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다. 옳다. 사람은 성공할 때에 넘어지기 쉽고,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에 어둠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옳지 않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옳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을 보자.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판하지만 그들은 결코 속물이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속 다르고 겉 다른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진지하고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던 자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끈질기게 옳음을 추구했던 자들이다. 실제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에게는 도덕적 압력을 행사했고, 대중에게는 신앙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선을 다해 정결함을 유지하고자 했던 자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신과 맺은 계약의 규례를 따르며, 약속된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실로 신뢰와 존경을 받을 만한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옳음이 결국 그들을 넘어뜨렸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세리는 자신의 죄악 됨을 생각하며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한 반면, 바리새인은 다른 죄인들과의 다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눅18:9-14). 여기서 바리새인이 거론한 다른 죄인들과의 다름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과의 다름이 목표일 수는 없으나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붙잡으면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다름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다름은 오히려 칭찬할 일이다. 특히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도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마땅히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아야 한다. 세상보다 더 큰 힘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다름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름’ 자체는 매우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감사는 가장 으뜸가는 신앙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감사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감사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다름’을 감사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떤 분들은 왜 이것이 문제인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자신의 ‘다름’을 감사한 것을 깊이 따져보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세계관이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이웃을 하나님의 눈(긍휼의 눈)으로 보지 않고 율법의 잣대로 평가했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비교 우위를 중시했다는 문제가 있다. 셋째, 자신의 의로움을 스스로 긍정했다는 문제가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만일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과 타인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자신의 다름을 감사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죄인들과 달랐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불의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러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놀랍게도 자신의 정체성과 의로움에 대하여 긍지가 있었다. 하나님을 바르게 따른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긍지와 확신과 자부심 때문에 바리새인은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인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은 옳음에 대한 긍지와 확신과 자부심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진실을 꿰뚫어보셨다. 옳음에 눈이 어두워져 정작 보아야 할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위험성을 깊이 꿰뚫어보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 간자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악한 짓을 밥 먹듯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신의 옳음에 갇혀서 허물을 보지 않는 것 또한 그 못지않게 위험하다. 인생길을 걸어갈수록 더 실감한다. 옳음이 저지르는 죄악이 참으로 많고, 확신범이 저지르는 죄악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범죄가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와 삶의 현실을 보라. 종교 전쟁보다 더 잔인하고 추악한 전쟁이 없고, 비교적 훌륭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일수록 뿌리치기 어려운 자만과 교만이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옳음이 그름을 내치고 짓밟는 것을 보면 옳음 속에 숨어 있는 잔인한 폭력성을 읽을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열심히 관찰해보라. 옳으면서도 부드러운 사람, 옳으면서도 겸손한 사람, 옳으면서도 따뜻한 사람, 옳으면서도 포용력이 넓은 사람, 옳으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껏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 예외였다. 나사렛 예수. 나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바로 그 사람을 보았다. 옳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사람, 정의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 한없이 옳으면서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예수님은 정말 한없이 옳으면서도 부드럽고, 한없이 옳으면서도 겸손하고, 한없이 옳으면서도 따뜻하고, 한없이 옳으면서도 포용하시고, 한없이 옳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죄 덩어리인 나를 한 번도 내친 적이 없으시다. 올곧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걷어차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예수님이 참 좋다.

 

(말씀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