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진리이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것은 진리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진리는 길 없는 세상의 길이라는 진실을 천명하신 것이다. 진리는 불의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너머의 이상(理想)도 아니고, 현실과 뒤섞일 수 없는 지고지순한 순결도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생명의 현실 안에서 작동하는 길이다. 진리는 시대를 뛰어넘는 옳음이요 문화를 초월하는 공감이다. 진리는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지 않는다. 진리는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현존할 뿐 낡거나 고리타분해지는 법이 없다. 물론 진리도 날카로운 도전과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진리보다 더 강력한 도전, 진리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이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모든 견고한 상식과 시대의 우상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전이요 날선 비판으로서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거대한 혁명이자 전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설교)는 왜 이리도 따분한 것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을까? 왜 이리도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유물 같은 것이 되어버렸을까? 왜 소시민적 욕망이나 부추기는 창녀처럼 되어버렸을까? 왜 이리도 속이 다 보이는 사탕발림처럼 되어버렸을까? 왜 삶의 깊이를 치고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것일까? 왜 듣는 이 없는 독백이 되어버린 것일까? 누구는 설교에 이야기(Story)가 빠져서 그렇다고 말하고, 누구는 설교에 현실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이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를 들여다보라. 시중에 떠도는 코미디와 유행어를 섞어가며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욕망하는 현실을 쥐어주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지상주의와 긍정의 힘을 통해 생활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탓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는 낡고 고리타분한 것일까? 왜 많은 사람들이 귀를 막는 것일까? 정말 주요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에 진리의 고유성, 진리의 진리성이 탈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진리의 고유성과 진리성이 자본주의적 유용성 · 효율성 · 실용성에 잡아 먹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근원적인 배경은 교회가 진리에 붙잡히기보다는 진리를 소유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부터 교회는 점차 귀를 막게 되었고, 진리의 날선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 보니 진리 앞에 굴복하기보다는 교회 맘대로 진리를 부리려고만 들게 되었으며, 진리를 부리는데 길들여지다 보니 결국 생명 없는 진리, 길 없는 진리, 진리 없는 생명이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물론 유용성 · 효율성 · 실용성이 진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진리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진리가 비록 효율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해도, 또 우리가 생각하는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해도,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진리보다 더 인간에게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라. 진리의 지극한 실용성을 긍정하는 말씀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유용성 · 효율성 · 실용성을 진리와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유용성 · 효율성 · 실용성이 진리의 고유성과 진리성을 집어삼켜버릴 수 있고, 또 실제로 집어삼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의 청중은 유용성 · 효율성 · 실재성이라는 잣대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철학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이 오늘 내 생활에 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내 생활에 유용한 결과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적인 생활에 효용가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조건 거부한다. 이뿐 아니다. 오늘날 교회의 청중은 소비자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선택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물건을 선택하듯 교회를 선택하고, 예배를 선택하고, 설교를 선택하고,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 선택의 기회와 가짓수가 많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지가 많지 않으면 이상하게도 구속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속도에 길들여져 있는데다가 빠른 변화에 익숙해진 탓에 신앙의 결과가 즉각적이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설교자들도 청중의 기호에 따라 진리 안에 있는 유용성 · 효율성 · 실용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 실현의 유용성, 성취의 효율성, 사회적인 실용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진리가 유용성 · 효율성 · 실재성에 잡아먹히는 오늘의 비극적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진리란 본시 즉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진리는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이고, 현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이며, 매우 유용한 것이면서도 유용성에 매이지는 않는 진리만의 고유성이 있다. 이 진리는 어떤 이유로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는 없다. 목회의 방편으로 떨어져서도 안 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방편이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혜의 처방전으로 치환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는 현실을 꿰뚫고 개혁하는 실용성,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실용성이어야지 현실에 영합하는 실용성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는 현실에 영합하는 실용성, 욕망을 실현하는 유용성, 성취를 담보하는 효율성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오늘의 설교자는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리를 증언해야 할 설교자들이 진리에 굴복하기보다는 청중의 욕구에 굴복해버린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청중을 얻는 자에서 증언하는 자로 돌아가야 한다. 진리를 소유하고 부리는 자에서 진리에 귀 기울이는 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는 진리의 실용성과 유용성, 즉 생명 있는 진리와 길이 되는 진리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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