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선교단체나 구제단체나 종교단체나 사회변혁운동단체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이 모든 게 담겨 있으되 이 모든 걸 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고 실행하는 하나님나라 삶터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단지 특정한 몇 가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삶의 양식을 좇아가는 삶터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가 교회의 원형이니까.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교회의 원형인 한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나라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고 실행하는데 집중해야 하니까. 만일 하나님나라 삶터가 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외면한다면, 그 교회는 또 하나의 종교적 아성을 쌓을 뿐이지 하나님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옳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 삶터가 돼야 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할까? 교회가 어떤 목회를 해야 하나님나라 삶터가 될 수 있을까? 그걸 찾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원형인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물어야 한다. 대부분 아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들음의 공동체요 수행의 공동체다. 또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평화 공동체, 모두가 주체로 서는 수평적 질서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섬기는 두레공동체다.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나라 삶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적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가 아무리 은사와 리더십이 탁월하고, 설교가 훌륭하고,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를 잘 가르친다 해도 현재의 목회자 중심 목회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아니, 턱없이 부족한 것을 넘어 아예 하나님나라적이지 않다.

교회가 하나님나라 삶터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목회의 주체가 아니라 교회가 목회의 주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목사가 성도를 교육하고 돌보는 중심에 있으되, 그걸 넘어 교회가, 즉 온 성도가, 아니 온 성도를 넘어 교회의 살림살이 전체가 목회적 기능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공적인 예배, 개인기도와 공동기도, 공동식사, 놀이, 각종 회의, 소소한 만남과 열린 대화, 수련회 등 기획된 행사, 소그룹 모임, 교회당 청소를 비롯한 각종 봉사활동 등이 목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나라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가 교정되고 변화되고 보완되고 성장해 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온전한 목회이며,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한 것도 바로 이런 목회적 삶을 살라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다.

 

물론 목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목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해야 한다. 이 세상의 소리와 가치관에 익숙해진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삶의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온전히 알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깊이 살피고, 보이지 않게 조정하며, 모든 지체들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옛말도 있듯이 성도들이 교회라는 방주를 산으로 끌어가지 않도록 방향키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목사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목회를 독점해서도 안 된다. 목사에게는 목사 고유한 역할이 있다. 목사는 그 일에 충실하면 되고, 성도들은 그 역할을 존중하면 된다.

 

그런데 현실은 많이 다르다. 목회자가 건강한 방향키 역할을 하기는커녕 종교적 아성을 쌓는 길로 잘못 이끄는 일이 다반사다. 목사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독점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반대로 이런 교회의 현실에 분노한 나머지 목사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적대시하는 경우도 적잖다. 심지어 교회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자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모두 가슴 아픈 일이다. 하나님나라 삶터여야 하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삶의 양식과 멀어지게 된 데서 벌어진 수치요 상처다. 지금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 밖에서 이런 수치와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

 

이제는 가슴 아픈 수치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목회자 중심의 목회에서 공동체 중심의 목회로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를 해야 한다.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들음의 공동체요 수행의 공동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평화 공동체, 모두가 주체로 서는 수평적 질서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섬기는 두레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 전체가 목회에 참여해야 하고, 교회의 살림살이 전체가 목회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목회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목회의 대상이어야 한다. 교회가 목회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목회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목회의 핵심이고, 이런 공동체 목회야말로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목회의 실체다. 또한 하나님나라를 닮은 삶의 양식 그 자체다.

 

만일 교회가 목회의 주체이기만 하거나 목회의 대상이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교회가 목회의 주체이기만 하면, 그 교회는 얼마 못가 하나님나라를 가리는 우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교회가 목회의 대상이기만 하면, 그 교회는 얼마 못가 힘센 누군가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힘센 누군가의 독단이 교회를 지배하게 될 테니까. 정말이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나라 삶터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들음의 공동체요 수행의 공동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평화 공동체, 모두가 주체로 서는 수평적 질서 공동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섬기는 두레 공동체 -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목회의 주체이기만 해서도 안 되고 목회의 대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목회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목회의 대상이어야 한다.

 

이 길은 민주화된 이 시대,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지그문트 바우만)인 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야 했던 아주 오래된 길이다. 그리고 이 오래된 길에 교회의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