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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무엇인가? -송재왕, 이동균 군에게!-

조회 수 3111 추천 수 29 2004.12.17 13: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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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왕, 이동균 군에게!

송 군은 지난 가을 학기에 내게서 <신학과 철학>을, 이 군은 <신학입문>이라는 수업을 들었네. 송 군은 작년 가을 학기에 이미 <신학입문>을 들었지? <신학입문>은 신학 초년생들에게 신학 전반에 대한 개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최소한 7년 이상 신학을 공부할 사람들에게 신학의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과목보다 중요하다네. 독일 신학대학교에서도 이런 과목은 대개 원로급 교수들이 맡고 있다네.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신학도 역시 그 토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지.
<신학입문>만이 아니라 신학대학교에 개설되어 있는 이론과목들은 학생들과 선생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자네들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 같으이.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개입되고 있는데, 줄여서 말한다면 신학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의 학문적 태도가 거의 한국 교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데 있네. 수업 시간에도 몇 번 설명한 적이 있을 텐데, 한국교회에는 신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아주 뿌리 깊다네. 일종의 ‘신학무용론’이 숙명처럼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 신학대학교에 들어와서 충격을 받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네.
그런 학생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지. 한 부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위해 들어온 3,40대 학생들이 있네. 앞에 속한 학생들은, 대학생인 내 큰 딸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바처럼 본질에 대한 사유(思惟)가 전혀 없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신학생이 되었지만 신학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대충 시간을 보내고 있지. 인생살이의 경험이 제법 많은 뒤에 속한 학생들은 신학에 대해서 어린 학생들에 비해 훨씬 진지하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인 근본주의에 지나치게 오랫동안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을 향해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네. 어린 학생들은 생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이고, 나이 든 학생들은 본질적이지 않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걸세.
신학생들이 어떻게 바른 신학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네. 왜냐하면 이 물음은 겉으로 보면 신학 방법론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네. 어떻게(how)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곧 신학이 무엇(what)인가 하는 물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네. 신학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 과정이 곧 신학 하기의 방법이니까 이 두 물음은 내용적으로 결탁해 있는 걸세. 신학(神學, theos-logos)이라는 터미놀로지에 근거해서 가장 소박한 차원에서 이 물음에 대답한다면 신(神)과 로고스(logos)의 리얼리티와 의미, 그리고 그것의 상호관계를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해명해나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신학 공부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네. 그 개념을 이렇게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네. 그 중간을 생략한 채 결론을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신비’와 만나게 된다네. 로고스(언어, 이성)를 말하는 신학이 결국 신비로 들어간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그의 나타남을 기다려야 할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사유나 언어로도 범주화할 수 없다네. 그 이유를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한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계내존재’(in der Welt Sein)이기 때문이네. 물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가 물 밖의 인간을 규정할 수 없듯이 신을 해명하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실존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신학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지 모르겠네. 그게 그렇지 않네. 신학은 하나님이 왜 신비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가장 궁극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네. 아마 자네들은 내 말을 실감하기 어려울 걸세. 이 문제는 일단 10년쯤 뒤로 미루어 두게.
자네들이 질문한 것들을 대답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하다가 공연한 쪽으로 흘러간 것 같네. 그러나 관계없는 것은 아니네. 결국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부분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사안이라기보다는 신학하는 전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자네들의 질문과 내가 위에서 개론적으로 설명한 내용들이 깊은 연관이 있다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자네들의 질문을 좀 직접적으로 다루어보세.
송 군의 질문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공경’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군의 질문은 기독교의 몇 가지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들을 새로운 진리의 수호자처럼 선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소종파에 대한 것이었네. 송 군은 여기 홈페이지와 메일과 인쇄물을 통해서 세 번에 걸쳐 궁금증을 토로했고, 이 군은 홈페이지에 매우 절절한 마음을 담아서 질문했네. 이 군이 질문한 하나님의 교회는 아마 안식일 교회, 여호와의 증인, 지방교회, 구원파 등등, 여러 사이비 교리를 총망라할 어떤 소종파 같이 보이네. 어쨌든지 두 사람의 질문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속내는 ‘붕어빵’처럼 닮은꼴이네. 송 군은 가톨릭을 비판한 것이고, 이 군은 우리 개신교의 비판 앞에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었네. 두 사람 모두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혹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네. 송 군은 가톨릭을 공격하느라 마음이 뒤숭숭하고, 이 군은 공격을 받아서 열을 받고 있을 뿐이지 사실 별 것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뿐이네.
여보게들, 역사를 보게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를 비롯해서 기독교도 역시 역사적 종교라네. ‘역사적’이라는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네. 일차적으로는 기독교는 하늘에서 한 순간에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말이지. 일단 자네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겠네. 교회가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이런 질문은 어떻게 생각하나?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교회를 설립할 의지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십자가로 처형당하게 한 장본인인 예루살렘 성전을 여전히 드나들고 있었을까?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교회의 출현은 매우 우연한 역사 과정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네. 이 역사 안에는, 예컨대 바울 같은 한 인물의 운명과 실존적 신앙경험 같은 것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의 심각한 갈등과 신학 논쟁, 이단논쟁, 더 나아가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정치역학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네. 그 과정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적인 전통과 헬라의 철학, 로마의 많은 정치, 문화, 예술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전통에는 예수의 부활을 기린다는 근본적인 차원이 있지만 동시에 태양신을 섬기는 로마 문명의 영향도 있다네. 12월25일의 성탄절의 유래도 역시 이와 연관된다네. 참고적으로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1월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그 이외에 약간 다른 날짜를 고집하는 종파도 몇 더 있다네. 우리는 지금 기독교 안에서 순수하게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을 완전하게 구별하기는 힘들다네. 성서에도 역시 바빌로니아 설화나 헬라 철학이 개입해 있는 실정이네. 마리아 문제도 역시 이런 과정에 속한다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게. 기독교가 정수된 물처럼 완벽하게 순수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담지한 공동체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가 똑같이 여러 한계를 가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나? 예수님이 배고프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독교가 역사의 과정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와 로마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는 그런 문화의 옷을 입고 본질을 바르게 지켜나가기만 하면, 그것이 곧 ‘ecclesia semper reformanda’(늘 개혁하는 에클레시아)라는 종교개혁의 모토인데,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 부족할 게 하나도 없다네.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위에서 ‘역사적’ 공동체라는 말의 첫 의미를 설명했는데, 바로 이것 ‘종말론적’이라는 말이 ‘역사적’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라네. 앞의 의미는 그 구체적인 역사 과정에 초점을 둔 것이며, 뒤의 의미는 역사의 끝부분에 초점을 둔 것이라네. 즉 기독교가 역사적이라는 말은 그 역사의 과정에 뿌리를 둘 뿐만 아니라 역사의 끝에 미리 닿아 있다는 뜻이네. 이게 자네들에게 좀 까다로운 신학개념일 테니까, 너무 딱딱한 음식을 먹으면 체할지 모르니까 내가 길게 끌지는 않겠네. 모르는 것은 일단 접어놓고 앞으로 나가는 게 놓은 책읽기이듯이 신학에서도 아쉽지만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개념만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게 지혜롭다네.
요즘이 ‘대강절’이니까 한 마디는 덧붙여야겠네. 기독교는 자신들이 인간과 세계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네. 물론 이런 재림신앙이 탈역사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고 한국교회의 설교 현장에서는 그런 방향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실제로는 이 재림신앙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혁명론이라 할 수 있다네. 인간의 정치, 경제적 프로그램을 무효화하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철저한 변화가 어디 있겠나? 특기 기독교는 이런 종말론적인 미래가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선취되었다고 믿는다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학이 풀어야 할 과제가, 혹은 딜레마가 놓여 있다네. 과연 역사는 이미 2천년 전에 역사 안에 왔었으며, 종말에 이 역사 안으로 다시 올 그 예수가 역사를 완성하는 자인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은 풀어야 할 신학이 과업이 얼마나 중차대하며 심각한지 알겠나? 여전히 물리학과 생물학의 세계의 열려지고 있는 이 긴박한 역사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가 모든 생명의 토대라는 사실을 해명하기는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네. 어거스틴과 오리게네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융엘과 판넨베르크 등등, 쟁쟁한 신학자들이 펼친 작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대목이 계속 주어진다네. 흡사 끝없는 양파껍질처럼 벗기고 벗겨도 여전히 껍질 안을 모르는 생명의 세계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신비로운 능력을 포착하고 해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문자에 매달리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읽어야 하며, 이 역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생명현상에 대해서 예민한 영적 촉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네. 이런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면 안식일, 성탄절, 마리아, 성서 안의 오류, 교회의 비본질적이 요소를 극복할 수 있다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일단 자네들은 좌고우면 하지 말고 신학의 정통을 공부하게나. ‘foundamental theology’(근본신학)에 충실해야하네. 잘 듣게. ‘근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근본신학’, 또는 ‘정통신학’이네.
송 군, 마리아가 우상숭배 같다고 했지?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톨릭의 기본 교리는 아니네. 그들은 마리아를 숭배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그를 잉태하고 출산한 마리아까지 공경하게 된 것일세. 물론 이 문제는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여러 신앙적 갈등 가운데서 가장 첨예한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곡된 게 아니라면 관용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아마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는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우리가 마리아 공경을 비판하는 잣대로 우리를 본다면 그런 모습들이 적지 않게 드러날 걸세.
이 군, 사이비 이단들이 제기하는 기독교의 모순과 한계 중에서는 그들이 옳게 지적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네. 더구나 그런 것들은 송 군이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듯이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또는 종교문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예쁜 여선생님들은 변소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한다네. 사이비 종파의 기독교 비판은 거의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그렇다고 해서 늘 우리를 합리화하는 게 능사라는 말은 아니고, 그들의 주장은 거의 신학적으로 논쟁할만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네.
송 군과 이 군, 자네들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만 그쳐야겠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신학도로서 바람직하다고 보네. 그런 정도의 열정을 갖고 이번 겨울 방학에 좋은 책을 많이 읽게나. 세 권만 소개하겠네.
1. 게르하르트 에벨링, 허혁 역, 신앙의 본질
2.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정용섭 역, 사도신경해설
3. 에티엔느 트로크메, 유상현 역, 초기 기독교의 형성

2004년 12월17일
하양에서 정용섭  


[레벨:0]이동균

2004.12.17 13:59:39
*.33.89.205

감사합니다~*

[레벨:6]유희탁

2004.12.18 11:02:38
*.85.180.156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아직도 배움의 길은 끊이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논리정연한 목사님의 글....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움이 참으로 짧음을 경험하며..저도 더 배워야 겠다는 희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레벨:6]유희탁

2004.12.18 11:04:51
*.85.180.156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말한 것처럼 목사님이 저의 히치하이커가 될 것 같습니다..
주말 잘 준비하시고..성도님들과 주님의 말씀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시길...

[레벨:1]서찬성

2004.12.20 00:37:30
*.229.131.124

내년 2월이면 졸업하는 서찬성입니다.
두 분의 형제님을 위한 교수님의 글.. 저도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 )
사놓구선 책꽃이에 전시만 해둔 신학책들을 보며 한숨을 쉬곤 했었는데,
교수님의 글을 읽고나서 다시 힘을 내보려고 합니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면 저도 언젠가는
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

[레벨:0]송재왕

2004.12.24 21:20:19
*.108.213.56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하다가 집에 내려오니 적응이 안 되네요. 하루는 몸을 벌벌 떨면서 보내고(몸살 초기증세), 하루는 영화라도 한 편 볼 거라고 인터넷 뒤지다고 다 가고, 하루는 핸드폰 장만할 거라고 인터넷 서핑하고(구매 됐는지 안 됐는지 소식이 없네요 ^^;;), 하루는 집사와 지휘자를 만났지요. 그리고 오늘 금요일은 드뎌 알바 시작하는 날입니다. 방학 때마다 가던 곳이라 그런지 낯설지가 않네요. 작업복 입고, 기름 한 번 뿌려보니 2년이란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지더군요. 요즘 들어서(?) 성경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기 보다는 대학원을 어디로 가야하는지 더 고민이 됩니다.
오늘 일하면서 제가 일하게 된 곳은 다른 곳보다 쫌 편한 자린데(갈 때 마다 거기서 일했어여), 그러다보니 거기서 일하고 있던 나이 어린 동생을 밀어내었다는 게 너무 미안하더군요. 어차피 전도사 나가야 할 건데 사역 나가는 게 더 나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역은 대학원 때 나갔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고민이네요. 학비도 필요하고 생활비도 필요한데 사역 나가면, 이 넘의 돈 걱정 땜에 돈쟁이 전도사 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러고 보면 공장에서 일하면 학비랑 생활비는 되니까 쓸데없이 돈 걱정할 거 없고, 다른 거 쓸데없는데(?) 시간 뺏기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되거든요. 막상 일하러 다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 피해주는 것 같아서 일하는 거 그만둘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ㅜㅜ 등록금 안 내면 학교 짤리니깐 더 그렇네요. 올해 2학기 땐 살벌했어요.
일하고 집에 와서 노트 정리하다가 교수님 생각나서 홈페이지에 들렀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큼직한 저의 이름이 잘 보였습니다. 얼마가 반갑든지 ^^ 바쁘실텐데 시간 내 주시고 답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각이 짧아서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개신교도 잘못한 것이 많지만)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얼마나 공경하였으면 제 4위 하나님으로 승격되어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너무 존경하기에 그렇게 표현하는지도 모르지요. 기회가 된다면 신부님이나 수녀님과 얘기도 쫌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운데 성당이 있어서 한 번 가볼까 생각 중입니다. 이쁜 수녀님 만났으면 좋겠는뎅 ^^;;;;;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며, 우리 신학생들에게 더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성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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