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오해를 피할 수 있을까? 오해 없이 진심과 진실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하자. 전혀 불가능하다.
실로 수많은 사람이 오해받음으로 인하여 속앓이를 하고 있으나 오해를 피할 도리란 도무지 없다. 

최근에 목사 셋이 대화를 하던 중 ‘순종’, ‘복종’, ‘순명’이라는 낱말 사용을 놓고
약간의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교묘하게도 세 목사가 선호하는 낱말이 각각 달랐고,
각 낱말에 대한 이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복종’이 자기 의지를 거스르며 따르는 것이기에
오히려 성경적인 의미에 부합한다며 적극 선호했고,
두 사람은 ‘복종’이 상명하복의 질서체계적 성격이 강하고
주체적 고민 없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며 사용을 꺼려했다.
‘순종’이나 ‘순명’에 대해서도 서로의 이해가 조금씩 엇갈렸다.

바로 이것이 삶의 축소판이다.
크게 보면 셋이 다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인데도 낱말마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고,
사람마다 낱말에 대한 이해의 뉘앙스가 다르듯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비슷한 것 같으나 미묘한, 그러나 중요한 이해의 차이가 있다.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공통점이 많아 소통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사람들도 서로를 알아갈수록
모든 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원해지는 경우,
이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깊이 알고 보니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아니, 어쩌면 모든 만남, 모든 일이 그렇다고 해야 옳다. 

세속의 삶은 그 자체가 어긋남이고(철학자 김영민), 사람의 관계는 그 자체가 오해다.
보라. 삶은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난다.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난다.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난다.
말이 마음에서 어긋나 수설수가 되고,
의욕이 영혼에서 어긋나 탐욕이 되고,
애정이 사랑에서 어긋나 욕정이 되고,
믿음이 진리에서 어긋나 신념이 되고,
선의가 행위에서 어긋나 사기가 된다.

오해도 그렇다.
나는 옆을 봤는데 흘겨봤다 하고,
나는 ‘아’라 말했는데 ‘어’라 들었다 하고,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는데 한숨지었다 하고,
나는 반가움을 표했는데 호들갑을 떤다 하고,
나는 겸손하게 말했는데 옆으로 돌려 말한다 하고,
나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했는데 다른 의도가 있다 하고,
나는 공중의 새를 가리켰는데 하늘에 삿대질한다 하고,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는데 아부를 한다 하고,
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는데 식탐이 있다 하고,
나는 편안하게 대했는데 버릇이 없다 하고,
나는 솔선수범했는데 나댄다 하고,
나는 세모를 보았는데 동그라미를 보았다 하고,
나는 상대에게 방해될까봐 문을 닫았는데 상대는 자기가 보기 싫어 문을 닫았다 한다. 

이런 일은 먼지처럼 흔하다.
하여, 우리는 오늘도 하던 짓을 멈칫한다. 몸을 움츠린다.
마음의 진심을 꺼내려다 만다. 오해받을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 삶은 실로 어긋남과 오해로 넘쳐난다.
앞글에서 말한 대로 사람은 제각각 처한 입장이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끼고 있는 안경(세계관)이 다르다.
더욱이 삶은 누구도 다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기계적이지 않다.
비슷한 것 같아도 미묘한,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결정적으로 사람은 신적 자기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 어긋남과 오해를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실로 모든 오해가 나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것을.
타자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조작할 수 없는 한 오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낼 재간이 도무지 없는 것을. 

어긋남과 오해는 실로 삶의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