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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신학의 뿌리

조회 수 4980 추천 수 3 2010.02.10 23: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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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 신학과의 싸움이다. 거짓 신학이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체념과 권력에 대한 복종을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신학이다. 이런 점에서 거짓 신학은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학이며, 정의의 하나님 대신에 사회적 불의를 조장하는 우상을 섬기는 신학이다. 권력자들의 기득권만이 아니라 그 권력자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제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성전중보체제가 성직자주의, 교리주의, 교회주의와 교권주의라는 거짓 신학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지난 시대의 대표적인 거짓 신학은 경제성장에 편승해서 교회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예수의 복음을 "성공과 번영의 복음"으로 둔갑시켜 무한경쟁과 업적주의를 정당화한 자본주의적 기독교였다. (이명박 장로의 독선과 업적주의와 조급증은 평생동안 몸에 밴 CEO의 습성만이 아니라 혹시 장로교 교리의 영향을 받았을 만큼 믿음이 깊다면 칼빈주의 예정론이 지닌 심리적 불안에 대한 자기확인의 필요성 때문은 아닐까?)

이 시대에는 리처드 도킨스처럼 성서 해석 전통에 대해 전혀 탐구하지 않은 채 단지 과학주의와 성서 문자주의에 근거하여 기독교 진리를 매도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과 그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다. 과학주의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라고 실증주의의 단순논리를 펴는 것처럼, 도킨스 역시 무신론에 대한 일방적 주장만이 아니라, "종교신앙에 대한 자동적인 존중의 원리를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극단론과 다르지 않다. 포이에르바하나 마르크스같은 무신론자들은 인간 소외, 가난과 사회적 불의, 보다 인간다운 세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그 허무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왜곡하는 신학이야말로 거짓 신학의 뿌리다. 복음을 왜곡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권력과 맘몬의 시녀로 전락한 때문이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기억상실증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기독교 진리는 피로 고백한 진리들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들, 곧 "주님"이라든가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라는 익숙한 용어들이란 당시의 막강한 로마제국이 자행한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망과 한숨 속에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분명하게 믿은 몇몇 사람들이 두 눈 부릅뜨고 목숨 걸고 외쳤던 신앙고백들이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이 당시의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창조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즉 예수와 바울 모두 당시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을 만큼 반체제적인 하늘의 질서,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한 가치관과 대안적 질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구체화시켰던 위험인물들이었지만, 그 이후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급진적인 복음을 "이 세상의 지혜"로 길들이고, 제국의 불평등한 계급질서에 순응하도록 보수화시키고 반동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탓이다.

[레벨:9]김용남형제

2010.02.11 00:26:14
*.149.1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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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엔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는" 신학이야말로 근본주의의 대안을 가장한 거짓 신학 중의 거짓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주체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민중신학 정서가 '하나님'과 '민중'을 개념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지만,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실체는 '민중'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은 '예수님의 관심'이었기에 기독교가 신학적 주제로 다룰 수 있는 것이지, 그 문제의 심각성 자체가 기독교를 그렇게 몰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자의 피가 곧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말은 교부신학의 인본주의적 한계입니다. 신학이 철학과 대화하는 일은 물론 꾸준히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최소한의 하나님 중심성을 놓치게 될 때 신학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아예 상실해버리게 됩니다. 정 목사님의 최근 설교에 등장하는 '거룩한 생명의 씨'가 <성서>의 전반적인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처럼, 교회의 씨앗은 순교자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이며,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을 실천론적으로 적용하려고만 들되 그 죽으심의 본질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박스러움이 바로 상황신학의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주의적 큐티식 성서읽기의 경박스러움과 비슷합니다. 해석은 실종되고 적용만 비정상적으로 범람하는 형국이라는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즉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은 '급진적 혁명론'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도무지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유일한 지시언어라고 봅니다. 그것이 복음에 내재된 고유성이며 존재성이지요. 원시 기독교가 로마제국이라는 상황 안에서 꽃피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확실하지만, 그 사실만을 부각시키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와 그 배후의 하나님의 마음을 놓칠 경우 정통신학이 말하는 진정한 복음의 신비는 묻혀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부디 상황신학 진영에서의 현대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문제의식과 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진보주의라는 또 하나의 규정 안에 갇히기보다는 정통 대림절 영성에 입각한 하나님의 주도권 인식의 신앙으로 올곧게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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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0.02.11 00:40:29
*.251.192.145

용남형제의 댓글에 추천 하나 누르고 갑니다....=3=3=3

[레벨:10]차성훈

2010.02.11 02:34:29
*.44.109.251

음, 문제 의식은 동감하는 바입니다. 근본주의도, 그와는 다른 색채의 상황 신학(상황 신학이 근본주의의 대칭은 아니지만)도 해석보다는 실용적인 적용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문제점이 있고, 그것이 한계지요.

근데, 마지막 문단이 약간 아리송하군요. 자칫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0세기의 역사와 원시 기독교 전통, 더 나아가 역사-상황과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분리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분리되어야 한다'로 읽히는데 맞진 않죠? 제 이해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탈 역사화한다면, 더 나아가 '성서'의 메시지를 탈역사화시킨다면, 오히려 성서가 가지는 역사적-상황적 차원을 간과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 않나 싶네요.(따지자면 '구속사'라는 내러티브도 성서의 메시지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뱀다리) 생각해보면, 대림절 영성은 한편으로는 철저한 수동의 기다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건강한' 토목 공사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지요. 철저한 능동의 기다림.

[레벨:9]김용남형제

2010.02.11 03:06:21
*.11.167.102

탈역사화가 아니라 구속사적 역사이해입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은밀한 약속에서부터 시작해서 신구약성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이해는 지금의 역사, 즉 '현존재(Dasein)'와 비슷한 의미로서 과거와 미래를 규정짓는 주체로서의 일종의 '현역사'를 철저히 상대화시킨다는 점에서 탈역사적 근본주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한 면의 역사에 천착(혹은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가장 신학적인 역사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은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속사 개념을 보편사로 환원시키고 보편사적 해석학을 부각시키는 것은 좋은데, 그 '보편'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보편이 아니라 인문학적 보편성 개념에서 나왔다는 게 한계라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구속사가 보편사로 승화되어야 한다기보다는 보편사가 구속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속사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차성훈님의 생각은 제가 보기에 구속사의 존재론적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신 결과입니다. 구속사는 해석학적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이며, 하나님의 다이나믹한 '마음'에 의존되어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주체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신 말씀에 관해서도 코멘트를 남기겠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원시적 복음이 차성훈님의 생각처럼 곡해될 소지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되도록 쓰기 싫어합니다.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데우(kingdom of God)'는 '하나님의 왕권'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성서> 전반의 사상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배타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왕권'만이 있다는 것이지요.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자는 카이로스의 출현을 돕는다"고 말했는데, 제 경우는 그와 반대입니다. "카이로스의 출현이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자를 세운다"는 것이지요. 새벽이 가까우니까 닭이 우는 것이지 닭이 울기 때문에 새벽이 오는 게 아니라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림절 영성은 수동의 기다림도 아니고 능동의 기다림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기다림 자체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일방적 명제야말로 대림절 영성의 핵심적 기초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그 사건에 종속되는 최소한의 인간의 반응을 가리킬 뿐이지요.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말 자체가 소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능동의 기다림'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profile

[레벨:14]저별과 달

2010.02.11 18:29:44
*.206.68.40

김용남 형제님, 고등학생 맞나요 ㅎㅎ
19세가 어떻게 이런 어휘를 사용하고, 신학도 못지 않는 표현을 구사하고,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까지 섭렵 하였는지  신기하기도 하구 ,궁금하기도 해서요?

[레벨:16]안희철

2010.02.12 02:59:20
*.142.8.86

"구속사 개념을 보편사로 환원"시킨다고 하셨는데요. 환원이든 승화든 지양이든 간에 판넨베르크 교수에게 있어 그런 요구는 전적으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정초해 있어요. "조직신학" 1권 초두에 말한 것처럼 신학은 신 자체에 대한 말(15, Aussagen über Gott selbst)이어야 하는데 고대교회(Altkirche)에서는 신학의 주제를 구속사Heilsgeschichte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세계와의 관계에 관심을 쏟은 것이지요.  이런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게 되죠. 달의 뒷면을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물론 고대 교회의 이해대로 신에 대한 모든 생각은 신과 세계와의 관계로만 이해될 수 있어요. 창조부터 종말까지, 빠짐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경륜적 삼위일체로 확장된 것이지만,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해요. 숨겨진 달의 뒷면이죠. 그게 앞서 말씀드린 신학의 원초적 관심이거든요(Rede von Gott). 판넨베르크가 대표적인 개신교 기초신학자(Fundamentaltheologe)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참조, 72).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레벨:9]김용남형제

2010.02.12 15:10:53
*.152.239.187

그게 판넨베르크의 한계로 보입니다. 성서적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 경험 진술로서의 신학은 '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의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신(god, Gott)과 하나님(God, GOTT)이 혼동되어 쓰이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전자는 세계에 계시된 하나님 표상이고 후자는 계시로 존재하는 하나님 자체이지요. 신학이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맴돌면서 세계의 책임론을 부각시키는 움직임만 왕성해지는 매너리즘적 방식으로 계속 흐르는 한 신학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정 목사님의 판넨베르크 설교비평 초반에 인용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그런 식의 매너리즘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주체성을 외면하고 '믿음이 무엇인가?'의 본질을 잘 캐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야 정 목사님께서 호평하셨듯이 우수한 설교라고 할 순 있겠지만 성서의 주제와 동떨어졌다는 점에서는 피차일반이라고 보니까요.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이고 그 약속의 속사정을 깊이 있게 파헤쳐나가는 것이 설교와 신학의 역할이지, '믿음의 본질'이라는 주제를 거기서 꺼내는 건 좀 심하게 말해서 헛다리를 짚은 것이지요.

 (목사님께서 드신 비유는 '달'입니다만) 해의 앞면을 보든 뒷면을 보든 해를 중심으로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해의 주체성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간은 생명의 본질을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전에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고찰될 부분은 (정 목사님께서 '예수 사건의 보편성'으로 강조하시는) 삼위일체 표상의 세계이며, 삼위일체 표상이 의존하고 있는 삼위일체 그 자체의 본질이라고 보입니다. 그 본질은 한국어의 '하나님' 표현이 말해주는대로 '하나임(Oneness)'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원초적 존재론으로서의 '사랑'이겠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명제 위에 말씀실증주의를 세워간 바르트는 이런 원초적인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를 축소 내지 간과했다는 점에서 '뜬금없는 계시론자'로 보입니다. 해설에 감사드리고요, 더 이상 지엽적인 논쟁은 사절.

[레벨:16]안희철

2010.02.12 22:05:06
*.206.196.183

다른 분들이 오해하실까 싶어 몇가지 부언합니다.
지엽적인 논쟁이니 사절하세요. 다른 데 마땅히 올릴 데가 없어 달아둡니다.

판넨베르크의 책들 인덱스를 찾아보시고 확인하셔야 할겁니다. 과연 혼동해 썼는지.
"신에 대한 말"(Rede über Gott)과 "신의 말"(Rede von Gott)을 혼용해 쓰는 사람은
신학대학 1-2학년 애들 말고는 없습니다(없어야 하고요).
신은,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고
다비아에서 줄곧 이야기되어 왔는데요,
이는 불트만 이래(그의 Glauben und Verständnis, Band 1, 26. 번역되었나 모르겠네요)
많은 조직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진 일반적인 명제입니다.
같은 페이지에
von Gott läßt sich deshalb auch nicht in allgemeinen Sätzen, allgemeinen Wahrheiten reden, die wahr sind ohne Beziehung auf die konkrete existentielle Situation des Redenden(말하는 자의 구체적인 실존 상황에 대한 관계가 결여된 채 참이라고 하는 그런 식의 일반적인 진술이나 진리들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오해하지 마시길. 실존에 관해über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부터aus 말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책 Glauben und Verständnis, Band 3, 120)
이것은 판넨베르크나 그 이전의 일반적인 신학자들의 견해에 있어서는
"사랑"Liebe과 "신뢰"Treue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그의 조직신학 1권인가 2권에서 읽은 내용인데 못찾겠군요.
찾으면 찾겠는데 시간도 없고)
다 같은 고민이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계시된 하나님 표상과 하나님 자체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행위Akt와 존재Sein 사이의 거리는요?
만사를 규정하시고, 게다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되어 표상으로 드러날 때 자신을 속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폐성을 오해하는 것이지요.
달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우리에게 앞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 말입니다.
계시된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믿는" 것은
그가 사랑이시기(Gott ist Liebe)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 경험의 보편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교회 공의회와 신학의 몫이고요.
신의 말Rede von Gott을, 그의 주체성을, 그 자신을, 그 자신의 신비, 생명을
무엇으로 기술하고 표현할까요?
허나 같은 경험을 하는 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신에 관한 말Rede über Gott이 같아서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그것은 신앙고백적이죠.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래 트란첸덴탈님께 달아드린 것처럼
사태(Sache), 즉 복음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사태의 경험에 다 녹아 있습니다.
우리의 구체적 실존에 접촉된 영원한 하나님의 현실이거든요.

[레벨:3]Pater Paulus

2010.02.11 06:07:59
*.209.120.239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겠죠. 
그런 의미에서 비대칭적으로 (asymmetrically)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데요.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신학적 주제로 다룰 수 있다는 말에는 수긍이 잘 안가는군요.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신학적 주제로 다룰 수 없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제가 비약이 너무 심한건가요? 좀 더 나가서, 예수님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도 있나요?

밑의 차승훈님의 댓글에 대해서도 답하자면,,,
구속사가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 중의 하나라는 말은 타당합니다. 그 밖에 form criticism 종류의 하나인 von Rad의 a history of traditions도 이런 방법론 중의 하나이니까요. 
형제님의 구속사적 역사해석에 대한 "신앙"은 존중하지만, 이게 차승훈님의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 보긴 힘드네요.
구속사적 성서읽기라던지, 혹은 구속사적 역사해석이 전통적으로 기독교 안에 흐르고 있긴 하지만,
이걸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주체라고 주장하는 건 님의 신앙적 고백으로 들립니다만.





[레벨:9]김용남형제

2010.02.11 07:46:52
*.11.167.102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는 주체는 하나님" - 안 그래도 이런 말씀을 누군가 하실 것 같아서 "하나님의 실체는 민중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진술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중심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선포이지 대칭적 섭리관도 비대칭적 섭리관도 아닙니다. 적어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당파성은 저도 수긍하지만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의 주도적 통치권을 찬탈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신학적 주제로 다룰 수 없다." 예, 비약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상황신학을 신학의 범주에 넣을 순 있더라도 최소한 정통 기독교 영성과는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통 기독교 영성'은 앞에서 말한대로 '주 예수님'에 대한 선포로서의 원시 기독교 사상을 가리킵니다. 이런 고정불변한 케리그마에 정초됨이 없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대적 문제의식의 유행에 휩쓸리는 신학은 엄밀히 말해서 이미 역사성을 상실한 세속적 철학일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도 당연히 있지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외면했고 가룟 유다는 버림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관심이라는 게 그런 텍스트에 갇힌 정적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얄팍한 자기 문제의식에 휩쓸리지 말고 언제나 예수님의 생각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고요.

 구속사에 관해서는 분명히 '존재론적 성격'을 강조한 부분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신앙적 고백일 뿐이라는 지적도 맞긴 맞습니다만 구속사를 해석학적 방법론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그야말로 구속사 개념의 겉부분만 맴도는 데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경험해봐야만 알 듯한 이런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해해집니다만, 구속사를 어떤 기제(機制)처럼 파악하는 순간 하나님의 인격성 개념은 파괴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구속사는 테크닉으로 접근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연성 속에서 은밀하게 포착되는 신비성 자체입니다. 신비롭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진술할 수 없으므로 더 이상 "그건 신앙적 고백 아니냐?"는 반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과 맛이 왜 달콤한지 그 불립문자의 세계를 어떻게 명료하게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신비를 제한하려 드는 오류만은 짚을 수 있지요.

[레벨:3]Pater Paulus

2010.02.11 13:25:12
*.209.120.239

일단 "하나님의 실체 (substance)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백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불어넣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두가지 명제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설명을 해주실수 있나요? 왜냐면 저는 "하나님의 실체" 관해 언급한 적이 없거든요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라는 말엔 반만 동의하고 싶군요.  (일단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는 님과 저의 견해는 거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독교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에선 동의합니다.)

문제는 님이 말하는 역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역사에서 어떻게 역사하느냐가 아닌가 싶은데, (말꼬이네요..ㅎㅎ 점에서 저는 비대칭적 섭리에 대해 운을 띄었던 거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점에서 인간이 꼭두가시가 아닌 이상 역사의 주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약자에 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상황신학에 대해서도... 정통 기독교 영성과 동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정통 기독교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로서의 원시 기독교 사상이라고 정의했는데, "정통" "원시 기독교 사상" 님께서 어떻게 의미하는지 궁금하군요) 과연 상황신학자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과 상관없이 그들의 신학을 실천했는지는 의문이군요. 구띠에레즈가 말이 있죠. "나는 liberation theologian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다"라고요


구속사 이야기가 나왔군요. 존재론적 성격을 강조하시는데 이해가 안가네요.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반만 이해가 가는데, 님의 존재론적 구원사 이해가 (특히성서의 구속사가 테크닉으로 감지할 없기 때문에 신비성에 기대는 부분이제겐 근본주의식의 성서 읽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이는데요. 물론 님께서는 동의하시지 않으시겠죠? 다비아는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하는 곳이니까요. 파고 들어보자면, 님이 말하는 "우연성 속에서 은밀하게 포착되는 신비성" 뭔가요? 어떤 우연성을 말하는 거죠? 바르트가 말한 성서 안의 평범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우연성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우연성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있나요?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구속사와 사과맛의 비유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같군요. 성서는 사과맛보다 훨씬 복잡하니까요..ㅎㅎ 그리고 "구속사 개념의 겉부분만 맴도는데 나온다" 님의 저에 대한 판단과 "이건 경험해봐야만 아는 세계다" 식의 태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봐요. 여러 신학용어를 많이 사용하시는데, 사용하실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무얼 바탕으로 논하려는 건지 알려주시고요.  : )

 

[레벨:10]Transzendental

2010.02.11 17:02:14
*.67.83.93

yy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NEGADETH님이 그런 지적을 하셨던거요? 다비안들이 정확한 개념 규정 없이 자기 입맛에 맞게 용어를 남발한다는 지적이 있었지요.  김용남 형제님의 뛰어난 논리성과 치밀함에 탄복하면서도, 또 한편 어떤 신학적 입장에 대한 '조선일보식 말꼬리 잡기 비판'이 이어져서, 아래분께서 이런 논쟁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과는 달리 제게는 소모적으로 보입니다.(터툴리안, 본회퍼, 리옹님 에 대한 김용남 형제님의 비판과 댓글) 라크리매님 뿐 아니라 본회퍼가 좀 억울하고 답답했겠다는 생각이 글을 읽는 내내 들더군요.

본회퍼와 관련된 김용남 형제님의 비판 중 버스 비유의 경우, 그 자신 고유한 신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내용,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이해의 원리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만 있어도 파악할 수 있는 그 같은 내용을 김용남 형제님의 맥락에 따라 자구대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김용남 형제님께서 비판하고 계시는 근본주의 진영이나 상황주의 진영의 경박한 실천적 적용에 다름 아닙니다. 김용남 형제님께서 시종일관 강조하시는 구속사적 존재론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확고한 선포에 대해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본회퍼의 버스 비유는 본회퍼의 신학의 존재론에서 나온 것인만큼 버스 밖의 경찰 이야기를 그가 들었다면 김용남 형제님이야말로 혹성탈출식 존재론혹은 슈퍼맨식 구원론을 가진 것으로 비판했을 겁니다. '깊이의 하나님'에 대한 본회퍼의 강조를 이해한다면 목사의 윤리적 행동은 상황적 급박함에만 온 정신이 쏠린 기독교 영성과는 무관한 행동인 것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에요. 좀 심한 격의가 될지도 모르지만 만일 김용남 형제님과 같은 존재론적 입장에 따른 윤리적 결론, 경찰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것을 하이데거가 들었다면 틀림 없이 "타락한 존재론"이라 했을 겁니다. 하이데거가 왜 선구적 결의성을 강조하고, 부름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 레비나스나 리쾨르와 같은 이들이 왜 그토록 '윤리'를 강조하는 걸까요? 모두 존재에 대한 응답가능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좀 다른 맥락이지만 이것이 왜 타락한 존재론인지에 대해서는 <존재와 시간> 서론만 읽어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자기 운동, 곧 사태의 자기 현시는 항상 legein되고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상은 늘 로고스와 결합되지요. 만일 하이데거가 김용남 형제님의 글을 읽는다면 존재론을 mystify하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존재론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대개 오해하듯이 '존재론'이 mystify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존재'는 mysterious합니다. 하이데거 역시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대답했지요. 저는 김용남 형제님께서 불립문자 운운하면서 사과 비유을 드신 것을 정용섭 목사님 설교에도 나타나는 뚜렷한 한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사태로 규정하는 것(하나님)이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 사태 자체는 말하기가 어려울 지라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죠. 용남님께 묻고 싶군요. 경험 자체를 표현하기가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신건가요, 아니면 경험 자체를 못해보셨나요, 아니면 경험 자체를 표현하기가 불가능한건가요? 저는 성서가 탈은폐의 방식으로,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가운데 불립문자의 세계-사태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사과 맛이 왜 달콤한지 그 불립문자의 세계를 어떻게 명료하게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신학적 사태를 '신비'의 이름을 덮으면 남는 것은 신비의 이름으로 군림하려는 자들이거나 신학적 회의주의자들이겠죠. 김용남 형제님은 지금 구속사, 즉 특수한 존재론을 존재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어요. 그러면 구속사를 우상화시킨 것이겠죠. 다만 김용남 형제님께서 구속사로 지시하려는 '사태' 자체는 신비한 것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용남 형제님께서는 구속사(개념)과 사태(대상)와의 일치를 가정한채 사태가 절대적이니 개념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제가 쓴 글을 한번 참고해주세요. http://spermata.egloos.com/1604551

좀더 현상학적 방식으로 김용남 형제님의 논의를 비판해보죠. 김용남 형제님은 구속사의 존재론적 성격 뿐 아니라 구속사적 역사 이해 자체를 신비화의 방식으로 절대화시키고 있어요. 문제는 김용남 형제님의 글이 저편만을 강조하고 있기에 '지향성'이랄까요, 노에마-노에시스 상관관계라 할까요, 이 같은 현상학적 이해의 기초가 결여된채 중세적 방식의 형이상학적 자기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상관관계를 강조한다고 해서 인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뭔가 사태 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해석학적 기초 개념에 대해 정확한 이해 없이, 다시 말해 어떤 인식론적으로 정당화(증명이 아닌)되지 않는 존재론을 기독교 영성의 기초 수호라는 목적론적 태도, 용남형제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실천론적, 윤리적 목표 하에서 근본주의적인 방식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yy님께서 김용남 형제님의 태도를 신앙고백적이라고 비판하고 계신 듯 보이구요.

저는 도미니크 크로산이나 마커스 보그와 같은 이들의 작업과 연구에 대해서 거짓신학 중의 거짓신학이라는 김용남 형제님의 주장에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그들의 주장이 김용남 형제님의 비판처럼 구속사적 이해를 결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판정할 수 없는 부분이거니와 그들의 입장이 기독교  영성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판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래 임마누엘님의 말씀과는 달리 기독교를 맑스주의와 구분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김용남 형제님의 표현을 조금 변용하자면, 존재의 부름과 요청에 대한 응답 가능성과 그 현실성에 대한 숙고인만큼 유치한 유물론적 태도의 신학적 변용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민중 신학이나 민중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탈했다고 하는 주장도 지나칩니다. 그들의 신학적 강조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앞에 선술어적이며 암묵적으로 놓여 있는 존재론이 적극적으로 개진되어 있지 않다 해서 그들의 신학 전체가 인본주의적 한계를 띄고 있는 것으로 매도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현사실적 자기 이해는 김용남 형제님께서 말씀하시는 존재론적 입장과 대개 일치할 것입니다. 그들 신학의 존재론이 개진되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들 신학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만큼은 거짓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성서이해에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아니구요.  위의 흰구름님이 쓰신 글은 아마도 크로산의 책에 대한 우회적 소개처럼 보이는데요, 이 책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역사학적historisch 관심이자, 동시에 부름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대한 역사적geschichte 보고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각기 다른, 다양한 형태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 지저스 세미나 회원들의 주장 역시 못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의 사태로>를 읽어보십시오. 철학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남형제님이 강조하시는 존재 우위가 인간과 무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김용남 형제님께서 그렇게 강조해마지 않는 기독교의 영성의 ABC이자, 그토록 강조하는 존재론의 ABC임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김용남 형제님께서 주장하시는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힘든 것이 전혀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상식선의 주장이에요. 다만 김용남 형제님의 논의에 이토록 많은 댓글들이 이어지는 것은 가히 도발적이리라할만큼 일방적인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토록 일방적인 주장을 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대개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 사역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주제를 상식적인 차원에서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닐텐데요.

[레벨:16]리옹~

2010.02.12 00:07:30
*.185.38.133

철학적인 사유도 없고 지식도 없고 신학적인 지식도 없으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론만 할 뿐인데 역시 다르시네요.
다비안을 위해 긴 시간 할애를 해서 반론을 올려 주셔서 감사드려요.yy님도요.
이렇게 해서 또 배우고 사고하게 됩니다.

[레벨:16]안희철

2010.02.12 03:30:02
*.142.8.86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요?
덕분에 소개해주신 블로그 들어가 좀 놀다 왔습니다.
하이데거의 "사태"와 그 현상학적 측면에 귀가 솔깃하네요.
사실 저는 판넨베르크의 궁극의 관심도 거기에 기초한다고 보는데요.
혹 연관성이 있을 지 모르겠네요.
조직신학 1권, 23-26.
Sache는 성서에서 증언된 복음 혹은 복음의 사신으로
성서 독자와 성서 저자 간의 보편적 사신을 전달하는 사태이기도 하고
종국적으로는 신자 공통의 종교적 감정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사태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비교리적이고 현실적이겠죠.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사태, 복음을
교리나 교회, 신앙고백과 대칭Gegenüber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뉘앙스가 그의 "사도신경" 해설에서도 나타나 있었고요.
단지 단어적 일치가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비교점이 있는 것 같아요.
평시에 관심가는 부분이었는데 달아주신 글 읽어보니
비슷한 관점이 있는 듯 해서
일단 댓글 달아봅니다.
쓰고보니 별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신비"라는 이름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는 일에
가장 앞서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닐까 합니다.
오히려 "시대적 책임"을 감지해야겠지요.

[레벨:10]Transzendental

2010.02.12 10:11:55
*.67.83.93

아래의 김용남형제님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깁니다. 읽어보니 다소 맥이 빠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댓글은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제 이만하면 여러 입장들이 개진된 것 같으니 읽으시는 분들께서 직접 판단하시겠죠?ㅎㅎ
안희철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짧은 글로 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주신 것 같아요. 제가 김용남 형제님의 글에 가장 알러지 반응을 보인 곳도 바로 안 목사님의 마지막 말씀과 관련된 부분이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Sache'론도 있군요.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현상학적 사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학적인 '사태'라하면 어떤 사태일까.. 사태를 신앙고백과의 대칭으로 읽는다는 것이 바로 제가 용남형제님의 댓글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즉 지향성과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고, 두 측면 어느 하나 무시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에요. 많은 일치점이 있는 듯 합니다. 조직신학 1권은 번역되어 있나요? 기회가 되면 직접 찾아보고 읽고 싶네요. 공부가 짧아 제 전공분야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괴물처럼 펼치는 다리만 늘어간다는 생각에 요즘 조금 힘듭니다. ㅋㅋ

블로그에 글이 많지 않아요. 대구에서 제가 이끌고 있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스터디에서 활용하는 블로그입니다. 제 생각이 단편적으로 개진되어 있지만 사실 다비안들의 수준에서 보기에는 좀 유치한 것들이 많지요. 이 곳에서 요즘 하이데거 강독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가끔 소식 남기겠습니다. 안목사님의 좋은 사진, 좋은 글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벨:10]유진

2010.02.11 08:45:57
*.119.17.63

여러분의 댓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이런 치열함이 다비아에 있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4]임마누엘

2010.02.11 09:18:36
*.182.6.47

저도 김용남형제의 댓글에 동의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의 중심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이라면
마르크스 주의와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겟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뿐이지 저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를 모르겠네요.

마르크스도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탈리아트의 인간해방과 역사 변혁과 역사 중심에 설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것과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의 중심 신학이 무엇이 다른것인가요?

profile

[레벨:13]눈사람

2010.02.11 10:23:42
*.136.37.76

요즘 일련의 글들을 보면
김용남 형제님이 토론을 유도하고 이끌어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아주 바람직한, 다비아에 걸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형제님의 대부분의 의견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구요
그리고 그 접근 방식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가장 옳고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물론 저의 생각이지만..)

형제님의 논리 정연한 글에 감탄하며
뭔가 한 번 꼬투리를 잡아 보고 싶어(이거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건 아니겠죠? ^ ^)
 저의 의견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님의 " 한편 예수님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도 당연히 있지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외면했고 가룟 유다는 버림받았습니다." 라는 말은 조금 동의 하기 힘드네요
예수님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님의 " 예수님의 관심이라는 게 그런 텍스트에 갇힌 정적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라는 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맞나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외면하시지 않았지요.
외면했다면 나무라지도 않았을 것이니까요.
가룟 유다를 버리지도 않았지요.
가룟 유다는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런 가룟 유다를 가엽게 여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일생이 자살로 마무리 되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있기에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저는 가룟 유다가 아니었더라도
그 어느 누군가는 가룟 유다가 한 일을 했어야만 했을 것이기에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아 먹은 나쁜 제자이거나 예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임무를 완수하시는 것에 일조를 한 제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론의 장을 열어주신 흰구름님과
토론이 진행되도록 이끌고 있는 김용남 형제님께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네요.

[레벨:5]퀄리아

2010.02.11 10:28:55
*.222.66.211

같은  내용의  글을  두번  읽으니  감이   좀   오네요 ...
현대 기독교  비판을  위해서,  예수님의  진보적  성향을  들이미는  것은 
썩은  정신을  깨우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지  그것이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임마누엘님  말처럼    이런   해방은  결국   유물론으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결국,  하나님을   물질로  끌어내리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 그런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진보, 중도, 보수 ... 예수님이  어느  성향을  띄어야  하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가끔   따져 묻는  느낌이  듭니다. "자 ~  예수님 ..  어느  편이시죵?? 응~??"

[레벨:12]라크리매

2010.02.11 12:18:47
*.41.16.153

최근 철학계에서 관념론으로 막스의 유물론(막스는 유물론을 말한적 없다지만..)을 다시 해석하는 바람이 일고 있다네요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이미 실패한 철학으로 입증되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사람들이 막스의 사상에 관심을 갖는건 관념론과 유물론을 대척점이 아닌 보완책의 입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레벨:5]퀄리아

2010.02.13 23:50:10
*.111.173.44

아 ~ 본인이   자연주의 혹은 인간주의라고  일관성  있게  못박았어요 ... 관념과 유물 .. 둘다를  포괄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나  ㅋ
글고, 이  글은   푸코의 맑스 들뢰즈의 맑스 처럼 .. 또다른  변용인  신학자의 맑스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남겨본  리플인데,  아니시라니 .. 신학을  모르는  입장에서 .. 먼가  다른게  있나보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갠적으로는  이런  계급과 해방    운운하는데에서  맑스의  유령대신  하나님이라 ... ㅎㅎ
전  잘  모르겠습니다. ^^

[레벨:12]진 예수만

2010.02.11 11:09:33
*.203.204.68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습관처럼(혹은 잠꼬대처럼) 들먹이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라는 종교적
으로 익숙한 용어들이, 알고보면 초대교회 시절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잠시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극한위기의 상황에서 정서적 / 정신적 쇼크로 인해 극도로 혼미해진 넋을 부여잡고
는 두 눈 부릅뜨고  외쳤던, 통상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던, 마치 돌아버린 사람들 같은 그런  "신앙
고백" 이었지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카타콤 묘실이나 카파도키아 유적지의 지하도시가 그들의 거처요 예배처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우리 스스로, 절체절명의 초대교회 기독교도 그들과 같은 '기독교도' 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진정 처절하고 절박했던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그걸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만의 모습에 불과한 게 아닐런지요.

그게 어떠한 계기로서든지 간에, '종교적 위선' 이 벗겨져야 진정한 종교로 환골탈태될 것입니다.

[레벨:10]차성훈

2010.02.11 14:37:03
*.44.109.251

0. 댓글에 댓글을 연이어 달면 폭이 좁아져서 글 모양이 아주 보기 어려워지는군요; 그렇다고 따로 댓글판을 갈면 주의가 분산되고...;
1. 김용남형제님의 의도는 이해하겠는데, 제가 가진 구속사라는 용어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제가 이해하는 구속사라는 용어는 쿨만 등이 제시하듯, 그리스도 사건으로 수렴되는 '구원'이라는 테마로 성서(혹은 역사)를 관통하길 시도하는 해석방법론의 한 방식인데요. 김용남형제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른바) '존재론적 구속사 이해'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과연 신구약 성서(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전통 일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물론 구속사라는 관점이 매우 유용하고 실용적인 개념임에는 동의하고(저 또한 구속사적 해석에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만) 이 방식이 오늘날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서 전반을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문제는 아직도 합의를 보지 못한 사안이지요.(최근의 동향을 살펴보면, '하나'의 관점만이 아닌 각기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한 '다양성'에 더 방점을 두는 경향성이 이루어지고 있죠.) 실제로 구속사 방식이 가지고 있는 기독론 중심성, 혹은 예표론에 가까운 알레고리적 위험성에 대해 면밀하게 점검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지요. 오히려 최근에는 구속사적 방식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성서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들도 많이 있지요. 어떤 것만이 옳은 방식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서의 텍스트와 해석자의 컨텍스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충분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것이지요.
2. 바실레이아에 대한 김용남형제님의 견해는 타당합니다만, 그 용어 자체가 어떤 정황에서 사용되었나를 고려한다면 '하나님 나라' 라는 표현은 썩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바실레이아는 신약성서 당시 로마 제국이라는 특정한 그룹을 상정한 용어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구약의 '말쿠트-왕권, 통치' 개념이 1차적인 의미였겠지만, 2차적으로는 실제 0세기 현존했던 로마 제국에 대한 대칭점의 의미로 바실레이아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영토, 국가, 통치의 범위' 등의 개념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역사적 예수 연구의 맥락에서는 '유대인' 예수에겐 충분히 영토나 국가의 의미도 있었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나라'라는 용어에는 그런 다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랄까요.
3. '건설'이라는 표현에, 인간의 주도권을 의미한다는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하신 듯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의 주도권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죠. 하지만, 대림절 영성에는 단지 일방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대개 후기 서신들에서 자주 나타나지요.)에서는 '예수 닮음', '예수 따름'의 윤리적인 메시지들을 찾을 수 있지요. 이것은 일방적인 도래를 무방비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예수의 메시지를 실천하고 지킬 것을 의도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림절은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 전반을 '닮아가는' 교회력 전체의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겠지요. 그렇다면 대림절 영성은 기다림을 넘어선 '닮아감, 따름', 그리스도교 윤리로 나아가는 과정이겠고. 뭐, 대충 이런 맥락에서 '건설'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쓰는 표현이 있는데, (적어도 성서의 많은 내러티브에선)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일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구원, 혹은 하나님의 '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관계적'인 사건이라는 결론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는 그 고루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역시 '사회성'과 '관계성'이니까요.
4. 뭐, 각자의 견해가 있기 때문에 단정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지만, 제 견해로는 '거짓 신학'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싶습니다.(물론 성서에서는 거짓 예언자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모든 신학이나 신에 대한 사변들은 결국은 상황과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렇다면 그 맥락과 의도에 얼마나 충실한지, 그리고 성서라는 텍스트와 전통에 어떻게 비추어지는지를 고려해야 할테지요. 그런 맥락에서 해방신학도, 그렇게 욕하는 번영신학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한국 교회, 우리, '나''의 맥락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5. unexpected error ocurred 자꾸 요게 뜨네요. 왜 이러지;;;;;;
profile

[레벨:14]저별과 달

2010.02.11 17:39:28
*.206.68.40

흰구름님, 인본주의 신학적 탐구로는 구원도, 십자가의 은혜도, 부활도 알수 없습니다.
신앙 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지식과 학문으로 규정 짓고 정의 할수 없는 것입니다.
님은 무슨 확신으로 님의 신학은 참 신학이고 다른 보수주의적 신학은 거짓 신학이라고 하시나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지혜를 비밀한 것으로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ㄱ)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레벨:9]김용남형제

2010.02.12 00:42:13
*.11.167.102

Transzendental님의 댓글을 중심으로 답변하겠습니다. 그만 하고 싶었는데 철학적인 반론까지 나오게 되는군요. 일단 제 글과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고 남기신 내용임엔 틀림이 없지만, 그마저도 전체적으로 기본 주제의 틀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렬하게 듭니다. 이 기분은 마치 정 목사님의 설교를 '토미즘의 아류'로 비판하고 생뚱맞게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형이상학의 향기에로"를 제언한 김종두 목사의 글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합니다. 문제제기는 타당하지만 결정적으로 전체적인 지향점을 놓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제게는 Transzendental님의 반론이야말로 전형적인 말꼬리 잡기로 여겨집니다. 솔직히 아직 철학적 소양이 미진한 제가 이 문제를 해명하자니 논리적 궁핍이 느껴집니다. 버겁지만 최대한 내용을 따라가면서 짚어보지요.

  먼저 제가 본회퍼에 가한 비판은 라크리매님의 댓글에서 불거진 부분이지 그 비판의 맥락부터가 본회퍼의 해석학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시대적 신학 정서를 구원론적으로 발전시키는 부분이 정통 기독교 영성에 적합하지 않다고 선을 긋고 있는 것입니다. 라크리매님과 제가 계속 소통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린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는 정통적 구원 개념 안에서 본회퍼 신학의 '조직신학적' 한계를 짚은 것이고, 라크리매님께서는 제 논지에 상관없이 엉뚱하게도 본회퍼 신학 자체를 변증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지요. 제가 짚은 본회퍼 신학의 한계는, Transzendental님께서 본회퍼의 버스 비유를 본회퍼의 고유한 존재론이라고 옹호하신 것과 정반대로 '존재론의 당위론화'입니다.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그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그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바르트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외면한 자기모순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또한 본회퍼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기에, 말씀하신 그와 틸리히의 '깊이의 하나님' 개념이 삼위일체론적 인격성에 기초한 하나님만의 고유한 세계를 외면한 채 도구적(실체론적) 신론을 신학 내에서 천박하게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해명하지 않겠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라크리매님, 리옹님, 차성훈님, yy님, Transzendental님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매우 답답한 공통점을 지적하겠습니다. 그것은 윤리와 존재의 질서혼동입니다. 윤리가 존재에 종속되기 때문에 독자적인 당위가 아니라 존재의 술어로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다섯 분 다 포착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버스 밖으로부터 구원이 온다"고 말하면 "버스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면 안되느냐"는 코미디같은 답변만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제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구원론과 당위론의 지평적 간극'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에 의존하지만, 후자는 윤리 개념을 슬쩍 강박관념으로 변용시킴으로서 윤리 너머의 영적인 리얼리티를 해소시킵니다. 이것이 언급하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이나 리꾀르의 기독교윤리학의 뚜렷한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당위의 학'으로서만 윤리학을 접근할 뿐이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일정한 패러다임을 넘어서 창조성을 지닌 일종의 '예언적 윤리학'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구약성서의 예언자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계시적 윤리학'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가 제가 말하는 존재론적 구속사를 "타락한 존재론" 혹은 "존재론을 mystify하고 있다"고 평하리라는 주장은 Transzendental님께서 제 글의 본의를 충분히 독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미숙한 비판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신비는 yy님의 반론이라는 맥락 안에서 제기된 '구속사 경험'의 신비이지 구속사 사태를 신비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구속사 사태에 관하여는 제가 윗 댓글에서 "다윗과 하나님의 은밀한 약속" 운운하면서 어느정도 해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그 세계가 하나님의 마음(사랑)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논리적 증명 불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건 사태를 넘어선 마음의 영역이며, 그야말로 경험(영성)으로만 접근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단지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니라 굳이 말을 만들자면 '삼위일체적 심리학'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쭙지요. Transzendental님께서는 구속사 사태의 신비성이 어디에 기초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 "사태 자체가 신비한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구속사 개념을 우상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 사태의 존재론적 고유성이 해석학적 방법론이라는 상대주의적 패러다임 언어에서 형해화할 것을 우려하여 비판한 것이며, 절대적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Transzendental님께서 계속 제가 말하는 '구속사'를 인식론적 언어로만 받아들이신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기초 수호라는 목적론적 태도"라는 언급까지 읽자니 님께서 아예 토론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고나 글을 쓰신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면서 한숨까지 나옵니다. 상황신학의 문제점은 단순히 '상관관계의 강조'가 아니라, 틸리히의 표현이기도 한 "묻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관계론적 주체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신학적 탈선에 있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제가 현상학적 이해의 기초가 결여되었다면, 님께서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선과 기독교 영성의 근본적 정체성 이해에 대해 치명적인 결여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yy님의 댓글을 동의합니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알아본 사실이기도 하지요. (제 주장을 일방적으로 절대화시키려는 뜻은 결코 아니구요.)

 그리고 언제 제가 도미니크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거짓 신학이라고 폄하했습니까? 이 부분은 님께서 제 글을 진지하게 읽으시고 제대로 독해가 되었는지 전반적으로 검토가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넘어가지 않고 싶군요. 꼭 답변을 부탁드리고요, "구속사적 이해를 결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판정할 수 없는 부분"도 아니며 "기독교  영성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판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닌" 건 더더욱 아닙니다. 상황신학은 기독교적 언어로 채색된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 정서라고 봅니다. 여기서의 반기독교란 기독교를 적대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가 지향하는 생명의 영성과 아예 따로 노는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현실성은 하나님의 행위이지 인간의 실천론적 적용에 놓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시는 '영적 리얼리티' 개념을 숙고해보시면 답은 쉽게 나오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의 적극적 개진의 결여가 문제가 아니라 프락시스의 과도한 적극성으로 인한 총체적 천박성이 제가 오류로 지적하는 핵심입니다. 이로 볼 때 Transzendental님은 지금 존재론과 존재와 윤리의 종속적이고 주체적인 관계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혹은 제가 던진 이야기가 애초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나 역사비평적 해석학을 깡그리 무시하려는 주장이 아니라 역동적 신학으로의 방향성을 제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철학적 색깔 안에서 진부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Transzendental님께서 정통 기독교 영성을 향한 지향성으로서의 본 토론의 의미를 충분히 되새기지 못하신 채로 제 논지를 잘 이해했다는 듯 말씀하시고 설상가상으로 제가 일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니 쓴웃음이 나옵니다. 라크리매님과 리옹님께 직선적으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상대방의 논의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소화도 못하고 본인의 코미디같은 침소봉대에 코멘트를 달아달라는 이야기는 아예 대화의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시장바닥 화법인데요, Transzendental님도 꼭 피차일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불쾌합니다. 제 논의의 핵심은 존재 우위가 아니라 존재 중심성이며, 제게 반론을 던지신 분들의 행위-고민적 영성이 원시적 기독교 영성에서 아예 빗나갔다는 논증을 쉬운 언어로 충분히 설명드렸는데도 엉뚱한 곳을 깊게 파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생명과 존재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이라는 영성의 심층과는 점점 동떨어질 뿐입니다. 이제 됐지요? 사실 어느 한 쪽의 회개(메타노이아)가 없는 한 끝까지 소통불능일 것으로 보이기에, 웬만하면 여기서 제 댓글은 끝내고 다비아 수행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죽어라고 답변을 해도 인식론적 차원의 차이이기에 오해할 분은 계속 오해하시고, 이심전심으로 제 말뜻을 분명히 이해하시는 분은 그렇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모저모로 결례에 용서를 구하며.

[레벨:12]라크리매

2010.02.12 05:08:09
*.41.16.153

형제의 글은 읽을면 읽을수록 비트겐슈타인의 " 말하수 없는 것에 입다물라 "라는 충고가 생각나게 하는군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 전쟁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모두를 잃게된 레비나스의 고통스런 경험으로 비롯된 것쯤은 알고 있겠죠?
그만큼 인간에게 경험은 인간 존재자체를 변화시키는 사건, 인간 삶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폐된 뜻을 발견하게되는 실재적인 사건이란 말입니다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도 결여된채 어떻게 생명과 존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영성을 알수 있다는건지 의문스럽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2.12 10:14:20
*.120.170.243

이 논쟁을 따라가시는 분들에게
아무래도 한 가지 힌트를 드려야겠군요.
저기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김용남군은
18세의 어린(?) 젊은이랍니다.
글투가 좀 전투적이지만, 음,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테크닉인지 모르겠으나,
논객으로서 자리를 이미 확보한 것 처럼 보이지 않나요?
앞으로 수능도 준비해야 할 사람이
이런데 시간을 물쓰듯 쓰니 어쩌려고, ㅎㅎ
주제와 상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좀 쉬었다 가시라는 뜻으로요.
그런데 '역사적 예수' 문제가 아직도
신학에서 핵심 주제가 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각주로 처리해도 좋을 듯한 문젠데요.
사실 논문에서는 각주가 더 중요할 때가 있긴 하지만요.
한국교회가 너무 관념화 되어 있어서
이런 주제가 나름으로 반향을 보이는 게 아닐까 합니다.
행복한 설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4]저별과 달

2010.02.12 22:35:22
*.206.68.40

정 목사님, 여기서 하나 확실하게 밝혀야 김용남 형제의 댓글의 진위를 올바로 파악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위에 김용남 형제의 댓글을 보니 정목사님의 판넨베르크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설교 비평에 대한 김용남 형제의
또 다른 비평에 가까운 예리한 대글과 또 다른 여러 대글들을  볼때에 이건 고등 학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등학생이 자신 스스로의  사고 체계로, 신학을 분석하고  또 김종두목사님, 판넨 베르크의 설교 등등,
또한 하이데거, 바르트, 본회퍼, 탈역사, 보편사,  상황신학, 민중신학 등등
이런 내용들을   이 공간에서 이런 어휘들로  표현 할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여러 다비안 들이 영문도 모르는체 가상의 인물과  지금 토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점 확실히 밝히고 넘어 가야 할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2.12 23:25:14
*.120.170.243

앗, 그러고 보니
김용남이 그 김용남이 아니라
또 다른 김용남일지 모른다는,
무슨 가상공간의 무엇처럼,
섬뜩한 느낌이 드네요. ㅎㅎ
글쎄, 나도 그게 불가사의에요.
지금 서울샘터교회에 나오는 바로 그 김용남이
저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김용남 맞나요? 음.

[레벨:28]첫날처럼

2010.02.14 00:14:59
*.67.83.36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별과 달님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흠..

[레벨:28]첫날처럼

2010.02.12 17:04:29
*.147.42.18

원글과 댓글 이제야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니 정말 잘 읽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흰구름 님 글은 즐겨 읽고 공감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거짓신학" 이라는 말은 왠지 좀 쌩뚱맞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면 마커스 보그나 존 도미닉 크로산의 신학은 참신학이란 이야긴지... 그 것은 또 다른 선민의식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 나라 교회의 신학 없는 신학, 번영 신학 같은 그런 것을 옹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거짓신학" 을 말하는 모습 속에 그들의 모습이 왠지 오버랩되어서요...

제 개인적인 소회를 말씀드린다면,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한권을 읽은 것이 전부라서 어떻게 이야기 하기는 그렇지만, 예수 세미나 쪽은 신학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관점으로 본 사회과학" 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더라구요...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적 측면을 존 도미닉 크로산은 "접신, 황홀경" (trance) 차원으로 해석을 하더군요... 그게 맞다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예수 세미나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의 댓글에서 일어난 모든 논란들이 결국은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神政이, 섭리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냥 이 세계 속으로 스스로의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냥 던져진 혼자된 존재(?)로 느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너무도 차갑고 냉혹한 無神적 상황들이 이 땅에서는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듯 합니다... 유태인들이 그냥 죽어나가도록 방치(?) 하신 하나님... 이라크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폭격으로 죽어 나가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하나님... 지금 이 땅에서만 봐도 현 정부가 만들어 내는 말도 안되는 상황과 그 속에서 핍박 당하는 사람들... 솔직히 맨날 천날 넉두리만 일삼는 저는 이런 말 할 자격도 없지만, 그 속에서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끼고 행동할 줄 알았던 의인들... 그 의인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냐' 고 하면서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계시와 응답이라고 할까요? 응답은 계시에 의존적이어야하고, 또한 계시는 응답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시와 응답 중에 응답이 결여된 계시, 계시가 결여된 응답 그 둘 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10.02.12 18:58:41
*.147.42.18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댓글들을 읽으면서 배우는 것이기도 한데,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신비와 현실은 다른 것이 아니고, 또한 신비가 현실에서 떨어져서 신비화될  때 그 것은 신비가 아니라는 것... 그 것이 리얼리티네요...

하나님의 당파성은 이런 거 같아요... 물이 많은 곳에서 물이 적은 곳으로 흘러서 똑같아져야만 하는 그런 자연의 공평무사 비슷한 그런 거 말이죠...    


[레벨:12]라크리매

2010.02.12 19:05:40
*.41.16.153

첫날처럼님 말씀에 공감해요
신비를 말하려할 때 이미 신비는 그자리에 없죠
신비가 현실에서 떨어져서 신비화될 때.. 정신분석에선 그것을 "도착" 이라고도 명명해요

[레벨:3]훈쓰

2010.02.12 23:37:34
*.223.154.153

쉬운 얘기 어렵게 하는 거 보기에 안 좋습니다.

물론 능력이 안 되서 그렇게 적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전문용어를 자신이 잘 이해한 데로 설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맞는 겸손한 글쓰기라 생각합니다만) 

어려운 말 자꾸 쓰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식 대결이나

 나아가 사소한 자존심 대결 되니까 삼가는 게 어떨까요?
(물론 그 대결에서의 승리가 이 토론의 장에서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내용 읽어 보니 그렇게 산뜻한 주제도  아니고, 오랫 동안 논쟁해왔던 문제 들인데,

말길어지니 논쟁이 주제와도 겉돌고, 보기 안 좋습니다.

너무 열내시는 것이 아닌 듯,  그냥 보기 안 좋아서 좀 끄적이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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