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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유익 (장봉운 목사님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었는데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면 그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거름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옆 밭에도 같은 비료와 거름을 뿌렸는데 풍성한 소득을 얻었습니다. 거름의 효과를 본 것이지요. 그러나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밭에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 아무리 좋은 거름을 뿌렸다고 해도 소용이 없듯이 영의 일에도 마찬가지 경우가 있는데 방언이 그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별로 유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방언에 대한 이해가 교회 안에서 아직 정확하게 가르쳐지고 있지 못하는 것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아직 활발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름은 아무 쓸모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방언은 각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윤활유와 같고 한약에서 감초와 같습니다. 방언 없이 능력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영이 강건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비밀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방언은 필수입니다. 이런 방언을 우리는 언어로 기도할 것이 없을 때 더 많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또는 기도할 내용이 없을 때 하는 보조적인 기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방언기도는 필수입니다. 영이 강건해진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지혜가 생기고 믿음이 생겨 시험이나 고난이 올 때 말씀으로 극복하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영적 힘을 의미합니다. 이 힘은 우리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힘이 생겨 영이 강건해지면 영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힘이 있어야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직무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우리 영안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축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육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기도가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수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체력을 단련해도 경기를 치러보지 않으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알 수 없듯이 방언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적인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이 얼마나 강건해졌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시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우선 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의 신호를 자신의 지각이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신호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 집회에서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밖에서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면 누구나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환상이 보인다면 계시가 임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예외적으로 역사하신 것이기 때문에 영이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놓치지 않고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며 보편적으로 일상에서는 우리 영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 지성과 감성에 전달해 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 전달 신호가 미약하면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마치 위성방송이 신호를 보내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신호가 미약해서 수상기가 제대로 영상으로 띄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더 큰 안테나를 세워야 하듯이 우리 영이 강하지 못하면 성령의 신호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방언기도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묵상기도와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기도가 관상기도(이미지를 그리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은 성장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따라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자라납니다. 그 가운데 방언기도는 매우 쉬운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이 기도하며, 천사가 기도하며, 성령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계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방언기도는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같은 방언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방언기도는 자신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로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정결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밖의 내용들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의 영이 하는 기도이므로 우리의 뜻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한계 가운데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별다른 느낌을 얻지 못하며, 마치 매일 하는 육성기도처럼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습관적이며 늘 같은 톤의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또는 성령께서 하시는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 기도는 분위기조차 다르고 방언의 음색이나 단어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영, 천사의 영, 성령, 그리고 심지어는 악령까지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 주체에 따라서 영적 분위기가 다르며 영이 주도하는 내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든 방언은 통역되는 것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통역이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통역을 위한 방언이 따로 있는데 이는 회중이 모인 집회에서 주어지는 통역을 위한 방언 즉 예언적 계시를 담은 방언은 예언의 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예언의 영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주로 천사의 음성인데 ‘대언의 영’인 천사가 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과 귀신을 쫓기 위한 방언 역시 다릅니다. 이런 방언은 그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일상적으로 개인기도 때 하는 방언과 다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은 지식의 말씀을 얻는 수단으로 주어지며, 통역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성경말씀이 떠오르거나(illumined scriptures), 병든 곳에 대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귀신을 쫓는 방언은 강력한 권능이 담긴 명령이며, 방언을 듣는 순간 귀신들린 사람은 힘을 쓰지 못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나뒹굴기도 합니다. 방언은 주어진 은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사역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특수한 방언들이 있는데 이는 평소에는 전혀 할 수 없는 방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방언은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그리고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별 유익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기도하는 무지함이 있지 않은가?
기도할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이나 목적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그 기도는 생명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라세인의 기도인데 이런 기도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고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방언으로 몇 마디 기도하고 시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경우에 깊은 기도로 들어갈 시간이 없으며, 기도주체가 바뀔 여유도 없습니다. 기도형태는 방언이지만 여전히 육에 속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방언을 기도의 보조수단이라고 여기는가?
방언기도는 육성기도를 돕는 수단정도로 생각하고 편하게 기도하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별로 할 말이 없을 때 기도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세는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말로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런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방언기도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수단으로 아는가?
방언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이므로 이 은사를 통해서 환상을 보고 신비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방언통역이 되지 않으면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통역을 못하니까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혼자 하는 방언은 스스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기를 구해야 하며, 이 통역 역시 술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부분적으로 미약하고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대부분 자신을 바로잡고 세우는 것이 가장 많습니다. 예배에서 일어나는 통역은 통역을 위한 방언으로 개인 방언과는 다릅니다.
넷째, 영적 지식을 거의 모르는 유아수준인가.
영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으며, 그저 줏어들어 지식만으로 무작정 남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니까 자신도 그냥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저 단순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유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의 일은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이 필요하며 지식이 없으면 깨닫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영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다음 단계의 태도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은 자라나야 하고 상승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 상태로 굳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섯째, 방언기도는 다 같은 것인 줄 아는가.
방언기도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그 주체도 다르며, 따라서 목적도 다른데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다 같은 방언인줄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목적으로 구분하면 1.자신의 유익을 위한 개인 방언, 2.표적을 위한 방언, 3.능력을 행하기 위한 방언, 4.통역을 위한 방언 등이 있으며; 주체로 구분하면 1.자기 영의 방언, 2.천사의 방언, 3.성령의 방언, 4.악령의 방언 등이 있습니다. 이런 방언의 다양한 구분으로 인해서 성경은 ‘각종 방언’이라는 말씀으로 그 차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언이 단 하나로 같다고 생각하면 다양한 방언에서 오는 다양한 기능과 유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섯째, 방언을 은사로만 알고 있는가.
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른 은사를 돕는 보조기능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능력을 행할 수도 없고 다 기적을 행할 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이 방언의 은사도 없습니다.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 교사, 기적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돕는 자, 관리하는 자, 여러 가지 방언 말하는 자 등과 같은 직무와 연관되어 각 사람이 고유한 직임에 의해서 그 직무를 감당하듯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방언 역시 그러함을 지적합니다.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여기서 은사로 보기 보다는 직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위해서 각종 방언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다양한 직무를 다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방언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은사가 아닌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방언은 누구나 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을 돕는 은사는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지지만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은사로서 돕는 것과 성도로서 돕는 것과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잠시 설명한적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막연하게 알고 유익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착각했던 방언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은사를 개발하는 일에 너무도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의 일은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배들이 있고 신학교에서 그 절차와 과정들을 배우고 다른 목회자들과 수시로 정보를 교류하기 때문에 능히 행할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일들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육적입니다. 학문적 배경과 노력으로 잘 감당할 수 있지요. 이런 수준은 벗어나지 못한 목회자는 육체의 일 이상은 할 수 없으며, 그런 목회는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영적 민감성이 탁월하지 않고는 결코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흉내 내서 될 일도 아니며,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성경을 열심히 상고한다고 되는 일은 더욱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을 열심히 상고했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특별히 단회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특별한 영적 민감성은 개발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하나님이 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므로 민감성을 지닌 사람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능들을 사용하시게 하는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경우(사도와 선지자)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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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
1.세가지 구분
1)성령에 의한 방언
이는 복음전파를 위해 전도자로 하여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 민족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은사로서 외국어 방언의 은사이다. 이는 신앙적, 영적 성숙이나 능력의 외적인 징표로 주어지는 은사라고 볼 수 없고 오직 복음 전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며 어떤 교리적 징표로 다루어질 성질의 은사가 아니다. 이 은사는 본인의 의지나 욕망으로 자유자재 되풀이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은사는 초대교회 이래 흔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은사이다.
이 은사가 있다는 것이 선교사로 하여금 외국어 습득과 연구에 게을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사단에 의한 방언
인류학자, 역사고고학자, 언어학자 등의 전문가에 따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교도들, 신비주의 밀교주의자들이 약물에 의해 흥분된 상태에서나 또는 우상신, 조상신의 심령술에 대한 예배의식에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는 방언현상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현대에도 모슬렘,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예배의식의 한 부분으로 방언 현상이 있다.
3)심령술에 의한 방언(사단에 의해 간접적 방언)
영·혼·육으로 창조된 인간은 애초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그의 영은 죽게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가면서 사단은 인간의 혼(soul)을 계발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쳤으니 이것이 심령과학에 속하는 것들이다.
레위기 19장 26절에는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와 함께 먹지 말라. 너희는 마법을 사용하지 말며 때를 살피지 말라” 고 성경은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이미 바벨탑 사건 이래 세계적으로 점술, 점성술, 무당굿 등이 있어 왔다. 바벨탑 사건에 관계되는 니므롯 등이 이러한 사단에 의한 심령술을 계발한 것으로 측정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계발한 심령술로 초능력을 행하거나 사람을 미혹하였다.
2.성령 안에서의 기도(엡 6:18, 유 1:20)
1)마가복음 16장 9-20절
이 부분은 은사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방언과 병자에 대한 안수기도의 정당성을 보이는 구절들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 17절의 “새 방언들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각 민족의 방언들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임을 뜻한다.
이 구절에 쓰인 '방언'에 해당하는 희랍어 성경의 원어는 ‘글로싸(γλώσσα, glossa)’인데 그 뜻은 전세계에서 쓰이는 민족의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서 글로싸는 1개 이상의 언어를 가리키는 복수명사이다. 따라서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기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2)사도행전 2:1-4
사도행전 1:15에 120명의 성도가 있었다. 사도행전 1:15과 2:1에 등장하는 사람은 120문도들이다. 사도들만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사도행전 2장 4-11절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은 유태인 교회의 탄생을 뜻하며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교회의 탄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 쓰인(행 2:8-11, 10:46) 방언은 희랍어로 디알렉토스(διάλεχτος)이다. 이는 역시 전 세계의 쓰이는 민족의 언어를 가리키며 영어 성경에서는 tongues로 번역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미워하는 적대 관계였으나 위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됨을 보여준다.
오순절 사건에서의 120명의 성도들이 방언을 말함은 특수한 사건이다. 그들은 타지방의 언어로 말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방언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12-15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유형의 방언이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6에서는 성령이 충만히 내려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게 되었으며, 성령으로 인하여 그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우리 영의 기도이다(고전 14:2).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고전 14:14), ‘내 영으로 기도’(고전 14:15), ‘영으로 기도’(엡 6:18), ‘성령 안에서 기도’(유 1:20)
4)사도행전 2:4-12
120문도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시 40:5, 66:3). 이는 방언이 주어진 기본적인 목적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님께 아뢴 것이다(성령 안에서의 기도). 그들은 방언으로 복음을 나눈 것은 아니다. 방언은 하나님에게 찬미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 것이다.
기도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를 들면 회개의 기도, 봉헌기도, 감사기도, 찬양기도 등이다.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찬미의 기도를 한 것이다. 방언의 목적은 외국인에게 자국어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구절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120문도가 모였을 때 그곳에 함께 모여온 사람들은 모두 외국에서 출생하여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 외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실질적 모국인 유대 말 뿐만 아니라 출생한 나라의 말을 모국어로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굳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외국어로 말할 이유가 없다.
5)사도행전 2:12-15
베드로가 군중들 가운데 서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유대 말 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군중들은 모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베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적을 보였다고 가정하지만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다.
6)사도행전 10:44-46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성령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이방인의 집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방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7)사도행전 19:1-7
사도 바울이 이들 12명에게 안수할 때, 그들 모두가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이들 12명이 방언으로 외국인에게 증거하였다는 시사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에 대한 결론
이상에서 본 세 가지 방언 사건(오순절 방언, 고넬료의 집에서의 방언, 에베소에서의 새 결신자)은 신약 성경 안에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예의 전부이다. 다른 부분에서 방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사건적인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언급한 구절에서 볼 때 새로운 신자들은 모두 방언을 말했다는 사실이다.
앞의 두 가지 예에서 방언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예는 새로운 결신자들이 방언을 말하고 예언도 하였다. 그들은 방언으로 예언을 하였다고 본다. 물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외국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이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하나니”(고전 14:2)라고 한 말을 세겨 보아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방언
신약 성경은 두 가지 형태의 방언 말함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1)방언으로 예언을 전하는 경우 자신이나 회중의 누군가가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통역의 은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2)성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모두 통역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1
천사의 말은 인간의 말과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실제로 삼층천에 올라가서 천사들이 하는 말을 직접 들은 유일한 사람이다. 따라서 방언이 천사의 말과 흡사함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할 때 때로는 사람의 말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의 말을 이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음성(방언)을 이용하기도 한다.
고전13:8-10
사도 바울은 천사의 말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사람의 언어와는 다르다. 그는 직접 그 말을 경험한 사람이다(고후 12:1-7).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천사의 말을 사용하실지 사람의 말을 사용하실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언급함에 있어서 예언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방언 등은 방언의 공적인 형태임을 언급하고 있다. 방언의 개인적 형태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며, 공적 형태는 방언의 은사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고린도 교인들은 개인적 형태의 방언을 공개적인 형태로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점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교회 안에서 예배 때에 일어나 방언을 말하는 경우가 있었고 회중은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회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방언을 말할 때 통역이 되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은 자리에 앉아 개별적으로 성령 안에서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3
사도 바울은 방언장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계속되는 내용을 통하여 예언의 유익과 방언의 교회에서 사용함에 있어서 무익함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정의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형태이다. 방언기도는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성경의 번역은 다양하다.
he utters mysteries by the Spirit (New International Version, footnote)
and in spirit he doth speak secrets (Young's Literal Translation)
but in spirit he speaks mysteries (Pocket Interlinear New Testament)
but in his spirit he speaks mysteries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ing James Version)
bu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1901 American Standard Version)
because he is speaking secrets in the Spirit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Yet in the Spirit he is speaking secret truths (Wesley's New Testament)
but he utters mysteries in the Spirit (Revised Standard Version)
in the (Holy) Spirit he utters secret truths and hidden things [not obvious to the understanding] (Amplified Version)
이러한 다양한 번역으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spirit에서 대소문자의 표현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아닌 우리의 영에게 주신다.
고린도전서 14:4
덕을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는 오이코도메오(οικοδομέω, oikodomeo)이다. 이 말은 ‘믿음을 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다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세우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유 1:20). 유다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우리를 세우고 유익케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방언기도가 우리를 세우고 유익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5
모든 사람이 다 방언 말하기를 바울은 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유익케 하기 때문이다. 방언이 통역이 되면 그것은 곧 예언이 되며, 이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예언의 은사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4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다’ ‘내 영으로 기도하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다’라는 말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성령은 말씀을 우리의 영에 계시하신다. 이 말씀이 통역되어지면 방언의 기도가 자신의 말이 아닌 성령의 말씀하심을 알게 된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것과 영으로 하는 것이 있다.
고린도전서 14:15
이 본문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Then what am I to do? I will pray with my spirit - by the Holy Spirit that is within me; but I will also pray intelligently - with my mind and understanding” (1 Corinthians 14:15, AMP)
바울은 그도 때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때로는 자신의 의식으로 기도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영으로 노래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노래한다고 한다(엡 5:19, 골 3:16).
고린도전서 14:18-19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됨을 감사한다. 그는 교회 밖에서 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됨을 감사했다. 교회 내에서 일어서서 방언을 말하면 자동적으로 통역이 된다는 어떤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방언은 매우 신중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4:21-25
바울은 이사야 28:11-12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해석되지 않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해석되지 못했을 때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예고하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방언이 다른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 근거해서 해석되지 않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표적으로 해석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가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이 이상한 소리로 방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심판이 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며 이런 까닭에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출석해 있을 경우 예언이 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4:26-29
오늘날 이 말씀이 적용되는 집회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집회에서 이와 같이 진행되는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여러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순서에 따라서 예언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분변함으로써 성령의 유익케 하심이 집회를 통하여 교회에 주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성령이 교회에 직접 관여하였다.
방언 기도는 몇 가지 유익을 준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고전 14:2)
-자기의 신앙적 덕을 세움(고전 14:4)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됨(고전 14:22)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므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함(고전 12:11)
방언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방언은 통역하지 않고는 본인은 물론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고전 14:4)
-통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전 14:5)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12:4-11, 27-31, 13:1)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27, 40)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하나님께만 하도록 하고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필요할 때는 절제하여야 한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었는데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면 그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거름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옆 밭에도 같은 비료와 거름을 뿌렸는데 풍성한 소득을 얻었습니다. 거름의 효과를 본 것이지요. 그러나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밭에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 아무리 좋은 거름을 뿌렸다고 해도 소용이 없듯이 영의 일에도 마찬가지 경우가 있는데 방언이 그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별로 유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방언에 대한 이해가 교회 안에서 아직 정확하게 가르쳐지고 있지 못하는 것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아직 활발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름은 아무 쓸모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방언은 각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윤활유와 같고 한약에서 감초와 같습니다. 방언 없이 능력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영이 강건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비밀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방언은 필수입니다. 이런 방언을 우리는 언어로 기도할 것이 없을 때 더 많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또는 기도할 내용이 없을 때 하는 보조적인 기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방언기도는 필수입니다. 영이 강건해진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지혜가 생기고 믿음이 생겨 시험이나 고난이 올 때 말씀으로 극복하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영적 힘을 의미합니다. 이 힘은 우리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힘이 생겨 영이 강건해지면 영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힘이 있어야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직무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우리 영안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축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육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기도가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수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체력을 단련해도 경기를 치러보지 않으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알 수 없듯이 방언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적인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이 얼마나 강건해졌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시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우선 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의 신호를 자신의 지각이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신호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 집회에서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밖에서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면 누구나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환상이 보인다면 계시가 임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예외적으로 역사하신 것이기 때문에 영이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놓치지 않고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며 보편적으로 일상에서는 우리 영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 지성과 감성에 전달해 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 전달 신호가 미약하면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마치 위성방송이 신호를 보내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신호가 미약해서 수상기가 제대로 영상으로 띄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더 큰 안테나를 세워야 하듯이 우리 영이 강하지 못하면 성령의 신호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방언기도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묵상기도와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기도가 관상기도(이미지를 그리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은 성장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따라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자라납니다. 그 가운데 방언기도는 매우 쉬운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이 기도하며, 천사가 기도하며, 성령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계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방언기도는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같은 방언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방언기도는 자신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로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정결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밖의 내용들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의 영이 하는 기도이므로 우리의 뜻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한계 가운데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별다른 느낌을 얻지 못하며, 마치 매일 하는 육성기도처럼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습관적이며 늘 같은 톤의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또는 성령께서 하시는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 기도는 분위기조차 다르고 방언의 음색이나 단어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영, 천사의 영, 성령, 그리고 심지어는 악령까지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 주체에 따라서 영적 분위기가 다르며 영이 주도하는 내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든 방언은 통역되는 것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통역이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통역을 위한 방언이 따로 있는데 이는 회중이 모인 집회에서 주어지는 통역을 위한 방언 즉 예언적 계시를 담은 방언은 예언의 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예언의 영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주로 천사의 음성인데 ‘대언의 영’인 천사가 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과 귀신을 쫓기 위한 방언 역시 다릅니다. 이런 방언은 그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일상적으로 개인기도 때 하는 방언과 다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은 지식의 말씀을 얻는 수단으로 주어지며, 통역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성경말씀이 떠오르거나(illumined scriptures), 병든 곳에 대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귀신을 쫓는 방언은 강력한 권능이 담긴 명령이며, 방언을 듣는 순간 귀신들린 사람은 힘을 쓰지 못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나뒹굴기도 합니다. 방언은 주어진 은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사역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특수한 방언들이 있는데 이는 평소에는 전혀 할 수 없는 방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방언은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그리고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별 유익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기도하는 무지함이 있지 않은가?
기도할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이나 목적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그 기도는 생명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라세인의 기도인데 이런 기도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고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방언으로 몇 마디 기도하고 시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경우에 깊은 기도로 들어갈 시간이 없으며, 기도주체가 바뀔 여유도 없습니다. 기도형태는 방언이지만 여전히 육에 속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방언을 기도의 보조수단이라고 여기는가?
방언기도는 육성기도를 돕는 수단정도로 생각하고 편하게 기도하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별로 할 말이 없을 때 기도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세는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말로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런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방언기도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수단으로 아는가?
방언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이므로 이 은사를 통해서 환상을 보고 신비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방언통역이 되지 않으면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통역을 못하니까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혼자 하는 방언은 스스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기를 구해야 하며, 이 통역 역시 술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부분적으로 미약하고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대부분 자신을 바로잡고 세우는 것이 가장 많습니다. 예배에서 일어나는 통역은 통역을 위한 방언으로 개인 방언과는 다릅니다.
넷째, 영적 지식을 거의 모르는 유아수준인가.
영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으며, 그저 줏어들어 지식만으로 무작정 남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니까 자신도 그냥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저 단순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유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의 일은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이 필요하며 지식이 없으면 깨닫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영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다음 단계의 태도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은 자라나야 하고 상승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 상태로 굳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섯째, 방언기도는 다 같은 것인 줄 아는가.
방언기도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그 주체도 다르며, 따라서 목적도 다른데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다 같은 방언인줄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목적으로 구분하면 1.자신의 유익을 위한 개인 방언, 2.표적을 위한 방언, 3.능력을 행하기 위한 방언, 4.통역을 위한 방언 등이 있으며; 주체로 구분하면 1.자기 영의 방언, 2.천사의 방언, 3.성령의 방언, 4.악령의 방언 등이 있습니다. 이런 방언의 다양한 구분으로 인해서 성경은 ‘각종 방언’이라는 말씀으로 그 차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언이 단 하나로 같다고 생각하면 다양한 방언에서 오는 다양한 기능과 유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섯째, 방언을 은사로만 알고 있는가.
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른 은사를 돕는 보조기능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능력을 행할 수도 없고 다 기적을 행할 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이 방언의 은사도 없습니다.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 교사, 기적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돕는 자, 관리하는 자, 여러 가지 방언 말하는 자 등과 같은 직무와 연관되어 각 사람이 고유한 직임에 의해서 그 직무를 감당하듯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방언 역시 그러함을 지적합니다.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여기서 은사로 보기 보다는 직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위해서 각종 방언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다양한 직무를 다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방언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은사가 아닌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방언은 누구나 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을 돕는 은사는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지지만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은사로서 돕는 것과 성도로서 돕는 것과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잠시 설명한적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막연하게 알고 유익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착각했던 방언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은사를 개발하는 일에 너무도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의 일은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배들이 있고 신학교에서 그 절차와 과정들을 배우고 다른 목회자들과 수시로 정보를 교류하기 때문에 능히 행할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일들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육적입니다. 학문적 배경과 노력으로 잘 감당할 수 있지요. 이런 수준은 벗어나지 못한 목회자는 육체의 일 이상은 할 수 없으며, 그런 목회는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영적 민감성이 탁월하지 않고는 결코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흉내 내서 될 일도 아니며,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성경을 열심히 상고한다고 되는 일은 더욱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을 열심히 상고했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특별히 단회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특별한 영적 민감성은 개발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하나님이 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므로 민감성을 지닌 사람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능들을 사용하시게 하는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경우(사도와 선지자)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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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
1.세가지 구분
1)성령에 의한 방언
이는 복음전파를 위해 전도자로 하여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 민족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은사로서 외국어 방언의 은사이다. 이는 신앙적, 영적 성숙이나 능력의 외적인 징표로 주어지는 은사라고 볼 수 없고 오직 복음 전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며 어떤 교리적 징표로 다루어질 성질의 은사가 아니다. 이 은사는 본인의 의지나 욕망으로 자유자재 되풀이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은사는 초대교회 이래 흔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은사이다.
이 은사가 있다는 것이 선교사로 하여금 외국어 습득과 연구에 게을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사단에 의한 방언
인류학자, 역사고고학자, 언어학자 등의 전문가에 따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교도들, 신비주의 밀교주의자들이 약물에 의해 흥분된 상태에서나 또는 우상신, 조상신의 심령술에 대한 예배의식에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는 방언현상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현대에도 모슬렘,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예배의식의 한 부분으로 방언 현상이 있다.
3)심령술에 의한 방언(사단에 의해 간접적 방언)
영·혼·육으로 창조된 인간은 애초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그의 영은 죽게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가면서 사단은 인간의 혼(soul)을 계발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쳤으니 이것이 심령과학에 속하는 것들이다.
레위기 19장 26절에는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와 함께 먹지 말라. 너희는 마법을 사용하지 말며 때를 살피지 말라” 고 성경은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이미 바벨탑 사건 이래 세계적으로 점술, 점성술, 무당굿 등이 있어 왔다. 바벨탑 사건에 관계되는 니므롯 등이 이러한 사단에 의한 심령술을 계발한 것으로 측정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계발한 심령술로 초능력을 행하거나 사람을 미혹하였다.
2.성령 안에서의 기도(엡 6:18, 유 1:20)
1)마가복음 16장 9-20절
이 부분은 은사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방언과 병자에 대한 안수기도의 정당성을 보이는 구절들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 17절의 “새 방언들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각 민족의 방언들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임을 뜻한다.
이 구절에 쓰인 '방언'에 해당하는 희랍어 성경의 원어는 ‘글로싸(γλώσσα, glossa)’인데 그 뜻은 전세계에서 쓰이는 민족의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서 글로싸는 1개 이상의 언어를 가리키는 복수명사이다. 따라서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기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2)사도행전 2:1-4
사도행전 1:15에 120명의 성도가 있었다. 사도행전 1:15과 2:1에 등장하는 사람은 120문도들이다. 사도들만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사도행전 2장 4-11절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은 유태인 교회의 탄생을 뜻하며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교회의 탄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 쓰인(행 2:8-11, 10:46) 방언은 희랍어로 디알렉토스(διάλεχτος)이다. 이는 역시 전 세계의 쓰이는 민족의 언어를 가리키며 영어 성경에서는 tongues로 번역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미워하는 적대 관계였으나 위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됨을 보여준다.
오순절 사건에서의 120명의 성도들이 방언을 말함은 특수한 사건이다. 그들은 타지방의 언어로 말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방언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12-15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유형의 방언이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6에서는 성령이 충만히 내려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게 되었으며, 성령으로 인하여 그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우리 영의 기도이다(고전 14:2).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고전 14:14), ‘내 영으로 기도’(고전 14:15), ‘영으로 기도’(엡 6:18), ‘성령 안에서 기도’(유 1:20)
4)사도행전 2:4-12
120문도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시 40:5, 66:3). 이는 방언이 주어진 기본적인 목적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님께 아뢴 것이다(성령 안에서의 기도). 그들은 방언으로 복음을 나눈 것은 아니다. 방언은 하나님에게 찬미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 것이다.
기도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를 들면 회개의 기도, 봉헌기도, 감사기도, 찬양기도 등이다.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찬미의 기도를 한 것이다. 방언의 목적은 외국인에게 자국어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구절이 없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120문도가 모였을 때 그곳에 함께 모여온 사람들은 모두 외국에서 출생하여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 외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실질적 모국인 유대 말 뿐만 아니라 출생한 나라의 말을 모국어로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굳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외국어로 말할 이유가 없다.
5)사도행전 2:12-15
베드로가 군중들 가운데 서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유대 말 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군중들은 모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베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적을 보였다고 가정하지만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다.
6)사도행전 10:44-46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성령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이방인의 집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방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7)사도행전 19:1-7
사도 바울이 이들 12명에게 안수할 때, 그들 모두가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이들 12명이 방언으로 외국인에게 증거하였다는 시사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에 대한 결론
이상에서 본 세 가지 방언 사건(오순절 방언, 고넬료의 집에서의 방언, 에베소에서의 새 결신자)은 신약 성경 안에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예의 전부이다. 다른 부분에서 방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사건적인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언급한 구절에서 볼 때 새로운 신자들은 모두 방언을 말했다는 사실이다.
앞의 두 가지 예에서 방언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예는 새로운 결신자들이 방언을 말하고 예언도 하였다. 그들은 방언으로 예언을 하였다고 본다. 물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외국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이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하나니”(고전 14:2)라고 한 말을 세겨 보아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방언
신약 성경은 두 가지 형태의 방언 말함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1)방언으로 예언을 전하는 경우 자신이나 회중의 누군가가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통역의 은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2)성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모두 통역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1
천사의 말은 인간의 말과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실제로 삼층천에 올라가서 천사들이 하는 말을 직접 들은 유일한 사람이다. 따라서 방언이 천사의 말과 흡사함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할 때 때로는 사람의 말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의 말을 이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음성(방언)을 이용하기도 한다.
고전13:8-10
사도 바울은 천사의 말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사람의 언어와는 다르다. 그는 직접 그 말을 경험한 사람이다(고후 12:1-7).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천사의 말을 사용하실지 사람의 말을 사용하실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언급함에 있어서 예언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방언 등은 방언의 공적인 형태임을 언급하고 있다. 방언의 개인적 형태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며, 공적 형태는 방언의 은사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고린도 교인들은 개인적 형태의 방언을 공개적인 형태로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점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교회 안에서 예배 때에 일어나 방언을 말하는 경우가 있었고 회중은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회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방언을 말할 때 통역이 되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은 자리에 앉아 개별적으로 성령 안에서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3
사도 바울은 방언장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계속되는 내용을 통하여 예언의 유익과 방언의 교회에서 사용함에 있어서 무익함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정의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형태이다. 방언기도는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성경의 번역은 다양하다.
he utters mysteries by the Spirit (New International Version, footnote)
and in spirit he doth speak secrets (Young's Literal Translation)
but in spirit he speaks mysteries (Pocket Interlinear New Testament)
but in his spirit he speaks mysteries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ing James Version)
bu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1901 American Standard Version)
because he is speaking secrets in the Spirit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Yet in the Spirit he is speaking secret truths (Wesley's New Testament)
but he utters mysteries in the Spirit (Revised Standard Version)
in the (Holy) Spirit he utters secret truths and hidden things [not obvious to the understanding] (Amplified Version)
이러한 다양한 번역으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spirit에서 대소문자의 표현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아닌 우리의 영에게 주신다.
고린도전서 14:4
덕을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는 오이코도메오(οικοδομέω, oikodomeo)이다. 이 말은 ‘믿음을 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다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세우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유 1:20). 유다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우리를 세우고 유익케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방언기도가 우리를 세우고 유익케 한다고 말함으로써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5
모든 사람이 다 방언 말하기를 바울은 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유익케 하기 때문이다. 방언이 통역이 되면 그것은 곧 예언이 되며, 이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예언의 은사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4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다’ ‘내 영으로 기도하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다’라는 말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성령은 말씀을 우리의 영에 계시하신다. 이 말씀이 통역되어지면 방언의 기도가 자신의 말이 아닌 성령의 말씀하심을 알게 된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것과 영으로 하는 것이 있다.
고린도전서 14:15
이 본문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Then what am I to do? I will pray with my spirit - by the Holy Spirit that is within me; but I will also pray intelligently - with my mind and understanding” (1 Corinthians 14:15, AMP)
바울은 그도 때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때로는 자신의 의식으로 기도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영으로 노래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노래한다고 한다(엡 5:19, 골 3:16).
고린도전서 14:18-19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됨을 감사한다. 그는 교회 밖에서 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됨을 감사했다. 교회 내에서 일어서서 방언을 말하면 자동적으로 통역이 된다는 어떤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방언은 매우 신중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4:21-25
바울은 이사야 28:11-12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해석되지 않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해석되지 못했을 때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예고하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방언이 다른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 근거해서 해석되지 않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표적으로 해석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가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이 이상한 소리로 방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심판이 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며 이런 까닭에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출석해 있을 경우 예언이 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4:26-29
오늘날 이 말씀이 적용되는 집회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집회에서 이와 같이 진행되는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여러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순서에 따라서 예언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분변함으로써 성령의 유익케 하심이 집회를 통하여 교회에 주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성령이 교회에 직접 관여하였다.
방언 기도는 몇 가지 유익을 준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고전 14:2)
-자기의 신앙적 덕을 세움(고전 14:4)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됨(고전 14:22)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므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함(고전 12:11)
방언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방언은 통역하지 않고는 본인은 물론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고전 14:4)
-통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전 14:5)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12:4-11, 27-31, 13:1)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27, 40)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하나님께만 하도록 하고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필요할 때는 절제하여야 한다.
기도가 굳이 방언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영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있지요.
성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그런 경우겠지요.
방언을 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동족을 위한 기도,
남북분단현실 앞에서 아픈 맘으로 드리는 기도,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로 망가지는 생태계를 걱정하며 드리는 기도,
기지촌 여성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기도,
등등 이런 기도는 영적인 기도가 아닌가요?
만일 방언을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방언은사를 주셨을겁니다.
현아님은 보통으로 기도하는 걸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셨네요.
그 말은 영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성으로는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성으로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없을까요?
노골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위의 글을 읽어보면 방언으로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한것 같아서요
영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있지요.
성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그런 경우겠지요.
방언을 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동족을 위한 기도,
남북분단현실 앞에서 아픈 맘으로 드리는 기도,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로 망가지는 생태계를 걱정하며 드리는 기도,
기지촌 여성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기도,
등등 이런 기도는 영적인 기도가 아닌가요?
만일 방언을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방언은사를 주셨을겁니다.
현아님은 보통으로 기도하는 걸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셨네요.
그 말은 영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성으로는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성으로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없을까요?
노골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위의 글을 읽어보면 방언으로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한것 같아서요
조현아
똑소리님이 지적하신 그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반인들도 그들의 양심이나 지각으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지향해야 할만한..... 일반적이고 두리뭉실한 기도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구체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제가 일반적으로 그냥 인간의 생각으로 하게 되는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요, 인간의 이성에서 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방언기도가 영으로 드리는 기도' 라고 증거한 것은
성경이요, 사도바울입니다.
저의 견해보다는 성경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반인들도 그들의 양심이나 지각으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지향해야 할만한..... 일반적이고 두리뭉실한 기도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구체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제가 일반적으로 그냥 인간의 생각으로 하게 되는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요, 인간의 이성에서 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방언기도가 영으로 드리는 기도' 라고 증거한 것은
성경이요, 사도바울입니다.
저의 견해보다는 성경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조현아 님,
또 방언 타령을 하셨군요.
미안합니다.
타령이라고 표현해서요.
이미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성격을 아실텐데도
꾸준히 방언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그것도 별로 신학적인, 영적인 근거도 없이 하시니까
좀 심하게 표현한 겁니다.
나도 방언에 대해서 완전히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종교현상적 신비에 대해서는 모두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전(?)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군요.
위에서 퍼 날은 장봉운 목사님의 글은
평신도 성서읽기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군요.
조현아 님은 말할 때마다 영, 영적인 것이라고 거론하는데,
도대체 영적인 게 무얼까요?
성서가 말하는 영이 어떤 생명의 지평들을 담고 있는지 아니나요?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킬까요?
제가 지금 신학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조현아 님이 말하는 영이라는 건 실체가 없어요.
리얼리티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또 긴 논쟁으로 들어가겠군요.
도대체 지금 방언을 신앙의 귀중한 담론으로 삼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일만마디 방언보다 한마디 설교가 훨씬 귀중하다는 사실을 아시죠?
저는 조현아 님의 이런 태도가
안티기독교인들과 닮은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기독교의 현상적인 부분을 침소봉대해서 비난하는 그들 말입니다.
지금 조현아 님은 원시 기독교에서,
주로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고 누가가 오랜 세월이 흐른다음에 회상하고 있는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
신비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러나 별로 교회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방언을
대단한 신앙의 리얼리티인 것처럼 접근하고,
그뿐만 아니라 강요하고 있군요.
저는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다르게 생각하면
치근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현아 님은 약간 다른 취향이시네요.
오늘 제가 이 글에 대해서 대글을 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냥 본인이 좋다 하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다비안들을 위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근본을 바르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위의 글을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아니 오히려 유해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이 우주의 역사에서
왜 구원의 선취인가에 대해서
성서와 2천년 교회 역사인 신학,
그리고 인문학적 토대에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공부하는 것도 시간이 모자라는 이 순간에
방언이라니요.
그것도 매우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방언에 대한 간증이라니요.
조금 우습지 않나요?
방언을 하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그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개인의 영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기도 방법론,
방언은 더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걸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인 가치인 것처럼 말하다니요.
내가 조금더 늙어서 신앙적인 철이 나서
방언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 지금의 내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조현아 씨만 혼자서 방언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서가 없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조현아 님의 신앙이 전반적으로 합리적이고 신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통찰력도 있구요.
글솜씨도 뛰어납니다.
조현아 씨의 모든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만 기독교가 역사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군요.
좋은 한 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또 방언 타령을 하셨군요.
미안합니다.
타령이라고 표현해서요.
이미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성격을 아실텐데도
꾸준히 방언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그것도 별로 신학적인, 영적인 근거도 없이 하시니까
좀 심하게 표현한 겁니다.
나도 방언에 대해서 완전히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종교현상적 신비에 대해서는 모두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전(?)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군요.
위에서 퍼 날은 장봉운 목사님의 글은
평신도 성서읽기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군요.
조현아 님은 말할 때마다 영, 영적인 것이라고 거론하는데,
도대체 영적인 게 무얼까요?
성서가 말하는 영이 어떤 생명의 지평들을 담고 있는지 아니나요?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킬까요?
제가 지금 신학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조현아 님이 말하는 영이라는 건 실체가 없어요.
리얼리티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또 긴 논쟁으로 들어가겠군요.
도대체 지금 방언을 신앙의 귀중한 담론으로 삼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일만마디 방언보다 한마디 설교가 훨씬 귀중하다는 사실을 아시죠?
저는 조현아 님의 이런 태도가
안티기독교인들과 닮은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기독교의 현상적인 부분을 침소봉대해서 비난하는 그들 말입니다.
지금 조현아 님은 원시 기독교에서,
주로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고 누가가 오랜 세월이 흐른다음에 회상하고 있는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
신비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러나 별로 교회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방언을
대단한 신앙의 리얼리티인 것처럼 접근하고,
그뿐만 아니라 강요하고 있군요.
저는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다르게 생각하면
치근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현아 님은 약간 다른 취향이시네요.
오늘 제가 이 글에 대해서 대글을 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냥 본인이 좋다 하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다비안들을 위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근본을 바르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위의 글을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아니 오히려 유해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이 우주의 역사에서
왜 구원의 선취인가에 대해서
성서와 2천년 교회 역사인 신학,
그리고 인문학적 토대에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공부하는 것도 시간이 모자라는 이 순간에
방언이라니요.
그것도 매우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방언에 대한 간증이라니요.
조금 우습지 않나요?
방언을 하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그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개인의 영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기도 방법론,
방언은 더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걸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인 가치인 것처럼 말하다니요.
내가 조금더 늙어서 신앙적인 철이 나서
방언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 지금의 내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조현아 씨만 혼자서 방언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서가 없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조현아 님의 신앙이 전반적으로 합리적이고 신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통찰력도 있구요.
글솜씨도 뛰어납니다.
조현아 씨의 모든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만 기독교가 역사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군요.
좋은 한 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조현아
정용섭 목사님께서
스스로가 배운 지식을 옳다하기 위하여...
성경의 기록마저 부인하는 비극이 없었으면 합니다.
(예리한 지적, 올곧은 소리도 많으셨지만...성경적 믿음을 무너뜨리는 부분도 많아서
제 능력의 한계로써는 일일이 다 짚고 넘어가기도 버겁습니다.
정말 비평을 하자면 지금까지 설교비평하신 것 이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자, 귀 있는 자만 듣겠죠.
방언에 대해서는 각자 신앙 양심에 그 판단을 맡기고
이제 더 이상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제 이 꼬리글이 다비아에서 저의 마지막 글이 될지 모르겠군요.
정용섭 목사님은 제게 안타까움을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용섭 목사님과 (다비안?)추종자들에게 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순진한 자들이 그럴듯한 지식에 자기 신앙을 팔아넘기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다비안화?하는데 불리하다고 해서 제 글을 삭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주의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
흐리멍텅한 종교일반론(좋은게 좋은 거다,)식으로
체계적으로 훼손되는 것에 대해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오직 살아계신 주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이곳을 찾는 영혼들을..
참 진리의 성령과
참 생명의 빛가운데로 인도해 가시길 바랍니다.
스스로가 배운 지식을 옳다하기 위하여...
성경의 기록마저 부인하는 비극이 없었으면 합니다.
(예리한 지적, 올곧은 소리도 많으셨지만...성경적 믿음을 무너뜨리는 부분도 많아서
제 능력의 한계로써는 일일이 다 짚고 넘어가기도 버겁습니다.
정말 비평을 하자면 지금까지 설교비평하신 것 이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자, 귀 있는 자만 듣겠죠.
방언에 대해서는 각자 신앙 양심에 그 판단을 맡기고
이제 더 이상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제 이 꼬리글이 다비아에서 저의 마지막 글이 될지 모르겠군요.
정용섭 목사님은 제게 안타까움을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용섭 목사님과 (다비안?)추종자들에게 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순진한 자들이 그럴듯한 지식에 자기 신앙을 팔아넘기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다비안화?하는데 불리하다고 해서 제 글을 삭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주의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
흐리멍텅한 종교일반론(좋은게 좋은 거다,)식으로
체계적으로 훼손되는 것에 대해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오직 살아계신 주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이곳을 찾는 영혼들을..
참 진리의 성령과
참 생명의 빛가운데로 인도해 가시길 바랍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또 참견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정목사님 추종자들이라구요? 진정한 다비안들이요?
그럼 조현아님은 장봉운목사란 분의 추종자이신가요?
이곳 다비아의 취지를 알면서도 당당하게 장목사의 주장을 선전하다니...
조현아님!
나도 <힐링 하우스>를 압니다. 장 목사님은 물론이구요.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집안에 ‘골방신학’내지 ‘기도원신학자’가 있어서
그 인연으로 오래전에 알게 되었지요.
한마디로 그 분은 이곳 다비아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칼 정신을 종교혼합주의이며 사단의 도전이라고 단정짓는가하면,
하나님의 뜻을 마귀의 일을 멸하고자하는 것, 그래서 성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마귀의 책략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들을 귀가 있으신 분들은 알아 들으시라!)
조현아님!
장봉운 목사님이
독일신학을 이데올로기 신학이라고 폄하 하는가 하면,
존윔버가 주장하는 5중사역의 회복을 위해서 자칭 “보이지 않는 목회자"로 고군분투 하시면서,
방언을 신앙의 핵심으로 내걸고...예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도 받는 분이란거 설마 모르시진 않겠지요?
방언이요?
나도 조현아님 수준의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만 빼놓고...)
하나님 그분을 한번 똑부러지게 믿고 싶어서
방방곡곡 신령하신 종님들 많이 찾아다닌 부끄러운 과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단, 그들이 어때서?”란 책을 쓰고 싶었는데,
탁명환 소장님 비명횡사하는걸 보고 ‘오매 무서워라~’ 그만뒀지요.
어제는 현아님이 게시판 댓글에,
장황하게 신천지에 대한 ‘경계 설교’를 한걸 보고 속으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로고~
그냥 웃어 넘겼지만...오늘은 도저히 커밍아웃을 안 할 수가 없군요.
조현아님께 주님의 긍휼이...
정목사님 추종자들이라구요? 진정한 다비안들이요?
그럼 조현아님은 장봉운목사란 분의 추종자이신가요?
이곳 다비아의 취지를 알면서도 당당하게 장목사의 주장을 선전하다니...
조현아님!
나도 <힐링 하우스>를 압니다. 장 목사님은 물론이구요.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집안에 ‘골방신학’내지 ‘기도원신학자’가 있어서
그 인연으로 오래전에 알게 되었지요.
한마디로 그 분은 이곳 다비아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칼 정신을 종교혼합주의이며 사단의 도전이라고 단정짓는가하면,
하나님의 뜻을 마귀의 일을 멸하고자하는 것, 그래서 성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마귀의 책략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들을 귀가 있으신 분들은 알아 들으시라!)
조현아님!
장봉운 목사님이
독일신학을 이데올로기 신학이라고 폄하 하는가 하면,
존윔버가 주장하는 5중사역의 회복을 위해서 자칭 “보이지 않는 목회자"로 고군분투 하시면서,
방언을 신앙의 핵심으로 내걸고...예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도 받는 분이란거 설마 모르시진 않겠지요?
방언이요?
나도 조현아님 수준의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만 빼놓고...)
하나님 그분을 한번 똑부러지게 믿고 싶어서
방방곡곡 신령하신 종님들 많이 찾아다닌 부끄러운 과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단, 그들이 어때서?”란 책을 쓰고 싶었는데,
탁명환 소장님 비명횡사하는걸 보고 ‘오매 무서워라~’ 그만뒀지요.
어제는 현아님이 게시판 댓글에,
장황하게 신천지에 대한 ‘경계 설교’를 한걸 보고 속으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로고~
그냥 웃어 넘겼지만...오늘은 도저히 커밍아웃을 안 할 수가 없군요.
조현아님께 주님의 긍휼이...
조현아님..
저도 예향의 회원이라 (지금은 잘가지는 않치만)
그곳에 공지라고 올리신 글들도 보았습니다.
오랜동안(?)님은 영분별에 열을 올리시던데,,
님께서 그렇게 열을 올리시는 그 영분별이 에메모호하다는겁니다.
(저도 이부분에 반박을 할려면 논쟁을 할수도 있으나,,
그야말로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단과 사이비들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이 믿음을 죽인다고 이성을 마치 몹쓸것인양 난도질 하시던데요..
저야말로, 예향이라는 카페가 정말 걱정입니다.
님께서 뭘 잘못알고 계신것 같습니다.
이곳은 예향처럼 이른바 청소년들이 많이 들락거린진 않쵸
순진한 사람들 별로 없다는 겁니다..
한마디로,이런류의 글들은 공중전?까지 겪은 다비아회원들의 관심거리가
못됩니다.
이런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겁니다.
순진한 청소년들에게 이성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걸 가르쳐도 모자를 텐데
왠 ~사이비 교주들이 말하는 것과 비스무레 말씀을
그들에게 설파하시는지요,,
방언이나 영분별을 해야한다고 설파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아시면서
계속 이러시는 이유를 묻고 싶군요
(그리고는 님께서 사이비교주들을 경계하라고 하시는군요..)
걱정되는 곳은 예향입니다...
조현아님의 열심은 알고도 남으나..
영?에 관한 집착이 좀 과하신듯하여
한말씀 드렸습니다.
참고로 저는 전에 팽귄아지매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하시길..
저도 예향의 회원이라 (지금은 잘가지는 않치만)
그곳에 공지라고 올리신 글들도 보았습니다.
오랜동안(?)님은 영분별에 열을 올리시던데,,
님께서 그렇게 열을 올리시는 그 영분별이 에메모호하다는겁니다.
(저도 이부분에 반박을 할려면 논쟁을 할수도 있으나,,
그야말로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단과 사이비들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이 믿음을 죽인다고 이성을 마치 몹쓸것인양 난도질 하시던데요..
저야말로, 예향이라는 카페가 정말 걱정입니다.
님께서 뭘 잘못알고 계신것 같습니다.
이곳은 예향처럼 이른바 청소년들이 많이 들락거린진 않쵸
순진한 사람들 별로 없다는 겁니다..
한마디로,이런류의 글들은 공중전?까지 겪은 다비아회원들의 관심거리가
못됩니다.
이런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겁니다.
순진한 청소년들에게 이성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걸 가르쳐도 모자를 텐데
왠 ~사이비 교주들이 말하는 것과 비스무레 말씀을
그들에게 설파하시는지요,,
방언이나 영분별을 해야한다고 설파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아시면서
계속 이러시는 이유를 묻고 싶군요
(그리고는 님께서 사이비교주들을 경계하라고 하시는군요..)
걱정되는 곳은 예향입니다...
조현아님의 열심은 알고도 남으나..
영?에 관한 집착이 좀 과하신듯하여
한말씀 드렸습니다.
참고로 저는 전에 팽귄아지매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하시길..
푸훗~ 울신랑,
한국말은 열마디도 못해요
딴나라(홍콩)사람입니다.
더 결정적인건,
이런데? 관심없는 사람입니다.
요즘 그의 관심은
축구와 한국가요 찾아 나에게
들겨주기 입니다..ㅋㅋ
서로의 관심이 다르다고
서로 핍박^^*은 안해요,
(예전에 제가 좀 핍박을 했군요
축구와 나중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ㅋㅋ)
강요는 더더욱 안하구요.
내가 이런데 관심이 많고 찾아다니는걸
구엽게 봐주고
또 희한하게 생각하죠.
교회는 저따라 오긴 하는데
전 아직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어쩔땐,
예수믿네하며 설치?는 저보다는
그에게서 예수의 흔적을 느낄때가 있지요.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네,은수도 이쁘게 잘크고 있습니다..
목사님도 늘 건강하시고요..
한국말은 열마디도 못해요
딴나라(홍콩)사람입니다.
더 결정적인건,
이런데? 관심없는 사람입니다.
요즘 그의 관심은
축구와 한국가요 찾아 나에게
들겨주기 입니다..ㅋㅋ
서로의 관심이 다르다고
서로 핍박^^*은 안해요,
(예전에 제가 좀 핍박을 했군요
축구와 나중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ㅋㅋ)
강요는 더더욱 안하구요.
내가 이런데 관심이 많고 찾아다니는걸
구엽게 봐주고
또 희한하게 생각하죠.
교회는 저따라 오긴 하는데
전 아직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어쩔땐,
예수믿네하며 설치?는 저보다는
그에게서 예수의 흔적을 느낄때가 있지요.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네,은수도 이쁘게 잘크고 있습니다..
목사님도 늘 건강하시고요..
누가 방언에 대해서 발언을 하신다구?
나도 왕년에 방언으로 한가닥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 할 때 마다 방언을 안 하면 라면 먹을 때 김치 없이 먹는 것 같아서.
그런데 내 현장에서 필요 없으니까 자연이 안 하게 되더구요.
그러나 쌩자들 신앙 생기게 하는데는 한 목 하더라구요.
목회 하면서
전혀 믿지 않을 사람이 혀 한 번 꼬부라지더니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 많이 받습니다.
방언! 이거 부작용(특히 듣는 사람 사람 정신 산란하게 만드는 거) 도 있지만 효과도 제법 있슴다.
그런데 조현아 님 사진 보니까 예쁘게 생겼던데 예쁜 여자가 방언하고 앉아 있으면 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나도 왕년에 방언으로 한가닥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 할 때 마다 방언을 안 하면 라면 먹을 때 김치 없이 먹는 것 같아서.
그런데 내 현장에서 필요 없으니까 자연이 안 하게 되더구요.
그러나 쌩자들 신앙 생기게 하는데는 한 목 하더라구요.
목회 하면서
전혀 믿지 않을 사람이 혀 한 번 꼬부라지더니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 많이 받습니다.
방언! 이거 부작용(특히 듣는 사람 사람 정신 산란하게 만드는 거) 도 있지만 효과도 제법 있슴다.
그런데 조현아 님 사진 보니까 예쁘게 생겼던데 예쁜 여자가 방언하고 앉아 있으면 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명경지수 님!
나보고 대뜸 안녕하시다니 옛날에 나하고 같이 방언하며 놀던 분 같은데?
맞으면 자수하시고
아니면 말구.
나는 실제로 '아놀드' 같은 사람이 방언하는 것 많이 보았어요.
방언도 생긴데로 하더라구요.
왜 아기방언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방언 대화도 있고. 방언 시합도 있고, 방언 싸움도 있고.
벙언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있고.
목회하면서 보니까
하여간에 방언 이거 하는 사람은 좋은 데
두루 유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디다.
그래서 바울 선생이 그랬죠?
"씨꺼! 한 구석에서 조용히 해!"라고
다른 것 내 세울것 없어 방언 내세워서 재미 좀 볼려는
목회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같은 심정일 겁니다.
나보고 대뜸 안녕하시다니 옛날에 나하고 같이 방언하며 놀던 분 같은데?
맞으면 자수하시고
아니면 말구.
나는 실제로 '아놀드' 같은 사람이 방언하는 것 많이 보았어요.
방언도 생긴데로 하더라구요.
왜 아기방언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방언 대화도 있고. 방언 시합도 있고, 방언 싸움도 있고.
벙언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있고.
목회하면서 보니까
하여간에 방언 이거 하는 사람은 좋은 데
두루 유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디다.
그래서 바울 선생이 그랬죠?
"씨꺼! 한 구석에서 조용히 해!"라고
다른 것 내 세울것 없어 방언 내세워서 재미 좀 볼려는
목회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같은 심정일 겁니다.
보통하는 기도가 마음으로 하는 기도라면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라고 정의했던 사도바울처럼
내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영과 내가 항시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 강했고, 들어주셔도 그만, 안그래도 그만
이루어주셔도 그만 응답하지 않으셔도 그만이었는데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시는 것을 종종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혹은 제 생각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는
단 한번도 로마서 8장 26절의 체험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 아니라, 방언기도 후에 귀신 들린자가 놀라서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고
실제로 귀신을 쫒아내기도 했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은
감추어진 비밀(실제 있었던 사건인데 은폐된 사건)까지 말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방언기도를 통해 벙어리가 말하게 된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방언에 대해 함부로 폄하하는 분들은 방언 속에 감추어진 영적 능력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인 육의 눈으로만 보고, 피조 인간의 지식과 한계에 갇혀
이성적 사고로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수시로 방언기도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 성령의 뜻을 깨달아가고 있으며
방언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응답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은 겉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영적 능력과 비밀에 속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을 직접 접촉하는 가장 초보적인 은사일 뿐입니다.그러나
이 초보적인 은사를 통해 더 큰 영적 능력으로 강하게 진전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방언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작은 사람의 교훈과 바꾸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