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성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

흔히 ‘영성’ 하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세계와 관련된 영적인 문제를 떠올린다. 육체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초현실적이며 초물질적인 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고질적인 이원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영성과는 거리가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결코 물질적인 것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 이원론적인 선을 긋지 않는다.
왜 그러한지를 뿌리로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초의 창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 이것은 성경의 첫 선언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실 기독교의 모든 체계는 이 뿌리로부터 나왔다. 그러기 때문에 영성에 대해서도 이 뿌리로부터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는데 몇 가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준다.
첫째, 만물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물 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작용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기운이 돌보고 있다.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첫 봄을 알리는 산수유도 하나님의 입 기운을 힘입어 얼굴을 내밀고, 첫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을 만나는 아이도 하나님의 축복을 온 몸으로 감싸고 나온다. 하늘을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히신다. 먼지 같은 미물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눈길이 머물지 않는 건 아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이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 안에 있다.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건 없다. 세상의 어떤 것도 선하지 않은 게 없다. 진리의 사도였던 바울은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며(딛1:15),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딤전4:4-5). 그렇다. 모든 것은 영적이다. 본질상 비영적인 것은 없다.
둘째, 하나님을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히11:3). 눈에 보이는 것은 진정한 세계의 한쪽 면일 뿐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만물을 보아야만 만물의 진정한 세계를 볼 수 있다. 부분적 진실이 아니라 총체적 진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통해 보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막4:4:12). 껍데기만 보지 속은 보지 못한다. 죄악만 보지 죄는 보지 못한다. 윌리엄 템플 주교는 “우리는 오직 물질 안에 영이 거할 때에만 그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실 때에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고 정확하게 말했다.
셋째, 모든 피조물은 아름답고 선하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비록 지금의 세상이 죄로 인해 창조의 영광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창조 세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죄로 일그러진 것과 악한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죄로 인해 악에 휘둘리는 것과 악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매우 미묘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이 차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신다(시5:5), 악한 꾀와 악인의 길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악인의 제사까지도 미워하신다(잠15:8).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요3:16). 그것도 독생자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이건 뭘 말해주는가? 세상이 악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일 세상이 악이라면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한 세상은 결코 악일 수 없다.

이 세 가지 진실이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영성의 굳건한 토대다. 이 토대는 결코 무너져서도 안 되고,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무엇을 논하고 행하든 성경적인 건강성을 잃지 않으려면 창조의 토대 위에 선 영성에 기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성은 왜곡되기 쉽다. 부분적인 영성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왜곡된 영성으로 하는 일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명목상의 이름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신앙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종교에 매이게 하는 올무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위험천만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라는 토대 위에 영성이 서야 한다.

2. 제거해야 할 영적 걸림돌

창조의 토대 위에서, 창조의 빛으로 영성을 이해하게 되면 교회 안에서 횡횡하는 영성들이 얼마나 부분적이며 왜곡되어 있는지가 보인다. 우리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영적 걸림돌들이 보인다. 우선 생각나는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렇다. 구원의 지평이 좁은 개인주의적 우물 안 신앙,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실 도피적 신앙, 지나친 기복 신앙, 말씀에 깊이 침잠하지 못하는 활동중심 신앙,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현실 집착적 성공 신앙, 현실을 멸망받을 세상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현실 거부 신앙…….
이런 신앙은 세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신앙의 걸림돌들이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할 영적 걸림돌들을 좀 더 포괄적으로 정리해보자.
제거해야할 첫 번째 영적 거침돌은 승리주의에 도취된 투쟁적 영성이다. 교회는 그동안 쉬지 않고 강함의 영성을 추구해왔다. 초기 200년의 수난과 순교의 역사를 빼면 거의 일관되게 정복적이고 투쟁적인 강함의 영성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부터 교회의 상황은 뒤집어졌다. 그때까지 박해받던 교회가 이제는 박해하는 교회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힘과 권력을 등에 업은 교회는 확장과 지배의 영성으로 더 큰 힘과 권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힘이 국가 권력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최고의 권좌를 차지하기도 했다.
물론 부분적인 흐름 속에선 이에 대한 반성과 거부의 흐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도원과 사막의 고독한 영성운동, 말씀대로 정직하게 순종하려는 새로운 갱신운동이 교회의 역사 속에 면면이 이어져 왔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지배체제를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부와 권력의 단맛에 길든 교회를 깨우는데 일정 정도의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대한 교회 권력의 중심부를 강타하지는 못했다.

또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서는 어떠한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영성과 성공의 영성이 큰 흐름을 타고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시대 교회의 설교를 들어보라. 믿음과 축복의 방정식이 강단의 주 메뉴이지 않은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받는다는 신앙 공식이 지난 유신 시대의 국민교육헌장처럼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성공이 나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성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나라의 삶인 것도 아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4)는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성공은 하나님나라에서 멀었으면 멀었지 가깝지는 않다. 믿음이 성공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정식이 아니다. 복음은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삶으로의 전환을 위해 있는 것이지 성공을 위해 있는 건 아니다.
복음의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속적으로 상향성의 영성을 추구하고 강화해왔다. 특히 오늘의 젊은이들은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성공과 승리를 주창하는 기독교 영성의 세례를 강하게 받고 자란 세대다. 소위 고지론과 비전론에 흠뻑 빠져 고지를 선점하자는 비전에 사로잡혀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강함과 승리의 영성, 생존과 성공의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몰리고 있다. 왜 이런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가?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강함과 성공을 추구하는 영성이 성공을 향해 매진하고, 지배체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데는 긍정적인 도전과 격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을 얻고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유익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장과 성공의 영성이 예수의 영성은 아니다. 아르헨티나 출신 신학자요 역사학자인 엔리케 뒷셀은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은 곧 형제인 타인·이웃을 지배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엔리케 뒷셀의 말대로 사회의 계층 사다리를 오르려는 자기 확장과 성공의 영성은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 욕망의 표출이요, 니체의 표현을 빌린다면 ‘권력의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지배 욕망의 표출인 성공의 영성으로 하나님나라를 증언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영성은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지배 질서에 편승하는 것이요, 세상의 지배 질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거해야 할 두 번째 영적 거침돌은 이원론에 근거한 현실도피적 영성, 즉 신앙에 몰두하는 신앙 환원주의다. 이원론은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신앙과 경건을 해치고 있다. 그것도 경건과 신앙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의 진정한 영성을 뿌리 채 흔들고 있다. 그리스에 뿌리를 둔 이원론은 모든 것을 ‘영’과 ‘육’이라는 두 차원의 세계로 나누어 ‘영’은 실체요 ‘육’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로티노는 물질이 원죄라고 했고, 그리스인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며 ‘육체’를 경멸하고,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영‘은 선하며 ’육‘은 악한 것이라는 선악의 대비가 뚜렷하다. 거룩과 세속, 기도와 정치, 교회와 세상, 영원과 시간, 영혼과 육체, 저 세상과 이 세상, 신과 인간, 예배와 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초월과 내재, 묵상과 행동, 영성과 해방, 영성과 감성, 금욕과 성, 안식일과 평일 등등. 여기엔 중간 세계도 없고, 통합된 세계도 없다. 오직 ’영‘과 ’육‘이라는 두 세계가 존재할 뿐이며, 두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에게 적대적일 뿐이다.
이처럼 삶을 두 개의 영역으로 쫙 나누면 세계가 선명하게 보인다. 애매모호한 점이 없어서 이해하기도 쉽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원론에 근거해 살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에 이원론을 말하는 것 같은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 예를 들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3:6),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15:50) - 이원론이 매우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절대 뽑히지 않을 만큼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이원론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지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한 적이 없다. ‘영’과 ‘육’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두 면이지 두 개의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하늘과 땅의 분리도, 거룩과 세속의 분리도, 교회와 세상의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별은 있지만 분리는 없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 세상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반면에 어느 목회자가 세상적인 방식으로 목회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방식이 거룩하냐 세속적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이지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성경과 이원론은 절대 손잡을 수 없는 정 반대의 세계관이다. 성경은 이원론을 수용하지 않는 유일한 책이다. 이원론은 모든 거짓의 근원이다. 교회의 보이지 않는 적이다. 이원론의 해악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구원의 지평이 좁은 개인주의적 우물 안 신앙,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실 도피적 신앙, 개인적 축복에 연연하는 개인주의적 신앙, 신앙의 세계에만 골몰하게 하는 신앙 환원주의적 신앙, 현실을 멸망받을 세상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현실 거부 신앙,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행함이 없는 신앙, 이게 다 이원론에서 비롯된 해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