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를 보노라면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심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괜히 뭔가를 들킨 것 마냥 얼굴이 화끈거린다. 성도들의 헌신과 기도의 진액이 봉헌된 교회당인데도 주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믿음의 순결함도 보이지 않고, 교회의 영광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가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멋지게 윤색된 욕망의 덩어리가.

 

사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창조주로부터 자유의지와 무한한 잠재력과 가없는 상상력, 독특한 자아 정체성, 나와 타자를 비교하고 판단할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을 부여 받은 인간, 참으로 고상하고 우아하며 고도의 정신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그 모든 것에 버금가는 욕망의 크기를 갖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경계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무한하다.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 욕망을 비롯해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안전 욕망,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 욕망, 사랑받고자 하는 애정 욕망,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소속 욕망,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시 욕망, 닮고자 하는 모방 욕망, 영원히 살고자 하는 생명 욕망 등 갖가지 욕망이 인간 안에 깊이 웅크리고 있다.

특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을 생산하는 사회, 욕망을 축으로 하여 돌아가는 사회다. 외적으로 보면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축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 같지만 더 깊은 내면을 보면 인간의 끝없는 과시 욕망, 소유 욕망, 모방 욕망을 축으로 하여 돌아가는 게 사실이다. 욕망을 생산하지 않으면 무한 소비와 무한 생산이 불가능할 것이고, 자본가들의 이익 또한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주역인 자본가들은 쉼 없이 만인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는 작업을 한다. 아니, 욕망 자체를 생산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진정으로 생산하는 것은 상품이기 전에 욕망이다. 상품보다 더 근원적인 구매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다. 하여, 자본가들은 욕망을 생산하기 위해 광분하고 있다. 광고비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광고의 내용 또한 상품을 알리는데서 구매 욕망을 조종하고 자극하는 고도의 심리 메커니즘으로 진화했다. 회사 브랜드와 상품 이미지를 사람의 정체성과 연계시키는 엄청난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기도 하다.

 

진실로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생산하는 사회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채울수록 더 커지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항아리와 같다. 때문에 한 번 가동된 욕망의 톱니바퀴는 계속 돌게 되어 있고, 욕망의 톱니바퀴가 돌고 도는 한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도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폐해의 근원이다. 환경오염과 자원의 고갈은 말할 것도 없고, 부의 양극화라는 사회악이 발생한다. 사실이다.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가 돌면 돌수록 소수의 자본가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절대 필연이다. 그리고 이 필연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다 아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사회악으로 고통받고 있다. 1%의 부자들이 99%의 재화를 독점하는 악독한 현실, 몇몇 초우량 기업이 지구촌 전체를 집어삼키는 무서운 현실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이것은 나눔 없는 부의 집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폭로하는 인간 보고서이자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의 치부를 보여주는 쇼윈도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실상을 아셨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인간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이미 꿰뚫어보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보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이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이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여기서 ‘탐내다’로 번역된 말의 원뜻은 단순히 ‘욕망하다’라는 의미이고,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어떤 행위라기보다는 욕망 자체다. 그러니까 열 번째 계명은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의 욕망을 금했을까? 모방 욕망을 깊이 연구한 르네 지라르의 말을 들어보자. “개인들은 날 때부터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거나 단순히 욕망하기에, 인간 집단 가운데에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다. 이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공동체의 조화, 그리고 심지어는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항상 위협할 것이다.”(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21쪽). 그렇다. 욕망을 절제 하지 않으면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공동체의 와해를 피할 수 없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 계명을 통해 욕망의 자율성을 억누르셨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마5:3)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다른 뜻이 아니다. 끝없는 욕망의 에너지를 다스려야만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욕망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살펴본 것처럼 죄로 오염된 인간 사회의 특징은 욕망의 정당화와 욕망의 생산으로 나타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났다. 그렇다. ‘욕망에 매이느냐, 욕망으로부터 자유하냐’ 바로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나라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교회는 실패했다.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인 교회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소유 욕망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전 욕망, 권력 욕망, 과시 욕망, 승리 욕망, 모방 욕망에 종처럼 휘둘렸다. 더 많은 영향력, 더 많은 선교,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기치로 내걸기는 했지만 결국은 욕망에 무릎 꿇고 말았다. 소비자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성도와 목회자들, 비정상적인 대형교회로의 몰입(미국 교회의 경우 2천명 이상 모이는 대형교회가 1970년에는 10개뿐이었는데, 1980년에는 50개, 1990년에는 250개, 2005년에는 1200개로 증가했음 - 하나님을 팝니다, 158쪽), 교회의 양극화,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정당화와 부추김, 목회 세습, 돈 뿌리는 총회장 선거, 각종 부패, 먹고 먹히는 생존 경쟁, 교회의 브랜드화, 이 모든 것은 욕망을 생산하고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런데 참 묘하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대형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징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목회를 했기 때문에, 믿음과 목회 역량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형교회를 이루기까지의 뜨거운 열정과 지난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며 믿음의 영웅으로 떠받든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걸 놓쳤다. 대형교회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은 대형교회를 생산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유전자에서도 그런 교회는 나올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 비정상적인 대형교회는 인간의 욕망이 종교와 결합한 참으로 비루한 욕망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의 총화인 대기업의 출현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욕망의 결정체일 뿐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이런 판단을 지나치게 부정적이라고, 작은 교회 목사의 비뚤어진 심보라고 힐난할지 모르겠다. 또 성도들이 좋은 교회를 찾아 몰려오는 걸 어떻게 막느냐고, 영적으로 살겠다고 찾아오는 성도들을 내쫓기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항변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의 삶은 가난하고, 작고, 무력했다. 단 한 번도 욕망을 추구하지 않았다. 소유 욕망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전 욕망, 권력 욕망, 과시 욕망, 승리 욕망, 모방 욕망, 지배 욕망에 휘둘린 적이 없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일, 성을 쌓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은 오직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일에 전념했다. 예수의 몸인 교회 또한 그랬어야 한다. 힘써 욕망을 해체하는 길을 갔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욕망을 포장하기보다는 욕망을 거부하는 길을 갔어야 한다. 아무리 목회자의 능력이 탁월하고 성품이 훌륭해서 성도들이 몰려온다 해도 지배 욕망, 과시 욕망, 소유 욕망을 해체하기 위한 극단의 조치 - 교회를 분립하여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선택을 했어야 한다. 규모의 차이가 없을 수는 없으나 지금과 같은 양극화 현상은 막아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내(우리)가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하겠다는 선한 욕망조차도 포기했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그동안 욕망을 해체하기보다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주기에 바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과 욕망 경쟁에 몰두했다(예를 들면 고지론). 어쩌면 세상이 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욕망을 정당화하며 부추겼다. 하나님을 욕망 성취의 통로로 이용했고, 욕망의 성취를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대형교회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후안무치한 짓을 했다. 인간의 욕망과 종교가 결합한 참으로 비루한 욕망의 결정체인 대형교회를 부러워하고 모방하며 뒤쫓아 가기에 급급했다.

 

사실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 교회는 운명적으로 대형화의 길을 가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욕망이 내달리는 길을 가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교회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적 또한 세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불타고 있는 욕망이다. 욕망을 해체하고, 욕망의 종노릇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싸워야 할 가장 근본적인 싸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진정한 제자도의 핵심이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가장 중요한 싸움에서 실패했다. 욕망을 다스리기보다는 욕망의 똥구멍을 열심히 핥았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 앞에서 비루하기 짝이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말씀샘교회 담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