다행 같기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한다면 자신의 자아는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나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이후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성이란  도구, 신학을 버리려 하겠죠 
성경말씀의 깊이안으로 들어가려는 많은 노력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분별해낼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신학이란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고
다른이들의 생각과 경험으로 대리 만족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벌거벗은 나자신과의 독대이며 그순간 그 벌거벗음이 가능하는냐의 문제 같습니다
우린 모두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살고 있어서겠죠
올리신 글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레벨:6]geunfeel

2009.09.04 13:03:55
*.156.50.18

잘 읽었습니다. 놀랍네요

[레벨:6]geunfeel

2009.09.04 13:03:57
*.156.50.18

잘 읽었습니다. 놀랍네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9.04 13:32:19
*.229.154.102

박승수님,
와, 장문, 감동이어요. 그래도 머 거뜬히 읽어냈슴다.^^
승수업빠 화팅!! 아자! ^^

[레벨:11]박승수

2009.09.05 06:03:34
*.238.212.49

화팅보다 비판이 먼저인데,...........
번제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행위를 강조한 듯이 비춰질 수 있기에 조금 염려됩니다.

라라님의 댓글에 젊어짐을 향한 치열함이 보이는군요.
제가 왜 오빠에요?
큰 누님 !!!

[레벨:10]나이스윤

2009.09.04 17:22:48
*.135.222.23

박승수님~ ^^ 잘 읽었습니다~
무림의 고수들이 다시 중원으로 모여 일합일리하며 나아가는 
공간이 되는 단초를 계속 주시기를 바라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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