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사회를 구성하는 축이요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신뢰가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고, 신뢰가 없으면 무엇 하나도 맘 놓고 할 수가 없다. 아이를 집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은행에 돈을 맡길 수도 없고, 세탁소에 옷을 맡길 수도 없다. 신뢰는 진실로 사회와 공동체에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하고도 절대적인 자산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소중하고도 절대적인 자산을 잃어버렸다. 사회의 어느 기관이나 단체보다도 신뢰받아야 할 교회가 신뢰도 바닥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10년에 실시한 일련의 조사 결과를 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교회를 신뢰한다는 의견은 17.6퍼센트에 불과하고, 48.4퍼센트가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는 더 낮아져 신뢰한다는 응답은 8.2퍼센트로 반토막이 났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5.4퍼센트로 뛰었다. 기관별 신뢰도 조사에서도 시민단체가 59.5, 언론기관 11.9, 정부 9.8, 사법부 7.0, 없음 6.9, 교회 3.2, 국회 1.4퍼센트로 나타났다(비기독교인의 경우). 종교별로도 가톨릭교회 41.0, 불교 33.5, 개신교회 20.0퍼센트로 나타났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신뢰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게 아니다. 사적이고 순간적인 극히 부실한 느낌에 기생하는 호감과 달리 신뢰는 오랜 관계와 시간 속에서 이드거니 드러나는 공적 부산물이다. 철학자 김영민은 호의와 신뢰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호의가 아무리 깊어도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고, ‘호의나 호감의 근저를 캐면 결국 이기심과 이모저모로 관련된 사적 정서로 낙착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심지어는 호의 그 자체가 신뢰의 형성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동무론. 28-29쪽). 옳다. 호의나 호감이 신뢰와 만나기란 참 어려운 노릇이다.

더욱이 삶이 온통 영업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뢰가 형성되기까지 기다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신뢰가 형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다면적인 관계가 요구되는데, 영업으로 치환된 삶 · 속도가 승부를 가르는 삶 · 네트워크가 중요한 삶의 현실을 살아내야 하니 어찌 쉽겠는가? 신뢰의 느림보다는 호감의 빠름이 현대사회의 생활 리듬에 맞기에 사람들도 저마다 호감을 얻는 길을 달려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복음 전도라는 지상 명령이 중요하다 해도 눈앞의 호감을 얻기에 몰두해서는 안 될 일이었는데, 교회조차도 세상의 호감을 얻기에 급급했다. 교회마다 총력전도 주일을 정해놓고,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었으니 말이다. 물론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정말 애끓는 심정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호객 행위가 너무 많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낚싯밥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저 이드거니 어리눅게 신뢰의 걸음을 걸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길게 호흡하지 못하고 호감을 얻기에 호들갑이었다.

 

나는 교회가 신뢰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낮은 신뢰도의 이유로 지목된 것이 ‘언론을 통해 부정적인 내용을 많이 접해서’가 18.6퍼센트, ‘그리스도인의 언행 불일치’가 15.6퍼센트, ‘그리스도인의 비윤리적 행동’이 14.9퍼센트로 나왔다.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 이유가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은 더 근원적인 이유는 호감을 얻기에 주력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이 부끄러운 현실을 깊이 곱씹어 보면서, 평소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 몇 가지를 토로해본다. 이제는 교회가 교인을 교회의 담장 안에 보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뜬 구름 같은 호감을 붙잡으러 어깨띠 두르고 세상으로 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말없이 삶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다. 교회 안의 충성 경쟁과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하면서. 또 신앙생활을 위해 삶을 지불하는 오류를 멈추면 좋겠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강박적인 신앙생활에서 해방되면 좋겠다. 신앙을 위해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신앙이 주어졌다는 진실을 기억하면서. 목회자들 또한 목회와 성공이라는 비정상적인 야합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목회의 본령에 충실하면 좋겠다. 허망한 호감에 교회의 명줄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적이 아니라 열매를 중시하면 좋겠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 욕망의 성급함을 떨치고, 이드거니 어리눅게 신뢰의 길로 낮게 걸어가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도타운 신뢰가 저만치서 웃고 있는 날을 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