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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 부자청년, 그리고 삭개오

조회 수 4743 추천 수 2 2009.01.06 11: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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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바리새인과 세리, 부자청년, 그리고 삭개오 ***
(누가복음 18장 9 -14절, 18-27절, 19장 1 -10절)

누가복음의 앞 뒤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그리고 부자 관원과 예수의 이야기, 그리고 삭개오와 예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이 마치 의도된 것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자만하는 바리새인보다는 불쌍한 세리에게 심정적 연민을 느끼는 수준으로, 또한 부자청년 이야기는 교회 내에서 더욱 더 가열찬 봉사와 헌금을 비롯한 충성을 격려하는 본문으로 사용되기 일쑤이지만,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리와 바리새인>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의롭다 자신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을 대비시킵니다. 세리와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주 단편적으로만 배운 나머지 그냥 위선자, 율법주의자 정도의 이미지만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대에 흠 없는 사람들로서 “저 사람들만 같아라” 할 정도로 완전한 수준의 종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부드러운 신사들이었음은 당연한 이야기겠죠.

그에 반해서 세리들은 식민지 유대 민족들에게 높은 세금을 거둬들여서 로마 제국에 가져다 바치고 남는 것은 자기들이 먹던 사람들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도 못받고 때로는 유대의 독립 운동가들이었던 열혈당원들의 피살 타겟이 되기도 했던,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세리를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 오 하나님! 저는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간음하는 자들 같은 그러한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결국 의롭게 되어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비유를 끝을 맺습니다. 또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 비유의 말씀이 세리에게 심정적으로 동정을 느끼는 수준으로만 끝나버린다면, 그건 삼천포로 빠지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에게 자신의 모범적인 삶은 스스로에게 기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의로운 언덕이 되어버렸고, 세리에게는 전혀 자신 속에 전혀 기댈만한 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칭의의 능력은 나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뼈저린 자각을 가진 사람에게 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부자 관원 이야기>

성경에는 “유대인 관원”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어떤 유대의 지도급 인사 한 사람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젊은 청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어찌되었든 젊어서 성공한 사람으로 유대의 “산헤드린”이라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 의 멤버였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의 질문은 자못 진지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하신 분이 없다. 너는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증언 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계명을 알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의 반문에서는 두 가지가 드러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신 예수는 스스로에게는 신적인 자각조차도 허락하시지 않는 참 인간이자 절대적 겸손 그 자체이셨다는 것입니다. 문선명이나 정명석, 안상홍 및 일부 종교 지도자급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반열에 올려놓지만 결국은 가짜임이 드러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의 질문 자체가 애초부터 잘못된 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의 선함과 공덕”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꼬집고 계십니다. ‘그래 니가 생명처럼 생각하는 계명이 있지 않느냐? 그 것으로는 안되더냐? ’ 라는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듯이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일단 이 사람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가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었을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그 관원의 아킬레스 건을 탁 건드립니다.

“너에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는 이 말씀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본문을 보면서 부자 관원을 바보 만들기 일쑤입니다. ‘참  어리석기는... 자기 있는 것 다 바치고 예수님 따르면 되지... 그런 기회를 놓치다니!!!’

그런데 사실상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무리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본문 설교를 하시면서 자신도 정작 자신이 없다고 하더군요. 너무도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교적 계명을 목숨처럼 잘 지키던 그 관원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더 이상 자신이 할 것이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종교 생활을 해왔지만, 그래도 자신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적 기준을 들이댐으로써 그에게 절대적 좌절감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편 돈이 아까워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슬픔까지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부자 관원이 열심히 집중했던 종교 생활이 정작 삶의 실제성과 깊이를 획득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나친 종교적 규례는 사람을 비인간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삶”을 실종되도록 만듭니다.    

어쩌면 그 관원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좌절감을 느끼며 슬픈 모습으로 돌아선 그 시점부터 구원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술렁입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살아가는 부자 관원 같은 사람조차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구원의 문턱이라도 밟을 수 있겠느냐는 넋두리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배타적인 영역이란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은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

예수께서는 여리고의 한 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삭개오라는 세관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관장이라고 하면 요즘 세무서장 정도 되는 지위였을 것입니다. 물론 돈도 많았겠구요. 실제감 있게 이야기 해보면, 일제시대의 장급 세무 공무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식민지 유대 사람들이 그를 어떤 이미지로 보았을지는 상상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보통 삭개오를 난장이라고 우스꽝스럽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사실 그 것은 오바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각색된 성경적 고정관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질러서 돌 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 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왜 예수님을 보려 했을까요? 당대의 유명 인사를 보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요? 삭개오 사건 전체로 보았을 때, 삭개오는 무언가 목이 타들어가는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부자이긴 했지만, 로마의 앞잡이로 보일 수 있는 세관장이기 때문에 받아야했던 질시와 오해, 심지어는 살해의 위협까지...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여느 세관장들처럼 부자인 것만을 자위하며 살아갔다면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무언가 모르는 절대의 공허감, 전혀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자신의 실상을 여실히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절실함이 삭개오로 하여금 염치 불구하고 돌감람나무로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위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삭개오를 만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마른 스펀지에 물이 빨려들어가듯 삭개오의 절실함 속으로 예수는 그냥 빨려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삭개오는 기다렸다는듯이 얼른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의미 없고 공허했던 삭개오의 어두운 영혼 속으로 한량없는 빛으로 예수께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그 것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을 작정이군” 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예수의 행동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들과 만나서 윤리적이고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당할 그런 분으로 보였겠죠.

삭개오는 일어서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인자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레벨:7]시드니

2009.01.06 12:15:03
*.167.253.2

Exactly !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멘.
속이 시원한 복음의 선포입니다. 복음서는 일관되게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없다" 와 "있다"의 문제입니다.(한국 TV프로 중에 이런 이름이 있던데....)
나에게는 없고, 하나님께는 있다.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께는 있다.

또다른 비유를 볼까요?
한밤중에 친구에게 빵을 구하는 이웃의 이야기 - 나에게는 빵이 없고, 이웃에게는 있다. 상황적으로
상식적으로 절대로 구할수 없는 상황이지만,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밤중에 빵을 파는데가 없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구하는 과부 얘기 - 나에게는 나의 원수를 갚을 능력이 없다. 도저히 말도 안되지만
(불의한 재판관에게 뇌물없이 구하는것), 그밖에는 나의 원수를 갚을 방법이 없다.

결국 다른 모든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거기에만 답이 있다. 그답은 나에게 없다. 그답은 내가
어떤 대가를 주고 살 수 없다. 그냥 상대의 자비(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다.
영어로는 the last resort라고 하죠.

[레벨:7]시드니

2009.01.06 12:23:22
*.167.253.2

한가지 더 생각났어요.
탕자의 비유에서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진짜 이유는,
나에게는 먹을 것이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다".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인식이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9.01.06 12:39:52
*.54.79.126

정확한 지적이신 것 같아요... 시드니님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9.01.06 13:28:16
*.62.26.5

흔히 복음서를 축자영감설의 영향으로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쓰거나 시간대로 나열한 역사기록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복음서는 예수전승을 자신들의 그리스도론에 따라 편집한 신앙고백입니다. 직접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본 적은 없지만, 입수한 예수 전승을 자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론에 따라 편집하고 배열한 것이죠. 따라서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다름을 알수 있는데,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죄인들의 나라임을 선언한 인물입니다 .자신이 세리처럼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이기적 본능을 갖고 있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임하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마가복음서의 예수는 부자청년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깨뜨림으로써, 대다수 민중들은 세리등의 하수인을 통한 로마제국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고, 부자청년으로 상징되는 소수 부유층은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심각한 빈부의 격차와 내가 살겠다고 민족을 배반하는 이기주의로 인한 계급간의 갈등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분으로 이해해도 될 듯 합니다. 예수가 부자청년에게 한 말을 풀어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은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말고하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으로 얻어진다.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하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겠는가?'라는 것이죠.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성공회 신학자 양권석 신부님이 기독교사상 2005년 10월호 신약성서강의에서 하신 말씀인데, 공동체적인 신앙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훨씬 사랑받는 우리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큰 줄로 압니다.

[레벨:7]시드니

2009.01.06 13:55:46
*.167.253.2

부자청년의 이야기도 '있다'. '없다'로 풀면 너무 무리하게 아전인수의 해석이 될라나요?
부자청년의 질문의 요지는 "내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어떤 것을, 혹시 몰라서 못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알려주시면 내가 그렇게 행하겠습니다."(나에게 있다)
예수님은 "너에게 없다.(네가 할 수 없다.)"를 증명하여 보이시고, 그것이 하나님에게 "있다"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9.01.06 15:06:00
*.54.79.126

하기야 말씀이란 것은 보는 다양한 각도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레벨:22]머리를비우고

2009.01.06 15:59:35
*.117.199.100

시드니님과 첫날 처럼님의 대화만으로도 성경의 세계가 열리는 느낌입니다.
참... 원더~풀... 빤따스틱~
"있다, 없다." 요것... 참...
5가지 이야기가 "있다, 없다." 주제로 연결되다니..ㅋㅋㅋ
나머지도 그런게 있는지 찾아 보는 재미가 생겨버릴꺼 같네요...ㅎㅎㅎ

[레벨:7]시드니

2009.01.06 16:22:30
*.167.253.2

비우고님 재미있죠? ㅋㅋ

또하나 할까요? 쫌 무리스럽지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구하라, 구하라, 구하라 의 강조로 이해되지만...)

구하는 것은 나에게 '없음'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다면 구할 필요가 없죠.
찾는 것은, 그러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단계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만 "있죠".
두드리라는 이웃이나, 과부처럼 간청하여 얻어내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찾아보면 나올거에요, 한번 해 보세요.

어쨋든 성경의 일관성을 발견하는 것은 짜릿한 체험입니다.
profile

[레벨:7]희망봉

2009.01.06 16:45:59
*.82.136.189

아~~"있다,없다" 재밌네요
시드니님! 계속 찾아 올려 주세요^^*

[레벨:7]시드니

2009.01.06 17:08:40
*.167.253.2

희망봉님~ 밑천 떨어졌는데요.... ㅎ

[레벨:28]첫날처럼

2009.01.06 17:40:25
*.54.79.126

또한 구하라, 찾으라 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 이란 것도 한 번 짚어보고 싶네요...

[레벨:28]첫날처럼

2009.01.06 17:43:47
*.54.79.126

아... 이 답글은 바우로 님께 대한 답글입니다... 쓰다보니 시드니 님 댓글에 단 댓글처럼 되어버렸네요...

[레벨:7]시드니

2009.01.06 17:56:45
*.167.253.2

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죠.

[레벨:28]첫날처럼

2009.01.06 18:07:07
*.54.79.126

시드니님 굿!!!

[레벨:22]머리를비우고

2009.01.06 18:27:26
*.117.199.100

역시... 시들지 않습니다....굿..ㅋㅋ

[레벨:22]머리를비우고

2009.01.06 18:31:46
*.117.199.100

창조도 종말도 그럼... 역시 있다 없다의 범주에 들 수 있겠네요...
우리의 손을 떠난 것이 창조와 종말과... 십자가와 부활이며...
생명도 역시 마찬 가지고요...ㅎㅎ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9.01.06 21:24:17
*.62.26.5

덧글 잘 읽었습니다.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9.01.06 21:24:38
*.62.26.5

시드님께서 올려주신 덧글도 잘 읽었습니다.

[레벨:1]segullah

2009.01.06 22:55:49
*.143.113.200

복음서가 시대순으로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무식해서 그런 것이지 축자영감설의 영향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는 사람도 주의깊게 복음서를 읽으면 복음서의 기록이 연대순이 아님을 이해합니다.

[레벨:6]평민

2009.01.07 10:11:51
*.90.49.136

개인적인 생각을 말 해보면
비유 에서 말 하고자 것은 " 위선' 을 지적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바리세인 의 "위선"을 가장 엄격하게 지적 하셨지요- 위선자 바리세인이라고-
종교든 일반적인 삶이든 인간이 가진 이 "위선"은 가장 해로운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유에서 보듯 "바리세인"과 "부자" 청년의 위선은 지금도 "있는자 ,배운자, 기득권자" 들이
가진 위선이 아닐가요?

삭개오는 이런 "위선"을 버리고 '자유로워진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서에서는 "삶의 자유" 를 얻게 하는 방식을 가르키고 있는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 내 말에 거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요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에서 이 자유 문제를 강력히 논하고 잇지요
그래서 신학자 '케제만"은 "예수는 자유를 의미한다" 는 책을 썻지요
"위선"은 본인도 모르게 내 속에 숨어 있는 경우도 많고 겉으로는 다 선함을 위장을 하고 나타나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의 "속"을 보시지 " 겉" 을 보시지 않는다고 말씀 하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위선적인 삶을 버리는 것이 성서가 요구 하는 삶으로 가는 첫 걸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레벨:3]데이비

2009.01.07 11:46:36
*.133.34.80

좋은 묵상 잘 읽었습니다. 마치 당시 실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첫날처럼님은 병원 잘 안되면 직업 바꾸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ㅋㅋ
바리새인-세리 / 부자관원과-삭개오의 구도가 거의 비슷한 것 처럼 보입니다.
사도행전을 함께 쓴 누가의 주된 성찰은 모든 이방으로 펴져나가는 구원에 관점이 있는듯합니다.여기에 나오는 세리들을 볼때도 그러합니다. 가난한자, 소외된자, 저주받은자, 이방인들 지옥의 땔감정도 밖에 안되었던 사람들..(사마리아여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방백부장이야기) 그런 관점에서 구원은 민족, 율법, 신분을 넘어서 가난하게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부자관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가진 재물을 다 팔아라)의 답은 삭개오에게 있는것 같습니다. 실재로 삭개오는 자신의 재물의 반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토색한것은 4배나 갚아줄려면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팔아야 하는 상황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이 사람으로는 할수 없고 하나님으로는 할수있다의 답인것 같습니다. 재물을 파는 것의 동기가 율법적인 동기에서냐, 주님을 만난 기쁨과 은혜, 자유의 출발선상이냐의 따라서 그것을 할수있고, 없음이 판가름 나는것 같습니다. 물론 삭개오가 자신의 재물을 다 팔려는 마음으로 팔지는 않았을것이고, 기뻐서 은혜로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된것 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이러면 문제가 좀 심각해지는데요. 제가 세리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가.. 아니면 부자관원처럼 어떤 은혜는 사라지고, 규범으로서의 율법으로서의 주님만 남았는가? 또 길을 잃는건가...누가 저를 좀 도와주세요..쩝.. 어쨋든 좋은 묵상 잘 읽었습니다.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9.01.07 13:21:25
*.62.26.5

그렇군요..

[레벨:3]코람데오

2009.01.08 01:06:39
*.109.122.33

첫날처럼님의 부자청년관한 비유에 대한 해석을 보며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장큰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을 자꾸 피해서 갈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첫날처럼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주님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했다고 했는데 저는 그리 보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자청년에게 당연히 해야할 일을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주님의 제자되었던 사람들은 첫날처럼님의 말씀과는 달리 모두 주님이 요구한 그런 삶을 살아갔습니다. 12재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처자와 와 전토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저는 제가 하기실고 할 수 없다고 해서 온갖 다소 비겁한 논리로 나의 구원을 정단화 하고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는 말로 나의 할수 없음을 정당화하려는 억지 논리를 펴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위의 하나님으로 하실 수 있다는 말은 나의 가지것을 버리지 않아도 은혜로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 하나님으로는.. 성능의 능력으로 나의 모든 것을 버리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정확한 해석이 됩니다. 인간은 버리길 싫어하죠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도 한사람의 부자청년처럼 버리기 실어하고 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없다고 처자와 소유와 전토를 버리지 않고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짓을 감히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9.01.08 10:45:55
*.54.79.126

코람데오 님 보시기에는 제 글이 비겁하게 본질을 피해가는 것이네요...

풋사과를 따다가는 가지까지 상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부자 관원이 예수의 말씀을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하나님과 구원을 거래하기 위한 규범으로 받아들이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준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삭개오의 패턴이 바로 신앙인의 패턴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름 신앙 생활 잘한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을 보면 신앙을 "규범" 처럼 생각하면서 항상 강박관념 속에서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쩌면 또 다른 부자 관원의 모습은 아닐까요?

[레벨:28]첫날처럼

2009.01.08 14:13:12
*.54.79.126

하기야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 고 하면서 내가 져야할 마땅한 책임마저도 저 멀리에 재껴놓고는 영적 긴장감이 없이 산다면 그건 더 큰 문제겠죠...

그런데 그 영적 긴장감이 강박관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나요? 마치 직원이 사장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업무 성취도를 요구받고는 그렇게 해야만 직장에서 짤리지 않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항상 압박감과 우울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 같아서요...

물론 제가 님의 의도를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겠죠... 의도적일수도 있구요... 그렇다면 님도 저에게 대해서는 똑같이 그런 겁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9.01.08 20:47:34
*.109.122.33

첫날처럼님 님의 질문을 주님께 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울며 겨자 먹기로^^) 복종하여 내 가진 것으로 나누어 주고 주님과 거래로 재당신의 제자가 되고 구원을 참예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첫날처럼님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신앙을 규범처럼 생각하며 강박관념속에 산다고 말씀하시는 군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을 아주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잘 표현 하신 것 같습니다.
님의 말씀의 표현을 "규범"을 "계명" 으로 "강박관념"을 "죽기까지 싸우는 삶"으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언어사용의 기교를 극대화 하여 성서 가르침의 본질을 비켜 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신앙의 방법이 아니라 봅니다. 과연 영적 긴장감이 강박관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어저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결과가 다를 뿐이지요 ..

성도라면 당연히 "마치 직원이 사장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업무 성취도를 요구받고는 그렇게 해야만 직장에서 짤리지 않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자신의 정용과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합니다"

님께서는 위의 성도의 마땅이 할 바를 매우 부정적인 인식으로 유도하고자 위에 "항상 압박감과 우울함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덧붙여 본질을 흐리시고 계시는 군요^^
실로 기독교의 본질과 그 가치를 깨닳은 사람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명령과 그분의 계명을 지킬것 입니다. 첫날처럼님 ^^ 님께서 주님의 주신 멍애가 강박감과 우울함으로 느겨지신다면.....
주님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내짐은 쉼고 내 멍애는 가볍다구요..
정말 주님의 양이라면.. 죄와 욕심의 멍애는 무겁고 나를 압박하고 우울하게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내모든 소유를 버리고 사는 삶은 기쁘고 즐겁고 가벼운 멍애일 것 입니다.
저도 어쩌면 님처럼 계명을 지키는 삶이 나를 압박하고 우울하게 만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에 참예하는 놀라운 축복은 사실 좀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구원에 참예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는 싫군요.. 대화 할 수록 커다란 벽을 느끼게 되는 군요..학문이 진리를 가려버리질 않길 기대 합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9.01.09 10:55:15
*.54.79.126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한다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책임이 크겠죠... 알고보면 주님 뜻 안에서 다들 치열하고 살고 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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