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교회 선택 시대다. 교회란 본래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종교개혁 이후부터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물론 그때에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교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파와 색깔이 다른 교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교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되었다. 또 잦은 이사와 이런저런 교회적 상황이 교회 선택을 피치 못하게 하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예배할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교회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중요성을 아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출석할 교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 선택 시대의 두 양상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선택에는 두 가지 뚜렷한 양상이 나타난다. 첫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선택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사나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교회를 선택해야 할 경우,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할지를 몰라 고민한다. 출석할 교회를 정하기 위해 몇 개월씩 교회를 순방하며 기웃거리는 것은 보통이고, 1년씩 떠돌며 고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단지 교회가 많아서가 아니다. 교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갈만한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둘째, 작은 교회를 기피하고 대형교회를 선택한다. 사람들이 동네 구멍가게를 기피하듯 그리스도인들은 동네 작은 교회를 기피한다. 아무리 설교 내용이 좋고, 목회자의 인격이 훌륭해도 교회 규모가 작으면 일단 부담을 느끼고 등록을 안 한다. 예전에는 작은 교회에도 교회 정탐꾼들(예배 순회자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정탐꾼조차 없다. 작은 교회는 아예 선택의 대상에 끼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뭘 말해주는가?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현실 속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균열이 생각보다 깊다는 진실이 담겨 있고,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현실 속에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거대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뼈아픈 진실이 담겨 있다.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균열은 매우 심각하다. 그리스도인이 곧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불신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불신하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옷을 고르거나 상품을 구매할 때에도 그러지는 않는다. 불신의 눈초리로 이리저리 따지기는 하나, 불신의 골이 그리 깊지는 않다. 브랜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가지고 구매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에는 그 정도의 신뢰도 하지 않는다. 매우 깊은 불신의 눈으로 교회를 관찰하며 경계한다. 아니, 이제는 그마저도 지친 것 같다. 작은 교회는 아예 선택의 대상으로 고려조차 하지 않으며,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리 된 데에는 배경이 없지 않다. 성도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았다. 교회 유지와 성장을 위해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목회자들의 일탈을 여러 차례 겪으며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받았고,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열악한 작은 교회에서 과도한 짐을 지고 끙끙거려야 했던 아픈 경험들도 쌓여 있다. 목회자의 자질 부족과 본질에서 벗어난 설교에도 지쳐있다. 또 목회자와 성도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보니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나는 부담, 목회자와 성도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부자유함도 있다. 비단 목회자와 성도뿐 아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도 많은 상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은 이제 이름 없는 교회, 작은 교회는 아예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대형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실 작은 교회들이 지금의 고사위기에 내몰린 이유는 이것 외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작은 교회들이 지금의 고사위기에 내몰린 것은 교회의 여러 폐해가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결과라는 것, 특히 작은 교회들이 갖고 있는 한계와 폐해들이 적잖이 작용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교회를 기피하고 대형 교회로 몰리다보니 결국 지금의 위기상황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대형교회로의 수평 이동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8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누가 선도하거나 흐름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이 생겼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와 같은 흐름은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괴사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물론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의 생태계가 이처럼 황폐화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교회의 생태계는 아사 직전에 와있다. 몇몇 교회는 거대해졌지만, 그 덕분에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 동네 상점들이 백화점과 대형마켓에 잡아먹힌 것처럼 작은 교회들도 대형 교회들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종교시장이 되어버렸다. 능력 있는 놈은 살아남고, 능력 없는 놈은 도태되는 무한경쟁의 시장 질서가 교회 안에도 에누리 없이 작용하고 있다. 하여,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대형교회의 그늘에 가려 죽어가고 있다.

 

교회 선택에서 확인되는 모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행위 속에는 이처럼 교회의 현실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시장 질서, 교회의 비복음적인 행태, 그리스도인의 상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 모순의 실상을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는 소홀히 하고 상대적인 것들은 중시하는 매우 보편적인 본말전도(本末轉倒)의 모순에 빠져 있다. 교회 선택하는 걸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 선택의 기준을 보면 대략 이렇다. 우선 집에서 가까울 것, 본인뿐 아니라 자녀의 신앙교육에 유익한 교육 시스템이 있을 것, 목회자의 인품이나 설교가 훌륭할 것, 양육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시설이 좋을 것, 예배 분위기가 밝고 좋을 것, 소문이 좋은 교회일 것 등등이다. 거기에다가 사람들이 유명 브랜드를 좋아하듯 그리스도인들도 브랜드가 있는 교회를 좋아한다.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 소망교회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를 선호한다. 또 유명 브랜드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해 못할 것 없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를 선호하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문제의 성격이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 정도라면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에는 눈을 감고 상대적인 것에는 눈독을 들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앙교육 문제만 보자.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에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나무랄 이유가 전혀 없다. 신앙교육에도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시스템이 좋으면 신앙교육도 잘 될 것이라는 등식은 옳지 않다. 신앙교육은 성경 내용을 가르치는 지식 전달이 아니다.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만남과 유기적인 공동체의 분위기를 통해 배운다. 교육적 행위보다는 비교육적 행위, 즉 가정과 교회의 일상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 신앙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신앙교육에 있어서 함께 하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교육적 요소는 없다. 특히 같은 세대보다는 앞선 세대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주일학교를 운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이에 맞는 교육 환경과 교육 전문가들이 있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주일학교의 분반공부를 잘 운영하는 것도 매우 필요한 교육적 요소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가정과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환경, 가족을 포함한 성도들의 일상과 언행이 훨씬 중요한 교육적 요소라는 이야기다. 바꿔 말하자. 자녀를 인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것이 최선일 수 있지만, 양질의 신앙교육을 위해 좋은 교육 시스템을 갖춘 교회에 보내는 것이 최선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확실하게 말하자. 주일학교는 신앙교육의 일부분이다. 시스템을 잘 갖춘 교회의 주일학교가 그렇지 못한 교회에 비해 강점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하겠으나, 주일학교 교육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교육의 내실이 부족한 것은 피차일반이고, 큰 교회일수록 더 아수라장인 경우도 적지 않다. 본래 교육은 학생 숫자가 적을수록 좋다. 정부에서 학급당 인원수를 계속 줄여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여, 작은 교회가 신앙교육의 환경으로는 오히려 다 좋을 수도 있다. 더욱이 자녀의 신앙교육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 전부인 주일학교에 자녀의 신앙교육을 떠맡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자녀의 신앙교육을 위해 주일학교가 있느냐 없느냐만 따진다. 신앙교육의 본질적인 요소는 따지지 않고 상대적인 요소는 중요하게 따진다. 같은 또래끼리의 예배에도 장점이 있지만, 여러 세대가 함께 하는 공동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더 장점이 많다는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심각한 본말전도다.

 

둘째, 교회의 지체성은 외면하고 교회의 기능은 중시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배, 전도, 사회봉사, 선교, 교육을 하는 기능적 집단이 아니라 함께 사랑하고 소통하며 예배하고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과 기능은 유기적인 공동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다른 사회단체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교회의 지체성은 외면하고 몇몇 기능에는 집중한다. 선교나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의 지체됨(교회됨)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회에서 교회를 그런 잣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보다는 선교와 사회봉사를 하는 종교적 기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기능이 훌륭한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큰 교회는 여러 가지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니 당연히 좋은 교회라고, 또 좋은 교회이기 때문에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들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한다며 대형교회를 추켜세운다. 이것은 세상의 업적주의와 성공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가감 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현대인들은 소비생활에 익숙해 있다. 발품을 덜 팔면서도 비교 선택의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켓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교회생활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여, 언제든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간대의 예배, 다양한 색깔의 모임, 최상의 품질과 최신의 메뉴로 채워진 다양한 문화행사, 차별화된 설교와 교육 프로그램, 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연령대에 맞는 적절한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를 선호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속성이 있다. 같은 값이면 우아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예배하고 싶고,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찬양대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고, 자기 형편에 따라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대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 봉사에 참여하는 20%의 열혈 성도들이야 힘들겠지만, 나머지 80%의 성도들은 그들의 헌신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더욱이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최상의 예배서비스를 받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이다. 영적 소비자로서 신앙생활하기에는 대형교회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열심히 봉사하는 20%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시중들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 봉사하지 않는 80%의 성도들은 최상의 영적 축복을 맘껏 향유할 수 있어서 좋다. 하여, 다들 달콤함과 행복감에 취해 더 좋은 교회, 더 큰 교회로 몰려들었다.

 

교회 선택과 교회 생태계 괴멸의 상관관계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자. 다들 달콤함과 행복감에 취해 더 좋은 교회, 더 큰 교회로 몰려든 결과가 지금 어떠한가? 일부 대형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장의 축복과 영적인 복지를 맘껏 구가하고 있지만 교회의 생태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잘 아는 것처럼 교회 생태계는 지금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대형교회는 사역의 효율성과 탁월한 업적을 통해 몸으로서의 본질이 훼손된 것을 감추려 하고, 성도들 또한 풍성한 예배와 수준 높은 양육을 통해 신앙이 성장했다며 대형교회를 변호하고 있지만, 그건 변명일 뿐이다. 대형교회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개인적인 신앙성장의 유익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것과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죄악, 교회를 주님이 몸이 아닌 기능적인 종교집단으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죄악이다.

 

사람들은 교회 개혁이나 변화를 이야기할 때 교회의 규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형교회라 해도 헌금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쉽게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사태를 정확하게 보지 않은 것이다. 교회의 크기는 모든 문제의 본질이요 핵심이다. 몇 가지만 확인하자.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줄어든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욕심이 작동한다. 규모가 커질수록 비본질적인 일들이 많아진다. 따르는 자들이 많을수록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권력을 행사할수록 사람은 천박해진다. 더욱이 교회가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의 안락함과 편리함을 선호하면 할수록 교회는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더 큰 교회당, 더 많은 직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고, 교회가 더 큰 교회당과 더 많은 직원을 갖추려면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고, 또 더 많은 돈을 충당하려면 더 많은 성도가 있어야 한다. 실로 악순환이다. 이뿐 아니다.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교회는 몸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대형교회가 많아질수록 교회 생태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떤 지혜나 시스템으로도 막을 수 없고, 목회자의 훌륭한 인격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필연이다.

그런데 이런 필연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대형교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교회들은 저마다 대형화의 길을 재촉하고 있다. 사역의 효율성과 탁월한 성취, 개인적인 신앙성장의 유익을 내세우며 그 길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이것은 기업이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 운운하며 그 길을 달려가고 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 처음부터 교회 생태계를 파괴할 요량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교회도 복음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으로 열심히 하다 보니 성장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도 좀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형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쁜 결과가 주어졌다면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더욱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주님의 몸인 교회에 전가되었는데 말이다. 지나온 20여 년 동안 알게 모르게 교회 생태계가 황폐화되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지난 과거를 물고 늘어지려는 건 아니다. 대형교회로 이동한 자들을 정죄할 생각도 없다. 지난날을 향해 돌을 던진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또 우리 모두가 교회 생태계를 파괴한 공범이지 않은가? 사실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죄악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필자의 마음은 교회의 미래에 있다. 듬성듬성 녹지대가 남아 있기는 하나 전체 생태계는 점차 말라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치유하고, 교회의 생태계를 복원하는데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가려 한다. 교회 생태계가 이처럼 황폐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인의 교회 선택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나온 2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회 선택이 결국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지금의 아사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이어 한 가지 더 확인하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교회 선택 문제는 단지 교회 선택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를 선택하느냐는 곧바로 교회 생태계를 죽이느냐 살리느냐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이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진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구도 이 문제의 중요성(그리스도인의 교회 선택의 중요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하여, 필자가 부족하게나마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비록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교회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진실, 교회의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진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재앙이 닥쳤다는 엄정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생태계는 한반도의 생태계보다 훨씬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 시급히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실 필자는 한국교회에서 이보다 더 긴급하고 절박한 현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현안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함께 그 길을 찾아보자.

 

(다음에 계속)                                                                                                              정병선(말씀샘교회 담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