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회색빛 우울에 빠뜨리는 건 내가 명령받은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진부하게 만드는 건 기계적인 일상을 무감각하게 반복함으로써 순간의 장엄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건 서로를 선물로 보기보다는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며 강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벌어지는 모든 갈등과 싸움을 깊이 들여다보라. 악의와 거짓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20이라면 선의(善意)와 일리(一理)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80이다. 갈등과 싸움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모든 갈등과 싸움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결같이 ‘내가 옳다’는 외침이다. 국제분쟁에서부터 부부싸움까지, 유치원 어린이들의 싸움까지 똑같다. 모든 갈등과 싸움의 현장에는 언제나 ‘내가 옳다’는 준엄한 외침이 교차한다. 교회 안에서는 한 술 더 뜬다. ‘내가 옳다’를 넘어 ‘내가 성경적이다’는 외침이 넘실댄다. 

정말이다.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갈등과 싸움은 대부분 악의와 거짓으로 인해 빚어지는 게 아니라 선의와 일리로 인해 빚어진다. 나의 선의와 너의 선의가 충돌하고, 나의 일리와 너의 일리가 대립하는데서 빚어진다. 정의를 세워보겠다는 몸짓들이 오히려 정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평화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들이 오히려 평화를 깨는 계기로 작동할 때가 많다. 동물은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이거나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데 반해 사람은 자기 선의를 실현하고 일리를 지켜내기 위해 싸운다. 물론 동물적 싸움도 한다. 적나라한 밥그릇 싸움, 맘에 드는 이성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치열하게 한다. 하지만 자기 선의를 실현하고 일리를 지켜내기 위해 대립하고 싸우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로 인해 서로의 삶에 생체기가 나고, 공동체의 평화에 금이 가는데도 여전히 그 싸움을 반복한다. 특히 종교 간의 대립과 전쟁이 치열했던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선의와 일리의 싸움에 적극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정말 웃기는 역설이요 치명적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묻자. 왜 선의와 일리가 토의를 풍성케 하고 문제 해결의 밑거름이 되지 못하고 갈등과 싸움이라는 분열적 파괴의 씨앗이 되는 것일까?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하나는 자기 선의가 얼마나 알량한 선의인지, 자기 생각이 얼마나 일리에 불과한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삶의 모든 것이 다차원의 세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잡계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인 물질의 차원에서부터 물리적인 생명의 차원, 감정과 정신의 차원, 영적인 차원 등이 나누일 수 없을 만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 하나 속에 수 천 수 만 가지 요인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옳다. 인간의 자아중심성과 일리 안에 갇힌 무지가 나름의 선의와 일리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싸움이라는 부끄러운 고통을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싸움에 관한 한 교회는 언제나 세상보다 한 술 더 떠왔다. 세상보다 잦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치열했고, 쉽게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분열로 막을 내렸다. 특히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보다 극심했다.
왜일까? 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에 취약할까?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누구보다 선의와 일리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나아가 자기 일리를 성경적 진리와 등치시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선의의 알량함과 일리의 일리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쉽게 선의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일리를 성경적 진리와 등치시키기 때문에 선의와 일리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과 싸움을 의의 싸움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고, 이 싸움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쉽게 극한으로 치닫고 심각한 분열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다각도로 접근하고 얽힌 것들을 풀어내는데 창조적인 밑거름이 되지 못하고 갈등과 싸움을 야기하는 삶의 비극적 현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자기 선의의 알량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선의에 속는 것이고, 자기 일리의 일리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리에 갇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다른 일리를 경청하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은 선의와 일리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갈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선의의 알량함과 일리의 일리성을 깊이 인식하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고, 상대방의 일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며, 그렇게 되면 선의와 선의가 만나고 일리와 일리가 더해져서 이해의 공감대가 확장되고 깊어지며, 합리적인 해법을 찾게 되고, 서로의 삶이 풍성해지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물론 인생에는 선의와 악의, 일리와 진리가 대립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런 경우엔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갈등과 싸움은 선의와 선의, 일리와 일리가 부닥쳐 벌어진다. 모든 사람 안에는 나름의 선의와 나름의 일리가 있으니까.
결국 관건은 이것이다. 나름의 선의와 일리가 갈등과 싸움의 도구가 되느냐, 삶을 풍성케 하는 창조적 살림의 도구가 되느냐는 사람됨에 달렸다는 것.


말씀샘교회 담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