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자전거 타는 풍경

조회 수 3283 추천 수 36 2005.07.14 07: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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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운동을 하기 위해서 초등학교의 운동장을 향해 공을 들고 달려갔다. 그런데 전과 다르게 그곳에는 한 노 부부가 자전거를 끌고 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공을 땅에 내려 놓고 잠시 몸을 푼 후에 공을 가지고 놀기(운동) 시작했다.

   들어오면서 보였던 두 노부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정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들안에 감추어진 무엇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모습이다. 성령을 부르는 말에는 보혜사라고 불리우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말과 영이라고 불리우는 푸뉴마라는 말이 있다. 오늘 내가 만난 것은 바로 파라클레토스적인 성령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자전거를 붙들어 주면서 계속해서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하는 것인지,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넘어지지 않는지 계속해서 조언을 해주며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때론 할머니의 잘못을 꾸짖으며, 때론 격려를 하며, 할머니의 자전거를 잡아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속에는 성령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할머니의 자전거가 서서 달릴 수 있도록 돕는 할아버지, 그안에 성령이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자전거 솜씨는 아직은 서투르지만 할아버지의 도움을 통해서 그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모습이겠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도우며,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성령님을 나는 자전거 타는 두 노 부부의 모습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에 생명력을 일깨우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꿈지기의 생각나눔>

그냥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여서 어눌한 글을 올려봅니다...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저를 부디 이해해 주시길...
오늘도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시는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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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바이올렛

2005.07.14 10:01:39
*.54.119.8

유목사님!
여기 멀리 경상도까지...잘 전달되고있습니다.
글 내용의 풍경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아름답습니다...^*^

[레벨:6]유희탁

2005.07.15 21:25:26
*.85.186.38

김장로님 감사합니다...리플을 달아주시고...
두분의 다정한 모습이 넘 아름다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7.15 22:52:37
*.249.178.23

할머니의 자전거 배우기라...
눈에 선하군요.
나는 아직 집사람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지 못했는데,
아직 늦지 않은 것 같네요.
자전거 타기가 좀더 보편화했으면 합니다.
나도 매일 자전거를 탑니다.
집에서 연구소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묘미는 아는 사람만 알기 때문이죠.
할머니가 결국 자전거 타기를 배웠나요?

[레벨:6]유희탁

2005.07.16 06:46:40
*.225.129.153

처음보다는 익숙하게 움직이시는 것까지만 보고 들어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제 제법 움직이실 것 같은데...

그리고 전 허리가 좋지 않아...의사가 ...자전거를 보류하더군요..
허리에 무리가 간다고...ㅠ.ㅠ

[레벨:0]강현수

2005.07.16 22:43:02
*.209.78.49

유목사님 반갑습니다^^ 결국 성령은 감정과 의지를 가지신 분이며 이런 그를 먼저 인지하는 것이 그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군요.

[레벨:7]허정수

2005.07.17 05:10:58
*.194.245.96

강목사님
더운 날 목사님 가정에 평강의 시원한 바람이 항상 함께하시길^^
이러면서 더운 이야기를 올립니다.
'성령을 먼저 인지 하는 것',
생각 할수록 인간적인 욕심에 갇힌 표현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역사에 먼저 앞서서 성령을 인지한 경우가 있는지요?
오히려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을 인지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것도 인간의 해석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한계를 받아 들일 때 가능하겠지요.

[레벨:0]강현수

2005.07.22 19:07:42
*.209.78.228

성령을 인지한다는 것은, 성령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성령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니라서 눈에 보이는 어떤 물체처럼 확고한(?) 믿음으로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갖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이 눈 앞에 현상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굳이 믿음의 눈이라 말하지 않겠죠. 앞에서의 인정은 바로 이런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존재함과 활동함을 인정(믿는)하는 것. 저는 성령을 개인적인 지평에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성령의 개인적 체험을 좋든 싫든 대답해야하는 목회자이기도 하거니와,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아도 그것의 실체(?)는 분명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인정하였던 그 실체는 그것의 역사적 지평을 논하기 전에 분명 개인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묻는 바울에게 성령은 어떤 실체였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아직 명쾌하지 않는 탓에 이처럼 복잡한 답(?^^) 이나오는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죠^^ 대구 이렇게 더운 줄 몰랐네요^^

[레벨:7]허정수

2005.07.24 22:01:18
*.115.180.95

숨 막히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한줄기 시원한 바람의 고마움이랴!

용어의 해석과 개념의 적용이,
혼돈에 빠지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으로 비약될 때,
소통은 단절되거나 왜곡되기 쉽습니다.
강목사님께서 쓰시고 정리하고 해석하신,
‘인지’=>‘인정’=>‘믿음’, 그리고 ‘개인적인 지평’이라는 표현들은
지극히 주관적인(인간중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며,
용어 개념간의 논리적 유기성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하기에 ‘인간적인 욕심에 갇힌 표현’이라는 저의 언급은 유효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 또한
확고하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이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에 대한 확고함을
단정지을 수 없게 만들 뿐만아니라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비켜가는 것과 같은 언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구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한 구별해서 논의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가정에 주님의 평강이...

[레벨:0]강현수

2005.07.26 10:38:12
*.209.78.228

^^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릅니다만, 신학은 보이지 않는 물건을 파는 단체(?)의 웍샵교재와 같은 것 아닐까요. 제가 단순한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학문은 있는 것을 연구하지만, 신학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국문학을 하는데 있어 믿음이 전제요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어온 것(보이는 것)을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신에 관한 한, 성령이든, 하나님이든 믿음의 전제 없이는 이야기가 어렵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믿음이란 보이는 것의 여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란 말은 더 철학적이지 못한 제겐 이해하기 힘드네요^^ 믿음이란 단어 자체가 믿어야 하는 것을 필요로하기 때문에 나온 단어 아닌가요.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아닌가요. 오감으로 인지가 가능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로서의 믿음의 문제이겠지요.

일하는 중에 급히 적어 횡설수설일 듯합니다. 하지만 신학은 철학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 경계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없는 것을 믿음, 아니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있다고 거의 확신하는 수준으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둔한 대답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걸걸한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방학 빨리 끝나서리.

[레벨:7]허정수

2005.07.27 15:32:11
*.85.46.78

믿음이란,
현상이나 그 현상의 해석,
신념이나 그 신념의 심화,
귀납적이든 연역적이든 어떤 과정으로도
그 믿음 자체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이란 단어가
믿어야 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긴 단어라는 표현은
마치 ‘진리’라는 단어도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단어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다시 말해서, ‘필요’에 의해서 진리가 생성 된 것이라는 왜곡에 봉착하게 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종교를 ‘인간의 나약함이 빗어낸 것’으로 규정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리’나 ‘믿음'을
우리가 알 수 있고 규정 할 수 있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은 결코 알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있을 것이기에
인간의 필요나 불필요와 같은 이분법적 정리로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절대 한계로 말미암아
결코 한정 지을 수 없고, 가둘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진리’나 ‘믿음’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논의 되는 ‘믿음’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며,
또한 가시적인 것이든 불가시적인 것이든
대상의 개념으로 잡아내려는 노력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부조리한 한계 앞에서, 이로 말미암아
새삼 역사 속에서 임재하시고 종말에 함께하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숨결을 앙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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