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깨어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라도 늘 근신하며 깨어있어야 한다(벧전5:8). 그런데 깨어있음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깨어있음이 혹 심리적인 강박으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깨어있어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이 없지는 않을까?’하는. 찬찬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의외로 그런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어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 예배와 기도회와 그리고 각종 교회 생활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통해 깨어있음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아는 것처럼 강박이란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내적 상태를 말한다. 무엇에 눌리거나 쫓겨 심하게 압박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삶을 끌어올리는 해방과 상승의 에너지가 아니라 삶을 끌어내리는 예속과 하강의 에너지가 바로 강박이다.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강박에 사로잡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랑을 생각해보자. 사랑은 모든 생명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에너지이다.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한 에너지는 없다. 하지만 사랑도 강박이 되면 서로를 옭아매는 목조르기가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배움의 존재다. 배움처럼 인간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공부도 강박이 되면 단순 정보를 저장하는 뇌운동에 불과하게 된다. 적잖은 학생들이 사랑과 공부의 강박에 시달리다가 종내 자살하는 것에서 보듯, 모든 강박은 생명의 기운을 억압하며 갉아먹는 죽음의 블랙홀이다.

 

인간은 본래 욕망하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이 갈망하는 모든 욕망은 강박이 될 수 있다. 특히 사랑, 공부, 성공, 아름다움 등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것이거나 꼭 실현하고 싶은 이상에 가까운 것일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 욕망이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것일수록,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에 속한 것일수록 집착하기가 쉽고, 집착이 강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강박이 되기 쉽다. 신비한 영적 체험을 생각해보라. 위로부터 임하는 영적 체험의 순간이 너무 황홀하고 기쁘다 보면 그 체험의 순간에 머무르고 싶고, 같은 경험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며, 그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강박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당위와 집착, 집착과 욕망, 욕망과 강박은 백짓장 한 장 차이다. 때문에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강박으로 내달릴는지 알 수 없다. 정말이다. 깨어있음이야말로 강박으로 내달리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제어막이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당위조차도 강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강박은 마치 줄을 풀어놓지 않는 현악기와 같다. 모든 현악기는 팽팽한 줄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려면 줄을 팽팽하게 당겨야 한다. 하지만 연주를 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악기의 줄을 적당히 풀어놓아야 한다. 적당히 풀어 놓지 않으면 악기가 휠뿐만 아니라 줄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심하면 줄이 끊어지기 때문에 모든 연주자들은 필요할 때 외에는 줄의 긴장을 풀어준다. 이것이 현악기를 다루는 기본이다.

사람도 현악기처럼 다뤄야 한다. 줄의 긴장과 풀어짐을 적당히 조절해주어야 하는 현악기처럼 사람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도 긴장과 풀어짐의 조율을 잘 해주어야 한다. 만일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해 결국은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무너져 내리거나, 아니면 깨어있는 것처럼 꾸미는 외식을 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적당히 줄을 풀어놓지 않으면 현악기가 오래가지 못하고 망가지는 것처럼 사람도 적당히 긴장을 풀어주지 않으면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더 근본적인 진실은 이것이다. 본질적인 것에 깨어있으면 덜 중요한 많은 것으로부터는 자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깨어있다는 것이 뭔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과 피상적인 것,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 아닌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질서지우는 것 아닌가. 이상을 꿈꾸면서도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 아닌가. 때문에 진정으로 깨어있으면 헝클어졌던 삶이 정돈된다. 생활의 크고 작은 많은 긴장으로부터 해방된다. 삶의 호연지기를 회복하게 된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기쁘게 긍정하면서 지나친 욕망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지나치게 자신을 들볶지 않게 된다. 웃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품게 된다.

 

사실이다. 진정한 깨어있음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빈틈을 만들어내는 깨어있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는 깨어있음이 참 깨어있음이다. 빈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깨어있음은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니며, 빈틈이 없는 완벽함과 느슨함이 없는 팽팽함 또한 깨어있음이 아니다. 깨어있지 않은 풀어짐과 빈틈은 나태와 방종의 이웃이고, 풀어짐과 빈틈이 없는 깨어있음은 망상과 강박의 이웃일 뿐이다.

하여, 나는 희망한다. 깨어있기에 생활의 나사가 여기저기 풀린 사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