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적 자기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부분적 존재다.
시대와 문화의 한계, 보고 듣는 것의 한계, 인지 능력의 한계, 신체 역량의 한계 등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존재다. 때문에 모든 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오직 자기 한계 안에서만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해를 피할 도리란 도무지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아예 이해(하고)받기를 포기해야 할까?
이해받으려 할 것도 없고, 이해하려 할 것도 없고, 애당초 갈 길이 다르거니, 하면서 맘 편하게 각자의 길을 가야 할까? 어쩌면 그것이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기왕 오해를 피할 수 없다면, 아예 이해하고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이해(하고)받기 위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마땅히 피해야 하지만,
아예 이해(하고)받기를 포기한 채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것은 의외로 오해의 필연에 갇히는 것이니까.
오해로 말미암는 아픔을 최소화하기 위한 도피 이상의 대안이 되기는 어려우니까.
이해(하고)받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 욕구와도 배치되니까.
 
어쨌든 현실은 분명하다.
백 번을 생각해봐도, 오해가 삶의 필연이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오해의 필연에 갇혀서도 안 된다.
우리의 삶은 마땅히 오해의 필연을 넘어 이해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오해의 필연을 넘어 이해의 경지로 나아가야만 진정한 차원의 삶이 꽃필 수 있다.
하여, 나는 오해의 맥락부터 찬찬히 되짚어보려 한다. 우선 한 가지 물음 앞에 서보아야 한다.
바로 이 물음. “한 번의 오해도 없이 한 사람을 이해한 적이 있는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아니, 한 번의 오해도 없이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확률 제로(zero)다. 내 몸으로 낳아 키운 자식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자식을 포함해, 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까지는 족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의 오해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체험적 진실이다.
 
진실로 그렇다. 오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해는 사실상 이해가 아니다.
오해의 아픈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해는 나만의 일방적 판단에 불과할 뿐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판단의 폭력일 뿐이지 이해는 아니다. 이해의 경지는 오직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의 오해의 과정을 통해서만 열린다.
바꾸어 말하자. 오해는 이해로 가는 징검다리다.
오해는 우리네 삶을 아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참으로 무거운 멍에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며,
관계를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차원에서 인격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축복의 문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다. 오해는 나를 알기 위해서도, 내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자라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자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안다. 내 시야가 언제 넓어지고 교정되었는지를 더듬어보면 안다.
나의 경우, 내 생각과 인격이 변화하고 자란 최고의 계기는 거의 언제나 오해였다.
사람을 깊이 오해하고 나서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넓어질 수 있었으며,
인생을 오해하고 나서야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넓어질 수 있었다.
정말이다. 나는 수많은 오해의 과정-오해하고 오해받는 과정-을 통해 내 판단의 잘못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를 상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삶의 복잡성과 신비에 눈뜰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눈뜰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조금, 정말 용의 눈물만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오해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배우고 있는 중이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또 뭔가를 한 번도 오해하지 않았다면, 정녕 내 눈-인생을 바라보는 눈, 사람을 바라보는 눈,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교정되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녕 그랬다면, 아~, 이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이 얼마나 암담하고 참담한 일인가!
 
무릇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오해에도 양면성이 있다.
오해는 분명히 우리네 삶을 아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참으로 무거운 멍에이기도 하고, 이해를 가로막고 관계의 숨통을 조이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해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이기고 하고, 삶을 풍성케 하고 관계를 깊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축복의 문이기도 하다. 오해는 삶의 필연일 뿐만 아니라 필요와 미덕이기도 하다.
진실로 그렇다. 모든 사람은 오해를 통해 자라고, 모든 관계는 오해를 통해 깊어진다.
오해의 아픈 과정을 겪지 않은 이해는 아예 이해가 아니고, 오해의 아픈 과정을 겪지 않은 관계는 피상적이고 사무적인 일종의 거래일뿐 만남과 관계로 자라지 못한다.
 
하여, 감히 말한다. 오해하고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해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기꺼이 오해하고 오해받으라.
그리고 오해를 통해 자라가라.
이해에서 자라고, 생각에서 자라고, 존재와 인격에서 자라고, 관계에서 자라가라.
한 마디 더. 이제는 오해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자.
오해가 꼭 삶의 걸림돌만은 아니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오해는 진정한 이해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도,
삶의 미덕이 될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