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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조회 수 528 추천 수 0 2016.09.28 0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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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오늘의 일반적인 예배는 대부분 종교적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이미 오랜 시간 만들어진 예배라는 고정화된 이미지가 있어, 그런면에서 예배의 보편적 이해는 '성도들의 종교 행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그런 종교적 행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배는 영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영적이란 곧 영원이다. 영적 예배란 곧 영원으로의 하나됨이다. 결코 육신의 행위적일 수 없는 분명한 이유다. 행위적이란 표현 속에는 물질적 헌금이란 것도 포함된다. 오늘의 예배에서 헌금이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구약의 제사법 속에 담긴 의미를 오해한 오늘 종교화의 소치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행위란 곧 인간적인 형태를 총망라하는 모습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만 한다고 했다. 곧 '성령과 진리' 즉 '진리의 말씀'이다. 즉 어떤 형태의 행위적인 것도 아닌 인간적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말씀에의 인식, 이해, 서로 간의 공감과 교류 자체가 예배다.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그저 종교적 인간의 행위들일 뿐이다. 인간들끼리는 인정할 수 있으나, 예배와는 상관없는, 즉 상징적이긴 하지만 일종에 금송아지라는 의미다. 바리새인의 열심이기도 하다. 그것의 확대가 곧 바울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던 것처럼, 십자군 전쟁 같은 것으로 드러났다.

영원과 하나되지 못한 사람들의 예배는 그저 종교 행위일 뿐이다. 그러기에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행위처럼 그렇게 발악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당시나 오늘도 예외없이 그리스도 임재가 없는, 곧 영원과는 상관없는, 곧 말씀으로가 아닌 형태적 종교의식에 샘플이기도 하다.

성경적 예배는 형태적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 형태적 곧 행위적이지 않은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 육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선 그리스도 임재 곧 그 하나됨이 없이는 예배 자체가 불가능하고 하나되어도 행위 또는 형태는 줄이고 말씀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레벨:12]staytrue

2016.09.28 19:38:18
*.36.142.238

목사님,
제가 옳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목사님의 그리스도 임재라는 표현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앞에서는 어떤 교리고 철학도 소용없다고 봅니다. 뭐 이걸 체험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기독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것 같고요.
기독교는 정말 깔게 많다고 생각하는데도 말이죠 ...

그런데, 기독교를 말아먹은건 바울이라는 생각에 어느정도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바울은 ... 음 .. 이건 중요한게 아니고, 그리스도 임재에 대한 자세한 목사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이런 부분이 어렵다는 건 압니다.
제 생각에 이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외부에서 침투당하는 거거든요.
어렵네요 .. ㅎㅎ

[레벨:8]김인범

2016.09.28 22:02:08
*.179.49.182

물음이 제게는 참 고맙습니다.

위의 글은 최근에 쓴 것이 아니고 이미 좀 되었던 것인데 문득 발견되어 다시 올린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바울이 기독교를 말아 먹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 신앙의 온전한 해석가였다고 보입니다.
아마 바울이 없다면 오늘의 나 같은 성경 해석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제 시각에서 바울은 예수와 하나된 곧 그리스도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제대로 신앙을 가진다면 그 바울 처럼 그렇게 예수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임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임재'라는 표현은 인간들끼리 소통을 위해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은 '말씀의 이해'를 일컫는 것이라고 해야합니다.
물론 이 말씀의 이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오늘 대부분의 목사들도 나름의 말씀 이해를 전재로 설교를 하고 있으니까요.

예수가 요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면서
'내가 이른 말이 영(성령)이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성령세례'와 '그리스도 임재'를 병행해서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쓰는용어가 성령세례라면
같은 개념으로 제가 쓰는 표현이 그리스도 임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성령을 내가 이른 말, 곧 그 말씀으로 해석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세례는 어떤 신비한 현상이 아니라 그 말씀의 이해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있지만 설명이 실제는 이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단 말씀의 하나됨, 임재, 이해됨은 전통적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그것을 제가 요즘에 글로 표현해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주 건방진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의 역활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 곧 그리스도의 임재는 결국 그 예수와 같이 되는 것이기도 하기에 가능합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족보이기도 하고 예수의 비유 중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혹 새로운 이단이 출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실은 바로 이런 것이 전통적 그리고 정통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문제이기도 하지요.

바울이 기독교를 말아 먹은 것이 아니라 실은 종교화가 성경적 신앙을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종교 안에서 실은 그 내용, 곧 그 진리가 영그러 가는 것도 예정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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