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알듯 말듯한 얘기를 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8:1-2).

 

이 말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전체를 향해 한 것이 아니다.

소위 지식이 있는 자, 우상의 헛됨을 아는 자,

즉 하늘에나 땅에 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고 숭배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라도

개의치 않고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담대함이 있는 자들을 향해 한 것이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뼈있는 진실을 말했다.

첫째,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

둘째,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

 

성령의 눈은 참으로 정밀하고 깊다.

성령의 눈을 가진 바울이 말한 대로 지식은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자유케(8:9) 하지만 동시에 교만하게 한다.

교만은 영적인 측면에서 가장 치명적인 죄악인데, 지식이 바로 교만이라는 죄악을 부른다.

내 작은 인생길을 돌아봐도 그렇다.

지식이 있는 자 치고 교만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교양이든 전문지식이든 지식이 있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목소리가 컸고 윗자리에 앉곤 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보다 더 뼈아픈 진실을 말한다.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껍데기 지식이요 부족한 지식이라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사악한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라고(8:11).

심지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지식이라고(8:12).

옳다.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800년 전 독일의 에크하르트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 말했다.

첫째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시도할 때요,

둘째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 때요,

셋째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라고.

이것을 바울의 말로 바꾸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축소하고 왜곡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바울이나 에크하르트가 지식을 거부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바울과 에크하르트는 끊임없이 앎을 추구했던 자들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믿음의 길에서 패망한 것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만큼(롬10:2) 신앙에 있어서 지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과 에크하르트는 지식의 폭력성과 위험성,

그리고 지식의 한계에 대해서도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의 폭력성과 위험성, 지식의 한계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않는다.

자기 지식이 심히 부족한 지식이라는 진실을 외면한 채

자기 지식에 갇혀 살고, 자기 지식에 취해 산다.

지식의 칼을 마구 휘두르며 세상을 헤집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 세상을 보라. 세상 곳곳에 껍데기 지식, 천박한 지식, 사악한 지식,

죽이는 지식의 폭력에 짓밟히고 으깨어진 상처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도 온통. 

 

하여, 오늘 또다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

이라는 바울의 일침에 밑줄을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