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일상은 참과 진실보다는 본말전도(本末顚倒)와 왜곡(歪曲)으로 덧칠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만 놓고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먹기 위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것도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알고, 그 진실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건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공부는 최고의 생존무기인 지식과 스펙을 쌓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버렸습니다. 병원 또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병원의 흑자 운영을 위해 환자에게 과다 진료를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환자를 위해 부름 받은 의사 또한 환자 위에 군림하는 경우가 많고요. 업무를 처리하듯 환자를 대하는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모든 사람이 속한 국가도 그렇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국민이 곧 국가이지요. 하지만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을 짓밟는 사례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국가를 위한다면서 국가의 핵심 주체인 국민을 살상하기 일쑤였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억압하고 왜곡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본말전도와 왜곡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경우가 훨씬 많고, 본래의 뜻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사람과 조직을 찾아보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엔트로피의 법칙이 물질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기업과 조직은 물론이고 인간의 감정과 의지까지도 엔트로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철학자 김영민이 어긋남을 ‘세속 속에서 생기는 다만 일개의 불운한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차라리 구조’(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353)라고 말했듯이 본말전도와 왜곡은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세속의 피할 수 없는 얼굴입니다.

 

교회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본말이 뒤바뀌는 일, 이리저리 뒤틀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회의 중심인 예배부터가 그렇습니다. 예배란 본래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에 참여하는 것, 우리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배는 종교적 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시간이기보다 마음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공부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따르는 배움의 과정이기보다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과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증언하고 나누는 일이기보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전도를 촉진하기 위해 이러저런 값비싼 경품을 내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본말전도와 왜곡이 세속의 피할 수 없는 얼굴이듯 교회 안에도 본말전도와 왜곡이 처처에 쌓여 있습니다. 

 

이러저런 일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의 기본적인 관계에서부터 어그러졌습니다. 교회는 본래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교회가 단지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넘어 하나님나라를 닮은 지상식민지, 하나님 말씀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대안공동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증언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하나님나라를 향해, 세상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부지향적 방식이 아닌 외부지향적 방식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는 성도의 영적만족을 위해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외부지향적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교회와 성도가 내부지향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위해 성도를 동원하는 심각한 왜곡이 반복돼왔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동일시해가면서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요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순박한 성도는 교회의 가르침과 요구대로 교회생활에 전념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일상에서 신앙으로 생활하는 일에 힘쓰기보다 각종 예배와 기도회를 비롯해 수많은 훈련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최상의 신앙생활인 줄 알고 교회중심적인 신앙생활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목회는 성도를 동원하는 기술이 됐고, 성도를 동원하는 기술이 탁월할수록 목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대 들어 달라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의식이 성장하면서 교회생활로 신앙생활을 대체했던 잘못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교회생활에 동원된 신앙생활의 한계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나친 교회생활에 심신이 지친 성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주변을 보십시오. 교회생활에 지쳐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이라는 무거운 짐에 시달리고 있는 성도들이 정말 많습니다.

 

물론 교회생활은 신앙생활의 주요한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생활 없는 신앙생활은 국가 없는 백성으로 살겠다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국민을 동원하는 것이 사악한 일이듯 교회를 위해 성도를 동원하는 것 또한 사악한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위해 성도를 동원하는 것은 교회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일입니다. 일시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교회를 황폐화시킵니다. 이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곧 교회라는 진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진실을 조금만 곱씹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연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해 성도를 동원하는 사악한 죄악을 범해왔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교회가 성도 위에 서려하고, 교회가 성도를 배경으로 세상 앞에 서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성도 아래 숨어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를 딛고 서서 세상을 향할 수 있도록 교회는 성도 아래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교회는 정반대로 했습니다. 교회가 성도 위에 서려했고, 교회가 성도를 배경으로 세상 앞에 서려했습니다. 바로 이 욕망 때문에 성도를 동원하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성도를 동원하는데 재미를 붙인 교회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양을 잡아먹는 사악한 교회, 가장 교회답지 않은 교회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성도를 동원하면 안 됩니다. 성도 위에 서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엄마의 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푸른 초원이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어둠과 죄악을 대면하고 새롭게 돌이키며 일어서는 아름다운 회심의 성소여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생명과 삶이 약동하는 하나님나라의 지상식민지여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거룩한 지향을 견지하면서, 모든 일을 기획하거나 진행할 때에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방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회생활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고 맛보는 장이 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면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일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씩 온전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정녕 그렇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물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언제나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도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성도를 배경으로 세상 앞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 앞에 반듯하게 서야 하는 것은 성도이지 교회가 아니라는 것, 성도가 서는 것만이 교회가 서는 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지켜야 합니다. 성도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과 성도를 배경으로 교회를 드러내려는 욕망은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준 주님의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