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신학대학교 유해룡 교수가 진행하는 영성훈련에 참여하느라 8월 중반의 한 주간을 포천에 있는 은성수도원에서 지냈다. 하루에 두 번 예배를 드리고, 한 번 영적 지도를 받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독방에서 홀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전부인 생활을 했다. 물론 침묵으로 일관된 생활이었다. 공동으로 식사를 할 때에도, 서로 마주칠 때에도 눈인사 정도만 나눌 뿐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쯤 지나자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날마다 분주하고 시끄럽게 지내던 사람들이 절대침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하여, 침묵의 계율을 깨고 한 자매님에게 슬쩍 물었다. “침묵하는 생활이 어떠세요? 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사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침묵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라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그런데 자매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다. “참 좋아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요.” 예상을 빗나간 대답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공감이 됐다. 말을 주고받는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말의 무게에 짓눌려 있고, 말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는지.

말없이 한 주간을 살아보고서야 알았다. 수없이 떠다니는 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아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말이 없어지자 사건과 일은 뒤로 사라지고, 주변의 작은 사물들 - 나무, 돌, 허공, 꽃, 물 - 이 ‘나 여기 있다’며 눈에 들어오는 신기한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더라는 것을. 정말 그랬다. 침묵은 단지 말 없음이 아니었다. 침묵은 마음, 정신, 영혼의 쉼이었고, 존재들과의 속 깊은 만남이었고, 내면으로의 고요한 여행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주에는 복음주의목회연구원 목회자 모임이 있었다. 꽤 오랜 만에 7명의 목사님들이 울산의 정근두 목사님 집에 모였다. 만나자 말자 곱게 꾸며진 작은 정원에서 시작된 이야기 마당은 식사 시간에도 그칠 줄 몰랐고, 새벽 2시까지 눈 돌릴 여유조차 없이 계속되었다. 회의도 아니고 잡담도 아닌 이야기, 고백도 아니고 토론도 아닌 이야기,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이야기,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주제도 없고 목표도 없는 이야기가 웃음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여자들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남자들 수다가 보통이 아니”라고. 그랬다. 밤을 지새웠어도 아마 얘기의 소재가 바닥나지는 않았으리라. 정말 유쾌하고 재미나고 유익한 남자들의 수다였다.

이튿날 오후 모임이 파한 후, 나는 밀양으로 달려가 김영민 교수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또 다시 영천으로 달려가 정용섭 목사님과 밤 12시 다 되도록 얘기를 했다. 마치 한 주간의 침묵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말의 성찬을 즐겼다.

 

침묵과 수다의 교차, 참으로 현저한 대비였다.

침묵은 내면으로의 고독한 여행이었고, 수다는 세상으로의 유쾌한 여행이었다.

침묵의 마지막은 내적 충만이었고, 수다의 뒤끝은 어떤 허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