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관련해서 꼭 기억해야 할 진실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 옳다. 신앙이 삶을 위해 주어졌지, 삶이 신앙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고유함을 담보하는 근원적 진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진술(약2:17)도 종교적 덕목의 실천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은 신앙으로 존재하지 않고 삶으로만 존재한다’는 냉엄한 진실을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이다. 기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삶의 향연으로 충만하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단지 호구지책인 생활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를 살리는 살림살이(삶)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소비하는 데만 코를 박지 않는다. 창조세계의 질서를 보전하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알짬은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을 통해 ․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초월하거나 백안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상을 하나님의 손길이요 호흡으로 알고 거룩히 모신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한다(골3:23). 다섯 달란트 받은 자처럼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는다(마25:16). 참으로 그렇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을 통해 ․ 하나님을 향해 사는 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이드거니 내려앉는다. 만일 신앙으로 현실을 초월하거나 백안시한다면, 또 신앙을 위해 삶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신앙적 도착(倒錯)일 뿐 참 신앙은 아니다. 삶과 유리된 신앙 또한 기독교적 신앙 체계는 아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을 종교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은 없다.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의무와 덕목을 실천하는 걸 강조하는 일종의 종교적 체계가 아니니까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본시 삶(살림살이)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또한 삶의 길이다. 구원은 곧 삶의 회복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을 통해 ․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의 체계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체계를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예배)다(롬12:1).
 
진실로 그렇다. 삶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일 수 없다. 진정한 예배는 오직 삶으로만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삶으로 예배하는 자(일상의 영성을 사는 자)는 결코 공적인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일상을 통해 예배함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예배를 일상과 구별한다. 공적인 예배를 일상의 중심이요 정점에 위치시킨다. 물론 그에게 예배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예배가 일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예배가 있다. 예배는 일상의 연장이며, 일상은 예배의 연장으로 선순환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적인 예배를 일상과 구별한다. 공적인 예배를 일상의 중심이요 정점에 위치시킨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그리 할 때에만 일상의 영성을 오롯이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의 예배만으로는 예배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문명과 자연의 이치와 같다. 사람에게 문명은 삶의 필수품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문명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렇다고 문명이 자연을 대체할 수 있을까? 언어도단이다. 문명으로 자연을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문명의 어리석음과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눈뜬 문명은 그런 어리석음과 오만에 빠지지 않는다. 자연의 필요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자연을 의뢰한다.

삶과 예배도 마찬가지다.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진정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예배다. 하지만 삶으로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이 곧 예배이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 해서 삶으로 예배를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문명으로 자연을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오만한 일이다. 사실이다. 삶이 곧 예배이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 해서 삶으로 예배를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신비,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배로 드리는 삶’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어리석음이요 오만함이다. 무릇 문명이 없는 자연이 비인간적이고, 자연이 없는 문명이 환상인 것처럼,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없는 ‘예배로 드리는 삶’은 비기독교적이고, ‘예배로 드리는 삶’이 없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모짝 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