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제1장 여정의 끝

스탠리 존스 조회 수 3279 추천 수 0 2009.09.08 08:45:20

마하트마 간디가 순교하던 날 나는 그 비극이 일어나기 한 시간 15분전에 델리에 도착했다. 오후에 간디를 만나게 해달라고 친구에게 부탁을 해 두었었는데, 인도의 절망적인 모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차가 5시간이나 연착해 버렸다. 그리고 역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간디가 금식으로 가능한 한 대화를 적게 하므로 만나기가 어렵다고 전해주면서 그래도 그가 매일 갖는 정기적인 기도시간에 참석을 하면 최소한 몇 마디라도 가까이 에서 나눌 수는 있을 것이라고 힌트를 주었다. 전에 나는 종종 기도 후에 그를 만나 몇 마디씩 나누곤 했었다.

 

인도 국민의회 의장인 아차랴 크리파라니의 부인이 배석한 만찬장에 참석할 시간에 맞추려면 택시를 잡아야 했는데 내가 간디를 만날 동안 택시가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 물어야할 대기료가 아까워 택시를 탈 수 없었다. 결국 친구에게 다음 강의 시간에 맞추어 간디를 만나자고 했지만 실상은 돈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몇 푼의 돈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로 가장 큰 비극의 현장에 있지 못했다는 것은 참 창피스러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후의 순간에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이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있다.

 

저녁 만찬에 어떤 내용의 연설을 할까 생각하며 Y.M.C.A. 빌딩 근처를 오가고 있었다. 크리켓 경기로 시끌벅적하던 운동장이 급박한 명령을 기다리는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델리를 비롯한 전 인도 지역에 일어난 상징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의아해 하고 있을 때, 크리켓 선수 하나가 달려와 기도처로 향하던 마하트마 간디가 총격으로 사망했음을 알려 주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경악한 표정으로 그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저명인사가 말했다.

 

"지금 인도는 혼돈에 빠졌다.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발휘되었던 자제력을 상실한 인도는 혼돈의 바다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나는 조용히 부정했다. 내가 말했듯이 이 비극이 인도를 더 낫게 할 것이므로 마하트마 간디는 살아 있어서 보다 죽은 편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렇게 느꼈다. 무의식중에 십자가와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그 비극!,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는 침잠하였다.

 

우리는 와전되지 않은 정확한 소식을 듣기 위해 아차라 끄리팔라니가 머물고 있는 의사당으로 건너갔다. 그는 간디가 쓰러진 곳으로 가고 없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거구의 시크 경비원이 두 손을 모으고,

"인도에게 승리를"하며 인사를 했다.

 

그것이 예언이었을까? 이 사건으로 인도에게 승리가 다가 올 것인가? 네루와 사르다르 발라바이 파텔의 대국민 방송을 청취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둘러앉았다. 인도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감옥을 자기 집 드나들 듯 하면서도 조금도 떨림이 없던 이 거장들이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떨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스로 말을 이어 나갔고 가끔은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제복을 입고 라디오 곁에 앉은 장성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나의 눈물도 그들과 함께 섞였다. 우리의 공통된 슬픔이었다. 그들은 내게 성경 한 구절을 읽고 기도해 주도록 요청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지만, 영국인이 건네준 외경을 읽었다.

 

그러나 의인의 영혼들은 여호와의 손에 있나니

어리석은 이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듯이 보이고

그들의 떠남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고

그들의 영원으로의 여행이 황폐함으로 다가온다고 하나

의인은 평화롭도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소망은 영원불멸하도다.... (솔로몬의 지혜 3:1-8)

 

모든 구절이 마하트마에게 적용되었다. 그가 자신의 순교를 통하여 '나라를 심판'하고 '사람들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나는 느꼈다. 그것은 내가 전혀 꿈도 꾸지 못할 방법으로 나타났다. 나는 떠듬떠듬 상한 심정으로 충격을 받은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가 기도를 마쳤을 때 한 인도인이,

"이 날이 금요일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교통부장관인 존 마타이 박사를 불러서 기독교인으로서 그에 대한 우리의 존경의 마음을 표현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간디의 시신이 안치된 비를라 하우스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몰려든 군중들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인도인, 영국인, 미국인 우리 세 사람은 간디를 곁에서 보기 위해 3마일을 걸었다. 오히려 우리의 하얀 피부 빛이 도움이 되어, 우리는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서는 내일 아침까지는 누구도 그를 볼 수 없다면서 죄송해 했다. 자정쯤 거기를 나온 우리는 이 비극의 의미를 생각하며 밤을 새웠다. 왜냐하면 앞으로 수천 년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날 간디를 만나고자 했던 목적은 독립을 위한 비폭력투쟁의 의미에 걸 맞는 축제가 될 민족행진에 관한 나의 요청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소금 행진'을 하기 위해 사바르마띠에 있는 아쉬람을 떠났다. 그는 150마일 떨어진 단디 해변으로 행진하기로 제안하였고 해변에 이르러 소금을 만들었다. 자연 그의 행위는 정부의 소금 전매법을 위반함은 물론 그것은 정부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서 감옥에 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것은 극적인 비폭력 시민 불복종운동의 힘찬 시작이었다. 인도의 독립을 볼 때까지 아쉬람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간디의 선포는 그 운동을 더욱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선언은 너무나 불합리해 보였다. 여기 넝마 옷을 걸치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전대미문의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나이가 있었다. 넝마 옷이나 죽장 둘 다 독립전쟁을 치루는 투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은 사나이와 지팡이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거기에 아로새겨진 사상은 이러했다. 그에게 압제를 가하는 다른 힘에 맞서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 무한한 능력에 의해 모든 저항을 점차로 무력화 시켜갔다. 여기에 역사상 여기저기에 적용되어져왔던 기교가 있다. 그러나 인류의 5분의 1의 해당하는 인구의 자유문제에 적용한 적은 결코 없었다. 엄청 큰 내기였고 카드들은 모두를 그에게 불리했다. 어떻게 그가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내포된 사상의 거대한 힘을 보기 시작했다. 영국은 어쩔 줄 몰랐다. 한 억센 아일랜드 장교가 나에게 한 말은 이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무기로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도대체가....”

 

그는 무력하게 도리질을 했다. 간디는 무기를 제쳐두고 양심에 부딪쳐 갔고 대영제국이 여기에 맞부딪쳤으나 오히려 간디의 정신은 이를 압도하여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아쉬람을 떠나 17년간의 투쟁 후 전쟁은 끝났다. 작은 거인이 승리한 것이었다. 독립이 인정되었다. 인류 역사에 그 같은 무기로 그러한 승리를 쟁취한 예는 전혀 없었다. 지금 독립이 성취되었으니 마하트마지(선생님의 존칭: 역자주)는 '소금행진'에서 출발된 그의 행진을 선회하여 반드시 아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었다. 그로 하여금 상징적으로 5-10마일을 나아가게 한 다음 똑 같은 길을 똑같은 지팡이(사바르마티 아쉬람 박물관 보관)를 짚고 돌아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겸손한, 그러나 승리 후 돌아오는 그의 행진은 비폭력을 통해 성취된 독립을 인도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국가적인 행렬이 될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될 것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힘, 영혼의 힘이 나타나고 증명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내가 제안한 그 행진에 참가할 것이며 나도 그중에 한명이 되었으면 했다. 과도하게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더하여 애틀리씨가 그 행진의 돌아오는 길에 동참하면 승리의 상호만족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나는 부수상이자 뛰어난 내각의 일원인 사르다르 발라이바이 파텔과 독립을 기념하는 이 국가적인 행진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철수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냉철한 사람이어서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큰 관심을 보이면서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소금행진'으로 인해 처음 투옥된 사람으로서 나는 그 행진에 참여하기를 기꺼이 동의합니다. 마하트마의 동의만 얻으신다면 나는 기꺼이 모든 일을 준비하겠습니다."

 

비록 간디가 행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소금행진'의 의미를 종합하는 이번 행진은 그 경우가 다르다는 내용의 편지를 간디에게 썼다. 1948년 3월 12일 사바르마띠 아쉬람을 출발한지 18년 되는 그날에 다시 사바르마띠로 돌아올 것인가? 이 편지에 간디는 답변하기를,

"영국군대가 인도에서 철수하는 행렬은 사상 최대의 행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이 수많은 일들에서 언제 놓여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반무슬림 폭동이 일어나 화재와 약탈로 무법천지가 된 비하르지역의 주민들에게 복구를 호소하였다. 또 거기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에게 자수하여 자진 감옥으로 들어가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협조와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는 내 편지의 내용을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언젠가 그가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나는 이 생각을 봄베이의 프리미어 케르와 나누었고 그는 진지하게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내에서의 모든 준비를 자신이 하겠노라고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순교를 당하기거의 1년 전 일들이었고 그가 순교를 당한 날은 내가 다시 나의 생각을 마하트마에게 다시 제안하려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전에 먼저 보사부 장관이자 장관이 되기 오래전부터 마하트마의 개인 비서였던 기독교인 라즈꾸마리 암릿뜨 카울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녀가 마하트마에게 편지를 전달할 최적임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후 그녀는 편지로 마하트마의 반응을 나에게 보내왔다.

 

"제가 당신의 제안을 마하트마에게 말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나는 델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 당장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전혀 없어.'"

그가 금식을 결행했을 때가 바로 이때였다. 그는 하나의 신생 인도가 형성되는데 있어 커다란 위기가 임박했음을 피부로 느끼며 그 전투는 폭동 후에 비탄과 증오로 피범벅이 된 수도 델리에서 치러져야 함을 확신하였다. 델리는 난민으로 가득 찼고 저마다의 죽음과 상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델리는 무슬림에 대한 적의와 증오의 심장부였다. 신생 인도의 전투는 지든 이기든 델리에서 치러져야 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그 중심부에서 한 치의 과오 없이 그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우리가 돌아보건대 우리는 그 문제의 중심부 델리에 그의 손가락을 담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드문 통찰력이었다. 그의 마지막 전투는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행진의 제의를 점잖게 물리치고 국가의 분위기와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힘든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정신으로 신생 인도를 위한 진정한 전투에 뛰어 들기 위하여 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행진에 대한 나의 제안은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보다 훌륭한 행진에 의해 대치되었다. 마하트마 순교 후에 이루어진 인류가 본 사상 최대의 것 중의 하나였던 그 행렬에 비추어 볼 때 나의 제안은 너무나 빈약하고 빛바랜 것이었다.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제단을 향하여 가던 간디의 가슴을 향하여 쏘아진 세 발의 총탄이 그를 암살하였다. 그 모임은 기도 모임이라고 불렸으나 이 기도에 더하여 진정 이 모임은 나라를 향한 간디의 일일 메시지가 설파되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통해 간디는 국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조언을 전달하였다. 인도와 세계인이 주목하였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성직자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청중들에게 말했다.

 

"주목하십시오! 여러분. 40년간의 순수한 삶이 여러분에게 말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하트마가 연설하려고 할 때 인도는 40년간의 순수하고도 희생적인 투쟁이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신탁으로 받아들였다. 운명적인 날이 어김없이 다가왔으나 그는 평상시처럼 그는 기도 모임에 나타났다. 두 손녀에 어깨로 부축을 받으며 제단 앞으로 다가왔을 때 한 남자가 한 걸음 나아와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오늘은 늦으셨군요. 마하트마님"

 

그리고 나서 세 발의 총탄을 마하트마의 가슴에 날렸다. 그는 총격으로 마하트마와 그의 사상을 정지시켰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단지 간디의 사상과 영혼을 그의 연약한 육체에서 자유롭게 하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행위는 인류로 하여금 그의 사상을 소유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사바르마띠로 겸손하게 행진하는 개선 행진을 제안했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후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했던 최대의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인류의 영혼 속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로마의 개선식은 이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세계적이었고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었다. 전무후무한 사랑과 연민의 홍수가 이 이상한 자그마한 사나이의 죽음에 부어졌다. 마하트마의 사상과 방법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애도가 세계 방방곡곡으로 부터 쏟아졌다. 심지어 몇 년 전 '대영제국의 대표와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총독관저의 계단을 올라오던 '반나의 수도승'의 나타남에 반감을 표시하던 윈스턴 처질도 애도를 표해왔다. 그리고 진나는 '파키스탄의 국가에게'가 아닌 단지 '힌두 국가에게 상실'이라고 말도 되도 않는 말을 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악감 섞인 애도를 무의식중에 드러내었다. 마하트마는 심지어 죽음으로서도 그를 향하였던 사람들의 태도를 판단했다. 우연하게도 파키스탄으로부터 온 무슬림 관리로부터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진나의 악감 섞인 애도에 대해 실망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수상은 마하트마 간디를 '두 나라의 아버지'로서 언급했다. 전 파키스탄이 오열하였다.

 

무엇이 이 작은 사나이의 비밀이었을까? 어떻게 이 사람과 그에게 둔 세계의 관심을 해석할 것인가? 왜 그는 그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흡수하였을까? 적의의 칼날을 갈면서 그에게 접근한 모든 이들이 모두다 그에게 굴복하고 그의 포로가 되었다. 왜? 왜 그의 죽음이 세상 모든 이들의 심정과 양심을 흔들어 놓는 걸까? 그 같은 이상한 포장으로 포장된 능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이 찾고 있던 인류애를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는 다른 애들이 놀리는 것이 싫어서 학교에 가지 않았던 그런 겁쟁이 소년으로서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 겁 많은 소년이 불굴의 용기로서 제국을 대항하며 사회 관습을 도외시하는 가장 용감한 사나이중의 하나가 된다. 어떻게 그를 해석할 것인가?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9.08 19:56:17
*.229.154.102

선교사님, 간디의 서거장면은 영화에서 본듯 합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었네요.

영화 보면서, 우아, 간디랑 진짜 똑같다.. 

요런 것만 관심가졌을때니까요.

그가 새롭게 조명되는 군요.

"어떻게 그를 해석할 것인가?"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 뒤를 따라 나서야겠습니다.

한두해로 끝날 것 같지 않군요.

선교사님,

읽기 쉽게 풀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레벨:18]눈꽃

2009.09.08 21:46:03
*.187.19.193

 

제1장의 소제목이 여정의 끝이라 ㅡㅡ 여정의 긑이 여정의 시작으로 느껴집니다

ㅡ그 비극!,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어진 사실을 떠올리면서 나는 침잠하였다ㅡ

어떻게 그를 해석 할 것인가?

다음이 기다려 집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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