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제2장 대조되는 성격 조화의 결정체(2)

스탠리 존스 조회 수 3537 추천 수 0 2009.10.29 10:50:06

시골사람이면서도 도시사람이었던 간디

또 다른 대조되는 면이 간디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그는 촌사람이면서 동시에 도시인이었다. 그의 모든 도시화, 훈련은 도시의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 주 재무상의 아들로서 그는 지배층으로서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의도로 그는 자신을 75%가 농부인 대중과 함께 서는 편을 택했다. 그는 모든 좋은 옷을 옆으로 제치고 농부들이 허리에 걸치는 도띠를 입고 다녔다. 일생동안 그의 몸의 상부는 늘 벗겨져 있었고 장사용 장작더미로 옮겨갈때는 죽음에 적합하게 전신이 벗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완전히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한 엘리베이터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웃음을 옷입지 않는 한 그는 항상 벌거벗겨져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벗은 옷보다 얼굴에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미소를 띰으로 그는 항상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의 아들 데바다스 간디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누추한 옷, 말과 태도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사람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누구든 간디와 접촉한 사람은 이것이 사실임을 알게된다. 그는 여행중에 항상 3등열차를 탔는데 그 3등열차는 딱딱한 나무의자였다. 후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중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특별열차를 마련했는데 여전히 그는 3등 열차를 타기를 고집했다.

한 도시의 남자가 우상이 되고 대중의 목소리가 되었다. 인도의 시골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간디는 그들을 일으키고 그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도록 하고 운명에 대한 자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간디가 일선에 나서기 이전에 지성인 사이에 국민주의자 운동이 있었다. 그는 이 운동을 대중앞으로 이끌었다. 역사에 어느 누구도 마하트마의 시선을 끌고자 군집한 것 같은 많은 군중들의 갈채를 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간디에게서 자신들의 최선과 그들 스스로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정치적 발언권이 없는 대중들의 대변자였다.

그가 델리에 갔을 때 그는 청소부나 불가촉천민들이 사는 거리에 머물렀다. 영국 내각 각료 사절단은 간디를 보기 위하여 그곳에 왔다. 브라만을 비롯한 군중들이 간디의 기도 모임에서 그를 일견하고 또 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정결하지 못한 이곳에 찾아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간디는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존재였다.

어느 날 기차를 탔었는데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빗자루를 들고 그것을 청소했다. 객실에 있던 인도인이 이 모습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간디와 함께 있었음이 틀림없어요.”

내가 그와 함께 있었던 것과 이것을 배웠음을 시인하였을 때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행위가 그것을 설명합니다.”

졸업생을 대표하는 한 미국 선교사의 인솔을 받은 일단의 인도의 대표단이 간디를 초청하여 그 도시를 돕는 방법을 물었을 때 간디는 단 두 마디로 대답했다.

“도로 청소부가 되시오.”

그가 말한 의미는 그들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도시를 정결케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대부분 델리의 방기(청소부) 거리에 살다 인도의 가장 부유한 공업가중 하나였던 비를라의 손님으로서 그 별장에서 죽었다. (그 집은 국가로 환원되어졌다고 알려졌으나 비를라는 이것을 그의 개인 소유로 주장하고 있어 그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실수이다. 이것은 법적인 측면이 아니라 도덕적 측면에서 국가의 사원으로서 국가에 귀속된다.) 마하트마는 방기(청소부)의 집에 있어서나 비를라 하우스에 있어서나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이 말한 구절을 그대로 이룬 사람이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 4:12 표준번역)

사람이 비천하게만 살거나 부유하게만 산다면 그는 약한 사람이다. 그는 어느 형편에 처하거나 거기서 삶의 목적을 성취해내는 강한 사람이었다. 간디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마하트마의 삶에 있어 도시와 농촌은 공존했는데 이것은 인위적 결합이 아닌 그의 삶속에 녹아든 것이었다. 그는 결코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지 않았다. 대신 그들 중의 한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의 뼈중의 뼈가 되고 모든 고통을 함께 감내했다. 그에게 있어 부유한 도시인과 가난한 농부는 둘 다 단지 사람일 뿐이었다.

수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간디

다시 우리는 수동적 요소와 호전적 요소가 함께한 간디를 발견하게 된다. 소극적인 사람은 연약하고 반대로 호전적인 사람도 연약하다. 강한 사람은 둘 다를 소유한 사람이다. 간디는 소극적이면서 호전적인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호전적이면서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마하트마는 둘 다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무엇인가에 저항하였으나 그 방법은 무저항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소극적’이란 단어를 원어적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것은 ‘조용히, 인내심있게 고통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저항하는 것이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싸 안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다. 이것은 고차원적인 적극적 저항이다. 적이 당신의 뺨을 때리거든 당신의 놀라운 영적인 담대함으로 당신의 다른 뺨을 돌려 댐으로서 대적을 치는 것이다. 당신은 적의 무기를 빼앗는 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무기를 간직하므로 높은 차원에서 그의 양심을 치므로 그의 팔을 비트는 것이다. 그는 당신을 물리적으로 치지만 당신은 그를 영적으로 치는 것이다.

마하트마는 항상 무엇인가에 저항하고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인 것들을 동시에 대하며 싸웠다. 그의 금식들을 분석해 보면 개인들, 그룹들, 단체들, 국가들에 대항하여 시행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정화를 위해 자기를 위해서도 금식을 했다. 그런 여러가지 이슈들을 가지고 그렇게 오래도록 금식을 한 사람이 별로 없다. 인도의 어떤 치명적인 것도 그를 떠나게 할 수 없었다. 어디든 상처가 있는 곳에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 자신을 괴롭혔다. 그의 상처들은 그들의 상처들에 응답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무작정 무형의 적과 싸우는 완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슈를 선택했고 한번 그 부정이 잘못되었고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면 그것이 바로잡아질 때까지 자신을 학대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항상 즐거웠다. 그는 ‘행복한 투사’였다. 그는 수동적인 것과 전투적인 성격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다.

고행자요 섬기는 종 간디

그는 또 고행자이면서도 섬기는 종이었다. 인도에서 이런 일치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남을 섬기지 않는다. ‘신’을 섬기는 고행자에게 있어 섬김이란 낯선 것이다. 종교들의 궁극에 대한 고행자들의 생각엔 섬김이란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인도의 중심 철학인 베단다 철학에서 궁극적 실재, 브라마는 섬기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가 있다면 행위의 열매가 있고 행위의 열매가 있는 곳에 환생이 있고 환생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브라마는 무행위, 무감정 그 자체이다. 사람이 브라마와의 합일을 깨닫기 위해서는 앉은 채 묵상을 통해 아함 브라마스미-나는 브라마이다라고 계속 확신시키며 감각의 세계와의 접촉을 줄여야 한다. 선이든 악이든 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목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 고행자의 모든 관심은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일상사 전체는 마야, 즉 환상이다. 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많은 수행자들로 인해 국가의 도덕적, 물질적 소모는 엄청났다. 라마 크리슈나 미션 같은 단체들이 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대 수도원 단체임은 사실이나 이 단체들이 그런 일을 한 것은 니르구나 브라마 철학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 도는 자신이 낳은 위대한 아들이 자신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인도는 항상 세상사를 가볍게 밀어내고 세상과의 연을 단절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붓다의 왕자로서 갖는 상속권의 포기는 인도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여기에 새 인도의 지도자이자 고행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 간디는 고대 인도의 영혼을 붙드는 동시에 현대 인도의 영혼을 붙들었다. 현대 인도는 주변의 요구를 무시하고 상관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낭비다. 간디안에서 옛 인도와 새로운 인도가 생동력있게 혼합되었다. 간디는 섬기는 고행자였다. 두 그룹 둘 다 그에게 다가왔는데 이는 둘 다 자기들의 사상이 그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하트마는 단순히 한 인격이 아니라 신, 구 두 가지 사상의 흐름이 만나는 합일점이었다.

신비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인 간디

이와 유사하게 마하트마는 신비와 실재를 결합하였다. 그는 아침 기도를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그의 삶의 커다란 위기때마다 방향을 주는 내밀한 음성을 듣는 신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신비주의는 강력한 실재였다. 그가 물레바퀴를 돌리면서 종교적인 수행과 담화를 이루어낸 사실이 이것의 상징이다. 돌아가는 물레바퀴는 가난한 인도에 대한 그의 인식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가내 수공업은 동력 기계의 소개로 황폐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한 해의 절반동안 소작농들은 그들의 시간을 투자할만한 데가 전혀 없었다. 간디는 인도의 가내 수공업 경제를 파괴하며 인도를 서구의 노예로 전락시켜가는 몰지각한 산업화에 저항하여 차크라(물레)를 돌렸다. 어것은 농부들로 하여금 여가 노동의 활용과 아울러 부수적인 수입을 통한 소작농가의 자립을 돕고자 하는 시도였다. 간디가 앉아서 담소하며 그의 물레바퀴를 돌리던 사바르마띠의 아슈람 반대편 강둑에는 40여개-지금은 거의 백여개의 거대한 목화 방직공장 굴뚝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굴뚝으로 대변되는 이 거대한 힘과 비교하여 차크라를 돌리고 있는 마하트마는 밀려오는 해일을 빗자루로 쓸어내려는 시도와 같아 동정을 금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산업화가 그를 삼킬 것인가? 내가 어떤 인도 단체들에게 독립 인도가 가장 필요한 다섯 가지를 순서대로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인도의 산업화를 그 목록에 넣었고 어떤 그룹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손꼽았다. 인도는 반드시 별로 경제적이지 않는 수입을 주는 땅으로부터 사람을 떼어내어 공장으로 투입시켜야 한다. 해외로 보내져 가공품이 되어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원산물 경작자 대신에 인도는 반드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자신이 공급할 수 있는 제조업자가 되어야 한다. 되풀이 하건대 인도의 장래는 산업화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서구의 산업화 경험은 북적이는 슬럼지역과 우리 문제의 거의 전부를 안고 있는 비극을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장하는 인도 노동자의 주택 문제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현실이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해준다. 한 방안에 열 명 많게는 열 두명이 때로는 2교대로 자고 나가는 차월(연립아파트-역자주) 무정하며 이기적인 산업화의 부산물이다. 파업과 폭동의 난립은 자연적 귀결이었다. 산업화가 발생했던 서구에서는 분권화가 필수적이었다. 즉 공장들을 시골로 옮기고 주거 환경에 적절하도록 작은 규모로 세우는 것이다. 물레를 돌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생각이 바로 그 방향으로 인도의 산업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항이자 동시에 견인이었다. 급하고 무자비한 산업화의 가도에 걸쳐 앉은 간디는 이익에 굶주린 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백만장자와 비극, 궁궐과 오두막집, 대량생산과 대량 빈곤을 동시에 창출할 수 없다. 산업을 분산시켜서 많은 부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이 저항에 놀랄만한 그 무엇이 있다. 마하트마와 그가 돌리는 물레바퀴는 산업화 운동의 양심이 될 것이다. 그의 슬픈 눈동자는 거대한 이익을 바라볼 것이고 돈에 미친 사람들은 이 이익이 바로 가난한 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는 인도의 발전은 산업화에 달려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 문제의 미래는 간디가 아니라 사회학자인 자와할랄 네루의 손에 달려있다. 그는 동력 기계의 활용과 산업화가 인도의 사회와 경제를 좌우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간디와 그의 물레는 그 운동의 교정과 도덕적 분별력을 제공해 줄 것이었다. 그것은 서구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비극과 실수를 피하도록 인도를 도와 줄 것임에 틀림없다. 더하여 마하트마의 운동은 산업화와 곁들여 존재하는 가내 수공업을 창출시키고 원상태로 복귀하게 할 것이다. 가내 수공업은 나름대로의 권리를 소유하며 마하트마 간디는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

나는 힌두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자기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 도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배를 드리는 날 타타 제철공장에 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화환이 그들의 도구에 놓여져 있었으나 지금은 공장주의 기계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화환이 걸린 기계에게 절하면서 경배했다. 측은해 보였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불쌍한 사람들... 당신들은 조금의 사회적 목적이 없는 기계를 경배하고 있다네. 이 기계들은 이익을 위해 돌아간다네. 좀 더 이익을 많이 창출하게 되는 기계가 들어오게 되면 당신네들은 해고가 되어 길가로 던져질 것이네. 그런데 당신들은 그것을 경배하고 있어!” 나는 제품들을 모으는 거대한 동력외에는 아무런 소망도 볼 수 없다. 자신이 사업의 일부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도록 하는 이익분배가 첫 단계이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동력이 낳는 유익이 분배되는 다시 말하면 공업화의 사회회가 그 해결책으로 보인다. 이익분배가 시작될 때 자본주의는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사회화의 공정한 계획이 노동에 반영된다.

인도의 경제적 필요에 대한 대답으로서 마하트마가 물레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독립과 구심성에 둔 그의 주장의 핵심은 완벽하게 옳은 것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으나 현실적인 신비주의자였다. 그리고 매우 종종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 가장 현실적이었다. 돌아가는 물레바퀴의 작은 헌신자가 공장의 바퀴들을 돌리는데 도움을 주되 단순히 수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유익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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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9.10.29 13:46:47
*.104.196.173

대조적 성향을 그 내부에서 조화가 되기위해

간디는 끊임없이 정화와 긴장을 끈을 놓치않은 것 같습니다.

참 존경스럽군요.

 

마지막 단락에

'마하트마가 물레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한 스탠리의 의견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마하트마가 물레를 돌리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예전에 그의 영상물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의 헐벗은 상체, 지성적으로 보이는 안경과 눈빛,

가난한 자들이 입는 도띠의 정갈함, 금식으로 단련된 체격,

끊임없이 돌리는 물레...

아주 강렬한 이미지였습니다.

요즘의 정치인들이 급조를 해서라도 이미지 정치를 표방하는데

그런 인식 조차없었을 그에게는 이미지의 강력함을 지혜롭게 아는 듯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모의 하나하나에 의미과 의지를 부여하였고

물레질을 포함한 비폭력도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 듯....

이 생각은 간디를 폄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분석하자니 그렇다는 것이고 그가 옳다는 뜻입니다.

샤따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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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10.29 17:45:56
*.160.132.218

출옥후 인도를 다녀가신 신영복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지요.

안개꽃으로 둘러싸인 장미꽃 꽃꽂이가 있다.

네루는 장미꽃 중심

간디는 안개꽃 중심


간디는 느리지만 대중이 함께 하는 인도라는 나라를 꿈꾸었고

네루는 소수의 인텔리겐차를 중심으로 한 발전을 꿈꾸었다는 거죠.


근대 인도는 네루를 따라 흘러 왔고 또 그 방향으로 몰아치지만

그래도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간디는 아직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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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09.10.29 19:52:30
*.118.129.226

사도 바울의 고백이 간디의 삶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대학교 때 간디에 관한 책을 읽었지만

깊은 감동 없이 대략 삶의 줄거리를 훑으면서 인도의 정치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탠리 존스가 묘사하는 간디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수행자'의 모습, 더 나아가

인도 사회와 민중을 질곡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메시아'로서의 모습으로도 보이네요.

에그 이단 시비 붙을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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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10.30 08:29:02
*.163.109.231

간디의 삶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 깜냥은 없지만

제가 느끼는 바는 간디는 최소한 인생의 깊이속에 들어가

그안에서 자기 빛깔을 찾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는 행동하나, 말 한마디, 그의 삶 자체가

무저항, 비폭력이 가지는 진리의 힘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을

스탠리존스의 책을 다시 읽어가면서 느낍니다.


메시아까지는 못되더라도

스승의 반열에는 올려 두어도 되실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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