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선 글에서 우리네 삶이 고독하고 허허로운 것은 외적 진실과 내적 진실을 맘 편하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건 뭘 뜻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는 걸 뜻한다. 진심이 굴절 없이 전달되고, 진실은 있는 그대로 공유하기를 바란다는 걸 뜻한다. 사실이다. 사람에게는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으며 살고자 하는 강열한 욕구가 있다. 그런데 누구나 원하는 그 일을 누구도 하지 못하며 산다. 다들 진심을 털어놓기를 두려워하고, 진실이 드러날까봐 겁낸다. 

왜 그럴까? 왜 맘 편하게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고,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누구나 원하는 그 일을 누구도 하지 못하며 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진심을 말해서 진심이 이해받은 적이 없고, 진실을 말해서 진실이 전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속으로는 진심을 말하고 싶은데도 상대방이 몰라주고 오해할까봐 혹은 판단할까봐 겁이 나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것이다. 또 진실이 어떻게 왜곡될지, 어떤 파문을 가져올지 몰라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에는 더 근원적인 요인이 있다. 사람이 완전하지 못해서 서로의 진심을 오해하는 것이고 진실이 갈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제각각 처한 입장이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끼고 있는 안경(세계관)이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의 진심을 들을 때에도 그냥 듣지 않는다. 제각각 자기 입장, 지나온 경험, 자기 안경을 끼고 재해석하며 듣는다. 진실을 바라보는 것도 그냥 보지 않는다. 다들 자기 입장에서 보고, 자기 안경을 끼고 본다. 이건 거의 피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절대적 한계 때문에 진심과 진실을 맘 편하게 주고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사람마다 처한 입장이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끼고 있는 안경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부분(일리)에 갇혀 있기 때문에 진심이 오해되고 진실이 왜곡되는 것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근원적인 요인은 또 있다. 사람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으로 악해서 자신의 영광과 이익과 승리를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진심과 진실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맘대로 비틀고 역이용한다. 특히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그런 일이 잦아진다.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자들이, 약자들보다는 강자들이, 못 배운 자들보다는 배운 자들이, 지위가 낮은 자들보다 높은 자들이 진심과 진실을 나누지 못하는 것도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얻고 잃는 이해관계(利害關係)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사실 100원을 얻기 위해 친구의 진실을 비틀고 역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100억을 얻을 수 있다면 오랜 친구의 진실이라도 얼마든지 비틀고 역이용한다. 

이처럼 사람이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완전하지 못해서(부분-일리에 갇혀서)이고 악해서이다. 그렇다면 절망해야할까? 아니다. 맘 편하게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이 영 없는 건 아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장애물을 넘어서면 된다. 

첫째, 자기 안에 절대의 똬리를 틀지 않으면 된다. 즉 부분과 일리에 갇히지 않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처한 입장, 과거의 경험, 끼고 있는 안경을 겸허하게 내려놓는 상대화작업을 쉼 없이 해야 한다. 나는 겨우 하나의 이치만 아는 사람임을 쉼 없이 일깨우면서 나를 상대화하는 작업, 역지사지를 통해 나의 입장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작업, 지나온 경험과 지식까지도 내려놓고 매 순간 영점(零點, zero point)에 서서 사물과 삶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둘째, 삶을 이해관계와 경쟁의 틀에서 보는 오랜 습성을 넘어서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소리에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중심과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끝없이 솟구치는 마음의 욕망을 맑게 씻어야 한다. 특히 지배 욕망과 승리 욕망을 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근원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들려오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종말의 날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에 내 삶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두 가지 장애물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한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고, 이해관계와 경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노력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당신이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으며 살기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