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대로 한국교회 안에는 ‘믿음 환원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두는 ‘하나님 환원주의’,

기도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기도 환원주의’,

중요한 건 오직 내세뿐이라는 ‘내세 환원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오직 영혼 구원이라는 ‘전도 환원주의’ 등

여러 형태의 환원주의가 신앙생활 전반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 환원주의’,

피조물의 태도로 겸손히 기도하는 것과 ‘기도 환원주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전도 환원주의’,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것과 ‘내세 환원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게 크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의 태도임에 비해

‘하나님 환원주의’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고 하나님께 숨는 심리적 도피의 출구일 뿐이다.

겸손히 기도하는 것은 피조물의 마땅한 태도임에 비해

‘기도 환원주의’는 기적의 환상을 쫒는 자기 암시 내지는 기적 한탕주의와 다를 게 없다.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결정체임에 비해

‘내세 환원주의’는 세상을 사탄의 권세 아래 방기하고 저주하는 이원론의 사생아일 뿐 아니라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현실의 숭고한 가치를 외면하게 한다.

영혼 구원에 열심인 것은 주의 명령에 순복하는 일임에 비해

‘전도 환원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목회적인 패륜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의 아름다움과 풍성함까지도 사장시킨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전도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뜻이다.

하지만 전도를 위해 이웃에게 접근하는 것(영혼 구원을 겨냥하는 관계 맺음)은 결코 옳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구원은 은총의 선물이다. 강요나 아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전도 환원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하는 행태들을 보면 영혼 구원을 위해 아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심지어 영혼 구원을 구걸하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지나치게 비판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인의 이웃 관계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환원주의자들은 하나에 잘 미친다.

모든 에너지를 하나에 집중하기 때문에 성취의 효율성이 높다.

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영혼 구원의 효율성을 쫒다가 ‘전도 환원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교회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환원주의는 모든 것을 기능적으로만 작동시키기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는 것과 삶이 도구화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본래 생명과 삶이란 효율성이나 기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삶을 구원하는 생명의 복음이 영혼 구원이라는 효율성과 기능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 현실이 너무 슬프다.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한없이 송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