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고 닳은 진부한 이야기, 슬프고 수치스런 이야기,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그것은 한국교회가 총체적 부실이라는 것이다. 온갖 것들이 마구 뒤섞인 잡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요 신부라는 교회를 들여다보라. 구석구석이 병들어 있고, 곳곳에 수치가 널브러져 있다.

뱀처럼 지혜롭지도 못하고, 비둘기처럼 순전하지도 못하다. 지혜롭지 않아야 할 것에는 지혜롭고, 순전해야 할 것에는 순전하지 않다.

교회 안에 들어와야 할 세상은 굳게 차단하고, 들어오지 않아야 할 세상은 받아들인다.

세상과의 아름답고도 의로운 불화를 통해 대안공동체로 기능하지는 못하면서, 세상을 차지하는 일에는 재빠르다.

 

한국교회는 성인 아이를 닮았다.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장성한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성인 아이가 딱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미국 다음 가는 선교 대국이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인적, 물적 자산 또한 엄청나다.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졌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여전히 유아 수준을 맴돌고 있다. 말씀에 대한 이해나 신앙 인식도 매우 유치하고 좁으며, 삶이 신앙 고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설교도 대부분 영적 구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개개인의 신앙 인격 또한 편벽되어 자기중심적이다.

 

1980년대 이후 성경공부에 열심이긴 했으나, 성경에 대한 정보와 신앙의 열심을 부추기는 정도에 불과했을 뿐 세계관의 변화와 확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성경이 말하는 거대 담론도 읽어내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을 성경의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성경을 읽기만 했지 듣지는 않았다.

또 소수의 듣는 자들은 지나치게 개인화, 신비화의 오류에 빠졌다.

홍정길, 옥한흠, 하용조로 대표되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이 신앙의 외적인 옷은 세련되게 바꾸어 주었으나 내적인 체질을 바꾸지는 못했다. 자본주의적 삶의 체계를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의 근기를 심어주지 못했고, 존재와 삶을 뒤흔드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지금의 한국교회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지난 날 우리의 신앙이 낳은 지극히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관의 변화가 없는 현세 중심적 축복 신앙, 이성은 배제한 채 신앙의 열심과 헌신만 강조하는 외골수 신앙, 인간의 책임은 외면하고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는 일극 신앙, 구원과 오늘이 분리된 내세 신앙을 열심히 가르쳐 왔다.

그러니 그런 신앙을 먹고 자란 교회가 지금의 교회 말고, 달리 어떤 교회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느 날 갑자기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신앙의 퇴적물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교회의 복부를 개복(開腹)하고 수술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옷을 갈아입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복부를 열고 제거할 것은 도려내고, 막힌 곳은 열어주고, 염증은 치료하고, 더러운 침전물은 씻어내야 한다.

물론 피범벅이 될 것이다. 고통의 외마디를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수술의 후유증이 심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회복이 더딜 수도 있다. 하지만 대수술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교회로 설 수 없다는 뼈아픈 진실을 직시하고, 교회를 개복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대수술을 감행한 후, 하나님나라 언어와 가치와 삶의 양식을 새로이 배워야 한다. 아이가 첫걸음을 배우듯이.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오늘의 수치는 내일의 자산이 될 것이고, 오늘의 오명은 내일의 보약이 될 것이다. 내가 속한 교회부터, 그리고 교회의 일부인 나 자신부터 죽음을 각오한 개복의 대열에 나설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내일을 희망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