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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께 - 전통 기독교에 대한 이해

조회 수 5301 추천 수 258 2006.11.02 05: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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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reeview.org(*아래의 768번글의 댓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헨리 나우웬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는 차원이라 생각되어 여기 다시 새글로 남긴 것입니다.. 참고로 논의의 효과적 집약을 위해 이제부터는 정 목사님의 글에만 답변하고자 하는 점을 이해바라며, 이에 대한 논의들을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좀 긴 글이지만 끝까지 찬찬이 읽어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 좀더 목사님과 저와의 차이와 대비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읽기에는 결국 목사님께선 이미 초기 기독교 때부터 헬라철학의 영향을 극복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걸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삼위일체 개념을 비롯하여 전통 기독교는 플라톤의 찌꺼기들을 극복하고 있으며, 점점 더 지양되고 있다고 보는 거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설마 플라톤의 사상 자체가 이미 초월적이고 실체론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건 아니실테죠?

저는 기독교의 그 궁극적 기원이 이천년 전 예수사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때,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보존하고 계승하게 되면서 그에 따라 점점 해석이 가미되고 거기에 헬라철학이 상정하고 있었던 세계관이 점점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 본래의 이천 년 전 실재적 예수(real jesus)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헬라화>되어갔고 결정적으로는 로마 제국 하에서 국교화되면서 니케아와 칼케돈을 비롯한 공의회들의 결정들이 지속적으로 지금까지조차 그 결정적 영향을 끼쳐왔다고 봅니다. 심지어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그 운동조차도 그 점에선 이를 계승하고 있지요.. 이를 라가츠는 “종교개혁의 타락”이라고도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헬라철학의 찌꺼기들을 정말로 극복하고 있는지.. 적어도 그 핵심에 있어선 극복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목사님의 시각이기에.. 제가 이에 대한 반론들을 조목조목 드리면 되는 거 맞죠?

알다시피 초기 1세기만 해도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정통 교리라고 부르는 신조들은 거의 없이 지냈던 때였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함께 있었던 예수로부터의 생생한 종교적 통찰들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고, 단지 종말이 지연되면서 그것은 예수의 언행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속에 혼재되어 갔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극심한 외부 이교도의 사상들의 침투와 다양한 해석들의 난립에서의 기준 확립의 필요성에 의해 점점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했었습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의 헬라철학에 기반한 기독교 신조 확립들의 흔적들은 너무나도 많아 일일이 지적하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교회사가로 유명했던 아돌프 폰 하르낙은 말하길,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옷을 입은 종교라기보다 종교의 옷을 입은 헬라철학”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지요.. 어쨌든 기독교 사상사에서 그 사례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A D. 2세기 초의 경우에도 순교자 저스틴 같은 교회 변증가도 스토아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피타고라스 사상, 플라톤 사상에 열렬한 철학도였지요.. 그는 그러한 기독교 밖의 헬라철학적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기독교를 변증합니다.. 어디 저스틴만 그런가요? 이레네우스, 아리스티데스, 타티안, 아데나고라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 터툴리안 같은 신학자들도 모두 기독교인으로 되기 이전부터 이미 희랍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자들이였습니다.. 그 뿐인가요..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제롬, 보에티우스 등등 이들 모두 희랍철학의 수혜자들이었습니다..(혹시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이거 제가 이름만 나열하고 넘어간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제시할 수 있는 논증들이란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희랍철학이란 것은 세계 이해에 있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개념 체계들이죠.. 이들은 이를 가지고 기독교 체계의 주류 토대들을 점점 놓는 쪽으로 형성해나갔었습니다.

이미 당시 로마교회는 희랍의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세계를 설명하는 이해로서 당시 헬라문명권의 사유들을 끌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전파의 용이성 때문이었죠.. 헬라철학의 토대로 해석된 기독교는 당시 희랍철학에 경도되었던 로마 사람들을 비롯한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고급스럽게 들릴 만 했으니까요..

솔직히 조금 긍정적으로 볼 경우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의 신학과 그리스 철학 사이에 강한 대조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2, 3 세기의 주도적 그리스도인들은 헬라 문화와 세계관으로부터 큰 통찰력을 사용하여 그 기독교 사상을 좀더 체계화로 끌고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받아들인 섭리주의 사상이나 교의체계, 영혼불멸설과 목적론적 사관 등은 희랍철학과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고 본래 기독교의 것은 아니었죠.. 기독교의 신 이해가 희랍의 <데미우르고스>라는 섭리 신이 그 밑변에 깔려있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처음 한국 기독교인이라면 놀랄 만합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기독교 교리사들을 살펴보면 여지없는 얘기입니다. 초대 변증가들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도 있습니다.

“우주가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주를 조직할 신적이 장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군주적이고 주님이 되시는 그 분은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썩지 않고 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분의 명령으로 실재는 무로부터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분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았고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요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인정하고 그 분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지 않는다“

여기서 낯설게 보이는 <데미우르고스>라는 단어만 빼면 오늘날 믿고 있는 전통 주류 기독교의 신 이해와도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데미우르고스는 데미우르지(Demiurge)의 근원적 개념으로 이 말은 플라톤이 말한 창조자라는 의미인데, 후에 교부들이 이를 사용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었지요..

그렇지만 이런 흔적들은 아주 일찍부터 있었지요.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가 이미 헬라화하고 있었던 과정이 먼저 있었고, 후발 주자였던 기독교 역시 이를 답습했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의 헬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상가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학자였던 필론이었는데, 그는 유대교의 야훼와 플라톤의 신 이해를 동일시키고 있었고 섭리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유대교 보다 헬라화 과정의 후발주자였던 기독교는, 그 교부들이 바로 이 필론의 철학 저작들을 수없이 직간접으로 탐독하고 인용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필론의 그 신학적 포맷들은 서구 기독교 형성과정의 신 이해나 세계 이해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리고 그러한 헬라화 과정의 결정판은 결국 중세에까지 이르러 어거스틴(플라톤)과 토마스 아퀴나스(아리스토텔레스)에서 뚜렷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지요..

만일 목사님께선 이들의 신 이해가 혹시 '실체론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신학 진영에서부터 비판받기 이전에 이미 일반 철학자들의 진영으로부터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판받으실 듯 싶습니다..

분명하게도 서구철학사의 주요 흐름들은 끊임없이 실체론적이었습니다..
실체론에 대비될 수 있는 관계론적 패러다임에 따른 철학사상들이
그나마 메인으로 자리하기도 했던 건 대체로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죠..
이미 철학진영에서 <서구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라는 표현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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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지만,
잠시 여기서 생략하고 목사님의 쓰신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며
성서적인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지양되고 있다는 점을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

여기서 기독교 역사의 과정에서 언제 이것이 뚜렷이 지양되고 있는지에 대해선 목사님의 답변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성서적인 전통>이라는 개념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모호할 개념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신학을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또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에 기초되었다고 말할테니까요..

목사님께선 자신을 정통 기독교를 계승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종종 얘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의 그 같은 이해는 정통 기독교 역사에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로소 극복되고 나타나고 있는지요?

혹시 제게 말씀하신 뜻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일찍부터 전통 기독교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는 것인가요? 도대체 기존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나님의 플라톤적인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언제 극복했었다는 말인가요?

그 지점에 대한 분명한 근거와 답변이 없다면 이미 목사님께서 얘기한 그러한 언변은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 옳은 거 아닌가요? 물론 어느 순간부터 딱 부러지게 갑자기 나타나진 않았다고 하더라고, 목사님이 전통 주류 기독교가 그렇다고 보는 순간, 그러한 흐름들은 이미 <메인스트림>으로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거스틴이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루터가 그랬다는 건가요? 아니면 칼빈이 그랬다는 건가요? 우리는 이들을 주류 전통 기독교의 핵심 신학자들로 보고 있지 않나요?

아마도 목사님은 인용하신,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에 의거해서 그러했다고 보시는 거 같은데.. 그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해석의 활동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이들이 주류 전통 기독교의 핵심을 차지해왔던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몰트만의 경우, 이미 그의 신 이해는 거칠게 보면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적인 신 이해와도 닮아 있을 만큼 전통 기독교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하나님’이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같은 것은 여지없이 <범재신론>panentheism에 가깝습니다..

참고로 만에 하나, 제게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있어 범재신론적인 신 이해를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이미 현대의 것이지 기존 기독교의 메인 스트림에선 잘 보여왔던 흐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해는 사실 앞전에 목사님께서 우호적으로 표명했던 사상가들, 곧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떼이랴르 샤르뎅 등등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죠.. 설마 목사님께선 바로 이런 영성가들의 사상들을 전통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시거나 혹은 양립가능한 것이라는 얘긴지요? 그런 식이라면 삼위일체도 저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실체론을 극복하면서 새롭게 해석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했을 땐
그것은 이미 주류 메인 스트림을 얘기한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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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저를 오해하게 쓰신 점이 있습니다.
제가 전통 기독교를 무조건 허물어내려고 애쓴다거나
제가 안티기독교처럼 전통 기독교를 무조건 무너뜨려야 한다거나
하는 표현들은 오히려 분명하게 틀린 얘기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 글 어디에서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비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그렇습니다.. 앞서는 성육신을 언급하며 전통 기독교의 신조 가운데 유용한 구제도 분명히 얘기하였잖아요.. 암튼 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얘기한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저의 글 어디가 어떻게 그런지를 직접 제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거 없이 위의 언급처럼 말하신다면, 그야말로 저에 대한 비난 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안티 기독교인들처럼 기독교 박멸론자가 아닙니다. 제 저서에서도 <반신학>Anti-Theology이 아닌 <재신학>Re-Theology을 추구한다고 말할 정도로 저는 오히려 대안론자에 속할 따름입니다. 조금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김준우 박사님의 역사적 예수를 얘기하면서 저와 비슷하다고 하셨는데
언뜻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저는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자체가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는 보지만, 그것이 아주 결정적인 핵심이라고는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핵심은 기독교의 밑변에 깔린 세계관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의 여부가 더 핵심인 거죠.. 역사적 예수 문제는 그러한 패러다임의 전환들 가운데 하나의 문제적 차원일 뿐입니다.. 이는 김준우 박사님과도 어느 정도 다른 시각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도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적 예수 제3탐구에 속하는 크로산이나 마커스 보그, 혹은 타이센까지도 포함하여 그러한 예수 이해마저도 저는 비판하는 맥락에 있다는 점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한다면 주로 예수 세미나를 비롯한 제3탐구에 기대고 있는 김준우 박사님께서 그려내고 있는 역사적 예수 이해와 제가 그려내고 있는 역사적 예수 이해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6

무엇보다 목사님께서 저와 다르게 가장 크게 오해하고 계신 지점은
목사님께서 “일부 수구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언급하신 지점입니다..
일부? 제가 보기엔 오늘날 기독교의 대부분이 여기에 빠져 있지 않나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신대원 2학년만 되어도 불트만의 신화화 논쟁에 대해서 알잖아요.
수구적 집단만 제외하고 오늘 성서의 신화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아주 많습지요!! 일반 기독교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신학생 혹은 신학교수들까지두요..
총신대를 비롯한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대는 아예 성서비평에 대해선 제대로 배우지도 않으니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표피적으로 혹은 이단시하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갖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트만? 저들은 간단하게 코웃음치며 “그게 뭔데?” 하기 쉽상인 겁니다.. 즉 실제적으론 수구적 집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거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게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신학대도 문제가 없을까요? 웃기게도 그나마 소수에 속하는 진보 진영의 경우도 그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원화> 현상으로 인해 신학교에서 배운 거 목회현장에서 잘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성서비평의 성과들이 반영된 성경공부 하는 교회는 아주 드뭅니다. 거의 대부분이 두란노, 네비게이토, 옥한흠 제자훈련 같은 그런 교리공부 교재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역사적 예수 공부하면 교회에서 쫓겨나기 쉽상입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그런 속앓이 하는 분들 아주 많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가 목사님은 <일부>라고 보시나요?
제가 보기에는 이들은 이미 주류를 꿰차고 있고
전통 기독교라고 표방하고 있지 않나요?
오히려 목사님이 표방하는 기독교가 제가 보기엔 일부인 듯 싶습니다..

당장 기독교 서점으로 달려가서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책들을
쭈욱 전반적으로 한 번 비교 검토해 보신다면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전능자고 완전자며, 동정녀 탄생은 글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며
성서무오설 부르짖고 대속교리 부르짖고 정말 난리가 아니지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로선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웨스터민스터 신앙교리는 니케아적 전통 기독교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핵심신조들입니다.. 이들은 택도 아닌 창조론을 읊어대며,
과학의 진화론은 마귀사탄 이론으로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그 시각에는
근원적으로 신-인간, 교회-세상, 정신-물질, 영혼-육체, 남자-여자, 본질-현상 등등 이러한 이원론적 도식을 깔고 있습니다. 즉, 전자가 더 우월한 요소이고 후자는 파생적인 요소이죠.. 이를 일컬어 <위계적 이원론>hierarchial dualism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기독교 대부분 곳곳에서 우리에겐 흔히 목격되고 있는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처참하게도 말입니다.. 명백하게 이것은 플라톤적인 게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건지요?

만일 목사님께서 그것은 그저 ‘수구 보수주의 기독교’일 뿐이며, 이는 전통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하신다면,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이미 주류 전통 기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목사님은 자신은 보수 전통 기독교에 속한다고 얘기하고 계시거든요.. 아마도 전통 자체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거겠죠.. 즉, 바로 그렇기에 저로선 이러한 점에서 목사님의 그 같은 이해에는 엄밀하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모순의 지점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점은,

제가 느끼기에 그러한 목사님의 성향은 오히려 <중도 복음주의> 진영의 성향에서 주로 엿보이는 비슷한 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주 성격을 보면, 이들은 교리는 전통 기독교에 있다고 하면서 매우 개혁적인 성향을 띱니다.. 물론 복음주의 진영도 몇 가지 좀더 세분화할 수 있는 포지션들이 있습니다만, 이들 가운데는 성서무오설 받아들이면서 교회 개혁 외치고 좌파와 비슷하게 정치 사회 변혁 얘기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경우 성서무오설까지 받아들이는 분은 아니라고 보지만 어느 정도 전통 기독교에 젖줄에 있으면서 또다르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들 복음주의 진영의 사람들은 제 딴에는 그러한 자세야말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심각한 착각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저 엄밀하지 못한 사유의 불철저성으로부터 비롯된 것뿐이죠.. 그것은 그저 물과 기름의 절충적인 조합일 뿐입니다.. 이 혼재된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주의 진영에는 아주 많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류들은 제 글에서 언급된 적도 있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d002/15
http://freeview.org/bbs/tb.php/d003/1

실제로 제가 아는 -기독교 언론에 이름도 좀 알려진 분인데- 현재 활동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있다는 교회개혁가이신데, 이 분은 자신의 하나님 이해가 전통 기독교에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놀랍게도 그 내용은 범재신론(panentheism)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범재신론은 이미 플라톤적인 신 이해가 아니지요.. 그것은 이미 서로 다른 존재론적 시스템에 놓여 있습니다..

즉, 그 분은 제가 보기엔 목사님과 비슷한 패턴의 반응을 보였었는데, 이분에게 있어선 전통 기독교의 신 이해가 범재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꼴이 되고 있었던 거지요.. 사실 목사님이 언급하신 신 이해의 개념들은 제가 보기에는 범재신론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언급하신 몰트만의 신 이해도 이와 가깝다고 이미 평가되고 있구요..

초월신론,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 범재신론 등등 이런 것들은 신관에 따른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신관>이란 신에 대한 유형(type)에 대한 고찰이죠.. 그것은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신 이해의 유형별 분류에 있어 어느 하나에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은 명백히 <초월적 유신론>transcendent theism이었지 <범재신론>이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의 기독교에선 ‘복음주의’라는 용어자체부터가 출처가 다양해서 불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하지 못하게 쓰이고 있는 현실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좀 긴 글이었지만 그래도 꼼꼼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은 있는데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

P.S, - 아참,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저는 서로 간의 논쟁에 있어 과격한 표현을 듣는 거 자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것이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하느냐 아니냐가 제겐 관건이지 표현 자체의 과격성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점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표현의 과격성에 대해선 전혀 염려하지 마시고, 구체적이고도 정합적인 근거에만 기반한다면야 언제든지 절 꾸짖어주셔도 괜찮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오류가 노출되는 거 자체에 대해선 별로 두렵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절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니까요..

그렇기에 제 글에 대한 정합적인 반박이 있으시면, 저로선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임을 말씀드리며..
끝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백두의 경구를 남겨놓겠습니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는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MT 16)



[레벨:7]늘오늘

2006.11.02 07:55:32
*.239.101.212

새로운 변증이 요청되는 때가 무르익었나봅니다.
이미 다양하게 새로운(?) 고백이 누적되고 있다고 느끼고요.
그러나 새로운 그것은 2000년의 그것을 품고가야하리라 봅니다.
상대성이론이 뉴튼 역학을 품고 가듯이 (맞나? ^^)
대부분의 경우에선, 간편한 뉴튼 역학의 풍성한 성과를 활용하면서,,, ^^
(아직, 뉴튼 역학도 이해 못하는 과학도이지만 ^^)

두 분께서 맘껏 당신들의 생각을 펼쳐주시니 행복합니다.
사랑으로/계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니...

이길용

2006.11.02 09:46:29
*.114.16.4

미선이님의 입장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래 폴 니터에 관한 게시물 댓글에서도 밝히셨듯이 신앙, 종교와 이념을 거의 동일시하고 계시는 군요.

그리고 그런 입장에는 종교의 세계에 대한 진지함이 희석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이념적 진영주의가 분명한 입장정리와 또한 타격의 대상을 뚜렷이 한다는 점에서는 기능적으로 편리한 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시각을 곧바로 종교, 혹은 경험세계로 삽입시킬 때는 어쩔 수 없는 '결정적 환원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결정적 환원주의가 나쁘고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경험세계의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환원주의적 설명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최소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는 신앙 주체들의 최소한의 주장은 용인되어야 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보기에 미선이님과 정목사님의 대화는 이미 평행선입니다.

종교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이성적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어느 정도의 개방된 자세를 취하고 다시 종교의 세계를 조망하게 되면.. 종교라고 하는 영역이 그렇게 이념적으로 확연한 구분이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 부분도 설명적 심리학을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그 무엇으로 해체될 수도 있겠지만( 그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W. James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학적 유물론자'들과 한판 붙었긴 했습니다)... 여하튼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종교의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리와 위상은 허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미선이님은 종교의 세계를 이념으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우엔의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우엔류의 경험을 이미 공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의 뜬금없는 이야기가 무척 현실적으로, 그리고 매우 사실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미선님의 문제는 바로 그런 해석될 '수'도 있다는 최소한의 과학적 '개방성'마저 이념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사가로서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깔뱅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아니 그보다 앞선 히브리 성서의 문장들을 곱곱히 되씹어 보십시오.
야훼문서와 엘로힘문서, 그리고 제사상문서와 신명기 문서등의 지향점을 다시 한번 투명한 눈으로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모세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진득한 고백을 점검해 보십시오.
물론 그 전에 미선님에게 너무도 강렬한 이념적 프리즘을 어느 정도 제거해야 할 겁니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초월적 유일신론으로 포장되어 있을른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들이 조망했던 신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범재신론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방적 유일신으로 읽어버리는 것은 미선님이 가지고 있는 전투적 이념장치들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계속 말씀으로는 종교체험의 세계를 용인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리 하지 못하는 미선님의 태도와 논지를 보면 좀 답답합니다.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의 태도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레벨:1]똑소리

2006.11.02 09:57:35
*.204.70.4

미선이님!

역사,철학,신학적 내공을 겸비하신 분이군요.
냉철하시고 논리의 힘이 만만치 않아보입니다.
아무튼 정목사님의 답변이 기대되는군요.
두분의 논쟁이 다비안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선이

2006.11.02 11:56:06
*.47.21.101

이길용님,
'종교도 결국은 이땅에선 이념으로 드러난다'는 표현과
'종교가 이념이다' 라는 얘기가 님에게는 이것이 같은 뜻으로 읽히나요?
오히려 님이야말로 제가 종교=이념 이라고 그 스스로 전제해버리고서
논지를 펴나가시는 거 같은데 님에게는 이것이 저에 대한 잘못된 이념으로 이미 있는듯 싶네요..

글구 모세대표공동체 고백이 범재신론이라는 해석은 그동안의 주류 기독교 전통의
메인스트림이 아니었고 그저 오늘날의 해석이요 이길용님의 해석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세대표공동체 고백에 범재신론의 흔적이 아예 없다고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해석이 가미되기 이전의 원형의 사건은 <모호한 총체성>vague totality으로 있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문제삼고 있는 지점은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서 볼 때
이를 범재신론으로 읽고 있는 뚜렷한 기독교 전통의 흐름들이 있었느냐는 얘기지요..
굳이 얘기한다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 정도는 이를 범재신론으로 읽어내고 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어디 그게 메인 스트림에 안착했던 전통 기독교의 신 이해였나요?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 신학도 헬라화 과정에 발을 담궜을만큼
그 영향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혹시 부정하고 계시는 건 아니실테죠..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의 기초토대를 형성했던 헬라화 작업들은
오히려 기독교 전통이 아니었다고 얘기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리고 그런 식의 글이라면, 저 역시도 님의 글을 읽으며 답답함을 많이 느낍니다..
한 번 스스로 보세요.. 뭐 별다른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결국은 "뭐 한 번 해보십시요" "읽어보십시요" 라는 글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런 얘긴 저도 똑같이 이길용님에게도 돌려줄 수 있지요..
"서구철학사 한 번 공부해보십시요..
물론 그 전에 이길용님에게 있는 너무도 강렬한 이념적 프리즘을 어느 정도 제거해야 할 겁니다."

P.S - 죄송하지만 정용섭 목사님과의 논의에 먼저 집중 좀 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얘기나눠도 늦지 않잖아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02 18:12:04
*.150.14.55

미선이 님,
본격적으로 장을 펼치셨군요.
나는 자신이 없는데...
누구 좀 나서서 말려 주세요.
그냥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논의를 통해서
서로가, 모두가 배울 수 있긴 하지만
실효성에서는 의문이 드는군요.
그래도 한 마디 해야겠지요?
저의 생각을 이번으로 정리할 테니까
미선이 님도 한 번 더 말씀하는 것으로 정리하시죠.
이미 나올 건 대충 나온 것 같으니까요.
다 나왔다는 말은 우리가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선이 님은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을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보고,
나는 <삼위일체론>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아마 미선이 님은 그 삼위일체론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곧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럴까요?
그건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미선이 님은 왜 주류와 비주류를 그렇게 예민하게 구분하시나요?
누가 주류고 비주류인가요?
오늘 한국에서 한기총이 주류? 맞습니다. 맞고요.
저는 제가 형식적으로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자칫 말장난처럼 들리니까 줄이지요.
만약 미선이 님의 그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였어요,
그렇다면 결국 성서는 정통이 아니겠군요.
이런 걸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개혁, 문제점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한기총이 어느 순간에 마이너리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지요.

위에서 미선이 님이 열거한 초기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당연한 말입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런 내용은 미선이 님이 인용한 하르낙의 책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르낙은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구약성서를 개신교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제가 그분의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지요.
그건 단지 영향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플라톤 사상의 아류처럼 본다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구미정 박사는 제외하고....)
성서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부장적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에 물론 가부장적인 흔적들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각으로만 본다면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은
오늘 성해방의 시대, 페미니즘의 시대에 아무짝에도 못쓸 쓰레기입니다.
그런 건 새롭게 해석할 수 없고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일리 메리는 기독교를 포기했더군요.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라사상의 흔적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신학적으로 이미 최소한 100년 전에 끝난 문제에요.
끝났다기보다는 문제제기가 충분히 됐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신학에서,
오늘의 주류 신학에서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이는 없어요.
이미 정리된 문제를 미선이 님은 왜 새로운 것처럼 진술하나요?
내가 오해했나요?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들의 신화 문제 제기가 이미 신학적으로 걸러진 상태인데도
미국에 있는 일단의 신학자들이 약간의 과학적 방법론을 첨부해서
그걸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인 것처럼 제기하는 게 조금 우스운 일이죠.
혹시 미선이 님이 제기하는 헬레니즘의 문제도 그런 건 아닐는지요.
역사적 예수 문제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 문제는
물론 현장 교회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고,
일종의 계몽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는 흘러간 노래입니다.
흘러갔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주제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의 관점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신학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미선이 님은 그런 꿈을 꾸고 계시네요.
그걸 위해서 기존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헬레니즘화 되었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군요.
우리 함께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부릅시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들이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라는 사실을 노래합시다.
성서의 남은 자 사상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숨어있는 소수자가 바로 주류니까요.

미선이 님은 기독교 정통이 초월적 유신론에 떨어졌지만
최소한 몰트만은 범재신론에서 그것을 극복했다고 보시는군요.
범재신론이 무엇인지 개념 규정이 더 필요하지만
일단 옳습니다.
판넨베르크, 오트, 융엘, 벨커 등등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요?
미선이 님의 논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주류 신학은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한 셈이군요.
그럼 됐습니다.
이미 오늘의 신학은 그걸 극복했어요.
극복된 문제를 왜 다시 제기하시나요?
그게 교회 현장에 어떻게 접목되는가는 둘째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몰트만이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했다고 해서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몰트만은 2천년 기독교 신학 역사의 아들입니다.
조금 가깝게 그는 바르트의 <말씀 신학>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바르트를 극복했지요.
그러나 바르트를 부정하거 재구성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트에 기대서 한발 앞으로 내밀 뿐이지요.
2천년 역사에서 그 어떤 신학자도 역사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런 전승 안에서 활동합니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과 니케아 신조와는 깊숙한 연관이 있습니다.
니케아 없이 몰트만, 없습니다.
사실 모든 새로운 것, 비록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역사 단절을 통한 혁명은 없어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역시
그것이 논증될 수 있는 앞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뉴턴 없이 하이젠베르크가 나올 수 있나요?
이런 점에서 2천년전의 교부들보다
우리는 조금도 더 성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선이 님은 니케아와 어거스틴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재구성하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들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다른 데로 이야기가 나갔습니다.
지금 과학신학, 해석학신학을 말하는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만약)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하고 범재신론의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니케아 신조에 그런 단초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은폐의 방식으로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삼위일체론의 발전 역사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종속론, 양태론, 삼위일체론, 단일군주론 등등,
이런 교리사 문제를 일일이 열거해야만 정합적이고 정밀한 진술인가요?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결국 지금 중심에 서 있는 신학자들에게
미선이 님이 비판하고 있는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이룬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이 왜 초월적 유신론이 아닌지 설명해야겠군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성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초월적 형이상학이
성서가 말하는 초월적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긴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지만
기독교 신학은 그런 초월성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미선이 님이 아시는 대로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논의 스토아 철학과도 대화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영신 학생들과 이 대목,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 공부했는데요,
교부들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을 버려두고,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해서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
즉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시 피력해야할까요?
(관심 있는 분들은 저의 온라인 강의 “신학과 철학”을 참조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은 이 땅의 문제, 물리학의 문제, 인식의 문제 등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성서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구요.
성서적인 전통이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했지요?
왜 그걸 모호하다고 보는지 그게 이상하군요.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도 봅니다.
인간의 영혼도 역시 피조물이죠.
플라톤에게 인간 영혼은 선재적인 영원성이 있습니다.
교부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더 설명해야 하나요?
초기 기독교는 플라톤의 영혼불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멸절설 사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이들의 생각을
성서와 예수의 부활 사건 안에서 받아들이거나 교정했습니다.

이제 말을 마쳐야겠군요.
미선이 님은 내 말이 여전히 정합성이 없다고, 모호하다고 말하겠네요.
이런 증거를 대야겠군요.
니케아 신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호모우시오스” 개념입니다.
예수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동질이라는 라틴어입니다.
그걸 기독교 신조가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간과 신의 일치입니다.
땅과 하늘의 동일화입니다.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인격적으로 구별된다는 게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만약 4세기의 기독교가 플라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런 신조는 불가능합니다.
역사 내재적이었던 예수가 어떻게 역사 초월적인 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말인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신 인식은 혁명적입니다.
유대교와 플라톤의 초월적인 신 이해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 내재성에 머물지 않고,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게 바로 삼위일체론이 말하려는 신론의 핵심입니다.
이런 설명도 역시 모호한가요?
접합성이 떨어질까요?

앞서의 글에도 지적했지만
미선이 님은 왜 기독교 교리를
하르낙이 말하는 그런 구도로만 보는지,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구도는 이미 해결된 것인데도,
왜 계속 그것만 문제 삼고 있는지,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헬라화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겁니다.
그런 증거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과거에 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다 해 놓았습니다.
미선이 님도 그런 걸 참조하는 것이죠?

성서와 기독교 역사는 하나의 색깔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스펙트럼이 아주 넓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삶이, 하나님 경험이
다층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길용 박사가 말한 것 같은데,
구약성서에도 범재신론의 흔적이 많다구요.
저도 그걸 인정합니다.
모세의 호렙산은 아마
이집트 종교, 미디안 종교, 히브리 종교가 조우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서에는 초월적 하나님 표상도 있고,
범재신론적 표상도 있고,
삼위일체론적 표상도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4세기에 삼위일체론에 도달했습니다.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 안에서요.
그것도 극복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러나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삼위일체론은 내가 앞에서 “호모우시오스” 개념에서 말했듯이
초월적 유신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사상이
플라톤에게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왜 이 사실에 눈을 감습니까?

물론 역사적 현실교회는 초월적인 유신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런 학자들도 많았지만
그런 건 내 버려둡시다.
로마교회가 제국주의적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냅둡시다.
한기총 분들이 하는 일도 그냥 냅둡시다.
어쩝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순전히 플라톤적의 이원론에 떨어졌다는 오해는 맙시다.
그래서 오늘의 모든 문제가 거기에 연유하고 있듯이,
미선이 님이 주장하는 대로 그런 형이상학적 전통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형이상학을 재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이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미선이 님이 나름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몰트만 신학과 판넨베르크 신학도 가능한 겁니다.
더구나 이미 100년 전에 끝난 헬레니즘화 논쟁을
오늘 다시 불거지게 하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어요.


미선이 님,
저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전통과 대화함으로써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융해를 모색하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은 또 미선이 님 대로 재구성의 길을 가세요.
이것으로 제 생각은 접으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주세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대화는 유익했습니다.

바우로

2006.11.02 21:38:24
*.126.215.119

“신대원 2학년만 되어도 불트만의 신화화 논쟁에 대해서 알잖아요.
수구적 집단만 제외하고 오늘 성서의 신화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성서를 하나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적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이 글을 쓰는 저도 성서를 비판적으로 즉, 이성적으로 읽자고 말했다가 이단취급당한 적도 있고요.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1.03 00:18:05
*.208.208.167

총신대를 비롯한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대는 아예 성서비평에 대해선 제대로 배우지도 않으니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표피적으로 혹은 이단시하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갖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트만? 저들은 간단하게 코웃음치며 “그게 뭔데?” 하기 쉽상인 겁니다..
즉 실제적으론 수구적 집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거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게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 미선이님,

이런 현실이 억울하신가요? 그럼 증명을 하세요.
보수 기독교가 틀렸다. 내 신학이 옳다.
어떻게 증명할까요? 열매로 하면 됩니다.

예수의 신학이 뭔지 철학이 뭔지 잘 모르겠네요.
다만 그는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선이님이 폄하하시는 옥한흠 교재 시리즈.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지독히도 충실한 그 교재.
그 교재가 무오한 그 무엇은 아닙니다만,
그 저자인 옥목사님의 삶을 볼 때는 숙연해집니다.
특별히 그와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던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신학적인 입장을 떠나서 존경하지 않을수가 없어요.
(헨리 나웬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선이님은 어떻습니까?
삶에서 '영혼(인간)'이라는 열매가 나타나던가요?
누군가 당신의 삶을 보고 예수의 흔적을 얘기 하던가요?
삶과 신학(혹은 철학)은 완전히 별개인겁니까?
저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미선이님같은 분의 일상은 어떨까.

보수 교단의 목사,신학교수 중에 형편없는 사람들 많습니다.
항상 보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니까 잘 압니다.
진보라는 분들도 별반 다를것은 없어보입니다.
그런데 보수 교단이 숫자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더 존경할만한 분은 많더군요.
그게 제가 보수 교단의 교리에 더 신뢰를 두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뭐 어떤 면에선 참 위험한 생각이지만 꽤 쓸만한 방법입니다.

미선이님이 외치는 '설' 들..
일단 지금은 그게 옳다고 소리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삶에서 나타나는 영향력으로 신뢰성을 확보하시길.

지금 보수니 진보니 상관없이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소위 먹히는 말은 다 그 사람의 삶 혹은 인격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옥한흠? 김동호? 헨리 나웬? 로이드 존스? 루터? 칼빈? 정용섭?(^^)
신학적인 오류나 모호함이야 어찌됐던간에,
그들의 지금까지 쌓아온 삶과 글에서 최소한의 신뢰성을 사람들이 감지한거에요.
그게 빠른 길입니다. 정직한 태도의 사람들에겐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아직 미선이님은 그 최소한의 신뢰치를 확보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저도 삶에서 항상 그걸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이구요...)

기분 나쁜 댓글인거 알지만,
정말로 미선이님의 열정이 아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왜 내 주장엔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까?
이 댓글이 그 고민에 대한 단초가 되길 바랍니다.

[레벨:4]New York

2006.11.03 04:56:45
*.120.19.226

이 얘기는 미선이님한테만 국한 된 “오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체론”을 극복하고 그에 대비되거나 반하는 모든 논리나 arguments가 실체론적이라 것입니다. 잘 들여다 보세요. 님들의 예만을 들여다 보더라도 초월이라는 개념도 실체론에 근본을 두니 초월이고, “실체론”에 대비되는 개념인 “관계론”도 실체론에 근본을 두고 관계로 포장한 것입니다. “정”에 “반”하는 것도 “정”을 이미테이션하는 한 형식입니다.

실체론적으로 또 얘기한다면 플라톤의 “실체론”을 정말 이해한다면(자신들의 argument 편의상 축소도 하지않고) 지금 정말 “플라톤에 각주 달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실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직 플라톤의 “수준”을 넘어가는 서양철학가는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수학, 과학, 시”등에 대해서는 심화는 물론이고 강화조차 없이 난무하게 쓰입니다. 일단 수학에 대해서만 잠시 얘기하자면 수학은 예외입니다. 수학은 화이트해드의 동료인 럿셀이 얘기한 것처럼 수학자란 자기가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고 하는 게 수학입니다.

즉, “해석”이라는 오류가 낄 틈이 없는 절대적인 학문입니다. 그래서 화이트해드가 얘기한 것처럼 수학은 “추상적인 것들, The Abstract”에 deal하기 가장 용이한 특수한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해석의 문제”를 아시는 여러분 그 수학의 강점이 상상이 가십니까?).

“시에 수학공식을 대비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으면 엄청난 업적이지요; 시와 수학 “둘 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직 택도 없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는 과학에서나 수학을 대비할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그의 수학자 스승이 남긴 한 공식이 우주에 자연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풀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학문은 신학입니다.

시간상 “실체론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예로만 짚고 가지요.

여: “I love you (나 너 사랑해).”
남: “Well, that’s your problem(그거야 네 문제지).”

그래서 다음의 정목사님의 결론보다 더 포장해도 “실체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미선이 님,
저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전통과 대화함으로써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융해를 모색하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은 또 미선이 님 대로 재구성의 길을 가세요.
이것으로 제 생각은 접으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주세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대화는 유익했습니다. “

더 진도를 나가자면, “사람 중심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교회로…” 틀리는 얘기가 아닌데 이미“실체적론”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벨:7]늘오늘

2006.11.03 04:03:34
*.239.101.207

미선이님의 문제제기가 제 마음에 절실하고 반가왔습니다. 일단,
한국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지형도에, 저의 경험이 공감하고 있고요,
제 경우엔 나고 자란 교회가 아닌, 불교의 수행을 통해 비로소
기독교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나,
나름의 곤혹을 갖고 있던 터에, 범재신론이라는 개념이 그 탈출구를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두선생님의 철학이
유력한 툴로 기능하겠구나하는 기대 속에, 미선이님의 추구하는 바와
그 재능과 박력은 큰 감동이구요. 이번 꼭지에서 정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기독교의 전통이 얼마나 크고 깊은 세계일까하는 자극을 새삼스레
뜨끔하게 느낍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정목사님과 미선이님 같은 분들의
글을 대할 때, 큰 호사를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의 머리와 가슴이
겉도는 일 없이, 온통 주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

미선이

2006.11.03 13:11:30
*.47.21.101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저 역시 논쟁은 서로의 차이를 극명하게 확인이 된다면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둘 뿐입니다.. 단지 여전히 그 차이가 불투명하지 못할 경우엔 문제가 계속 남아있게 되겠지요.. 물론 그 논쟁이 유익했는지는 어차피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들이 잘 판단해줄 거라고 봅니다..

나름대로 목사님의 쓴 글을 그대로 옮겨와서 제가 조목조목 반박을 한 것이기에
글이 좀 길어졌을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꼼꼼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읽어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먼저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선이님은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을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보고,
나는 ‘삼위일체론’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목사님의 이 같은 언급에는 엄밀하지 못한 지점이 있습니다(*제가 이렇게 개념의 엄밀성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서로 간의 최선의 합리적 소통을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를 해주시리라고 봅니다..)

즉, 언급하신 초월신론은 신관에 속하지만, <삼위일체론>은 신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관>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그 유형(type)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내용의 신이냐 라는 그 내용의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가 신관이라고 말할 때는, 결국 초월신론,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 범재신론(=양극신론, 포월신론, 새로운 유신론) 등등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가 믿는 신은 바로 이러한 여러 현존 양태로서의 신 이해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것 외에 다른 양태로서의 신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유일신론, 다신론 같은 것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는 신 이해 맥락이죠. 신이 여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세계에 대해 초월신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유일신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초월신론으로 표방될 수도 있고, 범재신론적으로 표방될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신관에 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를 넘어서 유신론 사상을 갖는 모든 종교사상에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인 것입니다.. 실례로 우리나라의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범재신론>에 속한다고 평가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는 초월신론, 범재신론 이런 용어들과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없는 이미 다른 범주적 차원의 개념입니다.. 예컨대, 북한산, 관악산, 지리산 등등 산을 열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이미 좀더 구체화된 계곡을 불쑥 말하는 격입니다.. (* 그렇기에 제가 보기에 목사님께서 신관을 삼위일체론 신관이라고 표현했을 때는 아마도 그 삼위일체가 품고 있다고 보는 해석인 <범재신론>panentheism 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가 그 사상의 역사에서 <삼위일체론>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이미 신관의 논의를 넘어서 또 다른 차원의 해석이 가미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도 들어가고 성령님도 들어가는 거겠죠.. 이때 그 신의 유형은 초월신론일 수도 있고, 범재신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마도 목사님은 기독교 전통은 본래 범재신론으로부터 왔다고 보고 싶으신 거겠죠(만약 아니라면 어떤 것인지 다시 얘기해주셔야 하겠죠).. 하지만 기독교 전통은 본래 범재신론을 표방하고 있다고 볼 경우에도,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서 범재신론의 흔적을 찾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 같은 분들에서나 보일 정도로 아주 간간이 나왔을 뿐이었지, 더욱 두드러진 흐름들은 초월신론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얘기입니다.. 희랍철학의 실체론적 사유는 기독교 문명을 타고서 서구 사상사에 뿌리 깊게 흘러왔으니까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을 말했을 때 그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세계에 대해 언제든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세계는 그 하나님에 대해 영향을 줄 수도 없고 끼칠 수도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신은 세계에 대한 제일의 원인자요, 초월적인 전적인 타자로서 구별되구요..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입니다.. 존재함을 가능케 하는 그 원인에 세계는 들어갈 수 없고 오직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범재신론은 이러한 신 이해를 거부하고 신도 세계의 영향을 받고 그 제약을 받는다고 얘기하죠.. 관계적 맥락에 있기 때문에 상호 영향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의 신론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어쨌든 분명하게 기존 기독교의 신 이해 전통은 실체론적이었다는 사실.. 이때 실체론적 신 이해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이 바로 헬라철학이었다는 점입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자꾸 주장하고 계시는데 삼위일체는 이미 철학이 아닙니다.. 이미 거기에는 철학(형이상학)이 기독교 신학에 적용되어서 형성된 개념에 속합니다.. 뒤에 가서 또 얘기하겠지만,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를 신관이라고 표현하신 것도 그렇고, 형이상학이란 개념도 잘못 이해하고 계신 맥락이 있습니다.. 이는 맨 뒤에서 제가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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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선이 님은 왜 주류와 비주류를 그렇게 예민하게 구분하시나요? 누가 주류고 비주류인가요? 오늘 한국에서 한기총이 주류? 맞습니다. 맞고요. 저는 제가 형식적으로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자칫 말장난처럼 들리니까 줄이지요. 만약 미선이 님의 그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였어요, 그렇다면 결국 성서는 정통이 아니겠군요. 이런 걸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개혁, 문제점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한기총이 어느 순간에 마이너리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지요.>>

여기서 정 목사님의 얘기는 자신의 논지를 슬며시 제시하셨다가 다시 거둬들이고 하는 식이니 조금 불명료하게 보입니다..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지요(물론 금긋듯이 구분되진 않고 대체적인 구분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구분자체는 유효하다고 봄).. 누가 메인 스트림에 있느냐는 그 영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파생시키잖아요..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라고 하셨는데.. 옳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곧바로 말씀하시길, 그러면서 성서는 정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언자와 성서는 각기 별개라는 얘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의 역사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봤을 때 정말 무엇이 진짜 기독교 정통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바로 진짜배기 정통 기독교는 언제나 <마이너리티>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얘기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기존 기독교 역사 전체를 뒤집어봐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요.. 주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해왔던 기독교 사상은 정통의 껍질을 쓴 잘못된 이해였고, 실제로는 늘 마이너리티에서 예언자적 전통과 함께 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독교 혹은 실체론적 이해를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들 혹은 가부장성을 극복하려는 생태여성성의 노력들 등등 기독교사의 이러한 숨은 명맥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보고 싶은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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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낙에 대해서 얘기하셨는데 굳이 하르낙만 따져물을 문제가 아니지요.. 게다가 저는 하르낙의 언술 모두가 백퍼센트 옳다는 얘길 한 것도 아니었구요..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는 논증을 하는 가운데 단지 하르낙의 얘기도 빌린 것뿐이지 사실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는 점은 서구사상사에서 하르낙 말고도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지 않나요? 신학자만 그러나요.. 철학자들도 줄창 지적하던데..

제가 어제 저녁엔 장신대에서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가 있어서 밤늦게 왔었는데, 이들 책에도 기독교의 이원론적 병폐, 기독교에 스며든 희랍철학의 폐해들이 지적되고 있던데.. 굳이 하르낙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면서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지요. 그건 단지 영향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플라톤 사상의 아류처럼 본다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 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구미정 박사는 제외하고....) 성서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부장적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

그런데 여기서 정 목사님의 주장은 단정만 있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습니다.. (구미정 선생님을 얘기하셨는데, 저도 자주 뵙는 분이지만, 그 분도 그 자신의 책에서 곳곳에 헬라철학의 영향 위계적 이원론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제가 보기엔 목사님께서 침소봉대의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저로선 지금까지의 신학적 성과를 뒤집는 새로운 발상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그 근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뒤에는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에 물론 가부장적인 흔적들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각으로만 본다면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은 오늘 성해방의 시대, 페미니즘의 시대에 아무짝에도 못쓸 쓰레기입니다. 그런 건 새롭게 해석할 수 없고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일리 메리는 기독교를 포기했더군요.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라사상의 흔적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신학적으로 이미 최소한 100년 전에 끝난 문제에요. 끝났다기보다는 문제제기가 충분히 됐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신학에서, 오늘의 주류 신학에서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이는 없어요. 이미 정리된 문제를 미선이 님은 왜 새로운 것처럼 진술하나요? >>

도대체 무엇이 100년 전에 끝나고 무엇이 정리되었다는 얘긴가요? 초기만 살짝 헬라화되고 그 이후는 극복된 채로 계속 흘러왔다는 얘긴가요?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여전히 실종되어 있습니다..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캐치할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님의 입장에선 이 문제가 이미 신학계에선 그 정리가 끝났다고 하셨으니 잘 됐네요.. 제발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정말 몰라서 묻는 건대, 도대체 기존 기독교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헬라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그들이 희랍의 형이상학이 아닌 과정 형이상학이라도 끌어들여서 새로운 시스템의 조직신학을 재수립이라도 했던가요?

오히려 목사님의 그러한 얘기야말로 학계에 새로운 학설을 내어놓으신 건 아닌지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 문제가 정리되었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정리되었다는 얘긴가요? 목사님의 얘기는 여전히 불분명할 따름입니다.. (역사적 예수 얘기 문제는 저도 드릴 얘기가 많지만, 논의의 집중을 위해 제외합니다..) 그리고서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부릅시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들이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라는 사실을 노래합시다. 성서의 남은 자 사상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숨어있는 소수자가 바로 주류니까요.>>

목사님의 이 얘기는 제가 앞서 진짜배기 기독교 정통은 결국 마이너리티 소수자의 역사였다고 얘기한 것과 대동소이한 말씀입니다.. 저도 당연히 그렇게 보고 있구요.. 그렇지만 제가 목사님께 문제를 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언급을 하시고자 한다면, 모순되지 않게, 일관성 있게 말씀을 하셨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분명하게 평가되고 기독교의 주류 메인 스트림의 전통은 긍정하시면서, 동시에 방금 이 얘기는 오히려 숨어있는 소수자가 주류라고 하시고 계시니, 목사님 스스로 모순된 언급을 보이고 계신 게 아니냐는 얘길 드린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저와의 극명한 대비는, 목사님은 전통 기독교는 (단지 초기에 잠시 헬라화되었을 뿐) 이미 헬라화를 극복했다고 보고 계신 점이며, 그 헬라화 극복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들은 여전히 실종되어 있습니다.. 혹시 목사님의 입장에선 신학적 정리가 이미 끝난 거라고 보시니, 오히려 더 용이하게 잘 얘기할 수도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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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사님께선 몰트만을 비롯하여 판넨베르크, 오트, 융엘, 벨커 등등 주로 독일학자들을 인용하시면서 (아무래도 목사님의 신학적 바탕은 독일쪽이겠죠) 적어도 현대의 신학은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했으니 문제삼을 필요가 뭐 있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사님의 얘기는 제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지점과 약간 핀트가 어긋난 얘기일 뿐입니다.. 저는 현대의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이천 년 전 예수사건 이래로 지금까지의 기독교 전통이라고 불리우는 그 메인 스트림의 사상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니까요..

몰트만을 얘기하셨는데, 저는 솔직히 몰트만 신학(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명성에 이끌리겠지만)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이는 재밌게도 제가 지금 정목사님을 비판하는 맥락과 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앞글에서도 말했듯 몰트만의 신관이나 그 개념들은 과정신학적 시스템의 신관과도 닮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신학사상은 헨리 나우웬 만큼이나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어떨 때는 범재신론적인 언급을 하다가도 정목사님 말씀대로 어떨 때는 바르트의 신관을 자기 것으로서 얘기할 때도 있지요.. 또한 지적하신대로 몰트만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적 신 이해도 끌어들이면서 말입니다...

저는 바르트의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초월적 타자입니다.. 아무리 후기 바르트가 화해론을 읊었다고 해도, 그가 보는 하나님 이해는 전적으로 세계에 영향(은총/계시/구원 등등)만을 줄 뿐이지, 세계로부터 받는 영향에서는 여전히 초월적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결국 초월신론에 해당하지 범재신론이 아니지요.. 범재신론의 신과 세계의 현존 양태는 철저히 상호 의존적 관계입니다.. 다르지요.. 이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혹시 몰트만이 바르트를 극복했다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몰트만은 이 구분을 여전히 클리어하게 제대로 하고 있질 않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몰트만의 신학에도 정목사님과 흡사하게 여전히 <모순된 개념들의 혼재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지닌 문제인식에는 형이상학적 지평에서부터 세밀하게 구분하는 문제인식이 별로 없는 점에 기인합니다..

형이상학이란 존재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궁극적인 지평의 패러다임론입니다.. 존재를 다루는 그 기초 패러다임에서부터 달라지면 이름이 같은 단어라고 해도 그 뜻은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것입니다.. 희랍의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에서 보는 신과 과정 형이상학의 패러다임에서 보는 신은 그 이해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해야죠.. 이 첨예한 문제의식을 몰트만에게선 별로 찾아보기 힘들지요..

단지 몰트만은 전통 기독교 신학의 범주에 있다고 표방하면서도 (제가 볼 때 웬지 몰트만이 진보 신학자들에게도 가끔씩 어필되는 이유가) 사실 정치신학과 함께 제3세계 신학들 그리고 생태신학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통찰들은 간간히 신선한 신학적 통찰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이 모두를 그가 일관성 있게 꿰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답하는 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흡사 뉴턴패러다임 시절의 사물 이해와 양자물리학 패러다임 때의 사물 이해가 하나의 머리속에서 서로 뒤섞여 있는 채로 내뱉고 있는 경우지요.. 저는 솔직히 바르트를 보수와 진보를 그저 섞어놓은 절충적 보수주의자로 보는 지점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몰트만에게서도 <엄밀한 일관성이 결여된 절충주의자>라는 점이 없잖아 엿보인다는 얘깁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바르트나 몰트만 연구는 신학책 하나 써야 될 법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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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선 역사 단절을 통한 혁명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조건 기독교 전통을 거부한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지금까지의 기독교 전통을 플라톤이 아닌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다시 객체화하겠는 작업일 뿐입니다.. 목사님의 표현인 ‘단절’이라면 아예 거부하고 손을 떼야 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식이 아니거든요..

그리고선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결국 지금 중심에 서 있는 신학자들에게 미선이 님이 비판하고 있는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이룬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대해 목사님의 지금까지의 언급을 대략 정리해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있어 초기(잠깐 헬라화) 그리고 곧바로 헬라화 극복(근거는 삼위일체)이 있었고 그리고선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 20세기에 다시 헬라화 극복.. 대략 이런 모양새입니다.. 즉, 초기 이후에서 현대 이전까지의 기독교 신학의 <해석학적 존재론>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모호한 채로 실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선 별안간 현대 신학자인 몰트만, 판넨베르크를 끌어들이시면서 초기 니케아 때부터 이미 범재신론적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런 얘긴 목사님께서 기독교 사상사를 오히려 현대를 통해 역투사하여 일반화하겠다는 것인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니케아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까지 실종되어 있는 형이상학 지점도 명료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인데, 목사님의 언급에선 그런 것이 일관되게 없잖아요..

기독교 신학은 헬라화를 극복하고 초월적 하나님을 극복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서 말씀하시기를

>> “교부들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을 버려두고,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해서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기독교 주류 전통에 있는 주요 신학자들 가운데 도대체 어느 누가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해서 영향도 받고 제약도 받는다고 그렇게 기술하고 있던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초월신론이 극복되려면 중세 스콜라 사상이 메인 스트림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처럼 헬라화를 극복하고 초월신론 극복의 흐름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어거스틴의 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거의 반역수준입니다..

제가 보기엔 정 목사님이야말로 신학적 정리가 끝난 얘기를 오히려 억지로 다시 주장하고 계시거나 이 문제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보는 신학계와 아마 목사님께서 보시는 신학계가 다른가요? 그럼 신학 말고 철학계는 어떤가요? 철학자들이 중세 교부들이 헬라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을 폈다고 볼까요? 이런 문제는 이미 철학 진영에선 게임 끝난 얘기가 아닐까 싶은데..
(*혹시 철학자들이 기독교인도 아닌데 지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알겠냐고 하실 진 모르겠지만, 이미 서구사상사는 기독교 사상과 한 배를 타왔기에 철학계도 불가피하게 기독교 신학을 안들여다 볼 수도 없다는 점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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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 목사님께선 교부들의 극복 사례라며 다음과 같이 얘기하셨습니다..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도 봅니다. 인간의 영혼도 역시 피조물이죠. 플라톤에게 인간 영혼은 선재적인 영원성이 있습니다. 교부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더 설명해야 하나요? 초기 기독교는 플라톤의 영혼불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멸절설 사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이들의 생각을 성서와 예수의 부활 사건 안에서 받아들이거나 교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죄송하게도 목사님은 조금 핀트가 어긋난 답변을 하셨고, 여전히 제가 문제를 삼고 있는 지점은 못보시고 계십니다.. 저는 헬라화의 극복을 희랍철학이 가지고 있는 그 형이상학의 극복에 있지, 목사님께서 방금 얘기하신 영혼이 피조냐 영원이냐 멸절이냐 불멸이냐 그런 세부적인 것에 있지 않거든요.. 목사님의 인식대로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주의에서 신플라톤주의로 가는 것도 헬라화의 극복이 되버립니다..

그러나 제가 얘기하는 헬라화 극복은 그러한 세부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이데아-현실세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처럼, 영혼-육체, 정신-물질, 신-세계, 본질-현상, 남자-여자 등등 제가 형이상학이라는 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이 고질적인 이원론적인 존재 패러다임을.. 교부들이 극복했다는 건가요? 저는 가장 기초적인 혹은 궁극적인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결도 없이 영혼이 피조냐 영원이냐 멸절이냐 불멸이냐 라는 문제는 매우 지엽적인 것이죠..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도 없이 성서적인 전통을 얘기하시니 그저 여전히 모호하다고 볼 수 밖에요.. 다들 자기야말로 성서적인 전통이라고 내세우니까요.. 여전히 안개 속의 풍경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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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사님께선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를 언급하시면서, 니케아 신조는 결국 “인간과 신의 일치, 땅과 하늘의 동일화”를 말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의 지배와 영향에서 벗어나는 증거가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솔직히 제게는 목사님의 그러한 해석들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고도 새로운 학설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실 homo-ousios는 본래 성서 어디에도 없는 용어이자, 애초 그리스 철학 용어라는 점은 알고 계시지요?
잠시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썰을 좀 풀도록 하겠습니다..

애초 그리스어에서 ousia라는 단어만큼 다의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거의 없지요.. 그리하여 homo-ousios는 동일 ‘본질’(essence)을 의미할 수도 있었으나, 또한 동일 본성(substance), 동일 실체(reality), 동일 존재(being), 동일 양태(type)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플라토니안 철학자 포르피리우스는 인간과 동물의 영혼은 homo-ousios(동일한 보편적 양태)라고 기록한 바 있죠. 만약 ‘homo-ousios’가 니케아서 사용된 그 단어의 의미였다면 당시 아리우스파 중에서 이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리우스파는 하나님과 예수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호시우스의 전략들은 어떻든지 아리우스파를 누르고자 함이 있었고 그러한 압력에 있어 당시 아리우스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였던 유세비우스는 고민 끝에 이 homo-ousios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유일하게 출생한, 즉 아버지의 ousia(본성)으로부터 온,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만들어지지 않고 출생한, 아버지와의 homo-ousios, 그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된 분"

물론 homo-ousios가 아리우스파를 불쾌하게 만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실 이 개념은 심지어 아타나시우스조차도 그 회의가 끝나고 20년 동안은 그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죠.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한 hypostasis(개체), 혹은 본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벨리아누스주의(Sabellianism)의 냄새가 났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목사님의 그 해석도 사벨리아누스주의를 표방하고 계신 건 아니실테죠?

자, 이때 목사님의 니케아 해석은 ‘신과 인간의 일치’ 혹은 ‘땅과 하늘의 동일화’라고 하셨는데, 사실 니케아 신조의 그 뜻은 애초 땅의 인간이었던 예수를 오히려 인간과 구별된 천상의 그리스도로 만드는데 그 핵심이 있었지, 그 예수를 계속 땅으로 내려오도록 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즉, 목사님께선 지금 그 옛날의 니케아 신조를 전혀 다른 방식의 프리즘으로서 당시의 본래 뜻과는 정반대로 해석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좀 놀랬던 것이지요..

솔직히 신학교에서 배운대로만 이해해도, 니케아 신조는 당시 아리우스파를 누르고 아타나시우스쪽에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예수는 인간이라기보다 사실상은 신이라는 점을 얘기하려 했던 게 아니었나요? (이때의 인간이란 표현도 예수가 아예 그저 비역사적으로 떨어지지만 않는 정도의 안전판 정도의 의미일뿐이었죠.. 이는 오늘날 보수 기독교인들의 예수관과도 정말 딱 맞아떨어지죠..) 쉽게 액면가로 이해해도 그거였잖아요.. 예수를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천상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당시 니케아 신조의 맥락을 지금 현대의 정용섭 목사님께서 오히려 그 반대로 니케아 신조의 뜻은 신과 인간의 일치이기 때문에 땅으로 내려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시는 꼴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니케아 신조의 본래 뜻과는 지금 반대로서 해석해버리신 거죠..

물론 당시의 니케아 신조를 지금 현대에 와서 다시 재해석해서 볼 수는 있겠죠.. 그러한 시도에서 본다면 방금 말씀하신 목사님의 그 같은 해석도 하나의 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오늘날 현대의 해석이지, 기독교가 헬라화 되던 그 시점에서의 해석은 전혀 아니잖아요.. 제가 느끼기엔 목사님께선 니케아 신조 뿐만 아니라 전통 기독교의 사상 전반에 대해서도 무언가 잘못 그 맥락을 이해하고 계신 지점이 없잖아 있는지 좀 의문마저 들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저의 솔직한 속내를 얘기한 것입니다..

.................................................

성서는 계시사건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초월신론으로, 혹은 범재신론으로 등등 해석 여하에 따라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도 그 해석의 프리즘에 따라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갑니다..

이때 만일 그러한 전개에 있어 초월신론을 극복하는 범재신론의 흐름이 있었다면, 분명히 찾아내고 제시해야 하지만, 목사님의 답변은 그저 삼위일체만 계속 불러대고 계셨고,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 헬라화 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목사님께서 계속 착각하시는 지점은 삼위일체는 초월신론, 범재신론과 함께 동일 상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일종의 신관으로서 이해하시는데 그것은 분명 엄밀하지 못한 이해입니다.. 그것은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다른 범주적 차원의 신 이해입니다.. 그러니 니케아 신조를 비롯하여 삼위일체가 헬라화를 극복한 사례라고 보시니 저로선 참 아이러니할 따름이죠..

다음과 같은 목사님의 글도 그렇습니다..

>>미선이 님이 주장하는 대로 그런 형이상학적 전통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형이상학을 재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이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미선이 님이 나름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몰트만 신학과 판넨베르크 신학도 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목사님께선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개념을 저와 다르게 이해하고 계시는 듯 싶습니다.. Metaphysic란 말뜻 그대로 Physics라는 자연과학의 너머에 있는 지평인 존재론과 우주론에 관한 것입니다.. 좀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형이상학이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사물(=존재)에 대해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는 일반적 관념들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과학입니다.. 그것은 철학이라는 분과에서도 존재의 가장 궁극의 지평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형이상학을 일컬어 ‘제일성의 철학’이라고까지 표현하잖아요..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란 것은 이미 형이상학이 어느 정도 문명사에 적용된 관념을 말한 것이지 그것이 곧바로 형이상학은 아니지요..

플라톤의 희랍철학은 존재의 생성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를 그 자신의 도식으로 해명하고 있기에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합니다.. 바로 그 희랍의 형이상학이라는 해석학적 툴은 세계 해석의 기초 패러다임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초대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바로 복음서의 예수사건 뿐만 아니라 신과 세계를 몽땅 해석할 때, 바로 희랍의 그러한 해석학적 툴을 가지고서 썼던 것입니다..

희랍의 형이상학 이후에 어떤 새로운 형이상학이 새롭게 수립되어서 기독교 안에 들어왔었나요? 불교철학의 형이상학이 기독교에 들어오기라도 했던가요? 기독교가 언제 헬라철학을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목사님의 그 같은 얘기에 저로선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전통기독교와 지평융합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그 지평융합이란 게 여러 신학적 개념들의 혼재된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저 뒤섞여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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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과 저와의 차이에 대해 크게 주요 최종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용어 사용의 엄밀함에 있어,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론>를 신관 혹은 형이상학으로서 이해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다른 차원의 범주에 놓여 있다는 사실.. 혹시라도 만일 목사님께서 '신관' 혹은 '형이상학'이란 개념을 온전히 따로 이해하고 계신 맥락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부터 시작으로 제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그 개념에 대한 정의와 나름대로 이해하는 맥락들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2. 목사님께선 헬라화 극복의 사례로 삼위일체 혹은 니케아 신조의 homo-ousios 를 얘기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삼위일체는 오히려 현대의 해석을 역투사해서 일반화하려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선 기독교 니케아 신조의 homo-ousios는 오히려 당시의 뜻과는 정반대로서 해석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위에서 아주 상세하게 조목조목 반론을 드렸습니다..

3. 만일 초기 기독교가 헬라화를 극복했다면 그 이후부터 중간에는 어째서 중세 철학이 본격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극복했다면, 기독교가 동양철학의 형이상학이나 아니면 아예 직접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아닌 <새로운 형이상학>을 개발하여 이를 세계 해석의 툴로 쓰거나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이라는 주류 메인 스트림에 그러한 흔적이 도대체 언제 있었단말인가요? 목사님의 글에선 바로 이 점에 대한 구체적 근거와 답변들이 쓰신 글에선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

제가 기존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를 언급하는 그 맥락은 결국 그동안 기존 기독교의 밑변에 깔려 있던 해석학적 베이스인 <희랍의 형이상학>을 빼내어 다시 <과정 형이상학>이라는 렌즈로 해서 신과 세계와 예수와 성서 등등 기독교 전반을 다시 세워보겠다는 얘깁니다.. 설마 이것은 저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이미 과정신학자들도 진행해나가고 있잖아요.. 물론 저는 한국의 민중신학을 통해 그 과정신학마저도 넘어서고자 하고 있구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형이상학 지평의 렌즈가 다르면 세상 모든 게 달리 이해되고 다르게 채색됩니다..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선 삼위일체론이 그걸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좀 이상한 얘기지요.. 엄밀하지 못한 이해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철학 영역에 있는 개념이라기보다 이미 철학적 바탕이 깔려 있는 신학적 논의들에 있는 개념입니다.. 거기에 깔려있는 철학적 바탕은 그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프리즘으로 해석해낼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혹시라도 만일 철학 전공자들이 목사님의 그러한 얘길 들었다면 무슨 이상한 소리하냐며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같은 개념 이해도 그렇고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보시는 지점도 혼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헬라 형이상학>의 프리즘으로 채색한 삼위일체 개념과 <과정 형이상학>의 프리즘으로 해석해낸 삼위일체 개념은, 같은 이름의 삼위일체라도 둘은 천지차이만큼 큰 것입니다.. 삼위일체 뿐만 아니라 신, 예수, 인간, 교회, 성서, 자연 등등 모든 것들이 다른 식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인 거죠..

그리고 작금의 이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은 지금까지 이천 년 기독교 역사상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헛소리일까요? 이미 이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그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아마도 빠르면 10년 늦어도 2-30년 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뭐 이런 얘기는 한귀로 듣고 흘려도 상관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겠지만요..^^*

아무쪼록 저로서도 좀더 목사님과 저와의 차이가 더욱 더 클리어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바램인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암튼 제가 목사님을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음은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저 정직한 의문에 대해 충실하고자 반문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네 지성의 역사에는 그래도 아주 유효했던 논쟁의 사례들이 있었지요..
논쟁(대화)의 기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 참조

그렇지만 아무래도 목사님께선 논쟁을 접으시려고 하시는데
그래도 혹시라도 저의 반론에 대해 다시 얘길 주신다면 얼마든지 해주셔도 괜찮겠습니다..
아무쪼록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이해하고 읽어보신 분들이 잘 알아서 짐작하고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

이길용

2006.11.03 14:52:01
*.161.226.112

"그리고 작금의 이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은 지금까지 이천 년 기독교 역사상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헛소리일까요? 이미 이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그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아마도 빠르면 10년 늦어도 2-30년 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뭐 이런 얘기는 한귀로 듣고 흘려도 상관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겠지만요..^^* "

기대가 되네요~ 10년, 늦어도 2-30년 안이면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저도 생존해 있을테니 한번 기독교의 천지개벽하는 변혁 모습을 지켜보도록 하죠~








근데 어쩌죠.. 그런 이야기는 이미 20년전부터 들어오던 거였는데^^;;
뭐 그래도 2-30년만 참으면 된다하시니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도록 하죠~


근데 지금쯤은 좀 더 '새로운 이야기'도 나올 만 할텐데...
왜 그 레파토리는 변함없이 20년을 이어져 오는 것인지..

여하튼 그래도 한번 기다려 보겠습니다.

건투하시기를~

미선이

2006.11.03 15:00:09
*.50.20.7

훗~ 그런 식으로 시니컬하게 얘기하시기보다 20년전부터 들어오던 그 얘기의 진상이나 읊어보시져..
혹시 과정신학 그룹들을 가리키신 건가요? 어디 한 번 들어보구 싶네요..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맞는 얘길 하는 건지..
지금도 진보 기독교의 조용한 혁명이 미국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기사들도 있지만..
어쨌든 2-30년 후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가시적으로 확연히 느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암튼 이길용님의 레퍼토리도 좀 자세하게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누구에게서 들었고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말에요..

이길용

2006.11.03 14:58:51
*.161.226.112

이미 미선님 입으로 다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제가 보기에는 백두교 신자들의 18번쯤으로 읽혀지던데~

여하튼 20년 꾹 참고 기다려보죠~

미선이

2006.11.03 15:39:58
*.50.20.7

글쎄 백두교 신자들 누구여? 그렇게 막연하게만 얘기하지 마시구..
국내? 국외? 혹시 캅이 그런 말을 하던가요?
그런식으로 치고 빠지시려 하면 안되지요..
좀 상세히 읊어주시고서나 시니컬하게 얘기하시지..

P.S-이런 얘기로 일단 정목사님과의 논쟁을 분산시키지만 않길 바랄뿐..

정정희

2006.11.03 16:31:50
*.120.204.45

댓글이 진지하다고 느낍니다.. 계속 목사님의 반론을 보고싶습니다,,^^

[레벨:1]똑소리

2006.11.03 18:25:44
*.204.70.4

난 내심 칼부림(?) 날줄 알았는데
좀 싱겁게 끝났군요.
그래도 두 분의 논쟁이 여운은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 좋은 글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03 23:34:21
*.150.14.188

정정희 님과 똑소리 님.
논쟁 비슷하게 굴러간 게 재미있으셨어요?
다행입니다.
원래 신학계도 그렇고,
인문학계도 이런 노골적인 논쟁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게 학문 발전을 가로막고 있겠지요.
논쟁은 여러모로 필요한 겁니다.
앞으로 신학은 더욱 치열하게 논쟁해야합니다.
그런데 교수들께서 점잖으시기 때문에 그런 게 잘 안 돼요.
불행한 일이죠 뭐.
그런데 논쟁은 간단하게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여호와의 증인> 핵심 멤버와 논쟁한다고 가정해보세요.
조금 가다가 안 됩니다.
누가 옳은지는 차치하고 기본적으로 사유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는 내가 주체사상 신봉자들이나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들과 논쟁한다고 해보세요.
그들은 이미 나를 보수 반동분자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체사상이라는 틀과 반미반제국주의라는 틀이
건정한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대화의 벽을 만나는 거죠.
이런 대화의 벽을 여기 다비아에서도 가끔 만나게 되네요.
어떤 분은 도사연 하고면서 무슨 말만 나왔다하면
모든 게 당신 마음 먹기에 달렸어,
더 깊이 생각해봐,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어떤 분은 매번마다 성서구절을 들이대구요.
그런 성구가 아니면 그런 분과는 대화가 안 되는거죠.
어떤 분은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고 자꾸 강조하네요.
도사, 성구주창자, 성령론자들과의 대화에는
늘 문제가 생기네요.
이런 벽을 내가 미선이 님에게서 느끼기 때문에 논쟁을 그만두는 겁니다.
물론 벽을 느끼더라도 이런 논쟁을 통해서
다비안들에게 재미를 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내가 배우는 것도 있겠구요.
그런데 미선이 님은 정합성 운운하면서 많은 각주를 요구하시니
그걸 내가 어떤 수로 다 제공하겠어요.
한달에 두 주간을 꼬박 설교비평을 준비해야하구,
나머지 시간에 강의 준비와 설교준비,
그리고 다른 잡지에 글쓰기, 다비아 대글 달기 등등,
시간이 좀 그렇군요.
앞으로 미선이 님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전혀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한국 신학도 그럴 때가 온지도 모르죠.
매일 미국와 독일만 바라보고 신학을 할 수는 없잖아요.
미선이 님이 단정하고 있는 그런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는
한국적, 새로운 민중신학적 신학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다비안들에게 한 마디 드린다면,
사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아니 우리가 들어가 있는 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초월이다, 내재다,
실체다, 운동과 과정이다 하는 언술 자체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언어와 개념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뿐이지
종말론적으로 계시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이런 개념 안에 가둘 수 있겠어요.
이미 성서는 이런 신비를 나름으로 해명해보려한 하나의 역사과정이지요.
그래서 제가 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신학도 늘 이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한 마디로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하니,
그리고 이런 신비가 막연하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나우엔의 글이 모호하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누가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패러다임의 차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겠지요.
이 논쟁을 계속 이어가지 않는 걸 이해바랍니다.
미선이 님의 신학운동, 세기연도 소기의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선이

2006.11.04 04:24:10
*.47.21.101

졸지에 제가 여호와의 증인 핵심 멤버, 극단적인 반미주의자, 도사연 하는 사람, 성구주창자, 성령론자 이런 사람들에 비유되어버렸군여..
목사님의 이번 글은 좀 당황스럽네요..
세상에는 사유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대화란 거 자체가 무익할 뿐이죠..
서로 틀리더라도 조금씩 알아나가고 맞춰나갈 따름입니다..
논쟁의 무익함도 있겠지만 유익함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지성의 역사를 봐도 분명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논쟁(대화)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논쟁(대화)의 기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 참조
(당연히 조금이라도 이 부분에서 제가 어긋난 게 있었다면 얼마든지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제 글 어디에도 여호와의 증인이나 극단적인 반미주의자의 논쟁처럼 그러한 고정불변의 막가파식으로 대화를 건넨 적이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저의 글 어디가 그런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십시요.. 그럴 경우 정용섭 목사님께서 설득력 있게,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셨다면 제가 거기에 수긍을 안하셨을 거라고 보시나요? 오히려 정 목사님이야말로 저에 대한 그런 고정불변의 인식을 전제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물론 제가 그렇게 얘기하는 근거는 목사님께서 저를 그러한 막가파 사람들에 비유하고 계시기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어놓고 있잖아요.. 어차피 모든 학문은 근본적으로 <설명력 확보 싸움>에 있습니다.. 초월이다 내재다 실체다 과정이다 하는 것들도 결국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해명하고 설명함에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학문이 모든 걸 다 커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저 학문은 정직함이자, 최선일 따름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께 정직해야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를 얘기하셨는데, 신비는 자기 홀로의 체험에 있어선 매우 뚜렷하고 구체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표출될 때에는 <막연함>입니다.. 그걸 어떻게 명료하게 진술하고 형언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힘든 것일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은 언제나 확연한 명료함과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저로선 나우웬에게는 바로 이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 것이며, 바로 그래서 그것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술로 진술됐을 뿐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한 <티미함>이 있기에 나우웬은 보수 진영에서도 칭찬 받고 진보에서도 아주 가끔이지만 칭찬도 받고, 또한 동시에 조현아님 같은 보수측 사람이나 저 같은 진보측 사람에게서 비판도 받는 법이지요.. 물론 서로 그 비판의 내용은 다르지만요..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혹시 제가 신비를 부정하고 있는 듯이 보였나요? 어차피 신학을 하든 과학을 하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한계가 있기에 거기엔 언제나 신비가 전제되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미 겪고 있는 바이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 것은 하나님만 아신다” “미천한 인간은 모른다”는 식으로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신학이든 뭐든 공부할 필요도 없을테니까요.. 그저 "계시를 내려주시옵소서" 라고 동굴안에서 기도만 하던가, 하늘만 쳐다봐야겠죠..

결국은 저의 반론에 대해 목사님께선 기본적으로 다른 여러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네요.. 뭐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올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지녀왔던 사유의 오류가 많은 대중들 앞에 노출되거나 그것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게 있지요.. 저는 정말 그러한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면 감사했지.. 오류란 그나마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임을 사람들은 흔히 망각하곤 하는데, 어차피 인간은 한계가 있어서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뒤늦게나 겨우 깨닫는 유아적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수많은 실패와 오류들 그리고 문명사의 비극적 사건들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조차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다비아가 정 목사님을 통해서 배우고 얻는 부분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 목사님 역시 그러한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도 열어놓고 계셔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논쟁은 결국 구체적이고 근거 확보에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줍잖게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 목사님도 설교비평을 하십니다.. 사실 그것 역시 공개적으로 상대방에게 논쟁을 거는 것이거든요.. 만일 정 목사님의 비판을 받은 당사자가 지금 정 목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식으로 정 목사님에게 도로 말을 건넨다면 어떻겠습니까.. 즉, 만일 그 사람이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해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막힌 사람"이라고 보신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이번에 정 목사님과의 논쟁에서 정 목사님이 그동안 가지고 계셨던 그 신학적 사유의 실체를 조금 적나라하게 엿보았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점도 느껴졌었습니다.. 즉, 평소에 기존 기독교를 내다보고 있으신 목사님의 생각말입니다..
목사님과 그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말을 꺼내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솔직한 견해와 속내를 감추고 상대방에게 마냥 잘되기만 비는 것도 어쩌면 정말 정직하지 못한 위선일 수도 있지 않은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겐 늘 대화가 요구될 수 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지요..

어차피 저와 정 목사님과의 논쟁은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분명하게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냥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비록 홈그라운드가 아니었지만 저로선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혹시 이후에라도 제게 얘기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근거 없는 비난 말고, 정당한 근거에 기반한 비판적 대화를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레벨:5]이택환

2006.11.04 23:38:13
*.61.167.35

“우리는 서로 영이 다르다”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가 츠빙글리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 군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름지기 본질적인 것이 일치한다면,
비본질직인 쟁점들에 대해서는 자유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보일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츠빙글리가 본질적인 것이라고까지 생각지 않았던
성찬의 공재설과 기념설의 차이에 대해
루터는 그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본질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껏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고 여겨 온갖 귀중한 것들이,
혹시라도 허무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열심당의 본질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이번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정목사님과 미선이님, 두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레벨:0]백치

2006.11.12 23:35:19
*.138.170.7

와~ 마치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논쟁을 보는 듯 하네요.

근데 좀 궁금한 점은 백두파 과정 형이상학의 신관(원초적 본성, 결과적 본성)도 헤겔에서 나온거 아닌가요? 헤겔도 결국은 절대정신(성령, 초월)으로 지양되고. 물론 그 이전에도 만물유전을 부르짖은 헤라클레이투스나 또 에크하르트 같은 영성주의자도 있었고. 말하자면 백두의 사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라는. 나름대로 영향사적 의식 속에서 전통(고전)의 지평을 자신의 지평과 융합시킨 결과라고나 할까요?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내가 처해 있는 세계(Da) 없이는 나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하이데거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참 이런 인연이 있을까요? 저희 장신대 현대신학연구회 종교개혁제 작년 초청강사가 정강길 형님이시고, 올해 초청강사가 정용섭 목사님이시거든요!^^ 아무튼 두 분 논쟁을 보면서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뽐뿌 확 받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레벨:0]서우정

2006.11.12 23:25:17
*.144.231.199

정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한번 글을 읽다가 결국은 여기까지 다 읽어버렸습니다. 많은 공부도 되고 도전도 되었습니다. 두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미선이

2006.11.13 22:05:48
*.47.21.101

백치님께..

화이트헤드는 헤겔의 영향과는 미미합니다.. 물론 언뜻 비슷함을 논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흥미롭게도 신학계에선 잘 알려진 신학자 한스 큉이 화이트헤드를 신헤겔학파의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었죠.. 제 기억상에 한스 큉은 화이트헤드를 직접 공부했다기보다 주로 포퍼의 주장을 인용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화이트헤드에게선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에 해당되는 개념이 없습니다.. 혹자는 신의 원초적 본성을 들먹이며 헤겔이 보는 가이스트(정신)와 굳이 연결지으려고도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서 정신 활동이란 것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갖는 거대한 <사회>society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대부분의 논의들은 화이트헤드에 대한 깊은 공부 없이 표피적이거나 억지적인 해석들이 좀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화이트헤드 그 자신도 헤겔의 책을 읽다가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가 헤겔은 수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등등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동시에 수학에도 능했던 수학자였음을 감안한다면 화이트헤드로선 뭔가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던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화이트헤드는 헤겔까지의 서양철학사를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뤄져 있다는 유명한 말(적어도 이 말은 철학계뿐 아니라 백두를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많이 인용)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치님의 말씀대로 화이트헤드의 철학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닐 것이기에 도대체 누구로부터 이어받고 있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겠지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보면 주류였던 파르메니데스의 전통이 아닌 “모든 만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고 보았던 헤라클레이토스의 계보에 있다고 볼 수 있겠고, 근대와 현대에서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 있으면서 존 로크와 함께 브래들리,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보면 이들의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특히 화이트헤드 자신의 <유기체 철학>을 가장 앞질러서 표현했던 철학자는 <인간 지성론>의 저자였던 존 로크John Locke, 특히 후반부의 존 로크라고 그 스스로 명시적으로 얘기합니다..

물론 그는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사 전반을 꼼꼼하게 훑어보기도 하는데, 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화이트헤드를 깊게 공부하다보면 거의 서양철학사의 요지경이라고 할 만큼 많은 서양철학자들의 사상들도 조금씩조금씩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평가가 아니라 많은 화이트헤디안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존 로크, 칸트, 브래들리,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등 말입니다.. 이에 비하면 헤겔은 거의 낮은 편이죠.. 그의 핵심저서인 <과정과 실재>를 직접 읽어보시면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상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화이트헤드는 분명하게도 서양철학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그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갔고, 실제로 그 자신의 저서에서 동양사상에 대한 레퍼런스는 매우 찾기 힘들지만, 희한하게도 오늘날 동양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서양철학자로서 꼽을 만큼 화이트헤드와 동양사상은 매우 유사하다고 논하는 연구논문들과 저서들이 도대체 한두 가지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불교, 노장, 유교뿐만 아니라 우리네 동학사상도 그렇고 심지어 증산도에서도 화이트헤드와 관련한 연구논문이 나오기도 했었지요.. 물론 그러한 것들도 모두 일일이 직접 확인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그 거시적인 체계에 있어선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동양철학의 패러다임이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만큼은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대충 질문에 답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레벨:0]백치

2006.11.13 22:45:28
*.138.170.7

우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세밀하고 친절한 답변을 주시다니!

요즘들어 부쩍 화이트헤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핀이 예언했듯이 21세기는 정말 화이트헤드의 세기가 될까요?
그런데 왜 독일 철학계에서는 영미 철학을 폄하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영미 경험주의 속에서 홀로 형이상학을 전개하는 화이트헤드도 신기하구요.
아무튼 왜 이리 기라성같은 대가들이 많은 걸까요?
한편으론 언제 저걸 다 읽어보나 하는 중압감과 동시에
그 엄청난 사유의 세계가 내 앞에 좍 펼쳐지는 걸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

<과정과 실재>, 꼭 읽어야지요.
근데 그보다 먼저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을 읽어보고 싶은건 왜일까요? ㅋㅋㅋ
시형이랑 언제 한번 꼭 뵜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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