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1,722명을 대상으로
 ‘2014년 새해 기대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올해 가장 듣고 싶은 뉴스로 ‘중산층 확대와 빈부격차 해소’라는 응답이 나왔다고 한다.
30대의 71.6%, 40대 이상의 77.0%가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해소되어 중산층이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신년 국정 연설에서 빈부격차 해소를 최대의 국정 과제로 언급했다.
옳다. 상상을 초월하는 빈부격차는 현대사회가 풀어야 하는 가장 절박한 사회적 과제다.
동시에 가장 심각한 영적 과제다.

 

사실 가난은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고난이다.
가난 때문에 생명이 시들어가고, 가난 때문에 마음과 영혼이 생기를 잃고,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을 치유하는데 실패했다.
가난을 치유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의 총량이 천문학적으로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을 치유하는데 실패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빈부격차 때문이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빈부격차 때문에 부의 총량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치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계의 수입 분배를 살펴보라.
가장 부유한 20%가 전체 수입의 82.7%를 가져가고, 가장 가난한 20%는 겨우 1.4%를 가져간다(엘리자베스 A. 존슨이 쓴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136쪽에서 인용).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사랑을 알고 정의를 아는 인간이, 찬란한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한 인간이
이렇게 극심한 부의 불균형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수치 중의 수치다.
사실 세상의 어떤 동물도 같은 종 안에서 이렇게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없다.
먹이를 놓고 서로 싸우기는 하지만 독점적으로 차지하는 경우는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이렇게 부를 독점하고 있다. 

물론 빈부격차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아무리 사랑으로 나누며 산다 해도 빈부격차를 없앤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빈부격차는 너무 비인간적이다.
교양을 갖춘 인간, 과학기술을 개발한 인간,
위대한 정신문명을 이룩한 인간으로서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 우리 모두가 목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됐다. 

그렇다면 묻자. 왜 이렇게 부의 불균형 상태가 심화된 것일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배경을 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목사로서 근원적인 것 하나만을 얘기하려 한다.
존재에 집중하지 않고 소유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사실 이것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50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그는 [소유나 존재냐]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생활양식이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바뀌어야 죽임살이가 아닌 살림살이를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줄기차게 소유지향적으로만 살아왔다.
존재는 외면한 채 소유에만 집착했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데만 골몰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부의 양극화가 발생한 것이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야만적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토록 잔인한 야만적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책임도 아니고,
척박한 땅의 책임도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책임도 아니다.
부를 독점한 부자들의 책임이다.
그리고 소유 욕망에 눈먼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모두는 이 야만적인 부의 불균형 앞에서 석고대죄 해야 한다. 

우리는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죄인이다(렘17:9). 


  < 말씀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