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걸 넘어서 예수님과 교회가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교회 밖 세상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 세상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지금도 온 세상을 사랑으로 품고 계십니다. 길가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도 얼굴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주님의 몸은 아닙니다. 온 세상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당신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만이 주님의 몸입니다. 오직 교회하고만 모든 신경과 혈관과 살과 뼈가 연결되어 있는 몸과 머리의 관계로 계십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는 말씀을 들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각 교회의 실상을 매우 소상하게 아십니다. 에베소교회에 대해서는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3). 저들 안에 첫사랑이 식은 것도 아셨습니다. 서머나교회에 대해서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는지도 알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비방에 대해서도 주님은 아셨습니다. 버가모교회에 대해서도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3). 사실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모든 상황,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까지도 다 아십니다. 이 교회는 어떤 문제와 아픔이 있는지, 저 교회는 어떤 강점과 약점이 있는지를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이처럼 교회의 상황을 훤히 아시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는 어떤 책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머나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교회였습니다. 자칭 훌륭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에게조차 비방과 모함을 받았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 인구의 약 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 수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는 등 어려움을 겪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로마 정부와 관계가 괜찮았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것만으로도 로마 편에 서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와의 선린 관계를 위해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중상모략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비방과 모략을 당하고, 고소를 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기득권자인 유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자립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궁핍과 환난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무력함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궁핍하고 불행한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지만 실상은 부요하다고.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괜한 격려의 말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는 비참할 만큼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다고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저들의 궁핍과 환난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십니다. 서머나교회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정말 무력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께서 말씀합니다. 서머나교회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참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무얼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영혼이 부유해서였을까요? 마음이 부유해서였을까요?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궁핍한 현실을 초월해서였을까요? 우리는 자꾸만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유하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접근하면 본래의 뜻이 왜곡됩니다. 예수님이 서머나교회를 향해 ‘너희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눈에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부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부요한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궁핍과 환난도 눈앞의 현실이지만 부요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사회적인 눈으로, 정치적인 눈으로, 경제적인 눈으로, 종교적인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봅니다. 복음서에 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원을 가진 주인이 이름 아침에 나가서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9시에 보니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도 불러서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낮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도 일할 곳이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은 다 불러서 포도원 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자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서 하루 품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온 자부터 차례대로 주라고 했습니다. 청지기가 푸삯을 주는데 맨 나중에 온 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겁니다. 먼저 온 자들은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더 많이 일했으니까 당연히 더 받을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이 와서 일한 자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하고, 아침 일찍 와서 하루 종일 더위를 참아가며 뼈빠지게 일한 자하고 같은 품삯을 주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마20:1-14).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매우 당연한 논리입니다. 많이 일한 자에게 더 많은 품삯을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이고 합리적인 처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나라 주인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중 온 자에게도 먼저 온자와 똑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는 세상에서 말하는 공정과 합리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하나님의 세계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과 예수님의 눈, 세상의 눈과 하나님나라의 눈은 정말 다릅니다. 두더지의 눈과 사람의 눈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사과 하나를 보더라도 두더지가 보는 사과와 사람이 보는 사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두더지가 보는 땅 속과 사람이 보는 땅 속도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사람의 눈과 예수님의 눈, 세상의 눈과 하나님나라의 눈도 두더지의 눈과 사람의 눈만큼이나 다릅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은 가난을 가난으로밖에 보지 못합니다. 가난 속에서 부요함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부요할 수 있다는 더 큰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난 속에서 부요를 읽어내십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부요할 수 있다는 더 큰 진실을 보십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저들의 궁핍을 보지 못한 게 아닙니다. 저들 앞에 닥친 경제적인 빈곤과 환난의 현실을 주님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에게서 궁핌과 환난만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저들의 궁핍과 환난도 보았지만 저들의 부요함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궁핍과 환난이 눈앞의 현실이었던 것처럼 저들의 부요함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실체적 현실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짓이지요.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눈으로는 부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정 반대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 ‘나는 부자다’,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 했습니까? “너희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3:17)고 했습니다. 그래요.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보았지만 주님은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은 이처럼 달랐습니다. 환난과 궁핍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무력하고 앙상한 서머나교회를 향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했고,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했던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서는 너희가 가난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놀라운 진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 앞에 서 있구나 하는 사실. 세상의 눈과는 다른 눈이 교회를 지켜보고 있구나 하는 사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기준 앞에 서 있습니다. 세상과는 다른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나는 과연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과 다른 기준을 내 삶에 적용하며 살고 있는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선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그분의 기준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나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만큼이나 하나님나라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얼마만큼이나 하나님나라의 기준에 맞춰 생활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인생 실적을 어떤 눈으로 평가하시나요? 혹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은 하나님나라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쌓아올린 모든 것은 사실 바벨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미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 같은 건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비윤리적인 생활에서 윤리적인 생활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방식에서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개를 하려면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의 눈에서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가 가능하지 눈이 달라지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 세상과 다른 대안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의 눈이 세상의 눈에서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서 주님의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난과 환난에 허덕이는 무력한 서머나교회를 향해 너희가 실상은 부요한 자로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허망한 것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나라의 생태계가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가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에 눈떠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성경을 열심히 읽고 말하기는 하는데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성경을 읽기보다는 세상의 눈, 인간의 눈, 윤리와 종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데 익숙해있습니다. 개인적인 손익계산의 차원에서, 고작해야 교회의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성경을 읽지 하나님나라의 차원에서 읽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똑같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세상과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과 똑같은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서 빨리 교회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씀하십니다. 서머나교회가 처한 눈앞의 현실에 대해서도 아주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고, 너희는 십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키려고 덤빕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우 지혜롭게 쉬임없이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열둘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열흘이면 끝납니다. 욥의 고난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을 맘대로 하라고 맡겼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선을 그었습니다.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하도록 선을 그었습니다. 사실입니다. 환난조차도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축복은 하나님 손안에 있고, 환난은 하나님 손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과 환난까지도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교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탄의 시험이 별 것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고통과 가난의 짐이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궁핍과 고통은 정말 힘겨운 짐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까지도 주님 손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다. 내 안에 있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렇습니다. 사탄의 시험과 환난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보면 하등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보면 왕되신 주님의 함께 하심이 보이고, 이미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가 보이고, 길어봐야 열흘을 넘어갈 수 없다는 진실이 보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이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자, 하나님나라의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에 집중하는 자는 세상이 절대로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죽음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붙잡고 있고, 하나님나라가 그 앞에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죽음에 삼키우더라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순교의 역사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보고 계시나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고 계시나요? 만일 하나님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신념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