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제6장 진리 실험

스탠리 존스 조회 수 3306 추천 수 20 2008.05.31 22:22:36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삶에 대한 기술의 제목을 자서전이라고 붙이지 않고 ‘진리 실험’이라고 불렀다. 난 오랫동안 왜 간디가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해했다.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요체이자 능력의 원천이었다.

한 지방 총독이 나에게 말했다. “간디는 그의 인생 전체를 진리측에다 걸어버린 도박꾼이었죠.” 그는 깜짝 놀랄만한 도박꾼이었다. 그는 당면한 어떠한 과제가 주어지면 그것을 탁자위에 놓고 자기 생명을 거는 도박을 시작했다. 그는 무모한 도박꾼이었지만 승리를 확신할 때만 도박을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도박을 시작하기 전에 일의 성패여부를 저울질해보았다. 그래서 그는 확실성을 가져다 주는 확률의 파도를 탔다. 간디는 서구 과학의 성취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지만 ‘실험’라 이름하는 그 과학의 가장 핵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서구의 실험이 물리적 법칙을 실험하는데 폭 넓게 사용되었다면 간디는 이 실험을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 적용하였다.

간디는 많은 측면에서 실험자였으나 주로 정신과 정신의 법칙들을 실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경전조차도 실험의 대상이었다. 음식에 대한 실험을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 세 사람이 나에게 뜨거운 물에 녹인 꿀을 마시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기에 그것을 금하는 내용의(아유로베딕 책에서 나왔음직한) 글을 내게 보내왔다. 내가 과연 그것을 실제적 경험으로 확인해보았는가 물어 보았을 때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뜨거운 물에 녹인 꿀을 마신지 벌써 4년이나 되었지만 거기서 오는 어떤 부작용도 느끼지 못했다.

이를 통해 경전을 포함한 모든 것은 반드시 실험과 검증을 거쳐야만 한다는 중요한 주장과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맹목적인 믿음은 그릇된 것이다.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이것은 보리수의 씨가 사원의 틈바구니에 떨어졌을 때 그것은 자라나는 나무 뿌리 근처의 황량함을 없애는 것과 같았다. 이 간디의 생각이 만약 적용된다면 성장하는 진리의 기반을 둘러싼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단순한 독단주의를 떠나게 될 것이다.

간디는 도박꾼이었으나 용의주도한 도박꾼이었다. 마치 코끼리가 처음 지나는 다리를 건널 때 앞발로 미리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처럼 간디도 주의깊에 몇몇 원칙을 시도해보고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해보고 경험해보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다.”

그는 러스킨의 '이 작은 자에게'(Unto This Last)의 교훈을 이렇게 이해했다.

1. 개인의 선은 전체의 선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2. 변호사의 직업은 이발사의 직업과 꼭같은 가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제 직업으로 자신이 살아갈 것을 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3. 노동자의 생활, 즉 밭을 가는 자의 생활,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자의 생활이 살 만한 보람있는 생활이라는 것.

그 첫째는 내가 알고 있었다. 둘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셋째는 생각난 적이 없었다. '이 나중 온 자에게도'는 둘째와 셋째가 첫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에게 대낮의 빛같이 밝혀 주었다. 동이 틈과 함께 일어나면서 이 원리를 실천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선 간디는 일생동안 검소한 삶과 손으로 하는 노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주의해서 보라. “새벽에 깨어난 나는 이 원칙을 실천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들 대다수가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한다. 그러나 간디는 새벽에 원칙을 실천하기로 결단했다. 이것이 간디의 다른 사람들과의 독특한 차이점이다. 그는 진리라고 본 것은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모든 진리를 보지 못했으나 본 것은 행동으로 옮겼고 이것이 차이를 낳았다.

십자가를 생각해보자. 마하트마 간디는 확신한 크리스천이 보는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 즉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 또 나무위에서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간디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고통을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실천에 옮겼고 그것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실천하였다. 그래서 차이점은 이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간디보다 더 많이 보았고 알고 있지만 실천이 미약하다. 그러나 간디는 우리보다 십자가를 적게 접했지만 더 많이 실천했다. 우리는 십자가를 교훈으로 치부했지만 간디는 그것을 행위로 옮겼다. 그러므로 반쪽 빛을 가지고 전적인 실천을 한 간디는 온전한 빛을 가지고 반쪽 실천을 한 우리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천하는 행동이 미약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제한되게 역사하실 수 밖에 없는 반면 간디의 살아 움직이는 행위를 영접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정통주의를 무시하시고 행동주의를 사용하신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올바른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명목상으로 크리스천 세계가 진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간디는 그것을 실험했다. 그것이 차이점을 낳았다.

다른 요소를 보자.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른 진정한 크리스천이 보는 것처럼 보지 못했다. 그는 이 여기에 대해서는 아리송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몇 원칙들 -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사랑하라-은 그를 사로잡았고 간디는 이것을 실천에 옮겼다.  이 원칙들의 실천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발견하고 그에 의해 살았다. 비록 희미하고 무의식적이었지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37-40) 간디는 비록 무의식적으로 하였지만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행동을 통하여 희미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고 우리는 교리를 통하여 희미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단지 교리와 행동을 통하여 진정한 크리스천을 발견할 수 있다.

진리라고 본 것을 실험하였던 간디는 경험의 간디가 되었다. 그는 행동에 옮겼던 것을 경험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보지 않았으나 그가 본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간절함을 통하여 생생하게 되었다. 그는 시도해보지 않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전하기를 거부하였다.  내가 전쟁 전에 평화의 사도인 그가 유럽에 있으면 전쟁보다 평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유럽에 가도록 간절히 권유하였을 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아직 우리나라에도 평화를 이루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유럽에 평화를 말할 수 있겠소?”

누군가가 “모든 위대한 문학은 자서전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위대한 전파는 경험한 사실을 나누는 것이다. 간디의 말들은 그 자체 내에 실험을 거쳐서 나온 결과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무게가 있었다. 사람들이 교육이론을 갖고 그에게 왔을 때 간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에 얼마의 돈이 있네. 가서 시도해보고 자네의 이론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보게나. 만약 그것들이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네.”

그렇게 간디는 기본 교육에 내재한 아이디어들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의 영감아래 이미 수행되었던 것이었다. 기본교육의 근간은 너가 배운 것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교육이며 이 땅 인도에서의 삶이다. 기본 교육에 있어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가 음식, 의복, 요리, 공중위생 및 대중 서비스에 자급자족해야 한다. 공부하는 동안에 그들은 자체 유지가 될 수 있다.

그의 중요한 선언서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세계는 사따그라하 또는 진리의 근저에 놓여있다. 비진리를 의미하는 아사따그라하는 또한 “비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따그라하 또는 진리는 “존재하는것”이란 의미다. 만약 비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승리는 요원하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인 진리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이것이 간추린 사따그라하의 원칙이다.

만약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삶의 비즈니스는 그것과 함께하는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며 또한 실재의 총체는 너의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가 단지 아이디어로서만 받아들인다면 너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너가 자신의 태도와 행위들을 진리속으로 던져넣을 때 진리와 함께한 진정한 자신다운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를 대적할 자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너가 비진리로 자신이 인지될 때 너는 연약하고 깨어지기 쉽다. 우주는 너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간디는 단지 몇 가지 기본적 삶의 원칙이 있었을 뿐이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삶에 역사하도록 하였다.

* 러스킨의 금언중 하나: 일을 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얻었다면 반드시 일을 하고도 보수를 받지 못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다는 말이 된다. 노동이 먼저이고 보답이 그 다음이 될 때, 창조주인 신이 당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답이 먼저이고 일이 그 다음이 될 때, 당신은 보답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역자주)

[레벨:0]정교승

2008.06.04 22:56:50
*.150.79.181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말씀 감사합니다.
받아쓰기를 공짜로 읽고 모든수고를 공짜로 누린 저가 보답 할 길은 없겠습니까?
보답의 노예가 된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창조주의 신이 나의 주인이 될 찬스는 오지 않겠습니까?
동영상 강의를 신청하지 않은 나는 매일 후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씀 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다음엔 강의료를 내고 신청하면 들을 수 있게 허락은 해 주실려라?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8.06.04 23:37:22
*.162.157.63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정신이 투철한 다비아 정신을 배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참고로 상기 글은 스탠리존스 선교사님의 '마하트마 간디: 기독교적 해석'의 제6장 전문입니다.

[레벨:6]月光

2008.06.05 12:52:32
*.113.181.111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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