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지식 유감

조회 수 2549 추천 수 17 2005.04.20 19: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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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적 관점에서 우리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왔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인간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파괴해야 하는가? 생태 친화적인 한의학이 생물질의 약리작용을 통한 자연 친화적 치료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하는 사회적 행위관계로 바라보면, 생태 파괴적이라는 원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치료의 행위와 물질을 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사회의 구조적 순환 속으로 강력히 흡수되기 때문이다. 이는 생존본능으로서 인간은 재화를 필연적으로 구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재화는 교환을 수반하게 되며, 교환은 지식을 전제하게 된다. 즉 재화를 구하는 과정 전반에 지식이 자리잡게된다. 나아가 교환으로 전화하는 지식은, 물리적 재화와의 교환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에 자비, 선, 사랑 등의 개념과 같은 형태로 지식은 교환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인간적인 판단인 한에 있어서 비물질적인 재화로서 작동한다. 지식의 전화된 교환형태는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과의 교환,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과의 교환, 비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과의 교환방식으로 고착화 된다. 여기서 비물질적인 것이 변증법적인 지양에서 도출된 것 같지만 사실은 피라미드구조와 같은 계층적 구조 혹은 먹이사슬의 상층구조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구조 중심에 지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지식의 작동이 인간중심적인 한계 안에 묶임으로 말미암아, 지식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원죄로서 작용한다. 지식에 포로가 된 존재가 인간이다. 지식에 포로 된 인간의 삶의 태도와 신념, 가치체계의 해방은 어디에 있을까?

   지식 안으로 들어가서 전화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원시공동체의 공동사회에서 재화생산 방식은 생명연장의 이기성을 전제로한 우연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뤄지며, 이 경험의 방법적 축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 그리고 공동체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 차이는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지식의 차이인 바, 나아가 이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보유한 쪽으로 편중된다. 편중은 힘의 형태로 작동하는데 이것이 권력과 자본이다. 지식의 편중이 권력과 자본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사회는 본래적인 삶(공동체적 삶)으로부터 심각한 이탈을 초래하게 된다. 이제 지식은, 이를 확보하는 방법을 강화하려는 권력과,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필요재화를 넘어선 재화의 축적인 자본으로, 그 자체가 가진 동질성의 확보와 확장을 위해 삶의 방식을 규범화하고 체계화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확장하고 심화하는 ‘자기 동인’으로 활동하게 되며, 공동체 속에서 혈연, 지연 등으로 승계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확대 재생산을 통하여 사회는 다층적으로 구조화하고 복합화 되어간다. 그리고 권력과 자본의 유지를 위하여 규범과 체계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다수의 수용자와 생산기반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진행 속에서 지식은 사회적 규범을 심화 확대하며, 체제유지를 위한 도덕적 당위성을 신념화 시킨다. 한편, 지식의 ‘자기 동인’은 권력과 자본의 이동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지식에 포로가 된 인간의 이기적 속성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의 이동이 지식구조의 본질적 변혁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식은 권력과 자본의 변동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욕구의 심화와 강화를 경험하게 되고, 다시 권력과 자본은 더욱 큰 규모로 확대 재생산 된다. 어떻게 보면 이 권력과 자본이동의 역사는 지식의 역사이며, 이 지식은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하여 소멸되지 않을 신화가 되었다. 결국 이 지식은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끊임없이 충동하여 종국에는 인간의 생명을 삼키고 말 것이다. 아마 이 지식은 생명파괴의 전조현상을 역사적 추론 속에서 알아내었을 것이지만 ‘자기 동인’의 절대한계로 말미암아 종말의 그 때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경우로 의료지식을 살펴본다. 우리는 흔히 의료지식의 발전이 인간의 생명연장과 건강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료지식의 강화와 심화가 인간생명의 치료와 연장을 담보한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착각이다. 의료지식의 발전을 역사적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이 지식이 인간의 생명연장과 건강유지를 위한 필요로부터 발전했다는 생각은 대부분 오해이다. 왜냐하면 의료지식의 발전은 인간의 이기적 속성과 자본의 역사성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생명연장과 신체의 건강에 갈급함을 가진 유한한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치료행위를 구하게 되는데, 치료는 재화를 요구한다. 인간은 재화를 확보하기 위해 체계화되고 복합화 된 사회의 자본구조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활동이 대체로 이런 구조다. 이런 인간 중심적 한계에 묶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본의 이동이 먹이사슬처럼 순환되며, 우리는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식을 점유하려고 경쟁하게 된다. 나아가 인간사회는 이러한 경쟁을 규범화하고 체계화하며, 인간의 지식의 발전은 스스로를 심화하고 강화한다.

   자본의 순환구조 속에 놓인 인간의 지식활동은 자신의 이기적 속성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화-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확보를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시지프스 신화처럼. 그러나 우리는, 지식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시나브로 갉아 먹으면서 성숙하고 축적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인간의 역사 중심에 지식이 있는 바, 지식에 포로가 된 인간의 종말은 덧없는 죽음으로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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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04.21 12:10:50
*.181.160.89

허 선생,
맑스의 <자본론>의 한 구절을 읽는 것 같네요.
책읽기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회과학적 사유가 이렇게 치밀하다는 것은 또 한번 놀랄 일이군요.
도구주의적 지식론이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묵시록적 분위기가 감지되는군요.
인간사회를 내면적으로 뚫어보게되면 그런 불운한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지식이 도구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길을,
그리고 묵시록 이후의 어떤 세계를 내다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식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의 도구로 사용될 염려도 있지만,
오늘은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어떤 깨달음을 경지로 끌어주는 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에게 신학과 인문학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도 그만큼 독단적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런 신학적 지식이 자기를 성취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지요.
그건 그 사람의 세계관의 문제이지 지식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지식 정보학이 만연한 오늘의 삶에서 지식 존재론(?)으로 들어간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은 당위일지도 모릅니다.
신학적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만들지,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사용될지 두고두고 성찰해야 할 것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레벨:0]박석원

2005.04.21 13:08:32
*.236.24.201

현실적이자 사적인 사건에 대한 배경을 가진 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자세히 알 길이 없으니 제 답글이 공허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용기를 내서...

지식이 자본화 되어가는 현실을 의료지식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인 저로서도 어느 정도는 고개가 끄덕여 지는 바가 있습니다.

미국의 자본주의의 득세로 인한 지식의 독점화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기는 합니다만,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또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거대할 지라도 감히 '전부'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감정적인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고 말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우리의 신앙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출애굽기의 성막을 짓는 장면을 보면, 성막을 제조하는 기술을 가진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성경은 지혜롭다고 표현합니다. 지식을 목적화 하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술도 파괴적인 것이 되고 말겠지만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거룩한 도구로 사용할 때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 무지에 대한 변명이기는 합니다만...
좀 어려운 글이라 저 같은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댓글을 달기가 겁나기는 합니다만
잘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읽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

[레벨:7]허정수

2005.04.21 18:54:06
*.115.91.170

세계내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은 관계의 문제도 관점의 문제도 아닌 필연적인 한계인 것 같습니다.
지식에 포로 된 우리에게
해방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시공간에 갇힌 우리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단절할 수 있는 최종선택이 있긴 하지만...
포로 된 삶을 관통할 수 있을 지,
단지, 헤매는 인생으로 끝날 지,
우리 대다수는 자유 할 수 없는 헤매는 인생에 속한 유한한 존재며,
이것마저도 알지 못하는 존재일 겁니다.
그래서 갈급함이고, 목마름이며, 배고픔이고, 갇힌 자 된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
저만치
빛이 드러나고
그 빛이 우리를 인도하기를...

[레벨:7]허정수

2005.04.21 18:56:43
*.115.91.170

박석원님 안녕하십니까.
온라인상으로 인사드립니다.
먼저, ‘의료지식’을 예로 든 것은 저의 사적인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사실 이글을 올리면서 님을 포함한 다른 분의 현실적 위치를 언듯 떠올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도도 없음을 이해해주시고, 관용을 구합니다.
한편으로 님의 ‘성서 아카데미’ 사랑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지식은 인간의 도구가 맞을 겁니다.
그러나 습관에 포로 된 자, 술에 포로 된 자, 마약에 포로 된 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지식에 포로 된 자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간중심적인 한계 안에 묶임으로서 말입니다.
나아가 그 근저에 지식의 속성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일 뿐 하나님의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전적인 타자’로 있을 뿐,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일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며,
영에 철저히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야 할 그런 깨달음 속에서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훈이었습니다.^^
삶의 고난과 불의함을 겪을 때 종종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감사드리며, 님의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늘 함께하기를...

[레벨:0]조기성

2005.04.22 08:55:18
*.107.149.160

1.
'선지자적 비관'이라는 말로 인해
오랜동안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제가 겪고 있던 불합리에 대한 내 안의 들끓는 감정과 분노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치만 대안은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들에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라는 말의
무책임함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2.
허정수님의 글에 십분 동의합니다.
님이 말씀하고 계신만큼 절박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지식의 폭력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서도요...
님의 글은 늘 가르치는 삶의 언저리에 살아가는 저와 많은 분들을
충분히 불편케 하리라 생각이 들구요.
그럼에도 저 역시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리고 박석원 님이 말씀하신
여지와 가능성에 대해 손을 들고 싶습니다.

3.
그럼 이제 우리는 우째 해야하는 건가요?
그런 이야기도 여기서 나눌 수 있을까요?

4.
한가지 덧 붙이지면
소수이고 아주 미약하지만
지식의 그런 폐해에 대해 반기를 드는 움직임은 어떻게 보시나요?
지식을 무상으로 공유하자는 움직음......등등
그리고 '인터넷'의 등장은
새로운 변수와 매개체로 이미 작동을 시작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제 지식을 얼마나 소유하고 얼마나 양질의 지식을 소유했나보다도
지식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공유하는 가가 좀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이 되고 있지 않나요?
이미 넘쳐나고 있는 이런 종류의 클럽들과 블로그들이 한 사람이 몇 년에 걸쳐 습득한 지식을
몇 달만에 습득할 수 있도록--그것도 어느 정도 건강하게
견제와 조화를 이루며 좀 더 발전적으로--어디에서나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거 같은데요.

[레벨:7]허정수

2005.04.22 16:55:29
*.115.42.60

지금도 저는 저를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함에 가슴이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출구는 찾아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출구(대안)없는 의식(비판)은 허무주의적 종말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안을 찾으려고 세대를 관통하는 노력을 해야 하겠지요.
이 시점에서 정목사님이나 조기성님 같은 분들이,
진리의 길, 그 좁은 문으로 가는 도상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기성님께서는 ‘지식’을 ‘가르침’의 도구로서 비중을 많이 두는군요.
저는 가르침을 두 가지의 경우로 봅니다.
하나는 유용성과 효율성을 중심에 둔 가르침과
또 다른 하나는 진리로 이끄는 가르침이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중심적인 한계 내에서 이뤄지고,
후자는 진리와의 관계에서 경외롭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그 자체가 ‘폭력적’이거나 선행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구적으로 사용할 때 폭력적이거나 선행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제가 말한 지식은 그 속성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절대한계 안에서
권력과 자본으로 전화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여지’와 ‘가능성’은 우리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지향’이나 ‘발전’이라는 개념이 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향’은 ‘지양’으로, ‘발전’은 ‘과정’으로 한계 될 뿐
지향이나 발전은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서 성취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매개된 지식의 확산이, 소수에서 다수에로 보편화되고 공유하면서,
지식의 속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이전의 지식이 일반화-보편화가 아닌- 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심층화되고 확장된 지식이 이전의 자리를 차지할 뿐입니다.
또 다른 지식체제의 독점과 규범화를 통해서 권력과 자본으로 다시 고착화된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형태의 반복이 환상순환구조적이며, 인간의 포로 된 존재로 한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동은 있을 수 있지만 발전하거나 초월하거나 해방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진행을 우리는 종종 발전이나 지향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합니다.

저도 우째해야 할 지 모릅니다.
알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면서, 또한 조기성님의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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