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일곱 교회, 일곱 사자, 일곱 인, 일곱 뿔, 일곱 눈,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재앙 등 일곱과 관련된 숫자가 참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를 아우르는 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지금의 터어키인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가 해당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함의한다고 할 수 있고, 일곱 교회 이야기도 단지 일곱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교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에베소교회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행함이 없는 교회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힘들다며 그만두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강인하게 견뎌냈습니다. 악을 그냥 두고 보지도 않았습니다. 자칭 베드로의 후계자라며 사도 행세를 하는 거짓 교사들을 뿌리째 뽑아내기도 했을 만큼 진리에 철저했고, 분별력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는 니골라 당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교회는 악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분별력과 진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정말 칭찬받을 게 많은 교회였습니다.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결정적인 책망을 들었습니다. 만일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은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는 본래 사랑이 많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내 편지를 봅시다(1:15-6). 에베소서는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썼던 때보다 약 30여 년 전에 쓴 편지인데, 거기서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믿음의 수고뿐 아니라 사랑의 수고가 많은 교회였다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사실에 대해 바울이 감사해 했을 정도로 에베소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 책망을 들었을 때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매우 놀라면서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지 않았을까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황당해하지 않았을까요? 저들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보이니까 말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이렇게 주장했을 겁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열심히 분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참고 견디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짓 사도들과 니골라 당을 미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자기들의 그처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조금만 상상해보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랬을 것이라는 게 그림처럼 보입니다. 저들은 정말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신학적으로 정확할 뿐만 아니라 엄격했고, 도덕적인 긴장의 끈도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의 행위가 처음 행위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당시에는 모든 것이 사랑의 열매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겨워 자발적으로 기쁘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했는데, 사랑의 에너지가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갔는데 지금의 에베소교회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차갑게 식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정확히 아시는 분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사랑의 에너지는 식었는데 어떻게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그렇게 반듯하게, 그렇게 열심히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이런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신학, 사랑이 빠진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반듯한데 사랑은 말라 비틀어진 경우가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반듯한 신학과 반듯한 신앙의 행위를 근거로 디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학과 신앙의 행위에 속지 않습니다. 물론 에베소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잘못됐다고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저들의 행위를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사랑이 빠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에 대해 예민하다 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행위에 열심이다 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래요. 선을 행하다가 선을 행하는 것 때문에 넘어지는 게 사람이고, 진리를 지키려다가 진리를 지키는 것 때문에 넘어지는 게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사랑이 빠진 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신학과 신앙에 문제가 없으면 됐지, 사랑이 빠진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말도,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믿음도, 구제도,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까지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고전13:1-3). 그렇습니다. 모든 것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행위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만을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동기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는 것 하고는 같은 행동이라도 행동의 결과나 행동의 가치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는 결국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는 행위는 결국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그런 행위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는 행위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빛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빛입니다. 예수님이 두 렙돈(한 고드란트-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에 해당)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주목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막12:41-44). 그 여인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에베소교회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신학과 신앙은 반듯하고 훌륭한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하여, 주님은 경고합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라고.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사실입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닙니다. 진실과 사랑을 담은 뜨거운 권면입니다.

 

여러분, 살아보니 어느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던가요? 어느 때 가장 창조적이고 즐겁던가요? 사랑으로 행할 때이지 않습니까? 사랑의 동기에 이끌려 행동할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고 역동적이고 즐겁고 창조적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사랑으로 하면 즐겁고 행복하지 않던가요? 설거지 하나를 해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반대로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지요? 아무리 신나는 일이라도 이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실입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한 법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의무적으로 하는 사랑, 강제로 하는 사랑, 두려움 때문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는 자유라는 조건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모험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험 때문에 결국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그분에게 사랑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신 그분은 다시금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의 회복입니다. 인격적인 사랑,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대강령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입니다(마22:37-40). 하나님의 뜻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예배,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사랑의 동기로 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또 행하는 우리 자신도 사랑의 동기로 할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한 법입니다. 하여,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회개하라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일곱 교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에베소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그 위기에 빠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프로그램도 많고, 봉사도 많고, 기도도 열심이고, 선교도 열심인데 사랑의 동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억지로 하는 경우도 많고, 체면 때문에 하는 일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순수했던 첫 사랑을 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말씀샘교회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님들이 작은 일 하나라도 억지로 하거나, 체면 때문에 하거나, 습관적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목사로 살면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매너리즘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매너리즘(mannerism)처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저는 말씀샘교회가 메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생살이라는 게 좋아서만 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우아하게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반복해서 하다보면 습관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그걸 극복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일 하나를 할 때에도 사랑의 동기로 하는 것을 연습하면 좋겠습니다. 정말 체면 같은 것 떨쳐버리고, 겉치레도 벗어버리고, 소박하지만 마음을 담아 살면 좋겠어요(점심 반찬 - 너무 감사하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반응로서의 사랑의 행위, 이것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빛나는 행위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영향력 있게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성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고, 복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에베소교회와는 정반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믿음과 섬김과 인내뿐 아니라 사랑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열심인 교회였습니다. 나중이 처음보다 나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진리를 굳게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칭 예언자라 하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유혹되어 십자가를 부인하고 음행을 일삼는 자아 팀닉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내쫓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세벨의 불법과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심오한 것인양 선전하는 마귀들의 장난질을 경멸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의 헛된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붙잡고 인내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육체적인 탐닉의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니골라당을 미워하였는데 버가모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율법을 뒤집어 엎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를 맛보았어도 진리이신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이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분별력이 어두워지면 사람은 자아 우상에 탐닉하게 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게 되고, 자기 중심적인 종교성에 함몰되게 되어 있습니다. 황금 우상, 자아 우상, 성공 우상, 유행 우상에 빠져 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그래요. 사람에게는 어둠을 좋아하는 타락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면 언제든지 허망한 거짓에 솔깃하게 되어 있어요. 쉽고 편한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있어요. 어둠 속으로 도피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진리와 빛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진리와 빛을 거부했으면 거부했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진리와 빛을 구하는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추구하는 본성도 있고, 빛과 진리를 지향하는 본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빛보다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두 교회를 보십시오. 진리를 깨닫고도 진리에서 떠났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어둠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어둠을 쫓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고 모든 촉수를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기도로 주님을 응시하지 않으면 어떤 것에 걸려 넘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권면하신 겁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모든 촉수가 깨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기도고, 생활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모으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없이는 진리에 붙잡히기가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촉수를 주님께로 향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적으로 매우 교만한 자입니다.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피조물의 자리는 들음의 자리요 기도의 자리입니다. 들음과 기도의 자리를 떠난 자는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한 자입니다.

 

정리합시다. 에베소교회는 진리에는 투철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를 굳게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가 빠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교회는 둘 중의 하나만 있으면 안 됩니다. 진리와 사랑을 다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 때문에 사랑을 잃어서도 안 되고, 사랑 때문에 진리를 포기하거나 거짓을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가 빠진 사랑은 위태롭고, 사랑이 빠진 진리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말씀샘교회는 진리의 말씀에 순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 -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