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헨리 나우엔

조회 수 6742 추천 수 534 2006.10.30 08:09:38
관련링크 :  
(형님의 편지)

아우님 우리 주님의 은혜안에서 잘 계시는 줄 아네.
공부하는데 방해될 것 같지만 조금 도움이 필요하네.


내 주위에 '헨리 나웬'이라는 천주교 사제의 글에 감동(?)하여 매일 그의 글을 남에게 소개시키는 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난 '헨리 나웬'이라는 분의 글을 몇권 읽었는데 도덕적으로 마음의 수양이 될지 몰라도 요즘 한국교회에 (개신,천주 할 것없이 영성이라는 말이 전부인 것 같네) 부는 영성이라는 열풍이 잘못된 것 같고 따라서 영성의 대가로 인정되는 '헨리 나웬' 이라는 사제의 글을 무분별하게 출판하는 출판사( 두란노,홍성사,가톨릭 계열 출판사)의 책임자들의 신앙적인 식견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난 신학적인 안목이 부족하지만 아우가 고견을 한번 말해주게.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는지? 이니고 내 생각이 맞다면 어떤 의견을 제시해 주어야 '헨리나웬'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안 상하게 하면서 성경적인 길을 안내해줄 수 있을까?


요즘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수주의'(강남중앙침례교회 피영민 목사가 편저한 책)를 읽고 있네.그 책에서 소개한 벤자민 워필드의 '구원의 계획'과 윌리엄 커닝햄의'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원본으로 읽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네만 그럴 기회가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네.
항상 우리 주님의 은혜안에서 제수씨와 조카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네.

(답변)



사랑하는 형님,

그 동안도 평안하신가요? 부족한 동생에게 질문하시는군요. 고견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천박한 저 자신을 보면서 답변을 드리기가 죄송한 마음일 뿐입니다.

하오나,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그 안타까워하심이야말로 올바른 영성의 발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현실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그런 현상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고 있고, 그 현상이 너무나도 광범위한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오히려 연구가 늦어지는 중에 심화시키고자 하는 이유들이 그런 놀라움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늦어지는 연구에 대해서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묵상을 시작하면서 위로를 받는 중에 간단한 글을 올리고 나서야 형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헨리 나우엔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리라고 여겨왔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영성의 대가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 동안 보수주의(혹은 개혁주의)신학에 기초한 신학자들이나 교회들이 마땅한 모습들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는 반동이라고 여겨집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비판은 오히려 식상할 수 밖에 없고 비판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현대교회의 영성에 대한 열기는, 어쩌면 좀 더 거시적인 세계정신사의 흐름과 관계해서 설명해야만 좀 더 이해되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 짧은 리플로는 그런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고 또한 형님께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단지, 헨리 나우엔의 영성은 결코 기독교적이거나 복음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써서 출판했던 책에서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그의 마지막 책인 Sabbatical Journey(1998년 Hard cover)의 51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Today I personally believe that while Jesus came to open the door to God's house, all human beings can walk through that door, whether they know about Jesus or not. Today I see it as my call to help every person claim his or her own way to God." 예수를 알든 모르든 모두가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단지 "영성을 위한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비록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성경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타종교인들도 간파하고 있어서 그 중에 불교인들은 헨리 나우엔에게 대해서 굉장히 동정심을 갖고 있고 또한 나우엔 자신도 그렇습니다. Here and Now라는 책에서는 이런 자신의 견해를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The God who dwells in our inner sanctuary is the same as the one who dwells in the inner sanctuary of each human being"(p.22). 그의 하나님은 결코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고 그냥 모든 종교인들의 마음 속에, 아니, 비종교인들의 마음 속에라고 있는 그런 신적 본성을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그가 강조했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노장철학, 특별히 장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상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 그러니까 신비주의명상가들을 사상을 추적했고, 카톨릭명상가들 중에서는 토마스 머튼같은 사람 그리고 데이야르 데 샤르댕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들에 대해서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힌두교의 Eknath Eswaran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사상가 혹은 영성가라기보다는 기독교용어로 포장한 일반영성가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가 기독교용어로 포장해 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혹되어 있고,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볼 때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아마도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체험이 천박한 것에서 유래한 분별력의 상실이 아닌가 진단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의 서론 부분에서 그렇게도 신속하게 갈라디아교회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긴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인데, 바로 이 주의함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저의 진단이 교만하게 비춰지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님, 형님께서는 이 헨리나우엔의 글에 빠져서 현혹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하면 좋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헨리 나우엔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참된 복음에 대한 소개야말로 올바른 길일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 '참된' 복음의 소개야말로, 혼탁한 한국교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에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참된 복음인양 포장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저의 의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몇번 고국방문을 하는 중에 수많은 동료목사들, 혹은 선배목사들이 저의 회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어떤 체험 정도를 한 모양이라는 식으로 반응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할 것인가? 참으로 지난한 문제입니다.

형님께서 언급하신 벤자민 워필드의 글이나 윌리엄 커닝힘의 글들은 이런 신학적 왜곡현상들을 제대로 분별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임에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런 글들이 전문적인 신학적인 용어들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혹은 번역이 거칠게 되어 있어서(워필드의 '구원의 계획'을 번역한 분이 어떤 분인지 형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실상인지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하는데 그런 책을 소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형님께서 그 책들을 원서로 읽으시는 것은 적극 추천합니다. 혹시 저로서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조언은, 저로서는, 그들이 헨리 나우엔의 사상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도록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베뢰아사람들처럼 '신사적'일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얼마큼이나 예수 그리스도중심인가를 환기시키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중심의 성경에서 헨리 나우엔이 얼마큼 벗어났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혹은 병행되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얼마나 "가장 고상"한 것인지를 알도록 권하고 또한 기도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깊은 영성이고 넓은 영성인 양 오해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법만이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아 은혜를 입게 된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성이 가능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영성이야말로 가장 깊고 또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저도 그런 마음을 가져보고 또한 그 기도에 동참하기를 소원해 봅니다.

형님과 저 안에서 역사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성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의 풍성함과 고상함을 더욱 흠모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형수님과 조카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부탁드립니다.

ps. 우선 간단하게 적겠습니다. 기회있는 대로 헨리 나우엔의 영성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인터넷상에 올려볼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ImagoDei 원문보기  글쓴이 : Horace


조현아

2006.10.30 12:07:03
*.130.193.86

안병무, 문익환, 김준우 교수 ...그리고......
이런 신학적인 흐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왔는지...
------------------------------------------
뉴조의 송단님의 멘트
놀라실것 없읍니다. 성서비판을 용인하면 언젠가는 만유구원론에 이르게 되어 있읍니다.
자유주의자 부터 현대신학에 이르기 까지, 심지에 자유주의자의 적인 칼 바르트 까지
만유구원론을 수용하고 있읍니다.
유경재 목사처럼 인품이 훌륭한 분일수록 그런 경향이 다분히 있읍니다.
이것은(만유구원론) 장신대의 대체적 분위기 같읍니다.
눈물이 나는군요.
그러나 한국교회가 도덕적으로 새로와지지 않으면 이런 분위기를 깨어버릴 힘이 없읍니다.
06.10.29 22:05
어쨌든 만유구원론, ecumenical, 종교통합, 성서적 근본주의자 박멸은 시대의 흐름이고
주님이 오시기전 peak를 이룰 것이다. 유럽에서는 성서적 근본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이미 설 자리를 잃었으나, 다시금 서서히 자리매김을 하고있다.
근본주의 신학교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세는 바꾸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힘이 있을때 과감한 자체 개혁을 단행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태가 역전될 것이다. "근본주의자 = 미친놈" 시대가 올 것이다.
06.10.29 22:05
예수를 죽여야한다. 30년전 안병무의 "해방자 예수"를 읽고 기억에남은것 대강인용
"민중은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 예수는 민중이 성숙한것을 보고 내심 만족한 웃음을 띄고 숨을 거두었다.
예수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모든 종교의 냄새가 나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을 달성하기위해서는 먼저 종교간 교류가 필요하다.
그다음이 종교연합,종교통합,종교일치,,,
무종교,성숙한 인류. ecumenical 운동하는 자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완전히 없애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길인지.
----------------------------------------------------------------------------------------------
성경을 가르치면서 또 한편으론
주예수님의 말씀과 심판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들....
예수마져 그들의 개미같은 지식안에 가두고 재단하는 자들...
그들은 성경을 폐기하고 다시 쓸 태세다.
이들은 스스로의 이율배반적인 언사를 은폐하는 것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예수를 살짝 밀쳐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세상 모든 종교들과 연합하려는 듯, 활짝 열린 듯한 제스츄어로 열변을 토하는 자들..
그들은 이웃과의 평화에 골몰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이들의 전투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진리가 아니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려는 자들이다. 악을 심히 악되게 하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종교와, 천국과 지옥이.. 또는 선과 악이 하나라고 은근슬쩍 암시한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려는 어린 다윗앞에 그들의 지식과 학문은 가히 골리앗과 같다.
이들에 대해 주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부를까.....?

부디.................현대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순수복음에 대한 강간, 그 강간에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강간에 동참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깊은 영적 흑암을 자각할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이길용

2006.10.30 10:16:09
*.161.226.112

헨리 나우엔에 열광하고.. 또 그 열기를 조장했던 사람들과 출판사들의 면면을 보면 참 재미있네요..
profile

[레벨:16]seyoh

2006.10.30 11:15:17
*.237.187.150

요즈음 '영성'을 가지고 돈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벤트를 열심히 만듭니다.
이번에 포스터가 왔지요.... 리차드 포스터가 이번에는 희한한 모습으로 나타났더군요.
레노바레.... 라나 뭐라나 하는 이름을 가지고.
헨리 나우엔도 그 진면목이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토마스 머튼...그리고 마더 테레사... 베트남의 스님 틱낫한도 그 부류지요. 관상기도가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조현아님, 글 감사합니다.

[레벨:1]박상열

2006.10.30 10:57:56
*.114.22.74

나우웬님의 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성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 할 수 있었는데,,
제가 다행한건지...^^ 이런 부분들도 있었군요.
잘 분별해서 읽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7]늘오늘

2006.10.30 14:33:46
*.239.101.206

여기도 아닝개벼...
민중신학자들이 고백하는 해방자 예수도 아니고,
자유주의자들이 연구하는 역사적 예수도 아니고,
영성의 대가들이 흠모하는 우주적 예수도 아니고,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교리적 예수도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목회자들이 선동하는 싸구려 예수도 아니고,
늘오늘 따위가 고백하는 모호한 예수는 더더구나 아닐테고,
도대체 조현아님의 예수가 발붙일 땅은 어디란 말인가???

[레벨:20]신완식

2006.10.30 16:10:35
*.112.213.203

조현아 님......
개인 블로그에 하신 멘트랑 여기서 쓰신 멘트가 조금 다르네요^^.
블로그의 멘트를 그냥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하시지요.
그래야 하시려는 말씀의 주적이 누구인지가 드러날 게 아닙니까?

조현아

2006.10.30 18:41:05
*.130.193.86

신완식목사님, 첨 글을 올릴 때는
블러그의 글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그리고...다비아... 라는 표현만 지우고 말 끝을 흐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님의 자유-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주적이 누구인지가 드러날 게 아닙니까.....?)
님의 감정이 많이 상하신 것 같군요.
사람을 위해...어떤 신학적 성향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그분의 진리를 위해 감정이 상하셨다면 더 좋았겠군요.
저는 사람을 미워하기 보다는 성경과 대치되는 거짓말을 미워할 뿐입니다.
어떤 이에게 예수님은 신학적 담론소재나
감성을 자극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종의 모티브가 될 지
모르겠지만...제게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규합하고, 동질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동일한 칼라로 사람들을 동화시키는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저같은 태클과 반대에 충격을 받게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길용

2006.10.30 18:15:11
*.161.226.112

딱히 '주적'을 밝히시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알 겁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소통'이 그런대로 이어진다면 서로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겠지요.

정정희

2006.10.30 18:49:08
*.120.204.45

불같은 신앙을 갖고있는것 같습니다..예수님에대한 추호도 타협하지않는 사랑 .. 보기좋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30 19:23:49
*.150.14.62

글의 구체성이 여전히 실종되어 보이는군요.
위에서 형, 동생 하는 분들의 글과
그것에 대한 대글과
또 그것에 대한 조현아 님의 짧은 코멘트들이 별로 명확하지 않네요.
그 밑으로 또 나우엔에 대한 촌평들이 등장하고 있긴 한데,
그것도 역시 그냥 느낌 정도로 끝나버렸군요.
나우엔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동생이라는 분의 글에 이런 대목이 오는군요.

그가 강조했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노장철학, 특별히 장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상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 그러니까 신비주의명상가들을 사상을 추적했고, 카톨릭명상가들 중에서는 토마스 머튼같은 사람 그리고 데이야르 데 샤르댕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들에 대해서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힌두교의 Eknath Eswaran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군요.
나도 노장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노자의 도덕경은 대충 읽었지만
장자는 한자 공부도 할겸 중요한 대목은 베껴쓰는 방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신학행위는 장자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겁니다.
사막의 교부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흥미는 많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글을 좀 읽었는데,
마음에 드는군요.
드 샤르뎅도 마음에 들구요.
이러구 보니 나우엔은 나의 정신적 형님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의 영성이 여기서 매도되다니....
그의 어떤 부분이 기독교 영성과 다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어떤 영향을 받았으니까 나쁘다, 하고 말하면 담론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좋으신 분들이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약간만 다른 이야기를 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는지, 궁금하네요.
만약 그런 방식이라면 어거스틴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교부들도 기독교 역사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변의 철학과 부단히 대화한 사람들이거든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 교리형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답니다.
삼위일체는 플라톤의 직접적인 영향입니다.
믿음이 돈독하다는분들이 왜 이런 전통을 무시하려는지,
그게 참으로 이상하군요.
이런 헬라철학의 영향은 사실 신약성서에까지 이릅니다.
요한복음이 왜 로고스 론을 서장에서 다루고 있을까요?
예수가 왜 이성, 언어라는 말인가요?
초기 그리도교는 기독교 변증을 헬라 철학과의 대화에서 찾았답니다.
만약 그들이 장자를 알았다면
당연히 장자와의 대화를 시도했을 겁니다.
오늘 현대과학과의 대화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이 빅뱅으로 해명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물리학적, 생물학적 생명 이해와
성서의 생명이해가 조우할 수도 있고,
아니 조우해야만 합니다.
예수의 부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훨씬 풍부해져야 합니다.
만약 주변의 인문학, 물리학과의 소통을 막아버린다면
그는 교부들의 전통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주 초보적인 문제가 왜 이렇게 불거지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조현아 님도, 내가 설명하는 걸 충분히 알아들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니 ...
말이 길었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1. 나우엔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걸 지적해보세요.
그가 기독론의 어떤 부분을 부정했는지요.
그가 사도신경을 부정했나요?
2.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와의 소통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개인이나 실증적 종교가 독단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참된 세계를 열어갑니다.
성령은 바로 이런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 도중에 있습니다.
profile

[레벨:2]박 진

2006.10.31 03:28:07
*.76.3.51

조현아님의 '사상검증' 시리즈가 이어지는군요.
역사적 예수 문제도 그렇고 덕분에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씁쓸해지는 뒷맛은 왜 일런지요?


미선이

2006.10.31 06:42:24
*.47.21.101

헨리 나우웬에 대해 한 가지 얘기한다면
나우웬은 진보 기독교측 진영에 있어서도 별로 대접을 잘 받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는 헨리 나우웬 사상의 치명성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사유의 추상성 혹은 모호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는
매우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나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나
혹은 기독교 종파 바깥의 이슬람 영성가나 혹은 지적하신 뉴에이지 영성가들이나
모두가 공감하는 명제라는 점입니다..
헨리 나우웬에는 이러한 추상적 언급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측 기독교가 보기에도 매우 은혜스럽고
그 진폭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심오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것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결과물로도 보일 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진영에선 헨리 나우웬을 매우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수측 출판사들도 헨리 나우웬의 책들을 곧잘 찍어내곤 하지요..
이는 헨리 나우웬 뿐만 아니라 소위 인기짱이라는 C. J.루이스도
그러한 요소들이 없잖아 있어 보여집니다만.. 어쨌든 지난한 얘기들이 되겠지만요..

주로 중도라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인기있다는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보수적 입장에서 보면 보수로 보이고
진보측 입장에서 보면 진보로 보인다지만(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주로 주장)
실은 동상이몽이기도 한 거죠..

보수나 진보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조현아님 같은 분이나 저 같은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태도처럼
또한 보수와 진보 양자로부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 입장에서 본다면 나우웬은 그저 무난한 정도의 추상적 얘기들로 보이기에
솔직히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표현되는 사유들은 추상적인 두루뭉술함은 피하면서
또한 가급적 분명하고도 구체성을 띨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헨리 나우웬에 대해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저로서도 오래 전부터는 헨리 나우웬을 내심 비판하고 싶었지만
사실 지금 처음으로 나우웬 비판을 약간 웹상에 뱉어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헨리 나우웬이 살았던 그 분의 삶만큼은
정말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굳이 먼저 나서서까지 나우웬 비판을 하고 싶진 않았던 것뿐이었죠..
적어도 사유의 표현의 추상성 문제 때문에
낮은 자들과 함께 했던 그 분의 실천적 삶마저 폄하되어선 안될테니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31 08:21:13
*.150.14.39

위의 미선이 님의 글도 이해를 못하겠군요.
나우엔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그의 사유의 표현은 추상적이라고 보시는군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열매를 보아 좋은 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존재와 인식에 관한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우엔의 신학은 존재론적으로도 정당하다고 보이는데요.
나우엔의 어디가 추상적이거나 모호하다는 것인지
위의 글로만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군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우엔은 자나깨나 그런 말만 하고 다니는 건 아니죠?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화하는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나요?
그는 실제로 반전 평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동성애자들의 삶에 참여하지 않던가요?
미선이 님이 말한대로
그가 보수쪽에도 받아들여지고, 진보쪽에서도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그 반대되는 현상 때문에
그의 사상이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건
그것 자체가 추상적인 발언이 아닌른지요.
예수님도 그 당시에 진보가 보수 양쪽으로부터 거부당하거나
또는 받아들여졌다고 보아야합니다.
가장 진보적인 젤롯당 같은 사람들이 따르다가 포기하기도 했구요,
예수님에게 호감을 갖고 왔다가 실망하고 떠난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 아닐른지요.
미선이 님은 신학의 '추상성'과 '모호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추상성과 모호성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우엔의 사상이나 전통적인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관념적일 뿐입니다.
저는 나우엔의 글에서 그 어떤 추상성과 모호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글은 리얼하고 논리적입니다.
만약 미선이 님의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추상적이고 모호한 겁니다.
성서의 대부분도 역시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서로 보일지 모르겠군요.
삼위일체도 역시 그렇구요.
베낀글에 보면 나우엔의 글이 새로 올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사상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앞으로 기독교사상에서 그의 글을 당분한 연재한다고 합니다.
다른 분들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들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재단한다는 건
글읽는 이의 진정성이 조금 의심스러워보이네요.
사족으로,
다비아에 들어오시는 분 중에서
보수를 대표하는 조현아 님과
진보를 대표하는 미선이 님이
나우엔에 대해서만은 같은 배를 타고 있군요.
(재미 있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우엔과 같은 배를 타고 가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나는 나우엔의 배를 빌려타고 가렵니다.
그 안에서 나는 많은 것을 즐기고 배우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레벨:5]이택환

2006.10.31 09:16:27
*.61.167.35

기독교 베스트 셀러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심화'보다는 '강화'를 추구하는데,
예외적으로 '강화'보다 '심화'를 추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C. S.루이스, 유진 피터슨, 그리고 헨리 나웬 등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강화'에 익숙한 베스트셀러 독자들 중에
그런 작가들의 '심화' 를 '추상화'로 오해하거나,
또 하나의 '강화'로 오독하거나,
아니면 '강화'에 반하는 불온한 사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군요.
평소에, 한국의 기독교적 상황에서 그런 사람들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좀 이해가 갑니다.
베스트셀러를 이해하는 데에도 거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31 09:15:35
*.77.226.138

나우웬의 글이 추상적이라는 미선이님의 주장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엇을 지적하는 것인지, 좀 모호하네요.
신학자나 철학자의 개념과 같은 명확함이 없다는 뜻인지..
그가 추구하는 신앙의 행로와 방향이 어떤 종교적 뚜렷함이 없다는 뜻인지..
역사의 진보에 있어서 과대포장된 상품이라는 것인지..(순전히 제 추측입니다. 님의 주장과는 상관없는)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 어떤 말씀이신지 좀 더 자세히 풀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미선이

2006.10.31 10:03:15
*.47.21.101

익히 예를 들어보라고 하시니 어쩔수없군요..
예컨대, 아래의 언술을 생각해보죠..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하기 (헨리 나우웬)
새 경치를 보고, 새 음악을 들으며,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여행은 흥분되고 매우 기분 좋은 경험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어떠했지?" 하면서 물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돌아갈 집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찍은 슬라이드를 보며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겁습니다.
이런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돌아오기를 집에서 기다리시며 우리가 찍은 슬라이드를 보고 또한 우리가 여행 중에 사귄 친구들에 관하여 듣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여행입니다.
우리를 떠나 보내신 하나님의 눈과 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 우리는 멋진 경치를 보며,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으며, 놀라운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언술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한다는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도대체 뭐죠?? '여행'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뭘 얘기하는 건가요?

아, 아마도 그거 하나 가지고 맥락도 못보고 부분적인 걸로 트집잡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거 너무 많아서 발췌하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언술들의 사용은 기독교인들이 아주 많이쓴다는 사실도 익히 느낍니다..

영성? 성령? 이런 것들도 그러한 개념들에 속한다고 생각되네여..
영성이 도대체 뭐냐고 질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떤 어떤 대답들을 합니다..
하나님을 통한 내면의 빛이라느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느니 소리를 듣는다느니

그러나 제게는 이런 언급들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도대체 내면의 빛은 뭐고 얼굴은 뭐고 소리는 뭐냐고?
사람들이 과학에 열광하는 이유는 보다 구체성을 띠기 때문은 아닐지요..
나우웬이 관념적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과학도 어찌보면 기본적으로는 관념이지요..

예컨대, 히딩크 이전의 감독들이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뭐냐고 했을 때
정신력이라고 답변을 했었지요.. 그런데 히딩크는 말하길,
추상적으로 정신력이라고 말하기보다 그것은 곧 집중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신력과 집중력을 비교했을 때 집중력이 보다 구체성을 띠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모든 언어들은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 집중력이란 것은 정신력에서 그 어떤 추상성(모아짐 같은)이 하나더 +되는 경우가 되겠지요..
즉, 하나의 개념에선 추상성의 강도가 집약되면 집약될수록 보다 구체성을 띤다는 사실입니다..
수리논리학에선 이를 추상의 역리(패러독스)라고도 얘기하는데..
그러니 요는, 우리들의 언어에서 얼마만큼이나 추상성을 극복할 뿐이냐 이 문제겠지요..

X+Y=1 보다는 2X +3Y=1이
보다 더 구체성을 띰은 말할 나위 없지 않나요?

혹시 헨리 나우웬의 언술들에 이런 것들이 없다고 보시는지요?
또 발췌하라면 얼마든지 할께요.. 자료들은 많으니까요..

어쨌든 제 주변에도 그렇고 진보진영에서 헨리 나우웬 하는 분들은 많이 드뭅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좀더 리버럴한 사람이 헨리 나우웬을 좋아하는 건 봤어도 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언술들도 그렇습니다..
삼위일체가 뭐냐고 얘기하면 삼신론이니 어쩌니 이단소리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이런 우스개가 소리도 있지요..
삼위일체란 결국은 거대한 우주적 농담이라고..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알 뿐이라고..

미선이

2006.10.31 10:14:58
*.47.21.101

또 다음과 같은 언술들은 어떤가요?
.......................................

침묵 가운데 축복의 음성 듣기(헨리 나우웬)

한 시간 내내 오직 내면의 음성을 듣는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습니까?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볼 수도 없고 읽을 책도 없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는, 그리고 마쳐야 할 프로젝트도 없고 걸어야 할 전화도 없는, 이러한 경우에 처하면 어떻게 느끼게 됩니까?
대부분은 아직도 마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게 생각나서 그 두려운 침묵을 떠나 서둘러 일터로 복귀하곤 합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각양각색의 소란스러운 소리들과 세상이 이것저것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음성들을 건너뛰어 작고 친밀한 음성이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요, 내 은총이 네게 있도다” 하고 속삭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우리의 고독을 끌어안고 우리의 침묵과 친해진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실제로 육신의 귀로 그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말하는 것은, 환청이나 환상과 같은 현상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믿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앉아 있었고, 잡념에 시달리기만 했어”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시간을 매일 30분 동안 이 사랑의 음성을 듣는 데 사용하는 습관을 계발한다면, 점차로 당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당신을 축복하는 그 음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음성을 향한 경청의 시간이 단지 수많은 혼란의 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침묵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그 시간을 못 갖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안타까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습니다 – 그리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결코 주의를 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우 끈기있고 강하고 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기도에 관해 충실한 규율과 습관을 갖게 되면, 당신이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 Life of the Beloved PP.76-78 / 헨리 나우웬
......................

우리 내면 속에서 믿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
아마도 저같은 사람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믿음이 없으니 신앙이 없으니
그런 음성도 못듣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왕 저는 나우웬 비판 배를 탔으니 저도 한 번 가볼랍니다..

P.S - 아, 진보측의 나우웬 비판은 처음이 되나여?
그렇지만 그의 삶과 사유의 거대한 스케치에서만 본다면야
저역시 별로 그다지 비판하고 싶진 않은 것도
제 솔직한 심정이라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냥 나우웬이 회자되어도 무던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지..

[레벨:1]정세웅

2006.10.31 10:13:09
*.77.226.138

위에 제시하신 예문에 대해 제가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내공은 없고요...

제가 느끼기에 그것은 나우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나우웬이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약간 부적절한 것이 아닐까요?
추상의 정도가 크다와 작다라면,
과거의 기독교 신학자/저술가들은 이 기준에 의하면 다 비판을 받아야 하지않나요?
물론 동시대적 소통의 게으름이 문제라면,
글쎄요, 저는 그게 나우웬의 게으름이 아니라, 그가 서 있었던 세계의 한계라고 생각하는데..(누구나 있는 것)
그의 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기에 충분한
삶과 신앙의 성실성이 그에게 담겨있다면..
그것은 또한 구체적인게 아니겠습니까?

단지, 저는 나우웬이 성실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그 여운을 남겼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의 나우웬열풍이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안주거리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나우웬의 본질(?)보다는 사용자/독자/보수교회의 의도가 더 강조된 현상이 못마땅했을 뿐이죠.

미선이

2006.10.31 10:22:51
*.47.21.101

정세웅님 얘기 틀리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의 언술들도 그런 측면을 많이 보인다고 얘기했던 거구요..

그런데 정세웅님이 말하는 나우웬의 본질은 무엇이고 본질보다는
더 강조되었다는 보수교회 의도는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안주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 역시도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을 가했던 것이었거든요..

모호성의 글은 누구에게나 안주거리로 딱 좋지요..

[레벨:1]정세웅

2006.10.31 10:42:05
*.77.226.138

제가 말하는 본질은 그의 삶과 그의 글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놓치고,
나우웬의 삶에서 보수교회가 거부하는 것은 빼먹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상처입은 치유자, 환대/수용 등의 나우웬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과 함께생각할 수록 깊이와 닫는 이야기지요.
나우웬의 표현과 언어사용/용법의 모호성은 독특한 상상력정도로 보아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이것은 평소생각이 아니라, 님의 글을 읽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어떻까 하는 것입니다)
테레사수녀가 '하느님은 자비를 위해 우리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평범하고 카톨릭교회중심적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이 삶과 어우려져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본회퍼의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라는 말씀은 그의 삶과 함께 있기에
우리에게 무한한 하느님앞에서의 책임적 성숙/성실의 삶을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저는 신학자/철학자의 글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면에서 보는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나우웬이 교수의 경력이 있지만..

모호성의 글은 누구에게나 안주거리로 딱 좋은것임이 분명하지만,
안주거리는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는게 오늘날의 자본적 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미선이

2006.10.31 11:00:39
*.47.21.101

으음.. 나우웬을 읽는 보수교인들도 나우웬의 삶을 칭송하던데요?
그리고 나우웬을 신학자로 보는 ㅅ ㅏ람들도 여전히 많구요..

아 글구 테레사 수녀의 한계에 대해선 아래 글을 참고해보면
제가 보는 관점에 대한 느낌이 좀더 들지도 모르겠네요..

http://freeview.org/bbs/tb.php/f001/4

이길용

2006.10.31 11:49:05
*.239.93.192

미선이님의 이야기는 상당히 결정적론적인 환원주의자의 글처럼 읽혀집니다.

그럼 미선이님은 신앙이나 종교에 있어서 '경험' 혹은 '체험'이란 요소는 어떻게 수용하고 계시나요?

제가 보기에 미선이님이 나우엔에 보이고 계신 태도는 시인의 글에 수학자의 공식을 들이대는 형국 같습니다.




미선이

2006.10.31 12:06:55
*.50.20.7

아.. 물론 자칫 제 글이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익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수학적이라고 하더라도
신비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저 쉽게 말해 같은 값이면 좀더 구체성을 띠자는 얘기가 곧바로 환원주의자인 건 아니지요..

[레벨:1]정세웅

2006.10.31 12:22:35
*.77.226.138

미선이님의 입장을 알겠습니다.
링크하신 글의 입장도 분명히 알겠습니다.
물론 그런면이 중요하지요. 더구나 책임적 삶/신앙에 대해 고민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그 수녀만의 몫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제가 말하는 것은 해방운동가들은 그들의 해석이 있고, 테레사 수녀는 그의 해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해방운동적으로 철저히 근원을 파헤쳐서, 투쟁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자선/자비의 운동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비약이 아닌가요?
테레사수녀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저도 동의하지 않고,
그가 자선활동에 있어서의 사업적 수완(그래서 부와 권력과 밀착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장점/좋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테레사 수녀가 가난과 고통을 고착화하고 내면화하는데 앞장섰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요?
테레사수녀의 일이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부자들의 독점을 지지해주고, 폭력과 고통과 가난의 고착화에 찬성했다는 것인가요?
물론 미필적 고의가 있을 수 있겠죠. 저도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추가합니다)
약간 핀트가 빗나가듯 한데요..
테레사수녀의 개인적 평가가 중요한 듯 해서요.
저는 테레사가 전두환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미필적 고의를 염두에 두어야죠. 그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거고요.

미선이

2006.10.31 12:53:59
*.50.20.7

네.. 정세웅님처럼 적어도 그러한 부분을 인지하고
그렇게 답변을 하시는 거라면 어느 정도 저 역시 공감할 수 있는 바입니다..
저는 나우웬이든 테레사든 좋은 점이나 좋은 영향력이 아예 없다고 말한 적도 없으니까요..
나우웬의 경우, 그러한 부분에 있어선 주의깊게 이미 인지하고서 나우웬을 읽는다면야
오히려 유익이 됐으면 됐지 별무린 없을테죠..

아 저도 데레사 수녀에 대해 추가한다면,
데레사가 전두환과 아니기에 평가가 다르다고 해도
데레사 수녀가 독재자를 지지한 거처럼 (그 글에도 나왔듯이)
부자나 독재자들도 데레사의 일을 반대하진 않을 거라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31 13:40:27
*.77.226.138

한마디 덧붙이셔서 저도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나 독재자들이 테레사 수녀의 일을 반대안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게 토를 달아도 될까요?

미필적 고의를 염두에 둔다는 말은 모두가 미필적 고의에 혐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고,
테레사 수녀는 그 위치와 지명도만큼 중대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대중성(매스컴/영웅/신화)의 문제고
연예인 문제처럼 그것은 쉽게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사실, 이런 대중성의 문제는 쉽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고 봅니다.

미선이

2006.10.31 14:34:31
*.50.20.7

제가 알기에는 거의 모든 부자나 독재자들이 데레사를 반대할 이유가 뭐 있나여..
서로 충돌나는 것도 없으니..제가 보기엔 데레사의 그 글이
쉽게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은 적어도 아니라고 봅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은 주로 사회봉사 혹은 사회복지 적인 성향을 많이 띱니다..
반면에 데레사 수녀에게서도 나타나듯이 그러한 봉사 가운데서도
빈익빈부익부가 여전히 재생산되는 사회구조와 계급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희석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데레사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둘다 우리 모두의 삶에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이분화할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개인의 한계가 사회적 위치로서 나타난 문제로도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래서 데레사 수녀의 한계라고 언급되었던 거구요..
그런데 정세웅님의 이번 글은 웬지 느낌에 있어 그것은 개인의 한계가 아닌
모두에게 어차피 있는 것이기에 불기피한 것이니 개인의 책임은 면제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맞나여?
혹시 제가 틀리게 이해했다면 한 번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31 14:49:52
*.150.14.37

오늘이 종교개혁 489주년 되는 날이 확실하네요.
모두들 또렷한 자기 소신을 갖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현아 님은 싸움만 붙여 놓고 어디로 사라지셨을까?
악취미시군요.

나우에의 이야기에서 테레사까지 왔군요.
미선이 님이 인용한 나우엔의 글이 왜 추상적이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미선이 님이 이렇게 쓰셨네요.

저는 이런 언술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한다는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도대체 뭐죠?? '여행'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뭘 얘기하는 건가요?

정말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거는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눈을 배우는 게 곧 기독교 영성이 아닌가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이 체제와의 투쟁도 가능하겠고,
사회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대감도 갖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눈과 함께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향한 사랑, 또는 열정, 또는 에로스가 살아나고
고난과 가난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삶의 능력이지요.
이런 게 추상적인 건가요?
본회퍼가 히틀러 반대 투쟁에 앞장 선 것도 역시
이런 하나님의 눈으로 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걸 미선이 님이 모르고 위에서처럼 언급했을 리는 없다고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일종의 시적 언어인 여행이 서로 닿을 수 있는 부분이 없나요?
이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유기적으로 얽혀들고 있는 이 여행을 모른다는 말인가요?
위에서 이길용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시를 물리학적 개념으로 분석하려고 들면 넌센스일 겁니다.
3,4세기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매우 치열하게 삼위일체 논쟁을 이끌어갔습니다.
그게 우주적 농담이라는 결말로 끝난다고 보는 건
정확한 문제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개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에도 정당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로 남아있습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런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으로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하나님 경험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 안에서 훨씬 풍요로워지고, 심화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과정 안에 들어 있겠지요.

다시 나우엔의 이야기.
미선이 님은 침묵 가운데서 축복의 음성 듣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혼자서 산책할 때 우리는 침묵하지만 훨씬 근원적 평화를 맛볼 수 있지 않나요?
음악가들이 작곡할 때 사람들과 말하면서 하나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일종의 침묵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설교조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나우엔의 글이 나에게는 너무 절실하게 와 닿는데,
그걸 추상적이라고 말씀하시니,
더구나 신학적으로나 세계관에서 매우 진지하고,
진리를 향해 거의 용맹정진하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말하시니
당혹스러워서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나우엔의 정신적 전통이라 할 중세기의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에게서 저는
말할 수 없는 생명의 깊은 외침을 듣습니다.
그런 영성에서 저는 바깥 세계를 향해 나를 열고
정의와 평화 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성가들의 노래와 예언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니...

오늘은 종교개혁 개념일입니다!!!!

조현아

2006.10.31 15:38:51
*.130.193.86

ㅋㅋㅋ~
저는 싸움을 붙여놓고 ...
다른 분들이 쌈 하는 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여러 님들이 글 쓰는 열정을 보고 있노라면
제가 갑자기 할머니가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싸움을 붙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휴~~~ㅠㅜ
이렇게 싸움 붙이는 것보다는... 그냥 하나 하나
제 나름대로 짚어가거나 조율해가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31 15:11:15
*.77.226.138

정목사님 종교개혁 개념일이라뇨? 뭔가 의미심장한 말씀이신가요? ^.^

미선이님 마지막 지적을 인정합니다.
단지 모순이 많은 삶에서도 '진정성'을 읽어낼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하는 (갑자기 도사분위기.. ㅋㅋ.)
그렇다고 모순을 그냥 넘어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떤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떤 합의점은 위의 위 대글에서 정리 된 것 같았는데.. 괜히 한 마디 더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미선이

2006.10.31 16:58:49
*.50.20.7

정용섭 목사님께..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하나님의 눈이 무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신학적 소양이 덜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 그 같은 이해를 제가 거부한다거나 못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한 식의 이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또 구구절절 해석이 가능한 "하나님의 눈"이 될 것입니다..
체제와의 투쟁, 연대감, 고난과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삶의 능력 등등

이것은 소위 영성 담론에서 볼때도
흡사 영성이란 무엇이냐고 했을 때 나오는 답변들이랑 비슷한 듯 하네여..
물론 혹자는 이를 보고서
"영성이란 곧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겐 이런 언술은 거의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술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뚜렷하게 다의적으로 분화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든 언어와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다의적으로 분화가능하지만
특히나 보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들의 언술일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분화되는 성격이 아주 강하게 높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저의 비판에 대해 시를 물리학적인 개념분석으로 하고 있다거나
그걸로 환원된다는 보는 얘기들은 핀트가 어긋난 차원의 얘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헨리 나우웬의 글을 시라고 보시기도 하시니
그것이 추상성이 높은 메타포들의 향연이라는 점은 인정하시나보군요..

메타포 혹은 온갖 레토릭들의 향연들은 구체적인 근거와 데이터에 기반해서 나오기보단
그저 직관적 느낌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설교조가 되기 십상입니다.. 근원적 평화? 솔직히 그런 것이 무엇인지요?
제게 있어선 그런 기술들은 여전히 불분명하고 모호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가 개인의 성령체험이나 개인의 직관적 신비체험의 차원 자체를
제가 아예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단지 개인의 신비체험도 이를 밖으로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노출되는 것이기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도록
그 개인의 직관적 신비체험에 대한 타당성 있는 설득적 기술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성은 이 부분에서 더욱 크게 요구되는 것이구요..
제가 보기엔 이런 점들은 조현아님 같은 분들의 특징이 갖는 문제점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종교인들은 "체험해보면 안다"라고도 얘기하곤 하죠..
이것은 제게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면서 동시에 별로 비생산적인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 신앙을 어떻게 구체적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런 얘기가 곧바로
설득력 있는 구체화의 요구 자체를 아예 묵살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눈 이라는 메타포들도 소중하지만
가능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언술들로 같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새로운 기독교를 염원하는 돈 큐빗에 책에도 이런 말이 있더군요..
그리스도인들은 "저들끼리만 통용되는 비밀언어"가 있다고..
다시 한 번 누누이 얘기하지만 저는 이를 소통의 차원에서 지적하는 것이지
바깥언어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얘긴 결코 아님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저로서도 목사님께 더욱 의문이 하나 듭니다..

전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목사님 지적한 대로 플라톤의 직접적 영향이 큽니다..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헬라철학의 존재론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수 기독교인들도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듯이
헨리 나우웬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토마스 머튼 혹은 떼이야르 샤르뎅 등등
이런 자들의 밑바닥에 있는 해석학적 존재론과는 충돌하지요..

다시 말해서 저는 삼위일체를 헬라적으로 보진 않는 입장입니다만..
만일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를 전통 기독교의 범주 해석에서 받아들이고 있다면
헨리 나우웬 혹은 에크하르트 등등과 어떻게 양립가능 할 수 있는지요?

사실상 조현아 님 같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헨리 나우웬을 맹렬히 비판하는 그 밑바닥에는
바로 이 부분이 부지불식 간에 문제있는 충돌로서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무언가 언뜻 자신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신념(신앙)체계들을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이 건드린 게 있었던 터라 저토록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원론에 아주 익숙한 보수 신앙인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이 언뜻 은혜스럽게도 보이겠지만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자신이 지닌 것과는 근본적으로 체계가 다른 것으로서 읽히지요..
헨리 나우웬을 비롯하여 에크하르트도 그렇고 토마스 머튼도 그렇고
사실 이들은 전통 기독교의 존재론적 시스템에 맞지 않는 언술들이 종종 나오곤 하니까요..
저들은 이들을 기독교안에 스며든 뉴에이저 영성가들로 분류하곤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때 저들이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을 비판하는 그 맥락도 저로선 설명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제가 지금 제기하는 바와도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구요..

우리가 해석학적 존재론에 대한 첨예한 고찰을 철저히 파고 들어갈 경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근원적인 밑바닥에서는 서로 양립불가능처럼 충돌하고 있듯이
전통기독교와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과는 충돌하는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의 머리 속에 두 가지 충돌나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는 건 모순일 것입니다..

즉,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충돌자체가 없다고 보시는 건지
혹은 알면서도 무시하고 계시는 건지 의문이 들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답변을 주시면 제가 다시 재차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31 18:01:45
*.77.226.138

미선이님,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아서 몇 가지 설명을 요청합니다.
기독교안에 스며든 뉴에이저 영성가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같은 맥락인 것 같은데 전통 기독교의 존재론적 시스템과 맞지 않다는 뜻은요?

한 가지는,
저도 미선이님의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언술에 대한 입장을 중요하게 보는데,
근데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저는 일단 동시대적 소통능력을 추상적으로 정하고 있는데..
그게 참 어렵거든요. 동시대적으로 소통되는 구체적 언어/언술/말을 찾는 것..
제가 보기에 그것은 개념의 명확성을 지닌 언어/언술/말이 아니라,
용도/사용의 명확성이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제가 보기에 일상의 용어는 개념의 명확성이 아니라, 그 말을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달렸다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눈이라는 말'이 어떤 뜻이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는가?
사용되는 지점이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것이라면,
모호/추상의 언어/언술/말도 충분히 동시대적 소통으로써 의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생각이라서...

"하늘이 무너졌다"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모호한 말이지만,
일상에서 어떤 경우에 쓰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맞는 예인지 모르겠지만..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미선이

2006.10.31 23:14:31
*.47.21.101

정세웅님께..

뉴에이지에 대해선 일단 예전에 잠시 썼던 글이 있어 몇 자 옮겨놓습니다..

..........................................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은 서구에서 일어난 신비주의 경향의 문화정신
운동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위기감과 거기에 따른 전환을 부르짖는 정신사적
운동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까지의 서양 문명을 지탱해왔던
기독교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고 동양에 눈을 돌려 새로운 삶의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적 문양의 그림이나 생활 양식들을
많이 차용하기도 한다. 이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새 세계의 도래를
꿈꾸며 인간의 잠재의식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들을 발굴하여 결국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새
시대는 물병자리의 시대로써 온 인간이 사랑과 평화로 하나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주장에는 다분히 낙관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많다고 봐야한다. 비록 뉴에이지 운동이 서구에서
일어난 <오리엔탈리즘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도 보진 않지만, 나는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이 조금은 지나치게 신비주의 경향으로 나아가는 점에
대해선 별로 달가워하진 않고 있다. 정치 사회성이 탈각된 신비주의라는
것은 그 또한 보수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다분히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조화>와 <합일> 혹은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긴 하지만
세계 안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로써의 첨예한 갈등과 고통들은
별로 취급되고 있진 않기에 다분히 그 주장들이 뜬구름처럼 들릴 뿐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이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한계와 그 위기감에서 시도된 반성적 운동이라는 점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뉴에이지
혁명」이라는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책을 보라. 이 책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의
교과서로 인식되는 대표적 저서이다.

...........................................................

이 책에도 떼이야르 샤르뎅 같은 신학자들도 자기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얘기되기도 하죠..
이들은 신비 영성가들의 삶과 사상들에 많이 도취된 면들이 있습니다..
자연 혹은 명상을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죠..
헨리 나우웬이나 토마스 머튼을 비판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뉴에이지 운동과 사상과 흡사한 면을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헨리 나우웬을 비판하는 글을 제가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극심한 보수 기독인들 가운데는 심지어 <관상기도>나 <명상> 같은 것도 매우 이단시하기도 하죠..


두 번째 질문은 아주 간단한 문제가 아닌
진리를 논하는 철학의 근원적인 물음과 같은 맥락에 있는 얘기입니다..

저로선 개념의 명확성 뿐만 아니라 용도/사용의 명확성도 함께 중요할뿐더러
사실상 둘은 별개가 아니라 실은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전자는 논리적 합리적 측면과 후자는 실제적 적용의 측면을 의미하는데
논리적 이론 따로 실천적 적용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죠..
알고 보면 지극히 정합적인 이론일수록 실제적 적용에서도 유용성이 더욱 높다고 봅니다..
만일 후자만 인정하는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실용주의 관점일테죠..
이론과 실천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게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개념의 명확성은 어떤 경우엔 용도/사용이라는
실제적 적용에서 그 적용된 이론의 오류가 드러나기도 하잖아요..
거꾸로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플랜도 없이 당장 실천쪽으로 직행하겠다는
무뇌아적인 실제적 적용이란 것도 우스운 거죠..

정세웅님께선, '하나님의 눈이라는 말'이 어떤 뜻이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 그렇게만 본다면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보는 언술맥락과도
그다지 차이가 있진 않습니다.. 이들은 진리란 것은 결국
그것이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에 따라 형성될 뿐이지 진리 자체가 있다고 보진 않지요..

제 입장에선 '하나님의 눈'이 어떤 뜻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눈'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의 해석과 이해도 중요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 사용되고 있느냐도 같이 놓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개념의 정확한 분석과 이해란 그 자체로 이상적인 것이지요..
그 점을 모르진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예 필요치 않다고 말해버리거나
진리에 대한 그 가능성마저 거세해버리는 경우라면
결국 우리는 진리함수적 논리를 배울 이유도 논할 명분자체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들은 실용주의로 기울어버리면 되는 거니까요.. 초월이 아닌 내재만 남는거죠..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혹은 개념은 결국 그것이 놓여지는
<삶의 마당>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삶의 마당이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선
꿈조차도 못꿨을 정도로 그게 뭔지를 얘기하진 않았어요..
화이트헤드가 말년에 해놓았던 작업이 바로 그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언어와 개념이 놓여지는 존재와 우주 전체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죠..
그 작업은 개념의 정합적 합리성 축조와 함께
세계 안의 현실적 경험의 정당성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합리적 경험론자로 평가받지요..

이미 그는 러셀과 함께 한 수리논리학 시절부터 진리함수적 논리를 논하면서,
이상적 언어는 일체의 애매성과 다의성이 배제되고, 한 언어적 표현의 문법적 형식이
그것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하는 언어체계일 때 가장 탁월한 것이라고 말했습죠..
물론 이것은 언어기술의 이상입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바로 이러한 이상에 도전하는 그 과정자체가
즉, 그것을 끊임없이 적용시켜보는 모험의 과정 그거야말로
이미 우리 자신들을 발전시키는 유용함을 가진다고 보았습죠..
앞서 시와 물리학에 대해서 얘기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와 과학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곤란한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걸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의 <산상수훈>과 <수학의 곱셈표>가
도대체 무슨 상관성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는 동종의 연관성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선>Goodness의 본성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질서>라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바로 "선의 본성에 대한 최초의 통찰이 바로 <수학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위대한 시인의 시에는 그것이 비록 매우 추상성이 높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지극히 인류사를 꿰뚫는 합리적 타당성을 이미 그 밑바닥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합리주의는 곧바로 인간에게 붙잡혀지는 게 아닙니다..
이성과 계몽을 중요시했던 근대 합리주의는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이성을 맹신했었지요..
그래서 개념의 명확성에만 몰두하다보니 독일 관념론자들마냥 마냥
추상적일 수밖에 .. 유물론자들은 관념론의 이러한 도식을 역전시켜버리지요..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정신성과 물질성을 함께 지녔다고 보기에 관념론과 유물론을 통전하는 맥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자물리학의 소립자 연구에서도 의식과 물질의 상관성을 얘기할 때 언급되곤 합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네요.. 좀 길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저 간단하게 얘기한다면 소통의 기준을
힘(권력)이냐 설득적 합리성이냐.. 현대의 논의로선 이렇게 모아질 수 있겠지요..
언어는 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합리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의 의지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죠..
하지만 촘스키나 하버마스 같은 사람은 후자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하버마스와 가다머의 논쟁에서 그는 근대성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진 못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존재 자체가 힘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영속시키게 하는 힘은 합리주의 즉 설득적 합리성이라는 거죠..

인류사에서 이 사례는 과학의 역사에서 많이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게 천동설과 지동설의 사례를 들 수 있겠죠..
그 어마어마한 권력의 천동설을 초라한 지동설이 이겨낸 비결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새로운 지동설의 얘기는 매우 낯선 것이었고 소통하기 힘든 것이었을텐데도 말이죠..
그러나 결국은 지동설이 언술의 소통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후기 플라톤의 표현이기도 했던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라고 말하지요..
패러다임론을 제창한 쿤도 자신의 이론을 오해한 사람들에게 말하길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오해의 빌미를 제공한 것 역시 사실)
과학이 꼭 권력담론으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고 얘기하며
설득적 합리성의 차원을 남겨두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나의 언술의 권위 혹은 소통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힘(권력)인가? 아니면 설득적 합리성인가?

P.S-혹시 후자의 질문에 대한 저의 이런 답변을 두고
보수 기독교인들은 결국 그런 기준 역시 '하나님'에게 둬야 하지 않느냐
'성령님'에게 두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곧잘 얘기할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이 말뜻을 모르거나 굳이 반대하고 있진 않지만요)
어쨌든 작금의 논의에서 이렇게 말해버리면 정말 대화하기 참 더 힘들어지겠죠?^^;
그냥 이건 노파심에서 드린 얘기였음..

[레벨:5]이택환

2006.10.31 23:19:30
*.61.167.35

그런데 위의 글이 헨리 나웬의 글보다 더 추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비단 저뿐일까요?(^^)
미선이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일전에 동대문 복음교회에서 이웅상-이명욱 교수 특강시간에 만났던 누가회 이택환 목사입니다.
늘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레벨:1]정세웅

2006.10.31 23:19:26
*.77.226.138

진지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철학적 흐름은 대충 따라가겠는데, 아직 제가 속시원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이해는 못하는 건지..
제 질문이 여전히 모호한 거였는지(제가 질문을 정확하게 하는 내공이 아직 모자라죠. 그게 가장 어렵고..)
생각을 더 정리해 보고..
나중에 메일이나 세기연에서 다시 한 번 고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선이

2006.10.31 23:44:23
*.47.21.101

이택환님.. 뭐 그런 생각은 이택환님 뿐이겠습니까..^^*
워낙 온갖 개념들의 합종연횡들을 따라가다보면 쉽게 지치기도 하곤 하죠..
어딜가나 말들의 잔치이니.. 아, 그리고 그렇게 보는 의문 자체부터가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얘기되는 식으로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게 되버리면
저역시 이후에 할 얘기들도 막연할 따름이라는 점도 이미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또 얘기 나눌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세웅님..
내공이야 저역시도 여전히 모자람을 느끼는 법..
언제 '질문의 가닥' 확실하게 잡히면 세기연에 글남겨주시길 바랍니다..
나름대로 성심껏 답변해올려보도록 할께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01 00:31:42
*.150.14.169

나우엔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군요.
저도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늘(10월31일) 저녁에 대구에 나가서
김준우 교수의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종교개혁 특강이었습니다.
정직한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목소리도 역시 기독교의 다양성 안에서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의 중심에서는 크게 새로울 건 없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경청해야 할 부분이 많더군요.
정세웅 목사님,
종교개혁 기념일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천착한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도 현실이라는 점을 넌즈시 말한 것뿐입니다.
현실 교회를 살리는 개혁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미선이

2006.11.01 11:31:43
*.50.20.7

네에 알겠습니다.. 정목사님..
저 역시도 전부터 알고 있었던 헨리 나우웬이지만
그다지 비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번에 처음 내뱉게 된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나우웬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쨌든 중도쯤 되는 복음주의 진영에선 나우웬이 좀더 인기가 있을진 몰라도
진보 진영에선 헨리 나우웬이 간간이 언급되긴 해도 복음주의 진영만큼
그다지 관심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 싶어요..
거기에다 제가 보는 나우웬 관점에선 조현아님 같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나우웬을 그렇게 보는 맥락도 짐작이 가는거죠.. (물론 거기에 동의한다는 얘긴 아니죠..)

아 그리고 제가 목사님께 드린 그 질문은 답변을 잠시 유보하신 건지 다른 무엇인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언제든지 시간이 괜찮으실때 답변을 주셔도 괜찮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늘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은 특히나
좀더 심각하게 현실교회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모색해야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아요..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주님의 평화~!!

이길용

2006.11.01 12:31:23
*.114.16.4

보수주의자들 중에서 나우엔을 싫어하는 경우.. 아마도 그가 예수회 신부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클 겁니다.

그렇지 않고, 같은 소리를 예수회 신부 나우엔이 아니라 ****선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아무개 목사가 했더라면 열광의 강도가 계속 줄을 잇겠죠.

내용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나 비평이라기 보다는.. 그 외형이나 형식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작용할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우엔의 글을 주로 펴내고 있는 개신교 출판사들은 대부분 보수 라인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 나우엔의 글을 펴내기 이전에 가톨릭에 대한 그들의 기본 입장을 정리하는 작업을 우선해야 할터인데.. 은근슬쩍 그 부분을 스쳐 넘기는 모습은 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어떤 출판사는 아에 나우엔이 예수회 신부인 것도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더군요.

검은 고양이가 되었든, 흰 고양이가 되었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생각인가보죠.

여하튼 그렇게 뒤죽박죽 섞어찌개를 만들면서 한국교회는 진행되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정작 저는 나우엔이나 C.S. 루이스의 글은 한번도 접해보질 않았군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그럴 의도나 계획이 없을 것 같네요.

미선이

2006.11.01 13:33:34
*.50.20.7

물론 천주교 자체도 이단시하는 보수 기독교인들도 있는지라
예수회 신부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봐여..
말씀하셨듯이 나우웬의 책은 대부분이 보수출판사에서도 나오지만,
아주 간혹은 그의 소책자 같은 정도는 진보측 출판사에서 나온 적도 있긴 해여..
바로 김준우 소장님이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도 나온 적 있구요..

C.J.루이스도 근래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중 하나져..
이 사람 그래도 글빨 만큼은 좀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긴 해요..
나디아연대기 작품도 썼다지만 문학적 소양은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듯..

아참, 길용님 사자보면 웬지 나디아연대기 영화이미지랑 오버랩되는 듯^^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01 13:46:10
*.150.14.174

미선이 님,
또 이 꼭지에서 글을 쓰게 만드네요.
나중에 시간이 날 때는 또 잊을지 모르니까 간단히 한 마디만 하겠어요.
질문의 핵심은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나우엔 식의 사유 방식이 양립가능한가, 하는 거였죠?
가능하다 말다요.
여기서 전통적인 삼위일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건 접어두고 단지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해서 본다면
미선이 님이 천착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도 얼만든지 소통이 가능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해석하려는 테미놀로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 내재적인 분이며,
더 나아가서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인식론적 언어개념입니다.
과연 그런 분이 실체론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늘 열려 있어요.
삼위일체론은 비록 플라톤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쓸데 없이 가지치기가 되니까 요약적으로 말해야겠군요.
(혹시 다른 독자들 중에서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싶은 분은
몰트만의 책도 있고, 또는 이 다비안의 온라인 강의에도 조금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루이스, 그리고 나우엔의 영성은
당연히 성령의 하나님, 또는 창조자로서의 아버지(또는 어머니)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접촉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산고의 고통 속에 있는 어머니와 함께 하며,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하는 그들에게 함께하고,
양자 역학을 실험하는 과학자들의 그 행위에도 함께 합니다.
내가 베낀 글에 올린 나우엔의 글에 있듯이
정신장애우들에게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걸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모호하다고 생각하나요?
이 모호성 문제는 그만 두기로 했지요.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현대의 그 어떤 과학으로도 모든 해명이 불가능한,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그래서 그 세계를 창조한 그분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해명될 수 있는 이 세계를
훨씬 역동적으로 해석하고 그 안에 참여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다릴 수 있는 그리스도교 영성입니다.
아무래도 사족으로 한 마디 더 해야겠군요.
전통 기독교 도그마는 기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입니다.
교리가 먼저 있고,
또는 교리에 의해서 영성이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영성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는 논리로 교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나우엔이 전통 삼위일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적 체험은 당연히 삼위일체 안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과학도 역시 경험이라는 건 말지요?
화이트헤드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reality를 해명한 것이겠지요.
화이트헤드가 모든 실체를 실증적으로 증명했나요?
과정이 리얼리티라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증명될 수는 없어요.
아니 화이트헤드의 논리 안에서는 증명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여전히 잠정적인 것이겠지요.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새것이 올때는 낡은 것은 자리를 비켜야하는 것처럼
그의 논리는 그런 잠정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뉴톤이 결국 물러나야했듯이....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최선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구요.
다만 그도 역시 20세기 사람입니다.
앞으로 몇 세기, 또는 몇 백 세기가 흐르면
리얼리티 이즈 어 프로세스, 라는 그의 명제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이 세계의 신비가 아닐까요?
화이트헤드는 미선이 님이 전공이니까 내가 괜히 끼어들었다가
챙피만 당할 테니까 그분 이야기는 없었던 것도 하지요.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삼위일체는 현대물리학의 세계와도 여전히 소통된다는 사실입니다.
장자의 도, 하이데거의 존재, 화이트헤드의 과정은
성령론적인 지평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뒤범벅으로 말하다가는
이길용 박사에게 핀잔을 들을지 모르겠네요.)
결론:
나우엔의 영성과 그 해명은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미선이

2006.11.01 16:20:31
*.50.20.7

정 목사님.. 친절하신 답변에 감사합니다..

제 질문은 이곳에 나우웬 얘기가 나와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나우엔 식의 사유 방식이 양립가능한가, 하는 거였겠지만
사실은 오히려 목사님께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좀더 본질적인 물음은
목사님께선 적어도 기존의 전통 주류 기독교의 핵심 신조들은 긍정하고 계시면서 지금 열거하신 분들 즉,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나우엔 등등 (루이스는 분명치 않아 좀 뺐음)이 그것과 근원적으로는 양립가능한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양자는 근원적으로는 존재론의 도식에서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선 가능하다고 보시는 거 같아요..

특히나 언급한 분들 중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같은 사람들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 밖의 영성가들 불교에서까지도 우호적으로 볼만큼 기존 기독교의 시스템과는 다른 존재론적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세계를 보는 이해와 해석을 깔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화이트헤드도 큰 사유의 스케치에서 보면 이들과 비슷한 흐름에 서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기독교 형성과정에서 볼 때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우리가 이미 그 개념을 부여받았을 때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기반할 경우, 신은 내재가 아닌 초월의 원리에 기반한 신이 될 뿐입니다..
플라톤을 신학에 적용시킨 어거스틴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으로 기독교 신 개념을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나 여기에는 내재가 아닌 초월의 원리로서의 신 이해라고 봅니다.. 신은 전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초월적이며 세계의 간섭과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인 거죠.. 그럴 경우 예컨대, 고난이나 고통 받는 신 개념이라는 것은 전통 기독교의 전능자 초월자로서의 신 이해에서는 매우 이해가 힘든 것입니다..

악의 책임성을 말할 때 근원적으로는 신의 전지전능성이 아닌 신의 (자기)제약적 성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노장사상이 플라톤의 이원론과 양립가능할 수 없듯이 이들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교리가 먼저 있고, 또는 교리에 의해서 영성이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영성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는 논리로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점은 저역시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바로 그래서 저는 기존 기독교 교리에는 현실 경험에 대한 설명들을
온전히 구제하지 못하고 오류를 보이는 측면들이 (신론이든 기독론이든..) 있다고 보기에
다시 재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거구요.. 제가 말하는 새로운 기독교란 것도 이런 측면이 되겠죠..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기존의 전통 기독교 밑변에 깔린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대체하기 위해서 저는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의 ontology와 cosmology는 경험주의나 현대 물리학에 기반하면서도 유신론을 표방하고 있기에 아주 유용하다고 보는 것이겠구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과는 좀 차이가 있겠지요.. 무신론이 나온 이후에도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신 이해라는 평가도 있죠..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그런 화이트헤드도 언젠가는 자리를 내주겠지요.. 그 자신도 '논리적 정합성'과 '실제적 적용'에서 언제든지 오류가 보일 경우 과감히 수정 또는 폐기 처분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유의 역사는 언제나 활기찬 개시와 무기력한 종말을 보여왔었지요.. 언급하신대로 단지 최선으로 지닐 뿐이며 언제든지 화이트헤드보다 더 유용한 사유들(해석학적 도구들)이 있다면 당연히 화이트헤드도 뒤안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한에서 유용성을 갖는다고 보는 거구요.. 목사님 표현대로 잠정적이겠지만 동시에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화이트헤드가 왜 유용한가 하는 점들은 이미 제 책에서도 좀더 자세히 고찰된 바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깔려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면 저는 결국 서로 충돌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비롯한 기독교의 기존 신학적 개념들을 플라톤의 형이상학마저도 비판하고
넘어서서 새로운 해석의 툴로서 다시 재해석한다면 여전히 가능성은 있는 것이지요..

제가 그동안 목사님의 글에서 느낀 문제의 본질은 바로 이 부분,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목사님에게선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릇 어떤 언어나 개념들도 그것이 놓여있는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의 지평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일반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나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 뭐이런 것들과도 연관되는 얘기들이죠..

아무튼 서구철학은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를 플라톤의 각주라고 볼 만큼이나 플라톤의 그늘이 짙게 배여있습니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양립가능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플라톤과 데리다는 양립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헤겔과 들뢰즈가 서로 양립가능하기 힘들고, 유물론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와 신존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의 사상과는 그 궁극적 지평에서 충돌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언급하신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나우엔 그리고 떼이야르 샤르뎅까지 포함해서 이런 사상들은 화이트헤드를 포함해서 동양의 사상들과도 많은 흡사함을 둘 수 있겠지만, 적어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는 근원적으로 그 존재론적 시스템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충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기원은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행태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된다고 봤을때, 이 예수의 언행을 해석하는 해석의 툴을 일찍부터 초기 기독교의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도 고등한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던 헬라철학의 영향과 빚을 져 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래서 저로선 기존 기독교에 그동안 깔려 왔었던 헬라철학의 지꺼기들을 씻겨내고 그 기초에서부터 다시 재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거구요.. 이천년 전의 예수사건, 이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다시 재해석 재수립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기독교 전통을 죄다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랍니다.. 어차피 모든 경험들조차 해석활동이니 꼭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예컨대, 성육신 같은 개념은 헬라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히브리즘의 젖줄에 더 가까울만큼 반이원론적인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런 교리들은 전통 기독교 교리에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 보더라도 오히려 더 살려야 할 신학적 장치들이죠..

어쨌든 궁극적 지평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우리가 쓰는 개념들은 현상적 표피층에선 서로 뒤섞이고 얽혀버리게 되어
혼재된 모순들을 알게 모르게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목사님께서 그동안 설교비평을 비롯한 여러 얘기들을 통해
타성에 젖어있는 일반 기독교인들의 의식들을 잘 일깨워주시고 계신다는 점에 있어선
저로서도 고마움을 참 많이 느끼고 (목사님의 인격을 포함해서) 배울점도 참 많다고 여겨지지만
한편으로 정말로 정직하게 말해서 제가 정목사님에게서 그 사유가 철저하지 못한 부족함을 느꼈던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글이 길어졌네요.. 할 얘기들은 더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물론 제가 보는 시각이 틀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럴경우
저로선 목사님의 정합적이고 구체적 근거에 기반한 반론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번에 저희 세기연에선 정목사님을 초청하려 했었는데 서로 간에 일정이 안맞아서
저희로선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답니다..이미 구미정 선생님을 통해 알고 계실 거라고 봅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 번에라도 정목사님을 모실 기회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

주님의 평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01 23:26:39
*.150.14.145

미선이 님,
이제야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는군요.
미선이 님의 주장이 왜 내게 와 닿지 않는지가 말입니다.
미선이 님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일부 수구적 보수주의자들과
거의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시네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교리는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이고, 실체론적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고 있군요.
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며
성서적인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지양되고 있다는 점을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결국 수주적 보수주의자들의 생각하는 기독교 교리가
바로 미선이 님의 생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수구적 보수주의자들은 그걸 우격다짐으로 지켜내려고 애쓰고,
미선이 님은 그걸 무조건 허물어내려고 애를 쓰네요.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군요.
이렇게 내가 과격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미선이 님이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실체론적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미선이 님은 그걸 단정한 채로 자기 논리를 전개하네요.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우주 공간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삼위일체론을 강의할 생각은 없어요.
하나의 예만 들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변증법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미선이 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내재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경륜하는 역사성도 갖고 있습니다.
내재와 경륜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내재는 역사 내재의 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륜이 역사 내재의 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경륜, 또는 구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통치로서, 계시로서, 나라로서, 사랑으로서 존재합니다.
기독교의 계시론만 정확하게 이해해도
하나님의 플라톤적인 실체론적 형이상학은 극복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통치이고, 운동이고, 과정이고,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론에서는
유신론과 무신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선이 님,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비판하려면 기독교 신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 더 살핀 다음에 해야 합니다.
안티 기독교 사람들처럼
무조건 기독교를 싸잡아 가부장적이다, 제국주의적이다,
초월적이다, 해서 비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답니다.
물론 위의 표현이 모두 미선이 님에게 해당된다는 게 아닙니다.
미선이 님에게는 주로 기독교의 초월적 형이상학이 문제겠지요.
그게 아닌데 자꾸 그렇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플라톤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고 고집하시니
나로서는 좀 난감하네요.
좀 심하게 말해서
그건 선동을 될 수 있지만,
혹은 교회 밖에서 논의는 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신학 안에서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기독교 형이상학을 재구성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을 읽어보세요.
만약 그 책을 읽고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할까요?
기독교 신학은 이미 플라톤의 이원론적 초월주의를 극복했답니다.
사실 플라톤 사상을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도 없지만요.
미선이 님이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가 과연
신학적으로 정리된 것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어제 김준우 교수의 강의를 듣고도
미선이 님에게 느끼는 그런 비슷한 걸 느꼈어요.
내가 보기에는 별로 새로운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이해가
기독교를 새롭게 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이 말한 건 두 가지입니다.
1. 전통적 기독교는 신화적 교리에 묶여서 신자들을 잘못 이끌어왔다. 십일조 강조, 제국주의적 신앙, 율법적 신앙, 핵심적으로 그런 것은 모두 모세종교이다.
2. 그런 문제들은 기독교 교리가 신화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알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별반 새로운 게 없잖아요.
신대원 2학년만 되어도 불트만의 신화화 논쟁에 대해서 알잖아요.
수구적 집단만 제외하고 오늘 성서의 신화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신학은 그걸 넘어서
정치신학, 역사신학, 자연신학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면서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거 정직하게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누가 동정녀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왜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김준우 교수를 끌어들이냐 하면,
김 교수나 미선이 님이나 크게 오해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모두 수구보수주의자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를
전제하고 자기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분 모두 기독교는 초월주의자들이고, 이원론적이고,
율법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실체론적 형이상학이라고...
이런 생각을 전제하고 있어요.
이게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왜 아닌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지
다시 그걸 전제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안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자본주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요.
수구 보수주의자들의 기독교 이해와
미선이 님의 기독교 이해,
그리고 안티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이해가
일단 비슷하게 보입니다.
물론 그 해결에서는 다른 입장을 보이지만요.
흡사 레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게는
북한이 무조건 나쁜 놈들처럼 보이듯이
미선이 님에게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가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형이상학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 전제된 기독교 이해를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 되고 맙니다.
내가 수구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느끼는 답답증을
미선이 님에게서도 느낀다면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말이 길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체계 자체를 재구성하겠다는 미선이 님의 열정을
저는 진심으로 높이 삽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 일들은 별로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해결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늘 제 이야기가 다시 설교 조가 되었지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합니다.
언제나 이런 버릇을 고치려는지.
(그나 저나 다비안 님들은 이런
담론을 지겨워하지 않을래나....)
ps. 제가 위에서 조금 과격하게 표현한 걸 이해하세요.
속으로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미선이 님의 그 학문적 치열성과 변혁의 에너지를
부러워하고, 좋게 평가합니다.
다만 그렇게 열리신 분이
왜 수구보수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을까, 그게 궁금한 거에요.

정정희

2006.11.01 23:35:37
*.120.204.45

댓글을 보면서 행복합니다....^^

[레벨:0]riveroad

2006.11.02 01:44:58
*.116.148.209

*두 분 간 오간 글을 읽으며 느낀 잛은 평입니다:

"정통"기독교 Vs "현실" 기독교

미선이 님과 정목사님의 대화가 엇갈리는 이유가,
현실 교회에서 소위 "정통" 기독교의 메시지가 소리높이 들리는 게 아니라,
다른 메시지들(예를 들면, 극보수나 안티기독교)의 메시지만 구호로 자주 들린다는 현실이 버티고 있다는 점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무엇이 "정통"인지 교회 다니시는 분들(기독교인들)께 여쭤보면 아주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요.
대부분 "정통 기독교"를 말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좋아하는/또는 좋아하진 않지만 다수를 차지한다고 보는 "현실 기독교"를 말할 겁니다.

김준우 박사나 미선이 님의 메시지가 기독교의 체계 자체를 새로 세운다고 볼 수는 없지만[물론, 새로울 건 없다고 해도 재해석은 되겠지요],이런 문제 많은 "현실 기독교"를 개혁하는 데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겠지요.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보면 득인데, 그것만으로 다른 입장들을 다 폐기할 수 있다는 건 아니겠지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일도 없구요.

홍정수 목사님은 "영성"을 그냥 "신앙심"으로 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시더군요. 저는 잘 모르지만, 그분 왈, 한국에서 "영성"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이 길게 봐야 몇십년 안 될 거라면서요. 그리고, "영성"이란 말 사용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네요.
물론, 요즘은 "영성"이란 말을 안 쓰고는 곤란할 때가 많겠지요.

"영성"이란 말을 꼭 써야 한다! "신앙심"이란 말도 별 문제 없다!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슨 차이(differences)를 만드느냐지만..
"정통"기독교로 그냥 가도 될 사람들도 있고["신앙심"으로 가도 된다!], "개혁"기독교로 갈 사람들도 있겠지요["영성"으로 바꿔야 한다!]. 핵심은 문제많은 "현실기독교"를 어떻게 하느냐?"일 터인데, 그건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없으니, 조금씩 달라도 가능하면 함께 가야겠지요.

건강들 하이소!

미선이

2006.11.02 05:47:14
*.47.21.101

이젠 애초의 나우웬의 차원을 넘어선 논의들이라 생각되어 새글(774번글)로서 정목사님께 답변 올렸습니다.. 참고로 논의의 효과적 집약을 위해 이제부터는 정 목사님의 글에만 답변하고자 하는 점을 이해바라며, 이에 대한 논의들을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