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의 최대 이슈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과 인간과 뱀 사이에서 벌어졌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선악과를 먹을 것이냐, 먹지 말아야 할 것이냐 하는 거였습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으냐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선악과 속에 담겨 있는 문제의 본질은 지식의 문제였습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지식의 길, 이성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악과 문제는 사실상 지식의 문제였습니다.

 

뱀은 지식을 매우 긍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뱀은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지식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의 눈을 뜨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인간을 피조물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반대로 지식이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식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뱀은 지식의 길을 가야만 하나님과 같은 주체자로 살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하나님은 지식의 길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앙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의 핵심 이슈는 지식의 길을 가느냐, 신앙의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그 이슈는 에덴동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을 갈거냐, 이성의 길을 갈거냐 하는 문제는 오늘 우리의 문명을 좌우하는 최대의 이슈이고, 한 사람의 삶과 인생을 좌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슈입니다. 물론 신앙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야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 살면 되니까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성이야말로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골치 덩어리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이성은 인간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성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성이란 놈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끊임없이 신앙에게 시비를 겁니다. 링(ring) 위에서 권투 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쉬지 않고 잽(jab)을 날리듯이 이성도 쉬지 않고 신앙을 쪼아댑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이성 때문에 힘드신 적이 많았을 겁니다.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적잖이 해매였을 겁니다. 이성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기도 했을 겁니다.

 

신앙은 이성 앞에만 서면 작아집니다. 심하게 흔들리고 소리 없이 쪼그라듭니다. 가장 위대한 구원의 사건이고, 가장 탁월한 사랑의 사건인 십자가를 생각해봅시다. 십자가 사건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복음과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최고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폭발해버린 사랑의 헌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 지나가던 자들조차도 혀를 끌끌 차면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고 큰소리치던 자여, 너 스스로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지 않습니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고 비웃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라’고 욕했지 않습니까(막15:29-32). 말이 안 되는 엉터리니까 비웃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처럼 우스운 일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것처럼 황당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을 때에라도 하나님이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며 구출해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하나님이 아들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이 만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증명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처형하려 했던 자들이 어찌할 줄 모르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숨을 거두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고는 하나(마27:51-52), 정작 예수님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력하게 죽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한 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 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한 자, 한 때는 각종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쫒아내던 능력자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었습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동방의 의인이요 거부였던 욥이 쫄딱 망하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가 되었을 때 욥의 친구들이 뭐라 했습니까? 욥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긴 욥이 저토록 비참하게 망한 걸 보니 하나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지요. 욥이 처한 상황을 놓고 판단해보면 사실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욥이 엄청 큰 죄를 범했든지, 아니면 욥이 섬기는 하나님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욥의 친구들이 초지일관 욥에게 주장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차마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욥에게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것이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을 테니까요.

 

시편의 울부짖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10편을 봅시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한 자는 자기 야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을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집니다. 악인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심이 없으며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 합니다.”(시10:1-11).

바로 이것이 시인이 만난 현실이었습니다. 너무도 비루한 현실, 선악이 뒤집힌 현실을 고발하면서 시인은 간청하듯 탄원합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하고 말하게 내버려두십니까?”(시10:12-13). 정말 피를 토하는 탄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침묵하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이 활개를 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로 다할 수 없는 곤경을 만나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는데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모르는 듯 차갑게 외면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 때문에 낙망한 적이 없으신가요? 나 홀로 텅 빈 들판에 버려진 것 같은 상실감에 눈물을 훔친 적은 없으신가요? 물론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시인이 경험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정말 기막힌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인생에는 너무 많습니다. 인간이 그려낼 수 있는 어떤 비극 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인생입니다. 셰익스피어나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이 그려낸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일들이 인생에서 벌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 눈물로 탄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외마디 소리 지르며 마음의 문을 쾅 닫아버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울부짖는 예수님, 졸지에 불어 닥친 재앙 앞에서 정죄당하는 욥, 불의한 현실 앞에서 탄원하는 시편 기자, 그리고 불의한 발길에 차여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다고,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성과 지식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모든 것들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어디론가 빠져나가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과 이성은 본래 추구하는 영역이 다르고, 작동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는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세계 내적인 것, 역사 내적인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연구하기에는 이성보다 더 안성맞춤인 도구가 없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세계 내적인 것, 역사 내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성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려 일상의 세계, 경험의 세계에 붙박아 두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맞추려고 합니다.

대신에 신앙의 영역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넘어섭니다. 이성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고, 포착되지도 않습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신앙과 이성이 전혀 다른 세계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신앙 안에는 이성적으로 매우 탄탄한 논리의 토대가 있습니다. 어떤 철학보다 더 깊은 지식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성으로는 신앙 안에 있는 탄탄한 논리와 지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앙으로 도약해야만 정교하게 짜인 신앙의 지식과 논리가 보이지 신앙의 도약이 없는 이성과 지식만으로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신뢰합니까 신뢰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신뢰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전략들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는 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또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도움을 요청합니까 요청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기도로 요청하겠지요. 하지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도와주실지,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압니까 알지 못합니까?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하실 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깜깜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 말씀에 통달한다 하더라도 깜깜함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성의 입장에서 볼 때 신앙의 세계는 깜깜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에 위대한 약속이 있다고 믿고, 그 깜깜함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떠났습니다. 노아는 어디에서도 홍수의 낌새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약속하신 것을 손에 쥐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약속하신 것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습니다(히11장). 이들은 한결같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현실을 좇아갔습니다. 일상의 경험과는 반대되는 길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니 이성이 보기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살고, 들리지 않는 말씀에 목숨을 거는 신앙이 얼마나 엉터리 같아 보이겠습니까. 이성의 눈으로 보면 신앙은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성은 전체를 보지 못해요. 부분밖에 못 봐요. 본질, 근원을 못 봐요. 창조의 진실과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를 못 봐요.

 

이처럼 이성은 신앙을 엉터리라고 생각하고, 신앙은 이성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신앙과 이성 사이에 어찌 긴장이 없겠습니까. 신앙이란 깜깜함 속을 걸어가는 것인데 왜 불안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있는데 어떻게 긴장이 없을 수 있고, 불안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부조화가 있는 게 당연하고, 메꾸기 힘든 간격이 있는 게 당연합니다. 긴장과 불안, 의문이 없는 게 이상한 것이지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걸 부정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긴장과 불안을 떨쳐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이성과 신앙 사이에 긴장과 불안이 있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적극적인 증거입니다. 때문에 힘들지만 긴장과 불안을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때로 흔들리면서, 머리를 찧어가면서, 자신의 이성과 싸워가면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면서 이성과의 갈등과 긴장 없이 가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환상입니다.

물론 신앙의 지식이 깊어지면 이성이 아무리 건드리고 시비를 걸어도 꿈쩍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성의 소리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과의 난타전 없이 신앙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과의 지난한 싸움을 통해서만 신앙은 견고해지고 깊어집니다. 신앙의 지식이 탄탄해집니다.

 

사실입니다. 이성으로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성과 지식을 통해서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신앙으로 설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지식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성의 길,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였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심판함과 동시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홀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은혜로운 작정을 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창3:15). 이것이 바로 원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뭐라 말씀했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요14:6).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찾아낸 그 무엇도 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이성과 지식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한 업적을 성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길이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무엇에도 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기 자신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고 진리입니다. 이성으로 발견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이성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창조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이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지식이 왕 노릇하는 시대입니다. 이성이 독주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이성은 생각보다 토대가 약합니다. 이성이 대단한 것들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그리 신뢰할만한 수준은 못됩니다. 이성은 굉장히 허약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사에서 벌어지는 일들, 역사의 내일에 대해서조차도 이성이 아는 것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사실상 거의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해봐야 거대한 태평양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성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이성을 사용하며 살아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의지하지는 마십시오.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도록 허용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이성과 지식이 왕 노릇하는 시대에 이성과 지식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성과 지식을 상대화하고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과의 부조화, 결코 메꿀 수 없는 현실과의 간격에서 오는 긴장과 불안을 겪어 내야 합니다. 시대의 이성과도 싸워야 하고, 나 자신의 이성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성과의 긴장과 싸움이 없이는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영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힘든 교훈 - 우리는 겸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나아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을 배우도록 요구받고 있다.”(종교개혁시대의 영성. 112쪽).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새겨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지성 이상의 앎이 있습니다.

 

(말씀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