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핍박하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예수를 잘 믿는 자도 예수를 핍박할 수 있다. 일찍이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가 지적했다. “우리들이 고집을 부리고 야망을 세워 자기 의지로 관철하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은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할 때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 …… 우리는 주님을 위해 복음사역을 창달한다면서 고작 하는 일은 주님을 상처 내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마귀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다.”고 아주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실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예수를 핍박할 수 있다. 물론 믿음으로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경건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확신도 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한다고만 생각하지 예수님을 핍박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예수를 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신앙의 열정과 확신이 뜨겁고 강할수록 예수를 핍박하게 될 가능성과 위험성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 내막을 조금만 살펴보자. 하나님은 본래 자유의 영이시다. 그분의 지혜는 무한하고, 그분의 주권은 무궁하며, 그분의 의지는 온전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판단과 행위 또한 깊고 비밀스러워서 인간의 레이더망에는 포착되지 않는다. 하여, 그분은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최후의 계시인 예수를 통해 영광의 본체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 번도 인간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적이 없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말씀이 암시하듯 하나님은 영원히 은폐된 존재이실 뿐 아니라 알면 알수록 모를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분을 안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시스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의 뜻을 신앙적 교리나 종교적 시스템 안에 가두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의 경험과 내적인 확신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며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천 년 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실수를 반복하는 것 아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 주님의 뜻을 알고 있다는 확신은 오히려 주님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 쉽고, 옆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기보다는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고, 신앙의 시야 또한 매우 좁게 할 가능성이 많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과 다른 길을 갔고, 종내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확신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자들도 예수님의 뜻을 자기식대로 덧칠하고 왜곡하는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신앙의 확신과 열정이 해롭기만 한 건 아니다. 또 확신 없는 신앙이란 존재할 수도 없다. 비록 확신이 신앙을 낳는 건 아니지만 생명력 있는 신앙은 반드시 확신을 낳게 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확신이야말로 신앙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역사를 보라. 주후 25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독교가 125년 무렵에는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하는 공식적인 정책을 수립할 만큼 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겠는가? 기독교가 인종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사랑을 주창했고, 성적인 방종과 어린이에 대한 유기 등 이교 세계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엄격하게 금했으며, 유대인들로부터는 민족 반역자로 취급되기 십상이었고, 노예들조차도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놀랍게 확장된 배경이 무엇이겠는가? 고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앙적 확신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탁월한 신학자 톰 라이트도 초기 기독교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그 엄청난 성장 속도라고 말하면서, 그 배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헌신과 확신에 찬 충성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598쪽). 진실로 그렇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 추진력은 신앙적 확신의 심장으로부터 나왔다. 복음이 이천년 동안의 거대한 역사적 격랑과 어둠의 권세를 혁파하며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강고한 확신이 뒷받침된 신앙 때문이었다.

 

믿음은 본래 확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확신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다. 확신이 없는 신앙으로는 세상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을뿐더러 고난과 핍박을 돌파할 수도 없다. 확신은 정말 믿음을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과 사랑보다 자기 확신을 중시하고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매우 많다. 신앙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며 은혜의 결실인데 인간의 열심과 의지의 문제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고, 신앙의 결국이 하나님나라인데 종교적인 헌신과 윤리적인 경건, 그리고 물질적인 축복의 문제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교회는 아직도 신앙의 확신을 중시하고, 신앙의 열정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런 자들을 믿음이 특심한 자라며 지지해주고, 믿음의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 결과 겁 없이 판단하고, 어떤 의견이든 저돌적으로 돌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의 전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교회가 자랑하는 모범적인 신앙인들의 믿음이 반갑기보다는 부담스럽고 거북하다. 그런 자들에게서는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향기와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한없는 사랑과 자비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처절한 고백이나 무너진 자아의 신음소리도 듣기가 어렵다. 그들의 불타는 의지와 믿음의 열정을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다. 주님을 향한 그들의 헌신에 머리를 숙이며, 그들의 신앙적 진정성을 귀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결은 주님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도 “기를 쓰고 사생결단을 한 것처럼 주를 섬기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정신과는 판이한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상당히 복잡하고 모호한 일일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과 예수의 영을 따르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또 믿음이라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어둠과 죄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믿음처럼 어둠에 갇히기 쉽고, 죄성에 오염되기 쉽고, 욕망에 휘둘리기 쉬운 것도 없다. 사실이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영 앞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은 언제든지 죄에 오염될 수 있고, 욕망에 휘둘릴 수 있다. 그리고 죄에 오염된 믿음, 욕망의 포로가 믿음은 결국 예수님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어 있다. 신앙을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신앙의 내용은 천박해지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덧칠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랑 없는 앎과 하나님의 자유와 신비 앞에 서지 않는 믿음만 폭력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모든 앎도 마찬가지다. 모든 앎은 모름 앞에 설 줄 알아야 한다. 모름 앞에 설 줄 모르는 앎은 언제나 폭력으로 작용하기 쉽다.

아주 정직하게 말하자. ‘믿습니다’를 반복하는 것은 종교적인 강박에 불과할 뿐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참 신앙은 ‘믿습니다’를 반복하기보다 ‘주여, 나는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의 무지와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며 무릎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